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좁은 문은 비극의 문이 아닙니다 >
앙드레 지드가 지은 ‘좁은 문’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여주인공 알리사는 설교를 듣고 좁은 문의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녀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사촌동생 제롬과의 사랑을 세속적인 사랑이라고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제롬이 잘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상적 사랑과 종교적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가 그녀는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죽습니다. 그녀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합일을 꿈꾸며 이 땅에서의 사랑을 거부하지만 결국 사랑을 희생시키는 사랑에 대해 확신을 품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가르치시는 길은 너무 좁은 길이어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다.”고 독백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좁은 문의 삶을 절반만 이해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소설 ‘좁은 문’은 작가의 삶과 생각이 투영된 소설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특이한 결혼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친척 누나 마들렌을 사랑해서 결혼했어도 마들렌이 평생 순수하게 성녀처럼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둘은 한번도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금욕주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평생 고난 가운데 지내며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에는 갈등도 있고, 고통을 감수해야 構? 인내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끝까지 고난의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은 최후 승리의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소설 ‘좁은 문’처럼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적절한 때에 반드시 시온의 대로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의미 >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로 했습니다. 그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인기를 추구하지 말라.
요새는 대중적이어야 합니다. 인기가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찾고, 더 인정을 합니다. 인기는 인정의 보증수표입니다. 아무리 정직해도 인기가 없으면 인정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인기가 없으면 대학에서도 퇴출됩니다. 아무리 영성이 있고,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해도 설교와 기적을 통해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하면 교회는 성장하지 않고,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영성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런 세태라서 성공은 대개 말 잘하고, 외향적이고, 자기 피알을 잘하는 사람의 것이 됩니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따라가지만 성도는 내용과 진실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죄인과 세리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어울렸던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인기에 영합하지 말고 소수를 긍휼히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성공을 다 숫자로 평가합니다. 숫자와 외모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신이 되었습니다. 숫자가 많고 외적으로 부흥되면 다 축복인 줄 압니다. 그런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이 되고, 세미나의 단골 강사가 됩니다. 그러나 인기를 얻으면 신기를 잃어버릴 가능성은 그만큼 커지고, 다수와 힘을 숭상하면 하나님과 진실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는 인기와 숫자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광야 생활 때에 60만 명 이상의 남자가 다 “안 된다!”고 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된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다수가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선거를 하면 99.9%가 찬성을 하지만 천국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수를 사랑해야 하지만 다수를 좇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제자는 숫자가 적었습니다. 숫자가 적으면 외롭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외로운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섰을 때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때 몇 명 안 되는 제자들마저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 주님은 지극히 외로우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로운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숫자놀음에 빠지지 말고 필요하다면 외로움도 감수해야 합니다.
물론 외로움은 가장 두려운 십자가 중의 하나입니다. 죄수에게 독방은 가장 무서운 방입니다. 외로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의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저의 어머님이 미국에 사실 때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는데 한국에 와서는 “미국에 혼자 있을 때 참 외로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가끔 아이들이 모른 척 하면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앞으로는 더 할 것입니다. 그 길은 누구나 가는 길입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은 언젠가 고독한 순간에 처합니다. 그때 하나님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나님 없이는 이 세상의 어떤 강자도 언젠가는 미치도록 외로운 순간을 맞이하고 견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시고 외로운 순간도 기쁘게 감수하고 제 길을 고수하면 이 세상에서는 인기를 얻지 못해도 그의 삶과 영향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커지게 될 것이고, 반드시 좋은 열매를 얻는 날이 올 것입니다.
2.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
예수님은 30세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는 곳마다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물 위를 걷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런 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앞으로 있을 영광을 생각하면서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참아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 23절에서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제 자기들도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주님이 다윗 나라를 다시 건설해서 로마를 쳐부수고 세계 최강대국이 되면 자기들도 나라 하나씩 받아서 분봉 왕처럼 행세할 꿈에 부풀어있었습니다. 그런 꿈에 부풀어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높으냐?”는 싸움까지 벌어졌습니다.
바로 溜? 순간, 예수님께서 그 영광을 얻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설명해주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제자들은 “어떻게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느냐?”에 대해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왜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 길만이 구원을 여는 유일한 길이고, 그 길만이 영광을 얻는 진정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제자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 도망쳤습니다. 그때 예수님 곁에는 제자라고 뻐기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없었고 조용히 수종을 들던 몇 명의 여자들만 주님 곁을 지켰습니다. 그처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어려운 길이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쉽고 편한 길은 생명의 길도 아니고, 성공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에는 행복과 보람도 없습니다. 편한 것과 요령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어려운 길을 통과해야 축복도 얻고, 그 축복도 진짜 축복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제는 받으려는 쉬운 길보다는 주려는 어려운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려는 사람에게 반드시 더 큰 것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3. 자신의 정욕을 버리라.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낮출수록 낮추는 그만큼 내적인 능력과 영향력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삶을 살려면 끊임없이 능력은 키우고 그와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를 낮추어야 합니다. 그 차이가 커지면 커질수록 능력도 크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었지만 인간으로 낮아지셨고, 인간으로 오셔도 왕으로 오지 않고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치유의 능력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St Francis)는 이태리 앗시시(Assisi)의 부자 아들로 태어나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상 중에 이런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은혜 받은 자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음성을 듣고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거지처럼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처럼 자신을 낮추니까 그의 삶에서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보면 맹수도 온유해졌다고 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버리는 만큼 능력 있는 삶이 나오게 됩니다. 진짜 축복은 자신의 욕심과 싸워서 이겨야 주어집니다. 신앙의 길이란 자기가 없는 길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신앙의 진수를 맛보고 은혜를 맛보려면 자기를 버리고, 자기 뜻까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물질에 대한 욕심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좋은 일에 잘 쓰려는 목적으로만 벌어야 합니다.
왜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호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회개는 가짜 회개다!”라고 했을까요? 물질적 헌신은 욕망을 이겨내는 기초 훈련도장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축복과 행복을 얻는 시험에서 ‘헌신’은 가장 기본적인 시험과목입니다. 사실 헌신은 시험이 아니고 오히려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주고받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모릅니다. 드림의 축복을 모르는 사람은 받음도 없고,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왜 제가 선교를 강조합니까? 후방에 있는 우리가 전방에 계시는 선교사님을 외면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에 참여할수록 우리의 영혼이 건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쓸 일이 많은데 그것을 줄여서 선교에 동참하면 육신의 즐거움은 줄어들어도 영혼의 즐거움은 늘어날 것입니다.
오늘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추운 지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이 더 생각났습니다. 벌써 몽고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차량 문제로 기도하고 계시는 김재호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요새 요삼일육선교회에서 차량 펀드를 모금하고 있는데 그 일에 조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프가니스탄도 겨울에는 상당히 춥다고 합니다. 이영동 선교사님도 월동 준비를 잘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지난번에 한국 들렸을 때 여러 교회에서 선교에 관한 도전의 말씀을 주셨는데 재정적인 후원을 많이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들이 물질적인 헌신을 많이 해주었다고 정말 고마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말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를 대표해서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고생하시니 감사하고, 그 선교에 우리도 후방에서 도울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보람이 넘치는 일입니까?
우리가 자신의 정욕을 극복하고 헌신하면 그만큼 기쁨과 보람과 감사가 따라오고 미래의 행복과 축복도 따라옵니다. 롯은 정욕을 따라 소돔을 선택해서 얼마나 처참한 인생이 되었습니까? 반면에 좁은 길?자처했던 룻은 이방여인으로서 다윗 가문의 조상이 되고,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까지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정욕을 따라 선택해서 망한 롯의 길을 가지 말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따라 선택해서 승리한 룻의 길을 가야 합니다.
4. 과정을 중시하라.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열매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이면에는 성공하기까지 숱한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고 고난과 역경이 있었음을 있지 말아야 합니다. 꿈과 비전을 이루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정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편하게 지내면 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실력을 늘리려면 잠도 줄이고, 노는 것도 줄이고, 하고 싶은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벌려면 놀고먹으면서 편하게 지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생략하면 결코 성공적인 삶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혹시 성공하는 일이 있어도 행복과 보람은 없습니다.
요즘 과정을 생략하고 무엇을 얻으려는 사상이 너무 팽배해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로또를 삽니다. 그러나 과정이 없이 얻은 것들은 가치도 없고, 인생에 해가 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과정이 없이 얻은 명예는 그 명예를 겸손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심어줍니다. 과정이 없이 얻은 돈은 좋은 일에 사용되지 못하고, 영혼을 타락시킵니다. 그러므로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축복도 과정 자체가 진짜 축복입니다.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도 축복이지만 꾸준하고 겸손히 기도하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사람은 응답을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응답받는 것보다 우리에게 응답을 주실만한 신앙이 있는 것을 더 좋아하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에는 거짓 선지자 얘기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22-2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거짓 선지자들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권능과 기적과 응답이라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살면 하나님의 저주받는 백성이 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과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삶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과보다 과정과 진행상태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속담 중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서울은 못 가는 한이 있어도 바른 길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결과에 공을 들이지 말고 과정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결과에 신경은 적게 쓰고 과정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그처럼 과정에 공을 들이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반드시 명품 인생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5. 주님만 바라보고 살라.
요한복음 10장 9절 말씀에서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문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능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과 축복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앞세워 살아야 구원도 있고, 진정한 행복과 축복도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안에서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좁은 문은 대개 문도 낮습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려면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판박이처럼 똑같이 살려면 무엇보다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과시와 자기 과신은 죽는 길이고 부끄러운 길입니다.
저는 옛날 고등학교 때 아주 헛된 과시를 했습니다. 공사판에 쌓아놓은 5센티 되는 두꺼운 각목을 이마에 쳐서 부러뜨렸습니다. 요새 제가 가끔 정신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때 뇌세포가 조금 망가져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가끔 친구들을 공사판의 흰 벽돌 쌓인 곳에 데려가서 “너 한번 주먹으로 깨봐!”라고 합니다. 대개 하나도 깨지 못합니다. 벽돌에 습기가 많이 먹었을 때는 조금 힘 있는 아이들은 하나 정도는 깼습니다. 그런데 저는 4장까지 당수로 깬 적이 있습니다. 저는 왼손잡이인데 그때 왼손 두께는 오른손 두께의 1배 반 정도로 컸습니다. 병 중에서 가장 두꺼운 콜라병도 맨 주먹으로 깼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저에게 인상이 나쁘다고 하지 않지만 그때는 정말 나빴습니다. 강한 인상을 주려고 억지로 인상을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럽습니다. 가장 부끄러운 일을 자랑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저는 하나님을 안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저는 요절해서 지금쯤 지옥 불바다에서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누가 호두를 선물했습니다. 호두가 먹고 싶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방바닥에 놓고 망치나 다른 도구를 꺼내기 귀찮아서 옛날에 하던 방식대로 당수로 호도를 깨서 먹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게 했는데 그것을 보고 아내가 유머를 섞어 농담으로 말했습니다. “괜히 과시하지 마세요. 옛날의 그런 모습이 있었다면 저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이 하나님 몰랐으면 정말 끔찍했을 거예요.”
뼈가 담긴 유머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습니다. 본인은 사람들이 우러러 볼 줄 알고 어떤 자랑을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게 봅니다. 저도 주먹자랑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보고 어리석게 봤을까요? 그 사실을 그때에는 눈치 없이 혼자만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수치스럽고,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중에도 하나님 몰랐으면 끔찍했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지금도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데 하나님을 몰랐으면 어땠을까요? 멸망으로 가는 직행열차를 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을 영접해서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옥에 갈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주님의 자녀로서 자기 자랑은 줄이고 주님만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면 할수록 나중에 수치심은 커집니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 앞에 서면 이 땅에서 자랑했던 삶들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랑이 크면 천국에서 상급은 그만큼 적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은 하지 말고 사랑만 해야 합니다.
< 좁은 문을 찾는 삶의 축복 >
오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5가지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5가지 삶이 다 힘들고 어려운 삶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향하는 그 길에는 수많은 소중한 보물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 길은 눈물만 나오는 길이 아닙니다. 오솔길에서 가끔 예쁜 꽃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좁은 길로 가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수많은 즐거운 일들도 체험하게 될 것이고, 때를 따라 내려주시는 하늘의 만나도 얻게 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금욕주의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업고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문의 삶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결말은 항상 좋습니다. 반대로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의 결말은 항상 나쁩니다.
술집 여자들을 보십시오. 얼굴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삶도 호화롭습니다.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자고, 돈을 펑펑 씁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그 여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모는 점차 사라지면서 고독은 커질 것입니다.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곳곳에서 길이 막힌 절망적인 담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술집 여인들에게는 오늘이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오늘보다 못하고, 내년은 금년보다 못한 삶이 될 것입니다. 사단이 유혹하는 넓은 길은 이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좁아집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는 좁은 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넓어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길이 없어진다. 특별히 따로 여기는 길이고, 여기는 들판이라고 할 것도 없이 다 길이니까 대도무문의 경지에 올라서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숫자와 번듯한 외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꾸만 넓은 길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정도를 버리고 방법과 기술만 찾아다니고 강의와 세미나는 있는 대로 다 쫓아다니고도 열매가 없는 서글픈 인생이 됩니다.
어떤 최면술 학원 원장의 말에 의하면 자기 수강생의 3분의 1 가량이 목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넘어뜨리는 기술을 배운다고 합니다. 그래야 요새처럼 힘든 상황에서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서 성공한들 그게 무슨 성공이고, 그런 성공 안에 무슨 행복과 보람이 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묵묵히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것?진짜 축복입니다. 누구나 그런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사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이 땅에 보낼 때 다 나름대로의 재능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그 재능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일 때 그 재능은 은사가 됩니다.
자기 은사를 망각하고 편한 길로만 가면 명품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설교를 듣고 몇 번 웃고 운 것은 은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멘 많이 한 것이나 기분이 조금 업 된 것도 은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진짜 은혜는 실천에 있습니다. 이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을 더욱 실천하고 체질화시켜서 더욱 큰 은혜를 예비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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