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마음을 가지십시오 >
어떤 교회에서 그랜드 피아노를 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피아노를 강단 왼쪽에 놓자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강단 오른쪽에 놓자고 했습니다. 그 문제로 성도들 사이에 감정이 생겼고, 그 감정의 골이 깊어지다가 마침내 교회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우리는 큰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싸우고, 남을 비판하고, 교회를 힘들게 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한 분이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김 모 집사는 자꾸 기도할 때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호칭할 수 있어요. 듣기에 거북해요. 그 사람이 신앙이 있는 거예요.”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은 국어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당신’이란 말이 2인칭으로 쓸 때는 부부 간에도 쓸 수 있고, 막말을 할 때도 쓰지만 3인칭으로 쓸 때는 극존칭입니다.
그처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상태에서 비판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왜 그런 비판을 합니까? 자신이 더 낫고, 더 똑똑하고, 더 신앙이 좋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몸부림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리새인의 냄새를 풍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길입니다.
< 3종류의 사람 >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3종류의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 둘째는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 셋째는 예수님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은 절대 되지 말아야 합니다.
1.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
주님은 이 세상에서 바리새인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도대체 바리새인이 어떤 모습을 했기에 주님이 그토록 싫어하셨을까요? 바리새인의 대표적인 삶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이 3가지는 절대 멀리해야 합니다.
1) 비판주의
본문 18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절제하는 삶을 살자 귀신이 들렸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에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달리 먹고 마시니까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래도 비판하고 저래도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좋지 못한 것만 보려는 비판주의를 버리고, 미움과 편견도 버려야 합니다. 미움과 편견의 안경을 쓰면 다 밉고 다 나쁘게 보입니다. 객관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가정과 교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형제와 교우의 생각과 태도와 가치관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정 맘에 안 들면 뒤에서 비판하지 말고 뒤에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비판주의는 자기 생각과 경험만 진리로 생각하고, 그 생각에 맞지 않으면 무조건 비판합니다. 사실 그런 태도가 가장 비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비판할만한 자격이 없고 남을 비판해도 좋을 정도로 똑바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일은 축복하고 격려하는 일입니다. 비판하면 주님이 제일 싫어하시지만 축복하면 주님이 제일 좋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말 불쌍한 사람은 비판받는 사람이 아니라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이치로 미움 받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겪는 저주의 열매들을 생각하면 차라리 미움 받고 비판받는 사람이 훨씬 복된 사람입니다.
2) 무감동
예수님은 본문에서 바리새인의 모습을 장터에 노는 아이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어느 날, 장터에 있는 아이들이 즐거운 혼인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었습求? 그런데 아무도 춤도 추지 않고 반응도 없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 반응도 없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반대로 장터에 있는 아이들이 장례 놀이를 하면서 애곡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슴을 치지 않고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세례 요한의 선포에 아무 반응도 없는 바리새인의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처럼 바리새인들은 감동도 없고 반응도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무감동의 병입니다. 무감동은 교만의 산물이고,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무조건 시류에 따라 반응하면 안 되지만 진리에는 힘써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관심에도 힘써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열정과 감동이 사라졌다는 것은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열정과 감동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전도와 선교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교회도 열정적으로 섬기고 감동적으로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감동시킬 수 있고, 하나님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3) 무관심
바리새인들은 이웃의 삶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남과 함께 어울릴 줄 몰랐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혼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이 왕따를 만들면 기쁘게 왕따가 되십시오. 그것은 놀라운 영광과 축복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왕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참여하고 계속 얼굴을 들이밀어야 합니다. 성도는 고독한 배회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독주도 잘해야 하지만 합주는 더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조금 더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특히 교우들은 친형제처럼 살펴주고 섬겨주어야 합니다. 교우들은 예수님 안에서 같은 혈액형과 유전자를 가진 형제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형제에 대한 무관심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제 형제에게 더욱 관심을 두고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잘난 사람은 낮아지고 못난 사람은 높아져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에도 잘 참여해야 합니다. 구경만 하면 “왜 저렇게 해?”라고 비판할 것이 많이 생기지만 참여하면 “어떻게 하면 더 격려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처럼 열심히 봉사에 참여해야 공동체도 살아나고, 내 삶의 존재 의의도 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어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힘써 축복하고 격려하십시오. 또한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감사하십시오. 또한 교회와 이웃에 조금 더 관심을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바리새인의 3대 특징인 비판주의, 무감동, 그리고 무관심은 절대 멀리해야 합니다.
2.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
세례 요한의 삶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세례 요한은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맛있는 음식과 술은 전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절제하는 삶을 사니까 바리새인들은 그 경건한 삶이 자신들의 형식적인 경건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었기에 그를 귀신 들렸다고 공격했습니다.
때로는 조금 지나친 감이 있어도 세례 요한과 같은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삶과 너무 뚜렷한 비교가 되니까 사람들이 싫어하고 거부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도 십자가로 알고 기쁘게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세례 요한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눈물을 상징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눈물을 많이 잃어버렸는데, 그 잃어버린 눈물을 찾아야 합니다. 눈물은 농작물을 풍성하게 하는 이슬비와 같습니다. 그 눈물이 있어야 옥토 밭 심령이 되고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눈물을 많이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회개의 눈물과 수고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과 같은 눈물은 좋은 눈물입니다. 그런 좋은 눈물을 많이 흘리면 신앙과 영혼도 건강하게 되고, 몸과 마음도 건강하게 됩니다. 여자가 오래 사는 것은 눈물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의 눈물과 수고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잃어버린 행복도 되찾게 될 것입니다.
3. 예수님과 같은 사람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눈물을 많이 흘리고 세례 요한처럼 경건하게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삶의 지향목표는 ‘예수님’이지 ‘세례 요한’이 아닙니다. 최고의 영성은 세례 요한처럼 사는 돔봉?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는 영성입니다.
주님은 잔칫집에 계시듯이 흥겹게 사셨습니다. 주님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처럼 경건하게 살지 않고 그냥 보통 사람처럼 사셨습니다. 음식을 드실 때는 잘 드셨습니다. 때로는 포도주도 드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어울릴 줄 알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거룩하게 사셨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삶을 거쳐 예수님의 삶까지 성숙해져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살면 자칫 방심하는 사이에 마음이 높아져서 바리새인처럼 될 위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9장 14-15절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합니까?”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슬퍼할 수 있느냐?”
그 말씀은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장례식 분위기에 젖어 살지 말고 혼인집 분위기에 젖어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 영으로 우리 곁에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례식 상주처럼 슬퍼하며 살지 말고 혼인집 신부처럼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뜻 보면 세례 요한처럼 살아야 영성이 높은 것 같지만 사실은 평범한 삶 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이 오히려 영성이 높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 보기에 경건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세례 요한보다 영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 공감하는 삶을 살라!”는 중요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낮은 자와 함께 하고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얼마 전, 중학교 은사 선생님이 암에 걸린 소식을 듣고 의형제를 맺은 중학교 동창 7명 중에 5명이 위로차 선생님 댁에 모였습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올 때, 동해에서 병원을 하는 A 친구가 말했습니다. “이 목사! 필요한 거 없어? 차 한 대 사줄까? 필요한 것 있으면 꼭 말해!” 그때 옆에 있던 조치원에서 병원을 하는 B 친구가 말했습니다. “나중에 교회 옮기면 나도 도울게. 꼭 말해!” 그날 나는 너무 들떠서 어떻게 귀가했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 며칠 후, 주인과 전세협의가 잘 되지 않아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재정적 압박이 느껴지면서 수시로 A 친구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A에게 전화할까?” 전화하면 친구가 기쁘게 반응할 것이란 확신은 있었지만 선뜻 전화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 기도할 때마다 “오늘은 꼭 전화해보자!”고 다짐했지만 실천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알면서도 아직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복잡 미묘한 감정을 겪으며 무엇보다 선교사들의 심정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선교하다 보면 꼭 필요한 것이 있지만 마치 구걸하는 것 같아 많은 선교사들이 후원요청을 제대로 못합니다. 때로는 아주 시급한 재정적인 필요가 있어도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기도제목만 얘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현지인에게 맞아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해 병원비가 시급하게 필요한데도 기도제목을 나눌 때는 “병원비가 필요해요!”라고 하지 않고 “현지 영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렇게 편지를 보내니까 병원비가 시급히 필요한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중국에서 선교하는 한 선교사님은 전도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보석금이 급히 필요한데도 “감옥에서 나오게 해 달라!”고만 기도요청을 하니까 물질이 필요한 것을 몰라서 큰 곤욕을 치루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많기 때문에 저는 선교사님을 만나면 항상 먼저 말합니다. “선교사님! 필요한 것 없으세요?”
이번에 몽골의 김재호 선교사님의 차량 문제도 감독 목사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은 것입니다. 김 선교사님은 쓰던 차가 고장 나니까 “이제는 차 없이 사역을 해보자!”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하 3-40도에서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며 선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단기 선교를 가서 잠시 몽골을 방문한 목사님들이 그런 상황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파서 차마 어떻게 눈 뜨고 그 장면을 보겠습니까?
그런 상황인데도 본인 입으로는 그 상황을 잘 말을 못합니다. 김 선교사님처럼 순수한 분은 더 말을 못합니다. 제가 감독 목사님 얘기를 듣고 너무 안타까워서 요삼일육선교회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지난 몇 주간 후원요청을 했지만 아직까지 ‘몽골 김재호’라고 표기된 특별지정 후원금은 30여만 원밖에 모금하지 못했습니다. 목표액에는 너무 부족한 액수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조금 더 참여해주시고 조금 더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선교사님들이 기도요청 서신을 보낼 때 문장 사이의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소리 없는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나쁜 소리만 듣기 좋아하는 귀는 저주받은 귀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소리만 듣는 귀도 별로 복된 귀가 아닙니다. 가장 복된 귀는 ‘이웃의 탄식소리에 열린 귀’입니다.
더 나아가 그 탄식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반응하기 위해 나의 소중한 소유를 기쁘게 도려낼 줄 아는 사람이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그처럼 힘든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려고 힘쓰는 삶이 진짜 경건한 삶이고, 그런 삶이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결혼 안 하는 것이 더 경건해보였지만 사실 결혼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가정은 영성의 도장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요새 가톨릭교회에서는 신부 지망생이 너무 없어서 이제는 신부도 결혼을 하도록 교회법을 고치자는 얘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신부의 결혼을 신자들이 더 반대한다고 합니다.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덜 경건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가 전혀 누리지 않고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살다가 일찍 죽어야 경건한 줄 압니다. 아직도 세례 요한의 경건에 머물러 있습니다.
저는 선교사님들과 많이 교류하기 때문에 선교사님들의 마음의 깊은 소원을 잘 압니다. 그 말하기 힘든 깊은 소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잠깐 선교지를 떠나 안식하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의 최전방에서 떠나 후방으로 잠깐 돌아와 한식도 마음껏 먹고, 그리웠던 사람과 만남도 가지고, 다시 재충전의 기회를 가지면 사실상 더 사역을 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선교사님을 정말 사랑하는 분들은 “선교사님! 잠깐 쉬러 들어오세요!”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아주 매정하게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선교사 왜 이렇게 자주 한국에 온데요?” 그 말은 “선교사가 왜 그렇게 놀러 다니느냐? 아까운 선교비를 그런데 쓰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전방에서 전투하다 잠깐 쉬러 후방으로 온 군인에게 “수고했다!”고 물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지는 않고 오히려 총질을 하는 모습입니다. 결국 그 총에 죽어가면서 그 군인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한번 전방에 죽도록 있어봐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선교사들도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명만 붙잡고 있는 것이 경건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런 관념을 고치라고 도전하십니다. 안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부지런하거나 경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부교역자에게 제대로 안식을 주지 않는 담임목사들이 많습니다. 물론 월요일은 쉬는 시간이라고 정했지만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사명을 받은 사람이 어디 쉴 틈이 있느냐?”고 말하지만 사실 그 말은 비성경적입니다. 담임목사가 부교역자에게 1년에 최소한 52일의 휴식을 주지 않으면 그것은 큰 죄이고, 그가 아무리 큰 목회를 해도 큰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는 크게 야단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과 누림을 정죄하는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성도는 주님 안에서 즐겁게 살고, 웃을 줄도 알고, 유머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는 것도 잘해야 합니다. 대개 보면 놀 줄 아는 사람이 일할 줄도 알고, 그런 사람이 행복도 얻고 사람에게 감화력도 줍니다.
저는 은혜를 키우면서 처음에 걱정했습니다. 너무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서 어디에 가도 말 한 마디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초기에는 자폐증을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저러다가 정신에 병이 들거나 왕따가 되면 어떡하나 하는 염려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은혜의 생각과 시야를 넓혀서 정신적으로 건강한 자녀를 만들까를 생각하면서 은혜의 성격을 외향적이고 개방적으로 만들려고 소리 없는 전쟁과 씨름과 기도를 했습니다.
대개 목사님 자녀들에게 있는 특별한 스트레스 중의 하나는 목사님은 있지만 아빠가 없는 것이고, 목사님 자녀이기 때문에 남의 시선을 더 의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저는 아이들에게 평범하게 사는 모습, 노는 모습, 편안한 모습을 의식적으로 보여주었고, 아빠가 목사님 이전에 보통 아빠라는 것을 인식시켰습니다. 그런 부단한 노력들로 지금은 은혜가 생각보다 훨씬 밝게 잘 자라주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 주님 안에서 누리며 사십시오 >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열심이 일하고 열심히 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통회하는 마음도 있어야 하지만 통회한 후에는 다시 기쁨을 찾고 얼굴의 안색을 펴야 합니다. 때로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최후의 승리를 보장받은 자로서 미리 승리를 앞당겨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처럼 승리를 앞당겨 즐거워하는 힘이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물론 회개로 대표되는 세례요한의 삶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회개가 전제되지 않는 기쁨은 참된 기쁨이 아닙니다. 회개가 없는 즐거움은 값싼 즐거움입니다. 땀이 없는 누림은 결코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회개와 눈물과 땀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종적인 삶의 결론은 기쁨과 안식과 평안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도 기쁨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믿음이 바로 주님의 마음을 얻는 믿음입니다.
저는 84년 은혜 체험 후에 약 5년 동안 세례 요한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 보니까 내 신앙이 최고인 줄 아는 교만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세례 요한처럼 특별한 삶이 아니라 주님처럼 보통 삶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처럼 먹고 마시고 어울리는 중에서도 엄청난 경건함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바로 능력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영성생활은 사람들이 안 볼 때 이루어졌습니다. 기도도 새벽에 주로 했고 한적한 곳에서 주로 했습니다. 그처럼 감추어진 영성생활을 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남이 안 볼 때는 열심히 기도해도 남이 볼 때는 조용히 기도를 그치고, 다시 그 사람이 떠나면 깊은 기도 속에 들어가는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이셨습니다. 주님처럼 사람의 눈이 미치지 않는 음지에서의 성공이 진짜 성공입니다.
나의 영성생활을 남이 보면 볼수록 영성이 떨어집니다. 더 나아가 남에게 보이려고 하면 바리새인처럼 더 영성이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억지로 보일 필요도 없고 억지로 보이지 않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예배도 꾸준히, 기도도 꾸준히 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입니다. 그런 모습을 가져야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얻게 될 것이고, 우리 삶에서 놀라운 영향력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아침에는 기도할 때 주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큰 감격과 경탄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묵상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30세에 청년으로 사역을 시작하셨다가 3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연세가 80-90세 되신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합니다. 단 3년 만에 그런 엄청난 영향력을 보이셨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까 다시 한번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새롭게 실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삶도 훌륭한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3년 사역과 그 이후에 나타난 엄청난 영적 영향력’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며 살고, 기뻐하며 살고, 즐거워하며 살고, 세상 속에서 녹아지며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웅변해줍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처럼 즐거워하고, 예수님처럼 누리고, 예수님처럼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19절 말씀의 끝은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끝납니다. 그 말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진짜 지혜로운 삶이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사는 것은 사실 다른 종교가 추구하는 경건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의 삶에서 머물지 말고 이제는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처럼 어울리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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