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꾸시는 하나님> 몬8-19
사도 바울은 그의 대부분의 편지들을 구술하고 받아쓰게 했지만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이 본문 마지막 절인 19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친필로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다른 편지들에 비해 아주 짧고 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편지의 주 수신자는 빌레몬입니다. 사도 바울이 2절 하반절에서 "네 집에 있는 교회"라고 말하고 22절에서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손님을 묵게 할 수 있을 만큼 큰 방과 여러 방들이 있는 저택을 가진 재력가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5절에서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했고 7절에서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한 것을 보아 그의 집에 모여 예배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영향력이 큰 지도자였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 빌레몬에게 그의 노예 중 하나였던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위하여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사람을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부릅니다. 4절에서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했고 22절에서는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한 것 보면 그가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 늘 가까이 있었고 허물없던 사람임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절 하반절에서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빌레몬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받게 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사도 바울에게 영적으로 빚을 진 것입니다. 13절에서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한 것 보면 갇히지만 않고 가서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빌레몬은 사도 바울이 얼마든지 자기를 섬기게 할 수 있을 만큼 사도 바울에게 큰 빚을 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빌레몬에게 사도 바울은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문 첫 절인 8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다"고 말하며 21절에서는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이 얼마든지 쉽게 명령하고 순종을 받아낼 수 있을 빌레몬에게 모든 예의와 격식을 다 갖추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하게 부탁하는 편지를 쓰고있는 것입니다. 그는 본문 9절과 10절에서 "간구한다"는 말을 연달아 두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8-10절을 다시 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12-14절을 또 봅니다: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빌레몬은 만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복음사역을 위해 몸종이 필요하다고 요청만 한다면 몇 명의 종이라도 사도 바울에게 붙여줄 준비가 되어있을 만큼 재력도 있고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을 만큼 사도 바울에게 큰 빚을 지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진 빚을 그냥 탕감하라고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대신 갚아주겠다고 간곡한 청을 하고있습니다. 본문 18-19절을 봅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면 이제 그 오네시모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한 것으로 보아 빌레몬의 종 곧 노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선 15절에서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한 것은 그가 주인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노예였음을 말해줍니다.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빌레몬에게 쓰고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오네시모는 주인에게서 도적질을 하고 도망쳤거나 어떤 불의한 일을 해서 주인의 재산에 손실을 가져오자 그 문책이 두려워 도주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본문 11절이 말해주듯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는 무익한 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해서 옥중에 있던 사도 바울을 알게 되고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사도 바울과의 만남을 통해서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라고 말합니다. 11절에서는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다고 말하며, 12절에서는 "그는 내 심복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골4:9에서는 그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라고 쓰고 있습니다. 13절에서는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한다고 말함으로써 오네시모가 매우 믿음직하고 유능한 일꾼이며 갇힌 바 된 사도 바울에게 없어서는 안될 복음의 동역자가 되어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진 빚을 대신 갚아주면서라도 그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고 자기 가까이서 보다 자유롭게 자신과 동역할 수 있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 편에 편지를 써 빌레몬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 편지 속에서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바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빌레몬이 죄지은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를 자유인이로서 믿음 안에서의 형제요 복음의 동역자로 영접해주는 것입니다. 본문 16-19절의 내용은 모두 그것을 간청하고있는 것입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빌레몬을 향한 사도 바울의 두 번째 바램은 그가 오네시모를 아예 사도 바울에게 되돌려보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근한 뜻을 그의 글의 몇 군데에서 감지할 수 있습니다.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미 오네시모가 그에게 "유익한" 존재임을 말했고 12절에서는 "심복"이라고 했으며 13절에서는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21절에서 사도 바울이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말한 사실입니다. 특히 이 말의 뒷부분, 즉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줄 뿐 아니라 아예 사도 바울에게 그의 동역자로서 되돌려 보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남의 사소한 흠을 들추어내 떠들고, 남을 비방하는 글을 마구 써서 퍼뜨리며, 근거도 없는 말을 만들어서 남을 음해하는 일이 횡행하는 오늘날 사도 바울의 이 편지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인류역사에서 획기적으로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고있는 컴퓨터와 인터넷, 하나님께서 20세기말에 인류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선물인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을 인간들은 음란과 무형의 폭력을 위한 가공할 무기로 만들어 놓고있는 오늘날, 이 한 편의 짧은 편지는 그야말로 사랑의 핵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보다 진지하게 이 빌레몬서가 신약성경 중 한 권의 책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하나로서 수록되게 된 이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 빌레몬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단지 빌레몬과 바울, 바울과 오네시모 사이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뿐이라면 과연 이 개인적 편지 한 장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수록되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제자라 할 수 있을 빌레몬에게 일방적으로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그를 존중하며 예의를 갖출 줄 알았다는 사실이 이 편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고 성경으로 수록되게 했겠습니까? 아무리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이고 문학적으로 뛰어난 글이라 해도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 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지 않는 글은 성경 속에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개인의 문제에 관해서 쓴 지극히 짧고 사적인 이 편지의 그 무엇이 이 편지로 하여금 성경의 한 부분이 되게 했겠습니까? 우리는 우선 자유케 하는 진리의 메시지, 또는 인간평등의 메시지를 그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요8:32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7:22에서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라 했으며, 고후3:17에서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했고, 갈3:28에서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했습니다. 이렇듯 자유와 만인평등사상은 위대한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비록 작고 개인적인 편지로 보이지만 이 빌레몬서는 이 위대한 만인의 복음을 힘있게 선포하고있는 것입니다. 옛 사회는 노예제도 위에 구축된 사회였습니다. 노예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유인들의 삶의 수단이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더구나 도망친 노예는 아무리 가볍게 처리되어도 도망자(라틴어로 fugitivus)를 뜻하는 F자의 화인을 이마에 찍혀야 했으며 많은 경우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거나 고문을 받다가 죽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도망자 노예를 "아들"이요 "심복"이요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요 "복음의 동역자"라고 말하며 그를 자유인으로 놓아주기를 청한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핵폭탄과 같은 자유와 평등사상의 선언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고는 이 빌레몬서에서보다 더 강력한 자유와 평등사상의 선언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그 자유를 누가 주시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노예를 자유인으로 뒤바뀌게 하시고, 주인을 떠난 무익한 자를 주인에게 유익한 자로 되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을 위대한 사도의 "신실하고 사랑 받는 형제"요 "복음을 위한 동역자"로 바꾸어놓으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빌레몬서는 바로 이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에 지극히 짧고 사적인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수록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로부터 약 50년 후 고대교회의 위대한 순교자 중의 하나인 이그나시우스가 그는 그의 교회가 있던 안디옥에서 붙잡혀 처형되기 위해 로마로 이송되던 중 소아시아의 서머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에베소 교회로 써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곳의 훌륭한 감독에 관해서 많이 썼는데 그 감독의 이름이 오네시모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고 자유인이 되었으며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던 그 노예 오네시모가 바로 그 위대한 감독 오네시모라고 하는 결정적 증거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있고 또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빌레몬서 연구에 권위있는 어떤 학자는 바로 그 오네시모의 손에 의해서 오늘날 빌레몬서가 된 그 편지가 보존되었고 또 그의 영향력 아래 그 편지가 성경에 수록되었다고 확신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놀랍게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오네시모처럼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울처럼 우리도 인생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삶의 불리한 여건, 불행한 현실 속에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을 바꾸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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