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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강을 얻는 길 (베드로후서 1장 1-3절) < 예수님 안에서의 평안 > |

by 【고동엽】 2021. 12. 21.
은혜와 평강을 얻는 길 (베드로후서 1장 1-3절)
< 예수님 안에서의 평안 >

마가렛 코트란 테니스 여왕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인기, 명예, 돈, 좋은 남편 등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그러나 항상 외롭고 공허했습니다. 하루는 동창생을 만났는데 그녀의 얼굴에 기쁨이 넘쳐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친구였는데 그런 모습을 하자 그 친구에게 행복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도 행복의 이유를 별로 찾지 못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친구 아이들이 식사에 대해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행복의 이유를 어렴풋이 발견했습니다.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귀가하자 아이들이 2층에서 자는데 창문이 바람에 의해 열렸다 닫혔다 했습니다. 그래서 창문을 닫고 커튼을 정리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그녀의 마음에 예수님의 영상이 선명히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 후 그녀의 삶에서 외로움과 공허함은 사라지고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소유가 주는 만족은 순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더 허무하게 만듭니다. 결국 행복은 깨달음에 있고 감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외적인 환경보다 내적인 감사가 중요합니다. 감사하면 행복감도 커지고 믿음도 커집니다. 왜 요새 많은 사람들이 정신이 병들어 있습니까? 너무 돈에 집착해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한 처녀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습니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요정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가씨! 소원을 말하세요. 한 가지만 들어줄게요.” 고민이 되었습니다. 소원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돈도 있어야 되고, 남자도 있어야 하고,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꾀를 부려 램프 요정에게 한꺼번에 소원을 말했습니다. “돈! 남자! 결혼!” 그러자 요정이 소원을 들어줘서 정신이 돈 남자와 결혼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너무 돈을 좋아하면 평안을 잃고 정신이 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구원받고 은혜와 평강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도가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주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본문은 은혜와 평강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 은혜와 평강을 얻는 길 >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유언과 같은 편지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2절을 보면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쓸 때도 눈이 어둡고 손이 흔들려 실루아노를 통해 대신 썼습니다. 베드로후서를 쓸 때는 더 노쇠했을 것이기에 유언하는 심정으로 썼을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 수신자에게 가장 먼저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축복의 제일 내용입니다. 그런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종 의식을 가지십시오

본문 1절을 보면 베드로는 먼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구절에서 ‘종’으로 표현된 헬라어 ‘둘로스’는 노예를 뜻합니다. 당시 성도들은 베드로를 예수님의 수제자로 여기고 높이 우러러 봤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도가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한 것을 보면 베드로는 나이가 들고 명성이 높아져도 끝까지 겸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리와 명성이 높아져도 마음은 늘 겸손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 때 크게 쓰임 받다가 교만해져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회자들 중에도 많습니다. 목회자가 나이가 들고 교회가 커지고 위치도 높아지면서 조금 여유를 가지고 즐기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도 어렵던 시절의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도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할수록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의 챔피언이 되어야 은혜의 챔피언도 됩니다.

프랑스의 한 귀족은 젊었을 때 남의 집 하인으로 있다가 열심히 공부해서 큰 부자가 되고 귀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부자가 되고도 자기 집에 ‘하인의 방’이란 방을 만들고 그 방에 자기가 하인이었을 때 입었던 옷과 낡은 모자 등을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자기도 모르게 우쭐해지면 그 방에 들어가 과거를 되새기며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그런 ‘하인의 방’을 마음에 두어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도 계속 주어집니다.

항상 종의 자세를 잃지 마십시오. ‘소유’보다 ‘존재’와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 관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교회를 섬길 시간을 구별해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란 의식을 가지고 “내가 원할 때 특별한 시간과 장소에서만 주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지 말고 “주님! 언제든지 명령만 하세요.”라고 하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또한 종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잘못된 동기로 봉사하지 말고 기도할 때도 하나님과 흥정하듯이 “하나님 제가 이 일을 할 테니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에게는 바른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바른 동기를 판단하는 중요한 바로메타가 “감사한 마음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어려워도 감사를 잃지 않고 불평과 원망을 삼가는 것은 동기가 바르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향해 나가다 보면 어려움과 갈등과 고통도 있지만 그래도 비전 동역자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감사가 넘치면 동기가 바른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처럼 종의 자세를 가지십시오. 위대한 인물들은 대개 종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원망하지 않고 시련조차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기에 더 높여지고 더 많이 얻게 된 것입니다. 살면서 마음속에 실망과 원망이 생기려고 하면 제일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그처럼 주인 의식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종 의식을 가지고 살면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2. 사도 의식을 가지십시오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면서 동시에 사도라고 했습니다(1절). 사도는 당시 최고 권위를 가진 주님의 직계 제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겸손했지만 늘 자신이 사도라는 의식을 가졌기에 어디에 가도 당당했습니다. 로마 황제 앞에서도 당당했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우리도 큰 의미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입니다. 그 말은 진짜 사도가 된 것처럼 우쭐대란 말이 아니라 종처럼 겸손하면서도 늘 당당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당당해야 존중도 받습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 남이 나를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대부분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했습니다. 대적들이 그의 사도권 문제를 자주 걸고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공격 대신에 사도 바울을 공격했습니다. 바울만 무너뜨리면 기독교도 무너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계속 모함하면서 “자칭 사도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였다. 간질병이 있어 가끔 자빠진다.”고 하며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비하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는 사도권의 중요한 요건으로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을 언급하는데 대적들은 바울이 예수님과 함께 다닌 적이 없었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직접 만나 사도 요건을 갖췄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도로 인정받고 그의 서신 13개(히브리서를 포함하면 14개)가 정경으로 채택된 것입니다. 그처럼 사도성을 확신했기에 그는 극심한 환난 중에도 평안을 노래하며 선교사역을 수행하고 문서를 통해 기독교 교리의 뼈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의식을 가지고 리더의 축복을 꿈꾸십시오. 다 목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처럼 평신도로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을 최상으로 하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부족해도 좋은 멘토와 동역자를 만나면 얼마든지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좋은 교회를 만나면 인물의 꿈은 더욱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모세도 처음부터 위대한 재목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려고 할 때 그는 여러 핑계를 대면서 그 부르심을 회피했습니다. 그런 그가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을 보면 지도자는 선천적으로 태어나기보다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모세의 시종으로 지냈던 여호수아도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으로 격려하시고 지도자로 세우자 그는 가나안 정복전쟁을 통해 위대한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는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인물의 길을 자신이 미리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인물이 될 수 있음을 믿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리더십을 개발하십시오. 무엇이 리더십입니까? 리더십의 핵심 요소는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종의 자세를 가지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성경적인 리더는 통치자나 경영자나 관리자가 아니라 섬기는 인도자입니다.

그런 섬기는 리더의 기본자세와 비전을 가진 후에는 사람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남들의 판단도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대적들은 사도 바울의 사도성을 계속 걸고 넘어졌지만 사도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사람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를 두려워하며 최선을 다하면 인물의 꿈도 이루게 되고 은혜와 평강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3. 구원의 믿음을 가지십시오

본문 1절 하반부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편지의 수신자들을 자신처럼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자들이라고 언급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믿음의 중요성을 잘 나타냅니다. 그처럼 구원의 믿음이 확고하면 은혜와 평강도 넘치게 됩니다.

믿음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감정적인 믿음, 기적적인 믿음, 그리고 구원의 믿음입니다. 감정적인 믿음은 양심의 자극과 일시적인 감정적 흥분으로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시간이 지나 감정이 가라앉으면 약해지거나 사라질 수 있습니다. 기적적인 믿음은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또한 기적 중심적인 신앙에 발라진 꿀은 땀과 공부와 훈련 대신 기적을 위장하고 빙자해서 부와 명예를 편하게 얻으려는 종교인을 생성시킬 위험성이 있습니다.

사람의 질을 재는 3가지 지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지능지수인 IQ(intelligence quotient)입니다. 둘째는 요즘 와서 중시되는 감성지수인 EQ(emotion quotient)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종교지수인 RQ(religion quotient)입니다. 상식을 초월하면서도 바른 실천적인 믿음을 가진 것은 종교지수가 높은 것이고 반대로 몰상식하고 파괴적이고 실천이 없는 믿음을 가진 것은 종교지수가 낮은 것입니다. 지능지수가 아무리 높아도 종교지수가 낮으면 헛되고 거짓된 기적과 예언에 얼마나 잘 넘어가는지 모릅니다.

기적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17장 11-19절을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한 촌에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료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기적을 목격한 것이 아니라 직접 인생 최대의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믿음을 가질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그들 중 오직 한 명만 구원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보통 치유술사가 아닌 예수님이 직접 최상의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도 10분의 1만 구원의 믿음을 가졌다는 말은 기적과 구원의 믿음은 사실상 거의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성경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확신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믿음을 위해 감정적인 믿음과 기적적인 믿음도 일조를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확신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 구원의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믿음이 확고해지기에 고난과 상처와 슬픔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고 결국 은혜와 평안도 넘치게 됩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구원의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고 아무리 사탄의 공격이 심해도 그 사랑은 소멸되지 않음을 압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말씀합니다. “아무개야! 너를 사랑한다. 너를 지켜보고 있다. 네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과거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현재의 삶도 이끌어주시고 미래의 삶도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을 더욱 아십시오

본문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 구절을 자세히 보면 베드로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최대 노하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최대 노하우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도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을 앎으로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을 통해 영생의 축복과 변화된 삶의 축복이 주어졌다고 하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을 또 한 번 강조합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앎’은 ‘일반 지식’을 뜻하는 헬라어 ‘그노시스(gnosis)’가 아니라 ‘핵심 지식’을 뜻하는 ‘에피그노시스(epignosis)’입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잘 구분하는데 네트영어의 원리가 도움이 됩니다. 네트영어는 영어 단어와 숙어와 문장의 핵심 의미를 정확하게 개념화시켜 영어를 ‘한국어와 개념이 유사해 쉽게 배우는 일본어’처럼 쉽게 배우게 하는 공부방법입니다. 그처럼 영어 단어의 개념 정립을 할 때 신학공부를 위해 배운 헬라어 지식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헬라어에서 지식을 의미하는 어근인 그노(gno)가 영어에서 크노(kno)로 변형되었고 거기에서 영어의 ‘노(know, 안다)’란 단어가 생긴 것입니다. 또한 영어에서 에피(epi)란 어근도 헬라어에서 나온 어근으로 그 뜻은 한자의 ‘외피(외면, 표피)’를 뜻하는 어근입니다.

영어에서 ‘후기’를 뜻하는 에필로그(epilogue)란 말은 ‘본론 끝(외피)에 덧붙인 말’이란 뜻입니다. 에피소드(episode)라는 말은 ‘본체 밖(외피)에 덧붙인 것’이란 뜻으로 ‘삽입된 글(그림, 음악)’을 뜻합니다. 에피큐어(epicure)란 말은 ‘외피(피상적인 것, 육체적인 것)를 추구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육적인 사람, 쾌락주의자’를 의미합니다. 이피터미(epitome)는 ‘방대한 책(tome)에서 밖(외면)으로 발췌해낸 것’이란 뜻으로 ‘발췌, 개요’의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결국 ‘에피그노시스(epignosis)’는 ‘그노시스(gnosis)’에서 특별히 밖(표면)으로 발췌해낸 지식을 뜻합니다. 즉 경험을 통해 얻는 일반 지식인 ‘그노시스’에서 특별히 발췌된 ‘구원의 믿음을 위한 하나님의 지식’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뜻하는 단어가 바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성도는 ‘그노시스’도 넘쳐야 하지만 ‘에피그노시스’는 더욱 넘쳐야 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비례합니다.

운전할 때, 노련한 운전자는 앞과 옆과 뒤를 함께 다 보고 전체를 파악하며 운전하지만 초보자는 앞만 보고 옆과 뒤를 잘 보지 못해서 불안합니다. 어떤 초보운전자는 차에 ‘핵초보’라고 써 붙였습니다. 가까이에 오면 핵폭탄처럼 터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처럼 왕초보나 핵초보는 전체를 잘 못 보고 잘 모르니까 늘 불안합니다. 그러나 노련한 운전자는 전후좌우를 다 보며 잘 아니까 편안하게 운전합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미국을 방문할 때도 영어를 모르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때로는 잘 먹지도 못합니다.

어떤 여성이 미국에 처음 갔습니다. 남편은 회의하러 가서 혼자 호텔에 있는데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도 영어를 몰라서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 전화기를 어떻게 만지니까 신호가 가서 조금 후에 안내원이 왔습니다. 영어를 못하니까 마음이 불안해지면서 갑자기 가리막 현상이 생겨 치킨이란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꼬끼요!” 하고 닭소리를 내고 먹는 흉내를 내자 안내원이 눈치 채고 닭요리를 가져와서 겨우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모르면 불안하고 알면 편안합니다. 그러므로 배우기를 힘쓰십시오. 특히 세상 지식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쳐야 은혜와 평강을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도 많이 알고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알려고 힘쓰십시오. 그것을 위해 좋은 경건서적도 폭넓게 많이 읽고 바른 말씀도 많이 들으십시오. 특히 새벽말씀 묵상을 통해 매일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한다면 그만큼 은혜와 평강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회의가 듭니다. “왜 한국 교인들은 말씀을 많이 들어도 변화가 없을까?” 가장 큰 이유는 좋은 마음 밭을 가지고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해서 대충 알기 때문입니다. 대충 알면 오히려 더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피상적인 지식은 에피큐리안(쾌락주의자)의 지식입니다. 깊은 지식을 사모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한 식당에 갔는데 동치미 국물에 깊은 맛이 배여 감탄이 나왔습니다. 그처럼 창조성과 지혜와 사랑이 깃든 자기로부터 우러나온 깊이 있는 숙성된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인생 최고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은 법대나 의대가 유명하지만 원래 신학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다른 모든 지식의 출발점임을 알고 미국 초기 개척자들이 신학교부터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로 아는 지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고 보호자이고 격려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자연 및 사람을 보호하려고 하고 또한 자연 및 사람과 함께 나누며 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집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발전이 무엇입니까? 나누려는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물질이 늘고 지식이 늘어도 나눔이 늘지 않으면 결국 후퇴하는 인생입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길을 가는데 옆집 정원에서 토끼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너무 예뻐서 더 지켜보려고 살금살금 다가갔는데 토끼가 인기척을 느끼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목사님이 토끼에게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단다.” 그러나 토끼는 곧 덤불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생각했습니다. “저 토끼에 비해 내가 너무 크구나! 내가 큰 것이 남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구나!”

나눌 줄 모르면서 너무 크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눔이 없는 부와 권력은 다수를 울리는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었기에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예수님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처럼 작은 것을 불쌍히 보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한 사람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됩니다. 그런 인물의 꿈을 오늘도 새롭게 품으십시오.

현재 힘이 없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작은 새싹이 아스팔트를 들어 올립니다. 약한 감자뿌리가 땅 속에서 땅을 밀어내고 지구의 일부분을 밀어내면서 감자덩어리를 만듭니다. 작은 힘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나가면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유지됩니까?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서 최상의 열매를 맺고 이웃에게 그 열매를 나눠주며 사는 사람들에 의해 유지됩니다. 항상 나눔을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넘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도 얻고 은혜와 평강도 얻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112) - <성경66권설교파일에 '베드로전후서강해' 28편이 있습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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