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
사도행전 16장 11-15절
< 한 사람의 헌신이 축복의 문을 엽니다 >
어느 날, 한 젊은 군목에게 새로 부임한 신앙이 좋은 사단장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군목이 부탁했습니다. “사단장님! 매주 장군 제복을 입으시고 안내하시면서 주보 좀 나눠주세요.” 사단장이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때부터 그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장군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지위와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가지고 겸손하게 헌신하면 어디선가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온 역사였습니다.
< 축복의 통로가 되는 길 >
오늘 본문에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던 한 여인이 나옵니다. 바로 루디아입니다. 우리도 그런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마음이 형통해야 합니다.
어느 날, 사도 바울은 선교를 하면서 소아시아(터키)의 끝 부분인 무시아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새로운 선교 전략을 짜고 소아시아 북동쪽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행 16:7).
할 수 없이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유럽의 마게도냐 사람이 환상 중에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그 환상대로 곧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결국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 유럽 대륙 선교의 문을 활짝 열게 됩니다.
살다 보면 계획했던 길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한 쪽이 막히면 다른 쪽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동쪽 길이 막히면 서쪽 길이 열리고, 사람의 길이 막히면 하나님의 길이 열리고, 아시아의 문이 닫히면 유럽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역사는 인간의 계획과 인간의 생각을 초월해서 이루어집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유럽으로 보내셨을까요? 당시 아시아 지역은 종교적 영성이 강한 곳이고, 유럽의 그리스 지역은 철학적 이성이 강한 곳입니다. 아무리 종교적 영성의 콘텐츠가 좋아도 철학적 이성의 시스템이 좋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성의 내용은 변질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잘 진리를 보존하려면 신학이라는 틀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치고 한국을 거치면서 그 원래의 내용이 토착신앙과 혼합되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한국까지 전파될 때 유럽 지역을 거치고 미주 대륙을 거쳐 거꾸로 돌아서 전파될 때와 인도 지역을 거치고 중국을 거쳐서 직접 전파될 때와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즉 기독교 신앙이 유럽을 거쳐 신학의 틀을 입고 전파되면 원래의 복음이 그대로 보존될 가능성이 많은데, 기독교 신앙이 인도나 중국이라는 거대한 종교의 바다를 거치면 전혀 다른 형태의 신앙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복음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도 보면 사도행전 전반부 1-12장까지는 종교적 영성이 강한 베드로를 중심으로 펼쳐지다가, 후반부 13-28장까지는 철학적 이성이 강한 바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점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길을 막으실 때는 반드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선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사가 형통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하나님 안에서 마음이 형통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신실한 성도에게 한 길이 막히는 이유는 반드시 더 좋은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길로 우리를 인도하셔도 편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사형통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쓰시는 사람은 마음이 형통하고 믿음이 형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내가 기대하던 대로 되지 않고 길이 막혀도 낙심하지 않고, 더 좋은 길이 열릴 것임을 믿고, 또한 하나님이 그런 상황을 허용하셨다고 믿고 넉넉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처럼 마음이 형통하면 실패조차 더 큰 성공을 불러오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2, 주일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 도착해서 며칠 후에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이미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 회당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이민 가면 먼저 교회부터 세우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어디에 가든지 남자 10명 이상이 모이면 회당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회당이 없으면 대략 강가나 바닷가의 기도처에 모여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회당 대신에 기도처가 있는가 해서 강가로 나가보았습니다. 거기서 몇 명의 여자가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복음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두아디아 성의 자주 장사였던 루디아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플러스(+) 극과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마이너스(-) 극이 만나 유럽에 엄청난 불꽃이 점화된 것입니다.
루디아란 이름은 ‘부산댁, 목포댁’이라는 별칭입니다. 아마 본명은 유오디아나 순두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빌 4:2). 당시 두아디라 지역은 직조와 염료산업이 발달했는데, 루디아는 두아디라에서 생산한 자주 옷감을 유럽 지역에 대는 총판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에 자색 옷은 왕족이나 귀족만 입을 수 있는 비싼 옷이었기 때문에 자주 장사를 하려면 상당한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점을 볼 때 루디아는 생활력이 강한 여성으로 재력가였을 것이고, 아마 남편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바울이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빌 4:3)’라고 표현한 것을 가지고 루디아가 나중에 바울과 결혼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그때 어떻게 루디아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려고 바울 일행이 기도처를 찾아 강가로 나갔고, 루디아 일행도 강가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구별하신 날을 지키려는 열심이 있었기 때문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만남과 그들의 축복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려는 열심이 빚어낸 필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주일을 지키는 성도를 필연적으로 축복하십니다. 그들이 비록 화려한 인테리어가 된 회당이나 성전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강가의 초라한 곳에서 안식일을 지켰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정성과 열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루디아를 유럽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주일을 지키는 삶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킬 때 예배 시간을 잘 지키는 것도 힘써야 합니다. 물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사정과 형편이 있겠지만 예배 시간을 잘 지켜주면 예배 인도자가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때 제물 비용을 절약하려고 병든 양이나 염소를 사서 가지고 오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고 온전한 제물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정해진 예배 시간이 일종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온전한 제물을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주일을 잘 지키는 삶의 중요한 표시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주일을 힘써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의 축복도 힘써 지켜주실 것입니다.
3.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일행이 강가의 기도처를 찾았을 때 루디아 일행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들도 역시 그곳을 기도처로 삼아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기도를 하고 있었을까요? 저는 틀림없이 이런 기도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목자 없이 지내는 저희들의 형편을 아시지요? 이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좋은 목자를 보내주소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 모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안타깝게 여기셨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베풀어주셔서 바울에게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여주시고, 바울 일행이 루디아 일행을 찾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처럼 기도는 사람의 진로를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때 바울은 배를 타고 빌립보로 오면서 계속 궁금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그 환상에서 보인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다가 안식일에 강가의 기도처를 찾아 루디아를 본 순간,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이 바로 “바로 저 여인인 것 같다!”는 직감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다운 만남입니까? 그 만남도 결국 기도의 열매입니다.
루디아는 부자였지만 기도하는 부자였습니다. 그녀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기도 줄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마다 강변 기도모임을 주도했습니다. 아마 사업으로 바쁜 중에서도 유대인의 관례대로 매일 몇 번씩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빠도 기도하고,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기도해도 좋지만 제단에 나와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바울 일행이나 루디아 일행이 그들의 있는 처소에서 기도하고 안식일을 지킬 수도 있었지만 굳이 강가의 기도처를 찾았다는 것은 예배 처소를 찾는 것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그처럼 바쁜 중에서도 기도처로 나가 기도하기를 힘쓸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4.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바울이 루디아 일행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다른 여인들은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유대교 이단이 아닌가?” 그러나 본문 14절 말씀을 보면 루디아는 바울의 말을 청종했습니다. “청종했다”는 말은 “들은 대로 따랐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듣고 끝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때 바울이 말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주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다른 여인들은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저 말을 듣고 세례를 받으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유대 사회에서 매장될지 몰라! 저 사람의 말은 맞는 것 같지만 세례까지는 받을 수 없어!”
그러나 루디아는 바울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말대로 실천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초청했습니다. “선생님! 저희 집에 잠깐 들려주실 수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희 가족들 모두가 세례 받게 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흐뭇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결국 루디아의 가족과 모든 하인들까지 다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루디아는 결단력이 대단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선한 결단을 미루면 밀리는 인생이 되고, 선한 결단을 빨리 내리면 앞서는 인생이 됩니다. 그처럼 말씀을 듣고 감동이 있을 때 바로 실천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의 통로로 삼으실 것입니다.
5. 자기의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세례 받고 루디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에 유숙하게 했습니다. 당시에 바울 일행은 선교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잠자리도 부실했고, 먹는 것도 부실했고, 얼굴도 시커멓게 탄 상태로 초라한 행색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얼굴만 봐도 그들의 힘든 형편을 알고 루디아는 선교사 일행을 자기 집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맞이하는 장면도 참 지혜롭습니다. 본문 15절에서 어떻게 말합니까? “만일 저를 주님 믿는 자로 알거든 저의 집에 들어와 꼭 지내셔야 합니다.” 마치 백년손님처럼 모시면서 자기 집에 머물러 달라고 강하게 부탁하는 어조로 말해서 선교사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그 루디아의 말을 듣고 오늘은 어느 여관에서 머물러야 하나 고민하던 바울 일행은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보통 유능한 장사꾼은 손해 볼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디아는 주님을 영접한 후부터 선교를 위해서 즐겁게 손해를 볼 줄 아는 훌륭한 영적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사도행전 16장 40절 말씀을 보면 자기의 집을 교회로 내어놓아서 루디아의 집에서 빌립보 교회가 시작된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를 떠난 후에도 계속적으로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에 최대한 후원을 했습니다.
사람이 선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선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이 더욱 큰 축복입니다. 루디아는 자기가 큰 재산을 모은 것도, 그리고 큰 집에 살게 하신 것도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해 나에게 이런 축복을 주셨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소중한 일을 위해 자기의 소중한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 축복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을 신성시해서 그 물을 성수로 마시기도 하고, 그 물에 목욕하면서 회개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 가정의 저주를 끊기 위해 자기 자녀를 갠지스 강에 제물로 수장시키는 풍습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갠지스 강둑에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 아이는 건강했고 한 아이는 다리를 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직감적으로 아이를 수장시키려한다는 것을 알고 극구 만류했지만 허사였습니다. 한참 후, 그 여인이 장애인 아들만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선교사님이 장애인 아이 대신에 건강한 아이를 버리고 온 것이 궁금해서 조심스럽게 그 영문을 물었더니 그 여인이 “당신은 당신의 신에게 병들고 약한 것을 제물로 드리느냐?”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헌신이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과 정성을 보실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 손에서 사라지고 우리 곁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신앙을 가졌다면 그것은 사라진 것이나 빼앗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는 사라진 것과 빼앗긴 것도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 축복의 통로가 되십시오 >
우리는 헌신적인 신앙을 통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의 축복의 통로가 되고, 나를 통해서 어디선가 선교의 문이 열리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이제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나?”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순종하고 헌신하면 누구라도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 존재합니까? 결국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바울도 훌륭하지만 바울을 뒤에서 도운 루디아도 훌륭합니다. 루디아는 기도와 물질로 바울의 선교 사역을 얼마나 많이 후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보면 사도 바울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랑이 뜨겁게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주 장사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영원히 잊지 못할 선교의 평생 동역자였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의 뒤에서 조용히 후원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생각하면 저도 전방 선교사가 되어야 하지만 그 대신에 저는 열심히 저의 이 가게를 통해서 뒤에서 선교를 돕는 후방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이제 이 가게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 가게가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귀한 도구가 되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은 뒤에서 조용히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루디아를 통해서 유럽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한 사람의 헌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많은 것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에 유럽으로 타고 간 배에는 유럽 문명이 실려 있었다고 토인비가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축복의 통로가 되면 나라와 민족이 바뀌고 대륙이 바뀌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강가의 기도처에서 만난 여인 한 명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위대한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멸시하지 말고(슥4:10), 작은 것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버린 돌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대개 보면 교회는 여성들의 헌신과 충성에 의하여 발전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의 3분의 2가 여성입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분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여성들입니다. 예수님 때에도 비록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다 남자였지만 십자가의 현장에 끝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은 여성들이었고, 은밀한 후원자도 대부분 여성들이었습니다. 연약한 사람도 헌신하면 그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 아무 기반도 없고 배경도 없었던 사도 바울에게 루디아의 헌신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그때 사도 바울은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의 사역에 루디아를 동역자로 붙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우리 성도들과 선교 후원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분을 저의 사역의 동역자로 붙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그분을 루디아처럼 저의 사역의 평생 동역자가 되게 하소서!”
< 하나님은 지금 루디아를 찾고 계십니다 >
1991년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출신 목회자로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할 때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적극 반대했습니다. “한국은 이미 상당히 복음화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선교 대상지(Mission Field)가 아니다. 미국 CMA에서는 한국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면 재정 지원을 전혀 못한다. 다른 나라로 선교사로 가든지 아니면 미국에서 목회를 하라. 아무 배경도 없이 왜 한국으로 들어가려고 하느냐?”
그런데 저는 마음이 자꾸만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목사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뉴욕을 떠나 귀국 전에 부모님께 인사하려고 LA에 잠깐 들렸습니다. LA에서도 몇 분의 목사님들이 또 귀국을 만류했습니다. 그때 한 선배 목사님이 “한 2주 동안만 다시 생각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LA에 잠깐 머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저는 한국에 CMA의 110년 된 선교의 노하우와 열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제 한국은 선교 대상지(Mission Field)는 아니라도 전 세계로 선교사를 훈련해 보낼 수 있는 훌륭한 선교 자원 대상지(Mission Resource Field)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앞으로 한국에 좋은 선교사 훈련센터를 세워 많은 선교사들을 세계로 파송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니까 한국에 대한 열정이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살 집도 없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귀국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며칠 만에 루디아를 만나는 기적은 저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맨땅에서 “선교! 선교!”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지금까지 13년 5개월을 달려왔습니다.
때로 지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우리의 선교센터의 비전을 이루려면 어느 정도 재정도 축적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는 어떻게 비전을 이룹니까? 선교센터를 세우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 CMA 한인 선교사 8가정 돕는 일조차 빠듯합니다. 게다가 가끔 선교사님들이 긴급히 무엇인가 필요하다고 기도 요청을 하면 너무 부담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신기한 일은 힘들고 어려운 때마다 하나님께서 루디아를 예비해주심으로 필요한 재정을 채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저희 선교회 사역은 그런 루디아와 같은 성도들의 소리 없이 헌신을 통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 선교 팀도 수고를 많이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헌신하는 분이 누군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모든 분들이 루디아와 같은 아름다운 저의 선교의 동역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선교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낼 루디아를 찾고 계십니다. 지금 하는 일에 성공하십시오. 선교를 잘 하기 위해서 성공하십시오. 그리고 그 성공한 것으로 선교를 위해 사용하십시오.
그러나 성공한 사람만 선교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까? 성공한 사람만 드릴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과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무엇을 드릴 수 있습니까?”하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드릴 것이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지금 형편대로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을 찾아보면 드릴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우리의 기도가 없으면 그 엄청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는 몽골의 6개 교회 중에 신칠례 교회에 몽골 공안들이 주일에 들이닥쳐서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유는 “교회가 정부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요새 몽골 공안들이 시도 때도 없이 교회에 들이닥친다고 합니다.
지금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의 선교 팀에는 현재 제레미, 크리스틸, 의사 팜, 안화, 리사, 신지영 자매 등이 함께 사역하는데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모슬렘 권에서 사역하는 김진영 선교사님과 이영동 선교사님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주 토요일에는 터키의 김진영 선교사님의 캠프로 웹 디자인 사역을 하는 천혜림 자매를 파송했는데 그 자매의 안전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은밀한 사랑과 관심만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여러 모양으로 선교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해야만 선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선교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루디아처럼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신 말씀처럼 항상 마음이 열리고, 주일을 잘 지키고,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에 청종하고, 자기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 루디아와 같은 이 시대의 축복의 통로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을 바꾸시는 하나님(몬 8-19 ) / 이수영 목사 (0) | 2021.12.20 |
---|---|
출 18:13-27 민주적인 교회 / 김동호 목사 (0) | 2021.12.20 |
인생을 바꾸는 기도(대상 4:9-10 ) / 이수영 목사 (0) | 2021.12.20 |
예배 드림(계 4:10-11) / 이철신 목사 (0) | 2021.12.20 |
율법의 완성자 예수 그리스도 / 마 5:17-19 (0) | 2021.12.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