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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이후

by 【고동엽】 2021. 12. 19.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이후

 

김회권 목사(숭실대, 일산두레교회)

 

 

I. 한국교회의 빛과 그림자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있으며 거룩한 삶을 살아보려고 분투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의 와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중심은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교회라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히 긍정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로, 아직도 복음주의적 열혈 청년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다. 그들은 대학시절에 영적 각성을 맛본 후 시민단체나 비정부기구, 찬양 및 기독교 문화, 세계선교 등의 영역으로 사명의 장막을 넓히고 있다. 대학생 선교사역에 선구자적으로 헌신한 교회들의 수고가 이런 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수원지 역할을 감당해 주고 있다. 둘째, 교파간 및 교단간 교회일치 운동이 여러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장로교의 양대 교단인 통합측과 합동측의 신중하고도 우호적인 교류와 접촉들은 개교단주의의 협소한 전망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남북나눔운동의 경우 반성적인 진보 교회와 열린 보수 교회들의 우정어린 합작이요 동역의 산 증거라 볼 수 있다. 또한 한기총과 교회협의회 등의 연합기구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대화와 교류의 채널을 가동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셋째, 교회정치 등에서 점점 민주화, 투명화의 방향으로 진일보하고 있다. 합동측 교단의 경우 총회장 결선투표시 제비뽑기를 도입하여 교단장 선거의 추태들을 불식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넷째,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이 세상 한 복판에서 발휘하는 신앙적 지도력도 점증하고 있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많은 크리스챤 기업가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일터에서 기독교신앙을 세상 한 복판에서 적용해 보려고 분투한다. 물론 완숙하고 무흠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많은 평신도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다섯 번째로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이제 양적 성장에 치중한 지난 날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질적 성장을 도모하고자 하는 신학적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전도 프로그램 이외에 양육 프로그램과 제자도 훈련 프로그램 등이 광범위하게 실험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남북 문제, 민족화해 문제에 점점 더 각성된 사명감을 가짐으로써 남북한의 화해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점이다. 북한으로 보내지는 대부분의 구호물자는 한국교회(미주 교포 교회도 포함) 그리스도인들의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헌신의 증표다. 이런 밝고 긍정적인 양상들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희망적인 관측으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밝고 긍정적인 전망을 일시에 흐리게 만들만한 부정적인 양상들도 줄을 이어 발생하고 있다. 한국교회에는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마귀가 강요하는 악한 시험들을 이겨내는 서머나 교회(계시록 2:8-11)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분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기 위하여 인내와 수고를 감당한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수고와 인내로 칭찬받았으나 발람의 교훈을 영접하여 행음한 버가모 교회(계시록 2:12-17)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증표로 칭찬을 받았으나 이세벨을 용납하여 간음한 두아디라 교회(계시록 2:18-25)와 같은 부정적인 양상도 노정하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의 중대형 교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아주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진실들이 도전을 받거나 흔들리는 현상들이 교회 안팎에서 병발하고 있다. 최근 수년 동안 한국교회 안팎에서 가장 현저하게 등장하는 부정적인 열매들은 한국교회의 마음밭에 뿌려진 “씨앗”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마 13:36-43). 첫째, 많은 수의 도시형 중대형교회들은 여전히 교회성장학적 교회운영에 치중한 나머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흐리고 있다. 교회성장학은 자칫 잘못하면 큰 것, 많은 것에 대한 우상숭배로 전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오순절의 성령역사로 인하여 하루에도 제자의 수가 3000명이 증가될 수 있기 때문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양적 증가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들어온다고 해서 그것이 오순절의 성령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최근 문화관광부 통계에 의하면 불교 신자의 숫자는 2500 만명이다.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할 때 불교신자도 같이 엄청나게 성장하였다는 말이다. 종교에 귀의하도록 압박하는 한국교회의 병리적이고 불안한 사회분위기에서 이런 종교인의 양적 증가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은 아직도 4영리 단계의 초신자 수준의 설교들로 채워지고 있다. 태권도 홍띠나 청띠 정도의 신앙만을 가르치고 훨씬 수준 높은 9단 수준의 신앙단계로 성장하려고 갈망하는 기독교인들을 바르게 훈육하는 프로그램은 아직 태부족이다. 따라서 고귀하고 품격높은 제자도나 수도사적인 자기단련의 신학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영성신학이 등장하여 이런 양적 성장주의가 가져온 폐해의 일단을 교정해 보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한국교회는 대형화에 대한 환상에 집착하고 있다.

 

둘째, 대형교회의 기업화(세속화), 세습왕조화 추세는 심각한 폐단으로 지적된다. 교회의 왕조적 세습화는 어떤 명분으로든지 정당화되기 어렵다. CH교회, KR교회, 대형 선교단체 그리고 적지 않은 중대형 교회들이 부자세습 체제를 이루었거나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할 수만 있다면 부자세습을 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용기가 없어서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아서 혹은 당회 장악력이 모자라서 그런 세습체제를 구축하지 못할 뿐이다. 현재도 많은 개신교지도자들이 자신의 아들이나 사위 혹은 부인에게 사실상 자신의 지위를 넘겨주려고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셋째, 한국교회는 아직도 개교회주의 동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 목회자가 한 교회를 20-30년씩 목회를 감당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모험이 다. 모든 개별적인 목회자는 자신의 한정된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목회에 임한다. 강단의 교류나 영적 지도자들간의 광범위한 은사와 재능의 교류가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교우들에게 균형적인 신앙지도를 베풀 수 있을 것이다. 강단교류는 물론이고 교우들의 이동식 수업(교인 순환제)도 도입해 볼만하다. 개교회들이 투자하여 각 지역마다 기독교 도서관을 짓거나 문화센터들을 운영할 수 있다. 지방자치제 정신을 빌려서 지역사회를 섬기려는 지역교회들의 연합으로 세상의 가장 낮은 진토에 입술을 대고 희망을 찾으려는 가난한 백성들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로마카톨릭교회와 성공회와 감리교회가 교역자의 정기적인 인사이동을 통하여 이런 개교회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게 기계적인 인사이동으로는 개교회주의의 우상을 타파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밖에 없는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지체요, 목회자들은 교회와 역사의 주이신 예수님께 속한 목자요 예수님의 양떼를 먹이는 목회자다. 한 특별한 지역교회에 속한 것은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기 위한 하나의 절차인 것이다. 제사장의 사적 소유는 사사시대의 영적 파탄상태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니었던가? 스타와 같이 대중들의 존경과 환영을 받는 목회자들도 사람들의 존경과 환호성에 탐닉하지 말아야 하며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책임을 지는 영혼의 목자다운 품격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교우들은 자신이 존경하고 선호하는 목회자를 일종의 심리학적 숭배의 대상물인 종교적 아이콘(icon)으로 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교우들은 성령의 충만한 교통을 통하여 포도나무 원줄기인 예수님께 친밀하게 붙어있는 가지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소위 당회장 목사라 불리는 담임목회자의 전횡과 독재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우민화시키고 있는 현실이다. 개신교 교회는 가히 루이 16세급 독재권력을 휘두르는 1인 담임목회자의 리더쉽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다. 다행히 목회자의 인품이 훌륭하고 신뢰할만하면 그 담임교역자의 독재는 이른바 연성(軟性)독재가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수완있는 독재적 목회자는 평신도 교인들의 노예근성과 제휴하기 쉽고 그들의 마조히즘적 감정을 충족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늘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신령하고 감화력이 있는 설교를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목회자일수록 항상 자기몸을 쳐 복종시켜서 자기 옷을 찢어야 것이다. 루스드라에서 이적을 행하던 바나바와 바울을 보고 원주민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고 경배하였을 때 바나바와 바울은 옷을 찢고 자복하지 않았던가?(행전 14:8-14). 신적인 존재 혹은 하나님을 배타적으로 중개하는 중보자로 격상된 교역자 주변에는 항상 성적 스캔들, 금전적인 비리, 권력남용 등의 혐의가 끊어질 날이 없다. 따라서 목회자에 의하여 조장되는 평신도 우민화는 시급하게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에게 오로지 “믿고 순종하는 아멘형 우민(愚民)이 될 것을 강요하는 교회내의 반민주적 반(反)성령적인 폐해는 혁파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 교우들은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목회자 일인에게 전적으로 위임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뼈를 깎는 회개와 자기부인을 통하여 어떤 종류의 연성 및 강성 독재체제가 공고해지지 않도록 목회자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다섯째, 한국교회는 아직도 사회의 가장 복합적이고 강경한 쟁점들을 다룰만한 신학적 훈련이나 소양을 결여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회의 교회신학은 구약성경이 다루는 절실한 문제들-세상의 실제적인 구원,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 피조물의 미래에 대한 문제들-을 다소간 외면하고 있다. 영성신학이나 목회상담학의 왕성한 인기는 그리스도인들의 내면 치유에 대한 다급한 수요를 잘 증명한다. 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내적인 붕괴와 손상을 가져오는 사회의 외부적인 법, 제도, 관습, 경제체제 등 이른바 딱딱한 쟁점(hard issues) 등을 잘 다룰 수 있는 신학자들과 설교가들이 많지 않다. 특히 요즘 같은 경우 복잡해지고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되는 사이버 문화, 생명복제, 동성애와 이혼, 교육문제, 그리고 환경문제, 국제정의, 지방자치제와 정치 등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주의적 방관주의나 무관심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의 상처나 망가짐도 이런 외적인 사회정치적, 문화적 및 인류학적 쟁점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제 한국교회도 이런 포괄적인 전망을 갖춘 신학적 해답을 추구하여 할 때가 되었다.

여섯째,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차이점에 눈멀게 했다(자끄 엘룰, False Presence of the Kingdom of God, 1-43쪽 참조). 누가 보더라도 선명한 윤리도덕감을 고양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교회는 등경 위에 켜진 불이요 산위에 있는 동네로서 온 집안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한다. 교회의 고결한 윤리도덕은 단지 도덕주의적인 이상의 실현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알고 사는 피조물의존적인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 의존적인 신앙을 가르치는 도구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초세속적인 고결한 윤리도덕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목숨 걸고(내세를 믿는) 믿는 신앙이며 과연 초월적 세계, 즉 언젠가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실재함을 수긍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의 인적 구성의 편향성이다. 한국교회가 도시빈민이나 농회촌지역의 주변화된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 등 기성 종교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혜택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하면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십일조를 떠올린다. 교회가 담배와 술을 금지하는 곳, 인간의 욕망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곳 등으로 일방적으로 인식되면 상대적으로 남성(노동자) 신자들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갖게 된다. 예수님의 교회는 종과 자주자가 함께 어울리는 보편적인 교회다.

요약하자면 개혁교회는 항상 스스로 자신을 부단히 개혁하기 위하여 교회의 영이신 성령의 거룩한 갱신요구에 늘 굴복할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교회의 안팎에서 교회갱신을 외치는 목소리들을 해교분자니 사단적 교회분열주의자로만 매도하지 말고 그들의 상처입은 외침도 가장 겸허하게 경청하여야 한다. 교회갱신의 영이신 성령은 바람처럼 교회 안에 현존한다. 바람같은 성령은 교회 안에서 존재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은닉하고 가지들을 잎사귀들을 그리고 줄기들을 세차게 뒤흔들어 깨움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교회갱신의 영으로 계시하신다. 한국교회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는 바람같은 성령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는 고감도의 영적 지각력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교회 공동체와 개별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실천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는 공중보건의와 같은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공중보건의들은 성령의 활동궤적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지각력과 분별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신학적 공중보건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신학전망을 가지고 교회의 신앙실천을 점검하고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공중보건형 신학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관점에서 교회의 신앙실천을 늘 상대화한다. 이 신학은 또한 교회가 사용하는 온갖 이론들과 그것이 참여하는 실천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성서해석과 교회활동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세력들과 구조들, 세계관들과 인생관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역할까지 감당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이 터를 닦은 개혁신학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빛 하에서 교회의 신앙실천을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공중보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II. 교회의 본질적 구성요소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세계 역사는 사상과 이념의 건축과정이다. 세계사에 출현하였던 전제군주들은 피와 폭력으로 그들의 성채와 호화로운 궁궐들을 건축한다. 인간건축가들과 반대되는 방향이긴 하지만 하나님도 당신의 집을 건축하신다(엡 2:20-22; 이사야 28:16).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건축가들이 버린 돌을, 즉 강력한 로마제국의 총독이 처형시킨 그 남자를 새로운 건물의 모퉁이돌로 사용하셨다(카를 하임, <개신교의 본질>). 그 위에다 그는 인간의 궁궐이나 성채들과는 전혀 다른 한 신령한 집을 세우신다. 그 신령한 집은 살아있는 돌, 즉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들의 인격(신앙고백)들로 건축된다. 이 영적인 집을 세우시는 방법은 인간의 건축방법과 완전히 반대된다. 여기서는 세상의 건축물과는 달리 인간 벽돌이 서로 겹쳐(連絡) 쌓여진다. 세상 건축가들의 눈에 볼 때는 지극히 위태로워 보이는 겹쳐 쌓여진 돌들의 연락(連絡)으로 지탱되는 건물은 땅 밑에 박혀있는 거대한 기초석에 의하여 지탱된다. 전체 건물을 떠받치며 가장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석층 주위를 선지자와 사도들이라는 마름돌이 에워싼다(엡 2:20-22; 요한계시록 21:14). 여기서 기초석 위에 건축된 신령한 집의 견고성은 살아있는 돌(신앙고백자)들의 연락, 즉 인격적인 신뢰와 위탁에 의하여 확보된다. 겹쳐 쌓여져 있지만 인격적인 신뢰와 상호위탁으로 연락될 때 이 신령한 집은 가장 견고한 구조물이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이 세상의 어떤 인간의 모임이나 단체와도 확연히 구별된다.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완전한 대리자)라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요 1:12)들의 모임이다(마태복음 16:13-19).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Caesar)를 주(主)요 신의 대리자(혹은 신)로 고백하는 로마 황제의 직할통치 아래 있던 도시 가이샤라 빌립보(가이사의 은총으로 유지되는 도시 빌립보)에서 "누가 이 세상의 참된 주(主)인가?"를 물으신다(참조. 눅 3:1-3).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세계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다(눅 2:1-2; 참조 행전 16:31). 예수님은 가이사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의 주라는 신앙고백을 유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향하여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 여부에 따라 교회의 존폐가 결정된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당신은 그 그리스도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알려주실 최종적인 진리를 담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을 쉽게 풀면 다음과 같다. "당신은 성경에서 오랫동안 약속되어온 하나님의 대리자(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순종해 드리는 신적인 왕입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많은 표적들과 사죄선언 등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대리 왕)라는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며 이런 신앙고백이 없는 교회는 단순한 자선기관이나 교양강의를 들려주는 종교학원으로 전락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드리는 모든 사도적 신앙 계승자들은 개교회의 마름돌과 같은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매순간 우리의 신앙고백(가이샤라 고백)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살아있는 돌들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교회는 한 담임목회자가 30년전 혹은 40년 전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된 채 거적더미 위에서 시작하여 나중에 수십만명으로 성장시켰다고 자랑하는 그런 기업형 교회성장 신화와는 별로 관련이 없다. 그런 기업가형 목회자가 구축한 기업형 종교흥행 집단인 교회들은 본질적으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위에 구축된 성경적 교회와 상당히 다르다. 어떤 대형교회들은 개척자이자 영도자인 당회장 목회자의 신화적인 성공 이야기를 수없이 우려먹고 산다.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오늘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으로 해석하고 적용시켜주시는 성령의 역사보다는 신화적인 담임목사의 신앙무용담이나 영웅적인 고생이야기가 설교의 주요 텍스트로 등장한다. 이런 한국교회의 현상을 고려해 보면 마태복음의 교회 건축에 관한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은 허풍으로 팽창된 우리들의 오도된 종교흥행주의 관행을 세차게 타격한다.

 

III. 하나님 나라 운동의 종말론적인 전위로서의 교회

나사렛 예수의 구약성경 읽기의 핵심은 성서를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단편적이고 간헐적으로 실체화되었던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 바실레이아=the reign of God)는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집중적으로 충만하게 나타났다. 예수의 인격 속에 화육된 하나님 나라-몸소 하나님 나라인 예수의 인격, 메시지, 사역을 통칭-는 낡은 세계의 재편과 변혁을 의미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나사렛 예수의 생물학적 출생에서 시작되지 않고 가이샤라 빌립보 도상의 제자들의 신앙고백(마 16:13-16, 특히 16절)에서 탄생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는 신앙고백-예수를 하나님에 의하여 파견된 대리자라고 고백-에서 시작되고 실체화되기 때문이다(크라우스, 조직신학, 14쪽). 나사렛 예수는 이 세상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 창조를 산파하고 향도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사역은 공동체 생활, 즉 사회생활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능력 안에서 낡은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였음을 고지하였다. 따라서 나사렛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간단없는 갈등과 충돌을 불러일으키며 인격, 제도와 법, 정치경제 및 종교 및 문화의 모든 요소에 위기를 불러일으키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결단”으로 소환한다.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 때에 즉 세계완성을 앞둔 길목에서 이 새로운 백성, 교회공동체에서 시작하고 현존하다. 성령의 피조물로서 교회는 도래하는 자유의 나라의 전위(前衛)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주기도문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외친다.

 

현재 한국교회에는 하나님 나라 운동 신학의 관점에서 교회신학을 재정돈할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종말론적인 전위로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체도 될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 운동의 부정적인 객체로 전락할 불길한 중립성에 묶여 있다.

 

 

IV. 초계층적, 초민족적, 초계급적, 교제로서의 교회

 

1. 성직자-평신도의 각질화된 위계질서는 영민주주의적 은사공동체로 바뀐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主)는 신부나 목사에게 의하여 배타적으로 대표되지 않고 오히려 교회 공동체의 다양한 성령의 은사와 직분자들에 의하여 대표된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교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영의 능력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영적 사람들이 주도한다. 교회의 성령충만은 위계질서를 해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적인 투명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든다. 구제 문제로 발생한 쟁점들을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상당한 영적 카리스마를 가진 히브리 출신 사도들에게 들고 갔을 때 그들은 평신도들의 불평을 즉시 투명하게 접수하였다(행전 6장). 그래서 헬라파 일곱 집사를 세우지 않았던가? 성령충만한 교회에서는 위계질서는 있지만 투명하고 정직한 의사소통의 능력은 비약적으로 늘어간다. 에베소서 4:7-13에 의하면 승천하신 주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시려고 다양한 은사와 직분자들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은사야말로 평신도-성직자간의 해묵은 한국교회의 논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령은사 배분과 분여는 교회를 영민주주의적인 공동체로 만드시려는 뜻과 관련된다. 여기서 민주주의라는 말은 삼권분립이나 다수결주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가리킨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교우들에게 배분됨으로써 교회는 영- 혹은 은사-민주주의적인 공동체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여러 다양한 은사를 배분받은 사람들의 상호 가르침으로 유지된다. 안디옥 교회만 하더라도 다섯 명의 공동체적인 영적 지도력 하에서 크게 부흥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바나바와 바울은 가르치는 은사에 탁월함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일인 담임 목사의 설교와 교육권 아래 예속되어 있다. 은사적 교회 공동체 개념은 목사의 중대한 혼자 지는 짐(가르침과 설교)을 벗겨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장로들도 집사들도 설교할 수 있는 것이다(구역예배시 실제로 평신도도 설교한다). “은사론은 하느님의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알게 된다”(렘 31: 34)는 약속에 대한 확신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은사(영)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학의 배타적인 전문성은 교회의 머리되시고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상대화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주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목사의 설교는 격조높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설교자와 청중사이의 보다 더 유연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통하여 설교 및 강의에 대한 평가와 토론은 유익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은 굳게 닫힌 입을 열고 은사민주주의적 공동체 건설에 보다 더 능동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평신도들에게 “에바다”라고 외칠 것이다(막 7:34-35).

 

 

2. 초민족적 교제로서의 교회

기독교회는 모든 인종과 민족들 출신의 사람들이 사귀기 위하여 결합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예정된 초민족적 모임이다. 이 국제적인 결속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모든 결속과 의무보다 우위를 차지한다. 이런 점에서 서구교회의 많은 점에서 실패하였다. 각 민족국가내의 한 기구로 전락한 교회는 각 국가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 된다(독일 3제국하의 독일 제국교회, 일본군국주의하의 일본 기독교회, 현재 공화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미국의 일부 보수교회들). “교회는 새로운 계약을 맺은 방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민족들의 역사를 뚫고 하나님에 의하여 지시된 세계완성의 임박한 때를 지향하는 고유한 길을 간다”(크라우스, 조직신학, 435쪽). 이런 초민족적 교제로서의 교회의 정체성은 바울이 개척하였던 이방 지역의 교회의 보편적인 인적 구성에서 잘 드러난다. 바울이 개척한 이방지역의 교회는 언제나 이방 출신 신자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의 영적 교통을 경험하였더. 특히 로마 교회와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음을 잘 증거한다. 초대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받치고 있는 기초석이었다(엡 2:11-22). 당시에 이방인과 유대인은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도저히 화해할 수 없었으며 더더욱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가 될 가능성은 제로(zero)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천사들과 정사와 권세 등 공중 권세잡은 자(하나님께 반역하는 천사들)들마저도 예상치 못한 방법, 즉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써 원수지간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켰다. 이런 기습적인 초민족적 화해 공동체의 출현은 하나님께 끝가지 저항하는 악의 위계질서를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발휘하였다고 증거한다(골 2:15; 고전 15:20-25). 교회는 가장 사이가 나쁜 원수지간인 사람들마저도 형제자매 사이로 바뀔 수 있는 곳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았던 적대의 담벼락을 허물어뜨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왕노릇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파간, 교단간의 일치와 연합 운동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궤적 속에서 자리매김되는 모든 교회의 마땅히 취할 본분인 것이다. 한국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30만명 이상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한국교회의 선교적 관심은 일차적으로 개종에 있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와 돌보심을 제공하는 데 맞춰져야 할 것이다.

 

3. 초계층적 교제로서의 교회

또한 교회는 계급적으로나 계층적으로 그리스도만이 성령의 힘과 현존 안에서 그의 교회를 갱신할 수 있다. 승천하신 주 예수의 긴밀하고 간단없는 영적 친교가 교회갱신의 견인차다. 교회 공동체의 새로운 공동생활은 높이 들리워진 주와의 밥상교제에서 시작된다. 밥은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의미한다. 교회는 인간의 근본 욕구를 공동체적으로 충족시키는 “공동체적 식사”를 수평적 수직적 친교를 유지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하나가 되는 친교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의 능력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현실이며, 그것은 인간들이 변화된 공동생활을 통하여 참여할 수 있는 현실이다(골비쳐의 해석. 사유재산권 신성불가침 사상의 자발적 유보실현)(로마서 12:1-2; 엡 4: 1-6; 갈 6:1). 이 초기기독교회의 공동생활은 1960년대 미국의 히피들의 집단심리학적인 역동성과는 다르다. 사도행전 2-4장에서 일어난 사유재산권의 일시적이고 자발적인 유보가 실현되는 공동생활을 통하여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는, 돈(mammon)의 힘과 소유에 의한 생활안전보장이라는 필사적인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한다. 신격화된 돈과 재물은 형제자매적인 친교의 토대를 놓는데 거룩하게 낭비된다. 한 때 하나님과 소외되어 살 때 위세를 떨쳤던 것이 형제자매를 섬기는데 사용된다(크라우스, 조직신학, 456-457쪽)(눅 12:15; 딤전 6:10; 히 13:5; 참조 마 6:20; 13:22 재물의 기만성 예시). 형제자매적 친교로서 공동체는 순수한 영 안에서 사적 재산권과 소시민적 사유재산권 신성불가침의 울타리가 무너진다.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하며 비인간화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곤궁과 가난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요한일서가 말하는 형제자매적 사랑) 돈의 신적 위력 앞에 굴복당하여 비인간화되는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헌신한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기아선상에 있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것은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의 고려를 초월하는 거룩한 낭비행위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집과 재산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세상의 규범은 사라진다. ...거룩하다고 인정된 가족이기주의와 함께 소시민적 사고는 망해가는 세상에 속한 것이다”(크라우스, 조직신학, 461쪽). 그런 점에서 교회는 생계비관형 자살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상당한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교우들이 하나님께 바쳐진 십일조와 구제헌금은 아낌없이 되갚을 힘도 없이 무력한 가난 속에 속박당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낭비되어야 한다. 교회공동체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변화된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세상을 밝혀주는 빛과 세상을 보존하는 누룩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소환되어 있다. 따라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변세계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고 아낌없이 자신을 소비하도록 압박당한다.

 

 

V. 교회와 세속사회 사이에 있어야 할 건강한 긴장

교회는 새로운 공동생활과 세속사회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태도를 통하여 세상의 상황을 변혁하고 해방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부름받았다. 하지만 교회공동체는 주변세계의 질서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적응하는 길이 항구적인 유혹으로 열려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사회적인 삶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비판과 검토는 시민적인 지배계급체제의 속박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주변 사회경제정치적인 체제에 대한 질문을 부단하게 제기하여야 한다(쟈크 엘룰의 뒤틀려진 기독교; 또한 크라우스, 조직신학, 466쪽).

각질화된 구조물로서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새 포도주를 담지 못하는 낡은 가죽부대다. 이런 낡은 구조물로서의 교회는 각질화된 기존의 권력체제 대한 해방적인 공격세력인 하나님 나라 운동력을 자신을 노출하여야 한다. 교회의 머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내재하시는 영 성령이 교회갱신의 영임을 인정하는 곳에서는 교회의 왕조적 세습과 운영은 상상할 수도 없다. 교회가 먼저 갱신과 복된 해방(옛 구조 허물어뜨리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서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된 공격에 동참할 수 있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체제변혁적 에너지는 이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된다.

이 과정에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는 교회공동체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인 삶에 대하여 냉정한 신학적 평가를 내리도록 요구한다. 모든 인간적인 정치체제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는 엄청난 정치적인 동요를 의미한다(크라우스, 같은 책, 479쪽). “자신의 공적이고 비판적인 책임의식을 통해서만 교회는 특정의 기존 사회질서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편입되지 않으며 특정한 사회를 현상유지시키는 기능을 떠맡지 않게 된다”(크라우스, 조직신학, 481쪽 미주 1).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적 신념에 입각한 정치참여가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의 개인적인 전위대적인 윤리를 대신할 때가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완성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사들과 권세들, 보좌들과 주관들, 그리고 이데올로기들과 신들에게로 향하지 않고 인내와 신념을 가지고 해방자와 구원자를 앙망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재림과 자유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며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덕목들을 앞당겨 실현하려고 한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아시아의 일곱교회 가운데를 거니시면서 당신의 깨어있는 종들에게 비젼을 주시고 꿈을 주신다. 격려와 책망와 갱신의 처방도 주신다. 교회는 모든 사회구성체가 갖고 있는 자아중심성과 권력에 대항하여 교회공동체 안에서 움트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에 힘입어 새로운 대안사회의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이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환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온전히 관철되는 메시야 왕국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사회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 <근사치적 접근>의 사회를 위한 기독교회의 신앙실천은 훨씬 더 정교하고 치밀해져야 할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실현될 가치들을 이 지상에서 선취하여 사회화시키는 자들이다.

 

결론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라는 상위개념 밑에 교회를 둠으로써, 자기비판과 세상과의 비판적 조우를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개혁하는 개혁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한다. 현재의 한국교회는 몇 가지 긍정적인 징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교회를 위한 신학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나라”라는 우주적인 지평을 상실하고 교회성장학적 교회운영에 봉사하는 여러 가지 학문적 교육적 자료들이 양산하고 있다. 서두에서 지적한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양상들은 이러한 신학적 협소함과 폐쇄성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빛 하에서 보면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시고 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존적인 신앙고백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친교를 나누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위로서의 교회다. 이런 교회는 성령충만한 교회이며 성령의 은사가 교우들에게 고루 배분된 은사민주주의적 공동체다. 교회 공동체의 성령충만 경험은, 즉 공동체 전체의 성령의 은사경험은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를 보다 더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기여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도행전 13장의 안디옥 교회가 공동체적인 성령충만과 인도를 잘 경험한 교회다. 공동체적인 성령의 인도 및 현존을 경험하면 모든 교우들이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의식을 갖고 주인을 의식으로 무장될 것이다. 교회는 이런 성령, 자유의 영의 의향과 인도의지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여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 한국교회에서는 많은 경우에 역동적인 은사적인 교회공동체, 성령-민주주의적 공동체의 역동성 대신에 개교회의 영적 지도자 일인의 연성독재와 대다수의 우민화된 평신도들의 불안정한 위계질서가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 앞에 모든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인간 권세들이 굴복할 때 일어난다. 그럴 때 그리스도 예수의 왕적인 통치가 효과적으로 세상 밖으로 매개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혁교회가 스스로 개혁되면서 사회를 개혁하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목회와 신학 2003년 11월 특집(김회권, 숭실대 교수)

 

엘리야의 부흥운동과 예언자적 영성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은 하나님 백성들의 심령 갱신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종교 체제 전반에 대한 창조적 해체작업을 의미한다. 교회사의 첫 시작인 사도행전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로마제국 내에 침투한 기독교회의 사회변혁 역사, 4세기 영국과 아일랜드의 기독교적인 변화, 15세기(1452-1498)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사보나롤라의 개혁, 16세기 루터와 캘빈의 종교개혁, 18-19세기 유럽과 미국의 부흥운동(조나단 에드워드, 휫필드와 웨슬리안 운동)도 인간의 품성변화와 사회적인 변혁을 동시에 성취하였다. 2000년 긴 교회사 동안 일어난 부흥운동은 항상 이처럼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변혁이었다. 한국교회의 초대교회사에서 시작된 심령부흥 운동도 통전적이고 세상변혁적이었다. 이광수를 비롯한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이 다 인정하듯이 기독교 신앙은 조선의 봉건적 질서인 앙시엥레짐에 대한 총체적인 변혁을 주도하였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신앙쇄신만을 의미하거나 느슨해진 기독교신앙의 재무장화만을 의미하지 않았고 사회 및 문화 전반의 재주형(鑄型)을 의미하였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부흥사들이 주도하는 심령부흥운동은 교인 내면의 주관적인 변화에 주력한 반면에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총체적인 변혁에너지를 방출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부흥운동의 바람직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신앙에 의해서 주도되는 주체적인 신앙운동이자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 전반에 대한 변혁운동이기 때문이다.

 

불과 비의 예언자, 엘리야 (열왕기상 17:1-24)

엘리야 시절의 이스라엘은 괴롭고 암울한 시대였다. 엘리야 시대는 아합왕과 그의 시돈 출신 아내 이세벨이 주도하던 진보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종교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왕하 21장 나봇의 포도원 강탈 사건).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주도하는 바알 종교혁명의 여파로 야웨 선지자들은 대다수 살해되거가 동굴 속으로 숨어든 지 오래되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엘리야가 등장한다. 17장 1절은 엘리야를 ‘길르앗의 우거하는 디셉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길르앗의 디셉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촌락이다. 요단강 동편 사람들은 요단강 서편 사람들보다 신앙이 더 보수적이었다. 그들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 전 12부족들이 평화롭게 살던 부족연맹체 시절(당시를 기준으로 볼 때 150-200년 전)을 이상사회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12지파가 고루 땅을 나누어 가지고 평화롭게 살던 계약공동체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아합왕의 아내였던 시돈 출신 제사장 엣바알의 딸 이세벨은 바알 종교혁명을 일으켜서 수도 사마리아에 큰 바알 신전을 건축하였고 850명의 왕실 예언자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그녀는 경자유전의 원칙으로 지탱되던 자작자영체제를 무너뜨리고, 막대한 토지를 겸병하는 대지주를 도입하여 이스라엘 사회를 계급적 계층적 사회로 변질시켰다(미 6:16). 이에 반하여 아합 왕은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야웨 하나님도 섬기면서 동시에 바알신도 섬기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아합 왕은 시계 진자추처럼 야웨 하나님과 바알신을 왔다갔다하는 유약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우상숭배 쪽으로는 기울어져 있는 연약한 죄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가서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니라”(17:1)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였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예언은 “왕과 유력자와 귀족에게 가서 지금 하나님이 당신들에 대하여 진노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행위였다. 이런 예언은 신적 압박이나 명령 아래서 추동되는 행동이었다. 누가 감히 왕이나 거대한 기업체 사장을 향하여 “3년 동안 국가(회사) 부도가 나서 당신 나라(기업)는 엉망진창이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상의 왕권을 휘두르는 인간 제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은 언제나 위태로운 일이었다. 왕에게 대놓고 고언을 하고 간언을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격동하심에 의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순간, 평범한 인생은 벅찬 거룩한 바람 폭풍에 휘말려 가는 인생이 된다. 이것이 예언자들을 굶어 죽게 만들었고 기아선상으로 내몰았다. 이 말을 전하고 엘리야도 기아선상으로 내몰린다. 이세벨이 야웨 선지자들을 학살하고 박해할 때 엘리야는 동쪽 국경의 끝자락 요단강의 지류인 그릿 시냇가에 숨었다. 까마귀 떼들이 물어다 주는 양식으로 간신히 살아가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북쪽 국경 너머 시돈의 사르밧으로 망명을 떠났다(17:2-7). 엘리야 시대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세벨의 식탁에서 매일 먹이를 먹었지만, 야웨의 선지자 엘리야는 어떤 음식도 공급받지 못했다. 시돈의 사르밧에서 그는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한 과부를 만난다(17:8-12). 참 역설적이게도 시돈 출신 왕비 이세벨에게 쫓겨 시돈으로 망명을 떠난 엘리야가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공궤를 받으며 연명한다. 사르밧 과부의 집안에 머물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깊이 경험하였다. 자신을 공궤하는 과부의 곡식 가루와 기름 통이 다함 없이 계속 채워지는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을 맛본 것이다(17:15-16). 죽음의 한 복판에서 생명을 맛본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또 한 차례 죽음의 권세와 대결한다. 자신이 기거하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자 그는 재앙을 몰고온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마치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재앙(기근, 가뭄, 그리고 죽음의 권세)을 몰고 온 사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오해하고 비난하듯이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죽음을 몰고 온 사나이, 숨은 죄를 찾아내어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저승 사자로 비난한다. 이런 비난을 감수하며 엘리야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과부의 아들 시신을 자신의 다락방에 누여 놓고 그 위에 자신의 몸을 세 번이나 포개어 접촉한다. 그는 아이의 혼이 다시 되돌아올 때까지 부르짖는다. 이 죽은 아이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통하여 실상 자신이 죽음과 재앙을 몰고 온 사람이 아니라 생명과 풍요를 가져오는 사람임을 증명한다(17:17-22). 이 기적을 통하여 엘리야는 오히려 자신의 사명을 다시금 확신한다. “그렇다. 나는 생명의 사자다. 소생과 부흥을 매개하는 하나님의 사자다.” 사르밧 과부의 입에서 터져나온 고백이 엘리야의 내적 소명감을 객관적으로 확증한다.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17:24).

 

 

다시 아합 왕에게 나타난 엘리야(18:1-19; 18:20-40; 18:41-46)

악한 지도자 아합의 패역한 지도력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가뭄과 기근이었다. 풍요의 신, 비와 뇌우, 폭풍의 신 바알을 광적으로 숭배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은 죽음과 가뭄의 저주받은 땅으로 변질된다. 목회자들이 풍요와 다산을 숭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강단은 더욱 더 기근과 가뭄으로 쇠락한다. 큰 교회와 많은 교인들을 가진 교회를 세우려는 야심을 숭배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삶을 갱신시키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하나님 말씀은 더욱 더 희귀해 진다. 엘리야가 망명생활을 하던 3년 동안 야웨의 선지자들은 이세벨-바알이 통치하는 “가뭄”과 “기근”의 땅에서 종적을 감춘 채(동굴에 숨거나 살해당함) 영적인 기백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암울하고 황폐한 사마리아에 엘리야가 아합 왕을 위한 특별 메시지를 갖고 출현한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8:1).

엘리야는 자신의 목숨을 찾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가뭄과 기근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재난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엘리야는 3년 째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어린 심판임을 선포하려고 온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닥친 3년간의 가뭄과 기근은, 아합왕이 아내 이세벨과 연합하여 야웨 선지자의 씨를 말리고, 야웨 종교 대신에 바알 종교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대(大)자본가와 지주들의 세력을 팽창시킨 정치에 대한 신적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은 3년 동안 기근과 비가 오지 않은 이유를 엘리야가 비 오지 말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긴장과 적대의 불연속선을 뚫고 엘리야는 3년 만에 아합 왕을 다시 대면한 것이다.

엘리야가 아합왕을 대면하여 하나님의 회개요구를 전달하려고 사마리아에 갔을 때 왕은 궁내대신과 함께 그의 노새와 말을 먹일 물과 꼴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엘리야가 3년 만에 다시 출현하자 아합 왕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라고 소리친다(18:17). 이에 대하여 엘리야는 단호하게 반박하였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을 좇았습니다”(18:18).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명령”이란 말은 12지파 형제자매끼리 돈독하게 살도록 규정하는 시내산 계약을 가리킨다. 아합이 이 시내산 계약을 버리고 바알을 좇았다는 것은 대자본가들과 지주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경제적인 대변혁을 주창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평과 정의의 원칙보다는 풍요와 번영 이데올로기를 더 추구한 것이다. 바알 종교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자비의 길 대신에 ‘부자와 번영과 풍요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하였다. “풍요로운 이 곳에 하나님이 있다. 부요한 이 곳에 하나님이 있다. 부자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라고 가르쳤다. 바알 종교는 형제자매의 우애를 담보하는 계약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왕과 귀족의 농민지배를 정당화하였다. 또한 바알신은 아세라라는 여신을 아내로 삼기 때문에 바알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세라를 대표하는 여사제들(聖娼)과의 성교의식을 가졌다. 바알 종교는 성교제의를 통하여 풍요와 다신을 기원하는 음란종교였다. 마지막으로 바알 종교는 신에 대한 경건을 증명하기 위하여 맏아들을 번제로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그래서 엘리야와 바알-아세라 선지자들 850명 사이에 “비를 주지 않고 기근을 가져온 재앙의 근원이 바알인지 야웨인지 내기를 해보자,” 즉 야웨와 바알 중 “누가 참 하나님인가?”를 가리는 타이틀 매치가 벌어진다. 엘리야는 불로 응답하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바알-아세라 선지자들 850명과 기도 대결을 펼쳤다. 장소는 바알 선지자의 홈그라운드인 갈멜산이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번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기도를 해도 기도 응답이 안 오니까 그들은 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기도를 계속 했다(29절). 그러나 결국 바알 선지자들은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이제 엘리야 차례였다. 그는 처음부터 갈멜산 기도대회에 참관하러 온 기회주의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아주 도전적인 선포를 하였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왕상 18:20-23).

 

엘리야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까이 오게 한 후 그들 보는 앞에서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였다(18:30). 엘리야 보수신앙은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쌓아놓았던 12지파를 상징하는 12 돌제단을 다시 세운 데서 잘 드러난다. 그는 12지파의 형제자매가 오손도손하게 살던 사사시대의 형제우애적 계약공동체를 회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룩한 시대착오였다. 12지파의 무너진 단을 수축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대세가 되어 버린 대지주 중심의 이데올로기와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역사의 시침을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처럼 보였다. 엘리야가 만약 가뭄과 기근의 때에 굶지 않고 그는 이런 꿈을 못 꾸었을 것이다. 그가 이세벨이 베푸는 혜택의 수혜자가 되었다면 무너져버린 12지파에 대한 꿈을 상실하였을 것이다. 누구든지 각 시대의 주류 이데올로기의 혜택을 받고 살면 더 나은 세계를 꿈꿀 수 있는 힘을 상실해 버린다. 주류 이데올로기 체제의 바깥에서 가뭄과 기근을 온 몸으로 겪은 사람만이, 가뭄과 기근 시대를 끝내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것이다. 만일 엘리야가 가뭄과 기근을 겪지 않고 이세벨의 식탁에서 공급되는 포도주와 산해진미를 실컷 즐겼다면, 가뭄과 기근이 주는 고통에도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누구보다도 가뭄과 기근이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를 체험적으로 알았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최후의 만찬으로 몰아가는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를 치가 떨리도록 경험했기 때문에, 은총의 장대비 내리는 소리를 그만큼 사모하였을 것이다. 엘리야가 꿈꾼 부흥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였고 갈라진 대지를 적시고 오곡백과를 무르익게 만드는 단비였다. 그의 부흥은 나라 전체의 신앙, 도덕, 정의감의 부흥이었고 국가체제를 일신하는 정치적 신앙적 대변혁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농민들이 앓고 있는 기근과 가뭄을 끝내려고 애썼던 애국자였다(왕하 2:12). 그는 12지파 이스라엘의 무너진 제단을 쌓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의식을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사사시대의 계약공동체 시대로 소환시켜 놓았다. 길갈에서 12돌을 제단으로 쌓아놓은 후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외쳤던 여호수아 시대로 되돌아 간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의 99%를 세상의 영향 속에 노출시키고 살면서, 거룩한 용맹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상실하며 산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이 세대를 바꾸기는커녕, 극히 현상유지적인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기근과 궁핍을 온 몸으로 처절하게 경험해 본 사람만이, 장대비 같은 빗소리를 사모하게 된다. 장대비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이제 사무치게 꿈꾸던 12지파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제단을 쌓은 후 엘리야는 제단과 도랑까지 물이 철철 흘러넘치게 만들었다(18:33). 그리고는 저녁 소제 드릴 때에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구원사 전승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18:37).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음을 오늘날 사람들이 제발 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이 백성으로 하나님 당신이 이 백성의 마음이 얼마나 주님을 향해서 이탈되어 있는지를 얼마나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멀어져있는지를 제발 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엘리야의 핵심을 찌르는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불로 응답하셨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흙을 태워 도랑의 물을 핥았다”(18:38).

이 때 모든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요 엘리야가 야웨의 참 선지자임을 공적으로 인정하였다(18:35-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 21절에서 머뭇머뭇하던 백성들의 태도는 야웨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모든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고 다그치던 엘리야의 도전 앞에 한 말도 대답하지 못하던 백성이 아니었던가?(18:21). 머뭇머뭇하던 백성들은 엘리야의 제단이 불로 태워지는 걸 보면서 비로소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한다.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다.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그가 참 하나님이다. 번영과 풍요와 많은 것 큰 것을 좋다고 하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 이웃과 형제자매들과 평화의 능력을 증장시키는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다.”

결국 불로 응답받은 엘리야의 제단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킨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쌓은 제단 위에 불로 응답되는 역사현장을 볼 때 백성들의 마음은 기경되고 갱신된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불의 제단에 바쳐진 향기로운 번제물이 될 때 일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인정하게 된다. 바알과 야웨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은 야웨가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바알-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심판하는 엘리야를 도왔다. 백성들의 회개는 이내 갑자기 큰 빗소리로 이어지고 3 년간의 가뭄과 기근이 끝났다. 회개하는 제단에 기도의 응답이 있고 영적으로 황폐한 땅(심령)에 비가 내린 것이다(18:41-46). 온 백성들이 회개했을 때 많은 구름과 바람을 동반한 큰 비가 쏟아졌다. 엘리야는 손바닥만 한 구름 조각이 수평선에 나타날 때까지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기도한다. 마침내 작은 조각 구름을 보면서 큰 빗소리를 듣는다. 즉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큰 비 소식을 전달한다. 그 때 야웨의 능력에 사로잡힌 엘리야는 허리를 동이고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 약 50㎞ 정도의 거리를 왕의 수레를 호위하며 내달렸다.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백성들과 왕의 방황하던 마음을 사로잡는 운동이었고 야웨 하나님께 다시금 굴복하도록 초청하는 강력한 영의 시위였다. 엘리야가 지속했던 그 3년 동안의 경건한 자기연마와 영적 집중의 삶이 엘리야를 제단의 불꽃으로 태웠던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바쳐진 번제물이 되고 그 번제물 위에 하나님 께로부터 불의 응답이 내려올 때 백성들은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급진적인 전향을 경험한다. 제물을 태우는 불꽃 속에서 장대비 같은 은총의 역사가 예기된다. 온 백성이 회개하여 자기 삶을 쪼개어서 맛보는 장대비 부흥은 어떤 부흥사도 가져다 줄 수 없는 부흥이요 어떤 영적 지도자도 그 열매를 독점할 수 없는 진정한 하나님의 부흥이다. 한국교회는이런 영적 부흥운동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하나님의 종들이 먼저 하나님의 번제단 위에 불꽃처럼 타올라서 향기로운 제물이 될 때(롬 12:1-2)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자복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릇된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엘리야의 영적 침체(열왕기상 19:1-18)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도 넘지 못하는 장벽 앞에 좌절한다. 좌절당한 사람들은 작고 보잘것없는 힘을 엄청난 세력으로 평가하고 반면에 위대하고 강력한 힘을 보잘것없는 힘으로 평가한다. 엘리야는 갈멜산 대첩으로 엄청난 영적 고양을 맛보고 희망의 달음박질을 하였다(왕상 18:46). 그러나 사마리아로 돌아갔을 때 그는 아합-이세벨-바알 천하가 전혀 몰락하지 않고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보았다. 오히려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을 살해한 혐의로 엘리야 자신은 이세벨의 지명수배를 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드린 기도의 능력으로 불의 응답을 경험하고 비의 응답을 경험한 아합 왕과 백성들은 다시 이세벨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갈멜산 기도대첩 이전과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 현실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다시 생명을 위하여 도망치는 망명객이 되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19:1). 이런 위협적인 메시지를 개인 편지 형태로 전달받은 엘리야는 순식간에 영적 기백을 상실하였다. 19:3은 엘리야의 현실인식이 거센 현실정치적 세력, 즉 죽음의 세력 앞에 얼마나 쉽게 휘둘리는지를 잘 보여준다.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 살기 위하여 남쪽 국경 끝자락으로 도망친다. 여기서 ‘보고’라는 동사가 매우 중요하다. “본다”는 것은 “사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행위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세벨의 명령 한 마디가 현실을 지배한다고 믿어 버린 것이다(참조. 마 6:22-24). 한자에 보면 “현실(現實)”의 현(現)자(字)에는 왕(王)변에 볼 견(見)자가 붙어있다. 현실(reality)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달리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현실은 무한입방면체와 같이 역동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항구적인 힘인지 지배력인지를 잘 분변하는 것이 정당한 현실인식이다. 우상신 바알과 그의 하수인인 이세벨의 권력은 비실체적이다(unsubstantial). 덧없다. 항구적인 존재기반이 없는 바알신은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위력을 돋보이게 하려고 등장한 악역 조연일 뿐이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별거 아닌 것도 엄청나게 커 보이고, 엄청나게 큰 상황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역동적 상대성이 바로 현실인식의 세계다. 신앙은 이런 역동적인 현실인식의 능력이다. 아무리 거대한 힘도 하나님의 힘 앞에 세워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신앙이다(사 40:12-26).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보다 이세벨의 위협적 메시지 한 줄(19:2)을 읽고 그것의 권능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와! 이 말이 성취되겠구나! 이 말은 현실이 되겠구나!”(참조. 민 13:28-33; 14장). 갈멜산에서 포효하던 사자 엘리야가 보기에는 한갓 우상숭배에 빠진 이방여인에 불과하였던 이세벨이, 이제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변신한 엘리야의 눈으로 보니까 갑자기 위세당당한 여신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이세벨의 위세에 눌린 채 지극히 왜곡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도망친다. 그는 유다의 최남단 도시 브엘세바까지 도망쳤고 그것도 불안하여 광야로 하룻길 쯤 더 도망쳤다. 브엘세바는 유다 국경의 남쪽 끝으로서 이세벨이 보낸 저격꾼들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서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여 하루 더 광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갈멜산의 기도의 대첩 영웅, 여호와의 신으로 가득차서 왕의 수레보다 앞서 달렸던 엘리야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라는 자살지향적 기도를 드리고 있다(19:4).

 

엘리야처럼 자살을 기도(企圖)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한계상황에 빠진 사람들이다. 절대적인 절망에 빠져 모든 친밀한 인격적 접촉을상실하고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살지향적인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여 영적 붕괴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민망한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엘리야를 어루만지시고, 먹이시고, 재우신다. 영(靈)은 육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빵과 물, 신체적 접촉, 잠이 영적 자양분이다. 엘리야가 원기를 회복할 때쯤 되어서, 하나님은 정상적인 의사소통에 들어가신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자살지향적 기도를 “하나님! 저는 이세벨-바알이 다스리는 천하에서는 못살겠습니다”라는 현실변혁적 탄식으로 들으신다. 그가 “죽고 싶다”고 한 말을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라는 말로 알아들으신 것이다. 엘리야는 이세벨-바알이 지배하는 저 완강한 현실을 뜯어고치던지 내가 죽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의 자살지향적 기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체제전복적 기도로 재해석된다. 엘리야의 자살지향적인 기도 속에서 이 세상을 뒤집어엎어야겠다는 변혁의지를 간파한 하나님은 그를 그냥 자살하려는 하는 허약한 병자로 보지 않고 이세벨-바알 체제에 대해서 거룩한 불만을 가진 자로 인정하신 것이다. 7절에 가면 하나님의 먹이시는 목적이 드러난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어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분명히 사명의 길을 달려가기 위한 전투식량이었던 셈이다. “엘리야여, 네가 여기서 멈추어 주저앉을 수는 없다. 네가 달려갈 사명의 길이 아직 남아있다.” 엘리야에게 이제 “너는 하나님의 산, 호렙산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망과 영적 침체의 끝자락에서 죽고 싶다고 아우성치던 엘리야에게 호렙산으로 오르는 길, 즉 영적인 치료와 회복의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천사표 음식과 같은 원기 가득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천사표 음식을 먹은 사람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사명의 길, 호렙산으로 올라가야 할 벅찬 과제를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힘과 원기를 빼앗아 간다. 바알과 이세벨 체제를 거부하는 열정 때문에 겪는 굶주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 왕의 수레보다 앞서 달려가는 신적 권능으로 우리는 사명의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엘리야는 광야 로뎀 나무 아래서 천사표 음식을 먹고 힘을 내어 모세의 산 호렙산까지 내달렸다.

 

세미한 음성 속에 들려오는 새로운 사명-단기필마의 영웅담화로 끝나지 않고 세대를 넘어 계승되는 엘리야의 부흥운동(열왕기상 19:9-18)

하나님의 일이라고 굳게 믿으며 최선을 다하여 추진하던 바로 그 일이 기대와는 달리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때 찾아온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쉽사리 극복되지 않았다. 독자의 기대와는 달리 호렙산에 당도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력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다시 폐쇄적인 자의식의 동굴 속으로 칩거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경험(백성들이 야웨 선지자들을 칼로 죽인 것, 그리고 자신만 간신히 살아남은 사실)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이 본 것(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의 언약을 버리고 야웨의 제단을 헐어버린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19:10, 14). 이세벨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주도하는 현실을 피하여 동굴로 숨어들었다. 동굴 안에서 그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 앞에 절대고독과 무력감을 느꼈다.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한 두 번 천사표 음식으로 회복될 수 없는 뿌리깊은 영적 함몰이었다. 이세벨의 포악한 박해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변절이 그의 영적 기백을 결정적으로 꺾어 놓았을 것이다(19:10).

돌이켜 보면 요 며칠 사이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한 판 진검승부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처단하였다고 그 시대의 근본 악이 근절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풀을 베고 나면 잠시 후에 다시 그 풀 벤 자리에서 새 풀이 수북히 자라나듯이,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을 850명이나 무찔렀는데 이제 8,500명, 아니 85,000명의 기세로 다시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보다 더 절망적인 낙담은 백성들의 표변(豹變)에 있다. 18장 36절에서 분명히 “여호와 그가 참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면서 엘리야를 도와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을 도륙하는 데 협조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야웨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다고 비난당하고 있다(19:10). 엘리야가 그렇게 멀리까지 도망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변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의 언약을 버리고 야웨의 단을 헐며 칼로 야웨의 선지자들을 죽였던 그 상황은 이세벨의 잔악한 야웨 선지자 박해보다 더 한탄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는데 일이 꼬여가고 상황이 악화되고 현실은 여전히 완강하고, 850명의 악인을 죽였더니 그 자리에 85,000명의 악인이 엄습하는 엄청난 현실에 짓눌릴 때, 하나님은 영적 리엔진니어링(재동력화) 작업에 착수하신다.

 

엘리야는 호렙산 동굴 속에서도 로뎀 나무 아래서 터뜨린 불평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동굴 안에서 적대자들을 제압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는 다시금 갈멜산의 대첩 환상에 매료된 채 그 잔상효과에 기대고 있었을 것이다. 갈멜산을 진동하였던 그 외경스러운 불과 폭풍과 지진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속이 좁아져 버리고 하나님의 확 트인 인식의 전망을 잃어버린 엘리야를 동굴 밖으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의 시위를 베푸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서라”(19:11)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위력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본문은 원수대적들을 일시에 굴복시킬 수 있는 그 강력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 가운데 “야웨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 신적 권능의 현현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리는 피조물이요 능력일 뿐임이 드러난다.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갈멜산에서처럼 엘리야가 불과 지진과 태풍의 힘으로 바알 우상숭배자들을 척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현상들이다.

오히려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과는 정반대 현상인 세미한 음성 속에 야웨가 현존하심이 밝혀진다. “세미한 음성”(sound of silence)(19:12)은 침묵이라고 보기에는 소리에 가깝고 소리라고 보기에는 침묵에 가깝다. 소리와 침묵의 중간이고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고 들림과 안 들림의 중간이라는 특이한 표현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세미한 소리이기에 엘리야가 일순간에 못들을 수도 있는 메시지다.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 후에 들려온 세미한 음성,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19:9에서 동굴에서 엘리야를 불러낼 때 들려온 바로 그 음성이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말은 “엘리야여, 네가 어찌하여 동굴의 우상 안에 갇혀 있느냐? 왜 너의 좁은 상상력 속에 붙잡혀 있느냐? 왜 객관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느냐?” 정도의 말이었다. 19:13의 그 동일한 질문은 “네가 어찌하여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과 같은 가시적으로 초자연적인 권능 속에서만 나를 찾느냐?”라는 정도의 말이다. 하나님의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의 시위가 엘리야의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함이 드러난다. 19:14의 불평은(“....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동굴 안에서 터뜨린 그 불평(19:10)과 동일하다. “하나님 다시 한 번 나를 강철같이 강하게 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의 예언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내가 폭풍을 몰고 가는 바람의 예언자가 되어 다시 한 번 갈멜산의 대첩을 재현하게 만들어 주옵소서”라는 투의 엘리야의 잠재의식적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셈이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시는데, 그 세미한 음성 속에 엘리야의 새로운 사명이 열린다. (19:13). 그 세미한 음성은 엘리야의 하나님 인식방법을 우회적으로 교정해 준다. “더 이상, 바람, 지진, 그리고 불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말라. 더 이상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을 몰고오는 예언자로 활동하는 데 만족하지 말라.” 불과 폭풍과 지진은 감각적으로 볼 때에는 엄청난 큰 사건이요 현상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런 것들 속에 거하지 않고 절대 침묵 속에서 당신을 드러낸다. 오히려 아주 세미한 침묵의 소리 안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난다. 여기서 엘리야는 역사의 주관자는 이세벨과 바알이 아니며 야웨 하나님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엘리야의 영적 침체를 치료하신다. 새로운 사명은 동역자들을 세우는 사명, 그리고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젊은 동역자들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영적 침체는 새로운 사명의 발견으로 치료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15-18은 엘리야에게 새롭게 부여된 사명의 길을 제시한다.

 

 

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 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자신이 극복하여야 할 원수들이 갈멜산의 한판 진검승부로 끝날 수 없음을 심각하게 깨달은 엘리야는 그가 성취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듣고서야 영적 기백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취하여할 사명으로 자신의 열정을 태우며 달려가는 기관차다. 인간은 의미와 사명감과 책임감을 연료로 태우며 달려가는 존재다.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바알이라는 우상숭배주의자들을 척결하는 일은 자신의 당대에 끝날 일이 아니라 오랜 세대를 두고 완성되어야 할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한 것이다. 그가 받은 새로운 사명은 바알 척결작업을 세대를 넘어 계승할 후계자들을 세우는 사명, 그리고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젊은 동역자들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토록 척결하려고 했던 그 바알 우상숭배자들, 나라의 공평과 정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리는 번영지상주의자들을 친히 척결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종들을 오랫동안 준비해 오고 계셨던 것이다. 이 새롭고 확트인 현실인식 속에서 엘리야는 영적 침체를 극복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 안에서 들려오는 지극히 작은 음성이 새로운 사명을 고취하여 영적 침체를 극복케 하는 데 결정적 지침이 됨을 발견한다. 불과 지진과 폭풍과 같은 소란스러운 환경너머로 들려오는 하나님 음성은 세미하다. 그러나 이 세미한 음성 속에는 불과 지진과 바람의 언어가 들어있다. 님시의 아들 예후와 하사엘, 엘리사가 바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의 사자들이다. 그들은 바로 바알우상숭배자들을 한칼에 다시 쳐부수어 줄 불과 지진과 바람이 될 것이다. 불과 바람과 지진과 같은 후계자를 세우라고 명령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은 지극히 세미하다. 우리가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그 음성이 위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세미하고 차가운 음성 속에 엄청난 불의 언어, 폭풍과 바람의 언어, 지진의 언어가 시한폭탄처럼 내장되어 있다. 엘리야 자신은 불과 바람과 지진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가 안수하여 세웠던 예후와 하사엘과 엘리사는 불과 지진과 바람을 가져왔다. 이들은 모두 바알우상숭배자들을 타파했다. 이렇게 하여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극복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지금 너만 남았다”고 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예비해두신 세 사람에게 안수를 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동굴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확트인 현실을 그는 보았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침체의 극복이다. 인간의 제한된 시야의 동굴 우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영적침체를 극복하는 길이다. 엘리야는 자신만 응시하다가 탈진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맞추지도 않은 순결한 청년 전사 7천명을 남겨두셨다. 엘리야가 안수하여 세울 세 사람의 후계자들과 7000명의 거룩한 전사들이 바알 척결작업을 계승할 것이며 야웨신앙을 부흥시킬 것이다. 바람의 아들 아람의 왕 하사엘을 예비하셨고, 지진같은 정치혁명으로 권력을 잡을 님시의 아들 예후를 예비하시어 하사엘이 죽이다 남은 바알 잔당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또다시 예후가 죽이다 남은 사람을 불의 예언자 엘리사가 다 척결할 것이다. 엘리야는 자기가 불, 바람, 지진이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고, 불의 사나이, 바람의 사나이, 지진의 사나이를 안수만 하게 하셨다. “나만 남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동역자들과 후계자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엘리야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도하는 “현실”을 본 후 다시금 광야로 달려갈 수 있는 사명자가 되었다.

 

 

결론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바알 우상숭배자들과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회의 전반적인 체제에 대한 거룩한 저항운동이자 통전적인 인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척결작업이었다. 번영과 풍요를 공평과 정의의 원칙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바알주의자들이다. 목회자들이 번영과 풍요의 이데올로기에 광신적인 숭배를 보일 때 그들은 바알우상숭배주의자들이 된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의 죄악을 향한 심판의 현장인 기근과 가뭄을 온 몸으로 겪어 본 사람이 하나님의 부흥운동을 목마르게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도하는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제단에서 시작되어 세상 속으로 확장되고 세상의 우상숭배 체제의 근본을 허물어뜨리는 체제전복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단기필마식의 영웅적인 무용담으로 지탱될 수 없고 세대를 넘어 계승되어야 할 운동이다. 한국교회의 제단이 엘리야의 제단처럼 하나님의 불꽃으로 태워지려면 영적 지도자들의 부단한 자기부인과 수도사적인 자기연마와 수련이 요청된다. 하나님의 종들이 제단에서 태워지는 향기로운 번제물이 될 때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

 

 

 

목회와 신학 2003년 11월 특집(김회권, 숭실대 교수)

 

엘리야의 부흥운동과 예언자적 영성

 

성경에서 말하는 “부흥”은 하나님 백성들의 심령 갱신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종교 체제 전반에 대한 창조적 해체작업을 의미한다. 교회사의 첫 시작인 사도행전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로마제국 내에 침투한 기독교회의 사회변혁 역사, 4세기 영국과 아일랜드의 기독교적인 변화, 15세기(1452-1498)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사보나롤라의 개혁, 16세기 루터와 캘빈의 종교개혁, 18-19세기 유럽과 미국의 부흥운동(조나단 에드워드, 휫필드와 웨슬리안 운동)도 인간의 품성변화와 사회적인 변혁을 동시에 성취하였다. 2000년 긴 교회사 동안 일어난 부흥운동은 항상 이처럼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변혁이었다. 한국교회의 초대교회사에서 시작된 심령부흥 운동도 통전적이고 세상변혁적이었다. 이광수를 비롯한 한국의 근대 지식인들이 다 인정하듯이 기독교 신앙은 조선의 봉건적 질서인 앙시엥레짐에 대한 총체적인 변혁을 주도하였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신앙쇄신만을 의미하거나 느슨해진 기독교신앙의 재무장화만을 의미하지 않았고 사회 및 문화 전반의 재주형(鑄型)을 의미하였다. 그 동안 한국교회의 부흥사들이 주도하는 심령부흥운동은 교인 내면의 주관적인 변화에 주력한 반면에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가는 총체적인 변혁에너지를 방출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부흥운동의 바람직한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신앙에 의해서 주도되는 주체적인 신앙운동이자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종교 전반에 대한 변혁운동이기 때문이다.

 

불과 비의 예언자, 엘리야 (열왕기상 17:1-24)

엘리야 시절의 이스라엘은 괴롭고 암울한 시대였다. 엘리야 시대는 아합왕과 그의 시돈 출신 아내 이세벨이 주도하던 진보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종교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왕하 21장 나봇의 포도원 강탈 사건).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주도하는 바알 종교혁명의 여파로 야웨 선지자들은 대다수 살해되거가 동굴 속으로 숨어든 지 오래되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엘리야가 등장한다. 17장 1절은 엘리야를 ‘길르앗의 우거하는 디셉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길르앗의 디셉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촌락이다. 요단강 동편 사람들은 요단강 서편 사람들보다 신앙이 더 보수적이었다. 그들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 전 12부족들이 평화롭게 살던 부족연맹체 시절(당시를 기준으로 볼 때 150-200년 전)을 이상사회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엘리야가 꿈꾸는 이상사회는 12지파가 고루 땅을 나누어 가지고 평화롭게 살던 계약공동체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아합왕의 아내였던 시돈 출신 제사장 엣바알의 딸 이세벨은 바알 종교혁명을 일으켜서 수도 사마리아에 큰 바알 신전을 건축하였고 850명의 왕실 예언자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그녀는 경자유전의 원칙으로 지탱되던 자작자영체제를 무너뜨리고, 막대한 토지를 겸병하는 대지주를 도입하여 이스라엘 사회를 계급적 계층적 사회로 변질시켰다(미 6:16). 이에 반하여 아합 왕은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야웨 하나님도 섬기면서 동시에 바알신도 섬기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아합 왕은 시계 진자추처럼 야웨 하나님과 바알신을 왔다갔다하는 유약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우상숭배 쪽으로는 기울어져 있는 연약한 죄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가서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니라”(17:1)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선포하였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예언은 “왕과 유력자와 귀족에게 가서 지금 하나님이 당신들에 대하여 진노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행위였다. 이런 예언은 신적 압박이나 명령 아래서 추동되는 행동이었다. 누가 감히 왕이나 거대한 기업체 사장을 향하여 “3년 동안 국가(회사) 부도가 나서 당신 나라(기업)는 엉망진창이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상의 왕권을 휘두르는 인간 제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은 언제나 위태로운 일이었다. 왕에게 대놓고 고언을 하고 간언을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한 격동하심에 의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순간, 평범한 인생은 벅찬 거룩한 바람 폭풍에 휘말려 가는 인생이 된다. 이것이 예언자들을 굶어 죽게 만들었고 기아선상으로 내몰았다. 이 말을 전하고 엘리야도 기아선상으로 내몰린다. 이세벨이 야웨 선지자들을 학살하고 박해할 때 엘리야는 동쪽 국경의 끝자락 요단강의 지류인 그릿 시냇가에 숨었다. 까마귀 떼들이 물어다 주는 양식으로 간신히 살아가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북쪽 국경 너머 시돈의 사르밧으로 망명을 떠났다(17:2-7). 엘리야 시대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은 이세벨의 식탁에서 매일 먹이를 먹었지만, 야웨의 선지자 엘리야는 어떤 음식도 공급받지 못했다. 시돈의 사르밧에서 그는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한 과부를 만난다(17:8-12). 참 역설적이게도 시돈 출신 왕비 이세벨에게 쫓겨 시돈으로 망명을 떠난 엘리야가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공궤를 받으며 연명한다. 사르밧 과부의 집안에 머물면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을 깊이 경험하였다. 자신을 공궤하는 과부의 곡식 가루와 기름 통이 다함 없이 계속 채워지는 하나님의 섭리적 돌보심을 맛본 것이다(17:15-16). 죽음의 한 복판에서 생명을 맛본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또 한 차례 죽음의 권세와 대결한다. 자신이 기거하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자 그는 재앙을 몰고온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마치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이세벨이 엘리야를 재앙(기근, 가뭄, 그리고 죽음의 권세)을 몰고 온 사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오해하고 비난하듯이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죽음을 몰고 온 사나이, 숨은 죄를 찾아내어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저승 사자로 비난한다. 이런 비난을 감수하며 엘리야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과부의 아들 시신을 자신의 다락방에 누여 놓고 그 위에 자신의 몸을 세 번이나 포개어 접촉한다. 그는 아이의 혼이 다시 되돌아올 때까지 부르짖는다. 이 죽은 아이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통하여 실상 자신이 죽음과 재앙을 몰고 온 사람이 아니라 생명과 풍요를 가져오는 사람임을 증명한다(17:17-22). 이 기적을 통하여 엘리야는 오히려 자신의 사명을 다시금 확신한다. “그렇다. 나는 생명의 사자다. 소생과 부흥을 매개하는 하나님의 사자다.” 사르밧 과부의 입에서 터져나온 고백이 엘리야의 내적 소명감을 객관적으로 확증한다. “이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17:24).

 

 

다시 아합 왕에게 나타난 엘리야(18:1-19; 18:20-40; 18:41-46)

악한 지도자 아합의 패역한 지도력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가뭄과 기근이었다. 풍요의 신, 비와 뇌우, 폭풍의 신 바알을 광적으로 숭배하면 할수록 이스라엘은 죽음과 가뭄의 저주받은 땅으로 변질된다. 목회자들이 풍요와 다산을 숭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강단은 더욱 더 기근과 가뭄으로 쇠락한다. 큰 교회와 많은 교인들을 가진 교회를 세우려는 야심을 숭배하면 할수록 백성들의 삶을 갱신시키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하나님 말씀은 더욱 더 희귀해 진다. 엘리야가 망명생활을 하던 3년 동안 야웨의 선지자들은 이세벨-바알이 통치하는 “가뭄”과 “기근”의 땅에서 종적을 감춘 채(동굴에 숨거나 살해당함) 영적인 기백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암울하고 황폐한 사마리아에 엘리야가 아합 왕을 위한 특별 메시지를 갖고 출현한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8:1).

엘리야는 자신의 목숨을 찾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가뭄과 기근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재난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엘리야는 3년 째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어린 심판임을 선포하려고 온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닥친 3년간의 가뭄과 기근은, 아합왕이 아내 이세벨과 연합하여 야웨 선지자의 씨를 말리고, 야웨 종교 대신에 바알 종교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대(大)자본가와 지주들의 세력을 팽창시킨 정치에 대한 신적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은 3년 동안 기근과 비가 오지 않은 이유를 엘리야가 비 오지 말라고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긴장과 적대의 불연속선을 뚫고 엘리야는 3년 만에 아합 왕을 다시 대면한 것이다.

엘리야가 아합왕을 대면하여 하나님의 회개요구를 전달하려고 사마리아에 갔을 때 왕은 궁내대신과 함께 그의 노새와 말을 먹일 물과 꼴을 찾으러 다니고 있었다. 엘리야가 3년 만에 다시 출현하자 아합 왕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라고 소리친다(18:17). 이에 대하여 엘리야는 단호하게 반박하였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을 좇았습니다”(18:18).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명령”이란 말은 12지파 형제자매끼리 돈독하게 살도록 규정하는 시내산 계약을 가리킨다. 아합이 이 시내산 계약을 버리고 바알을 좇았다는 것은 대자본가들과 지주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경제적인 대변혁을 주창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평과 정의의 원칙보다는 풍요와 번영 이데올로기를 더 추구한 것이다. 바알 종교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와 자비의 길 대신에 ‘부자와 번영과 풍요의 이데올로기를 주창하였다. “풍요로운 이 곳에 하나님이 있다. 부요한 이 곳에 하나님이 있다. 부자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라고 가르쳤다. 바알 종교는 형제자매의 우애를 담보하는 계약 공동체의 기초를 파괴해가면서까지 왕과 귀족의 농민지배를 정당화하였다. 또한 바알신은 아세라라는 여신을 아내로 삼기 때문에 바알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아세라를 대표하는 여사제들(聖娼)과의 성교의식을 가졌다. 바알 종교는 성교제의를 통하여 풍요와 다신을 기원하는 음란종교였다. 마지막으로 바알 종교는 신에 대한 경건을 증명하기 위하여 맏아들을 번제로 바치도록 요구하였다.

 

그래서 엘리야와 바알-아세라 선지자들 850명 사이에 “비를 주지 않고 기근을 가져온 재앙의 근원이 바알인지 야웨인지 내기를 해보자,” 즉 야웨와 바알 중 “누가 참 하나님인가?”를 가리는 타이틀 매치가 벌어진다. 엘리야는 불로 응답하는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바알-아세라 선지자들 850명과 기도 대결을 펼쳤다. 장소는 바알 선지자의 홈그라운드인 갈멜산이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번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기도를 해도 기도 응답이 안 오니까 그들은 칼로 자해행위를 하면서 기도를 계속 했다(29절). 그러나 결국 바알 선지자들은 기도응답을 받지 못하였다. 이제 엘리야 차례였다. 그는 처음부터 갈멜산 기도대회에 참관하러 온 기회주의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아주 도전적인 선포를 하였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왕상 18:20-23).

 

엘리야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가까이 오게 한 후 그들 보는 앞에서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였다(18:30). 엘리야 보수신앙은 여호수아가 길갈에서 쌓아놓았던 12지파를 상징하는 12 돌제단을 다시 세운 데서 잘 드러난다. 그는 12지파의 형제자매가 오손도손하게 살던 사사시대의 형제우애적 계약공동체를 회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룩한 시대착오였다. 12지파의 무너진 단을 수축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대세가 되어 버린 대지주 중심의 이데올로기와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역사의 시침을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처럼 보였다. 엘리야가 만약 가뭄과 기근의 때에 굶지 않고 그는 이런 꿈을 못 꾸었을 것이다. 그가 이세벨이 베푸는 혜택의 수혜자가 되었다면 무너져버린 12지파에 대한 꿈을 상실하였을 것이다. 누구든지 각 시대의 주류 이데올로기의 혜택을 받고 살면 더 나은 세계를 꿈꿀 수 있는 힘을 상실해 버린다. 주류 이데올로기 체제의 바깥에서 가뭄과 기근을 온 몸으로 겪은 사람만이, 가뭄과 기근 시대를 끝내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할 것이다. 만일 엘리야가 가뭄과 기근을 겪지 않고 이세벨의 식탁에서 공급되는 포도주와 산해진미를 실컷 즐겼다면, 가뭄과 기근이 주는 고통에도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누구보다도 가뭄과 기근이 백성들의 삶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를 체험적으로 알았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최후의 만찬으로 몰아가는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를 치가 떨리도록 경험했기 때문에, 은총의 장대비 내리는 소리를 그만큼 사모하였을 것이다. 엘리야가 꿈꾼 부흥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였고 갈라진 대지를 적시고 오곡백과를 무르익게 만드는 단비였다. 그의 부흥은 나라 전체의 신앙, 도덕, 정의감의 부흥이었고 국가체제를 일신하는 정치적 신앙적 대변혁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농민들이 앓고 있는 기근과 가뭄을 끝내려고 애썼던 애국자였다(왕하 2:12). 그는 12지파 이스라엘의 무너진 제단을 쌓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의식을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사사시대의 계약공동체 시대로 소환시켜 놓았다. 길갈에서 12돌을 제단으로 쌓아놓은 후 “우리가 이스라엘”이라고 외쳤던 여호수아 시대로 되돌아 간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생활의 99%를 세상의 영향 속에 노출시키고 살면서, 거룩한 용맹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상실하며 산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이 세대를 바꾸기는커녕, 극히 현상유지적인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때에 기근과 궁핍을 온 몸으로 처절하게 경험해 본 사람만이, 장대비 같은 빗소리를 사모하게 된다. 장대비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히지 않고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이제 사무치게 꿈꾸던 12지파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제단을 쌓은 후 엘리야는 제단과 도랑까지 물이 철철 흘러넘치게 만들었다(18:33). 그리고는 저녁 소제 드릴 때에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구원사 전승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18:37).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음을 오늘날 사람들이 제발 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내게 응답해 주십시오. 이 백성으로 하나님 당신이 이 백성의 마음이 얼마나 주님을 향해서 이탈되어 있는지를 얼마나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멀어져있는지를 제발 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엘리야의 핵심을 찌르는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불로 응답하셨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흙을 태워 도랑의 물을 핥았다”(18:38).

이 때 모든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요 엘리야가 야웨의 참 선지자임을 공적으로 인정하였다(18:35-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 21절에서 머뭇머뭇하던 백성들의 태도는 야웨 하나님을 향한 확신으로 바뀌었다. “모든 백성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고 다그치던 엘리야의 도전 앞에 한 말도 대답하지 못하던 백성이 아니었던가?(18:21). 머뭇머뭇하던 백성들은 엘리야의 제단이 불로 태워지는 걸 보면서 비로소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한다.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다.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 그가 참 하나님이다. 번영과 풍요와 많은 것 큰 것을 좋다고 하는 그 하나님이 아니라 공평과 정의, 이웃과 형제자매들과 평화의 능력을 증장시키는 그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다.”

결국 불로 응답받은 엘리야의 제단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킨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쌓은 제단 위에 불로 응답되는 역사현장을 볼 때 백성들의 마음은 기경되고 갱신된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불의 제단에 바쳐진 향기로운 번제물이 될 때 일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인정하게 된다. 바알과 야웨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은 야웨가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바알-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심판하는 엘리야를 도왔다. 백성들의 회개는 이내 갑자기 큰 빗소리로 이어지고 3 년간의 가뭄과 기근이 끝났다. 회개하는 제단에 기도의 응답이 있고 영적으로 황폐한 땅(심령)에 비가 내린 것이다(18:41-46). 온 백성들이 회개했을 때 많은 구름과 바람을 동반한 큰 비가 쏟아졌다. 엘리야는 손바닥만 한 구름 조각이 수평선에 나타날 때까지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기도한다. 마침내 작은 조각 구름을 보면서 큰 빗소리를 듣는다. 즉시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큰 비 소식을 전달한다. 그 때 야웨의 능력에 사로잡힌 엘리야는 허리를 동이고 갈멜산에서 이스르엘까지 약 50㎞ 정도의 거리를 왕의 수레를 호위하며 내달렸다.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백성들과 왕의 방황하던 마음을 사로잡는 운동이었고 야웨 하나님께 다시금 굴복하도록 초청하는 강력한 영의 시위였다. 엘리야가 지속했던 그 3년 동안의 경건한 자기연마와 영적 집중의 삶이 엘리야를 제단의 불꽃으로 태웠던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바쳐진 번제물이 되고 그 번제물 위에 하나님 께로부터 불의 응답이 내려올 때 백성들은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급진적인 전향을 경험한다. 제물을 태우는 불꽃 속에서 장대비 같은 은총의 역사가 예기된다. 온 백성이 회개하여 자기 삶을 쪼개어서 맛보는 장대비 부흥은 어떤 부흥사도 가져다 줄 수 없는 부흥이요 어떤 영적 지도자도 그 열매를 독점할 수 없는 진정한 하나님의 부흥이다. 한국교회는이런 영적 부흥운동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하나님의 종들이 먼저 하나님의 번제단 위에 불꽃처럼 타올라서 향기로운 제물이 될 때(롬 12:1-2)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자복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릇된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엘리야의 영적 침체(열왕기상 19:1-18)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도 넘지 못하는 장벽 앞에 좌절한다. 좌절당한 사람들은 작고 보잘것없는 힘을 엄청난 세력으로 평가하고 반면에 위대하고 강력한 힘을 보잘것없는 힘으로 평가한다. 엘리야는 갈멜산 대첩으로 엄청난 영적 고양을 맛보고 희망의 달음박질을 하였다(왕상 18:46). 그러나 사마리아로 돌아갔을 때 그는 아합-이세벨-바알 천하가 전혀 몰락하지 않고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보았다. 오히려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을 살해한 혐의로 엘리야 자신은 이세벨의 지명수배를 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드린 기도의 능력으로 불의 응답을 경험하고 비의 응답을 경험한 아합 왕과 백성들은 다시 이세벨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갈멜산 기도대첩 이전과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 현실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는 다시 생명을 위하여 도망치는 망명객이 되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19:1). 이런 위협적인 메시지를 개인 편지 형태로 전달받은 엘리야는 순식간에 영적 기백을 상실하였다. 19:3은 엘리야의 현실인식이 거센 현실정치적 세력, 즉 죽음의 세력 앞에 얼마나 쉽게 휘둘리는지를 잘 보여준다.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 살기 위하여 남쪽 국경 끝자락으로 도망친다. 여기서 ‘보고’라는 동사가 매우 중요하다. “본다”는 것은 “사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행위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세벨의 명령 한 마디가 현실을 지배한다고 믿어 버린 것이다(참조. 마 6:22-24). 한자에 보면 “현실(現實)”의 현(現)자(字)에는 왕(王)변에 볼 견(見)자가 붙어있다. 현실(reality)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달리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현실은 무한입방면체와 같이 역동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장 항구적인 힘인지 지배력인지를 잘 분변하는 것이 정당한 현실인식이다. 우상신 바알과 그의 하수인인 이세벨의 권력은 비실체적이다(unsubstantial). 덧없다. 항구적인 존재기반이 없는 바알신은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위력을 돋보이게 하려고 등장한 악역 조연일 뿐이다.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별거 아닌 것도 엄청나게 커 보이고, 엄청나게 큰 상황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역동적 상대성이 바로 현실인식의 세계다. 신앙은 이런 역동적인 현실인식의 능력이다. 아무리 거대한 힘도 하나님의 힘 앞에 세워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신앙이다(사 40:12-26).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보다 이세벨의 위협적 메시지 한 줄(19:2)을 읽고 그것의 권능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와! 이 말이 성취되겠구나! 이 말은 현실이 되겠구나!”(참조. 민 13:28-33; 14장). 갈멜산에서 포효하던 사자 엘리야가 보기에는 한갓 우상숭배에 빠진 이방여인에 불과하였던 이세벨이, 이제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변신한 엘리야의 눈으로 보니까 갑자기 위세당당한 여신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이세벨의 위세에 눌린 채 지극히 왜곡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도망친다. 그는 유다의 최남단 도시 브엘세바까지 도망쳤고 그것도 불안하여 광야로 하룻길 쯤 더 도망쳤다. 브엘세바는 유다 국경의 남쪽 끝으로서 이세벨이 보낸 저격꾼들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서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여 하루 더 광야로 들어갔다. 놀랍게도 갈멜산의 기도의 대첩 영웅, 여호와의 신으로 가득차서 왕의 수레보다 앞서 달렸던 엘리야가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라는 자살지향적 기도를 드리고 있다(19:4).

 

엘리야처럼 자살을 기도(企圖)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한계상황에 빠진 사람들이다. 절대적인 절망에 빠져 모든 친밀한 인격적 접촉을상실하고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살지향적인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여 영적 붕괴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민망한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엘리야를 어루만지시고, 먹이시고, 재우신다. 영(靈)은 육체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빵과 물, 신체적 접촉, 잠이 영적 자양분이다. 엘리야가 원기를 회복할 때쯤 되어서, 하나님은 정상적인 의사소통에 들어가신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자살지향적 기도를 “하나님! 저는 이세벨-바알이 다스리는 천하에서는 못살겠습니다”라는 현실변혁적 탄식으로 들으신다. 그가 “죽고 싶다”고 한 말을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다”라는 말로 알아들으신 것이다. 엘리야는 이세벨-바알이 지배하는 저 완강한 현실을 뜯어고치던지 내가 죽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의 자살지향적 기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체제전복적 기도로 재해석된다. 엘리야의 자살지향적인 기도 속에서 이 세상을 뒤집어엎어야겠다는 변혁의지를 간파한 하나님은 그를 그냥 자살하려는 하는 허약한 병자로 보지 않고 이세벨-바알 체제에 대해서 거룩한 불만을 가진 자로 인정하신 것이다. 7절에 가면 하나님의 먹이시는 목적이 드러난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어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나님이 주신 음식은 분명히 사명의 길을 달려가기 위한 전투식량이었던 셈이다. “엘리야여, 네가 여기서 멈추어 주저앉을 수는 없다. 네가 달려갈 사명의 길이 아직 남아있다.” 엘리야에게 이제 “너는 하나님의 산, 호렙산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망과 영적 침체의 끝자락에서 죽고 싶다고 아우성치던 엘리야에게 호렙산으로 오르는 길, 즉 영적인 치료와 회복의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천사표 음식과 같은 원기 가득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는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천사표 음식을 먹은 사람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사명의 길, 호렙산으로 올라가야 할 벅찬 과제를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힘과 원기를 빼앗아 간다. 바알과 이세벨 체제를 거부하는 열정 때문에 겪는 굶주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야 한다. 왕의 수레보다 앞서 달려가는 신적 권능으로 우리는 사명의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엘리야는 광야 로뎀 나무 아래서 천사표 음식을 먹고 힘을 내어 모세의 산 호렙산까지 내달렸다.

 

세미한 음성 속에 들려오는 새로운 사명-단기필마의 영웅담화로 끝나지 않고 세대를 넘어 계승되는 엘리야의 부흥운동(열왕기상 19:9-18)

하나님의 일이라고 굳게 믿으며 최선을 다하여 추진하던 바로 그 일이 기대와는 달리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때 찾아온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쉽사리 극복되지 않았다. 독자의 기대와는 달리 호렙산에 당도한 엘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력을 회복한 것이 아니라 다시 폐쇄적인 자의식의 동굴 속으로 칩거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경험(백성들이 야웨 선지자들을 칼로 죽인 것, 그리고 자신만 간신히 살아남은 사실)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이 본 것(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의 언약을 버리고 야웨의 제단을 헐어버린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19:10, 14). 이세벨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주도하는 현실을 피하여 동굴로 숨어들었다. 동굴 안에서 그는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사실 앞에 절대고독과 무력감을 느꼈다.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한 두 번 천사표 음식으로 회복될 수 없는 뿌리깊은 영적 함몰이었다. 이세벨의 포악한 박해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변절이 그의 영적 기백을 결정적으로 꺾어 놓았을 것이다(19:10).

돌이켜 보면 요 며칠 사이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한 판 진검승부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처단하였다고 그 시대의 근본 악이 근절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풀을 베고 나면 잠시 후에 다시 그 풀 벤 자리에서 새 풀이 수북히 자라나듯이,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을 850명이나 무찔렀는데 이제 8,500명, 아니 85,000명의 기세로 다시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보다 더 절망적인 낙담은 백성들의 표변(豹變)에 있다. 18장 36절에서 분명히 “여호와 그가 참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면서 엘리야를 도와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을 도륙하는 데 협조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야웨의 선지자들을 칼로 죽였다고 비난당하고 있다(19:10). 엘리야가 그렇게 멀리까지 도망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변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의 언약을 버리고 야웨의 단을 헐며 칼로 야웨의 선지자들을 죽였던 그 상황은 이세벨의 잔악한 야웨 선지자 박해보다 더 한탄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최선을 다했는데 일이 꼬여가고 상황이 악화되고 현실은 여전히 완강하고, 850명의 악인을 죽였더니 그 자리에 85,000명의 악인이 엄습하는 엄청난 현실에 짓눌릴 때, 하나님은 영적 리엔진니어링(재동력화) 작업에 착수하신다.

 

엘리야는 호렙산 동굴 속에서도 로뎀 나무 아래서 터뜨린 불평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동굴 안에서 적대자들을 제압할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는 다시금 갈멜산의 대첩 환상에 매료된 채 그 잔상효과에 기대고 있었을 것이다. 갈멜산을 진동하였던 그 외경스러운 불과 폭풍과 지진과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달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속이 좁아져 버리고 하나님의 확 트인 인식의 전망을 잃어버린 엘리야를 동굴 밖으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의 시위를 베푸신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서라”(19:11)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위력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본문은 원수대적들을 일시에 굴복시킬 수 있는 그 강력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 가운데 “야웨께서 계시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 신적 권능의 현현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리는 피조물이요 능력일 뿐임이 드러난다.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갈멜산에서처럼 엘리야가 불과 지진과 태풍의 힘으로 바알 우상숭배자들을 척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현상들이다.

오히려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과는 정반대 현상인 세미한 음성 속에 야웨가 현존하심이 밝혀진다. “세미한 음성”(sound of silence)(19:12)은 침묵이라고 보기에는 소리에 가깝고 소리라고 보기에는 침묵에 가깝다. 소리와 침묵의 중간이고 있음과 없음의 중간이고 들림과 안 들림의 중간이라는 특이한 표현이다. 이것은 너무나도 세미한 소리이기에 엘리야가 일순간에 못들을 수도 있는 메시지다.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 후에 들려온 세미한 음성,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19:9에서 동굴에서 엘리야를 불러낼 때 들려온 바로 그 음성이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는 말은 “엘리야여, 네가 어찌하여 동굴의 우상 안에 갇혀 있느냐? 왜 너의 좁은 상상력 속에 붙잡혀 있느냐? 왜 객관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느냐?” 정도의 말이었다. 19:13의 그 동일한 질문은 “네가 어찌하여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과 같은 가시적으로 초자연적인 권능 속에서만 나를 찾느냐?”라는 정도의 말이다. 하나님의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의 시위가 엘리야의 영적 침체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못함이 드러난다. 19:14의 불평은(“....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동굴 안에서 터뜨린 그 불평(19:10)과 동일하다. “하나님 다시 한 번 나를 강철같이 강하게 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의 예언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내가 폭풍을 몰고 가는 바람의 예언자가 되어 다시 한 번 갈멜산의 대첩을 재현하게 만들어 주옵소서”라는 투의 엘리야의 잠재의식적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셈이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시는데, 그 세미한 음성 속에 엘리야의 새로운 사명이 열린다. (19:13). 그 세미한 음성은 엘리야의 하나님 인식방법을 우회적으로 교정해 준다. “더 이상, 바람, 지진, 그리고 불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말라. 더 이상 강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을 몰고오는 예언자로 활동하는 데 만족하지 말라.” 불과 폭풍과 지진은 감각적으로 볼 때에는 엄청난 큰 사건이요 현상이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런 것들 속에 거하지 않고 절대 침묵 속에서 당신을 드러낸다. 오히려 아주 세미한 침묵의 소리 안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을 만난다. 여기서 엘리야는 역사의 주관자는 이세벨과 바알이 아니며 야웨 하나님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엘리야의 영적 침체를 치료하신다. 새로운 사명은 동역자들을 세우는 사명, 그리고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젊은 동역자들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영적 침체는 새로운 사명의 발견으로 치료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19:15-18은 엘리야에게 새롭게 부여된 사명의 길을 제시한다.

 

 

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 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자신이 극복하여야 할 원수들이 갈멜산의 한판 진검승부로 끝날 수 없음을 심각하게 깨달은 엘리야는 그가 성취해야 할 새로운 사명을 듣고서야 영적 기백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성취하여할 사명으로 자신의 열정을 태우며 달려가는 기관차다. 인간은 의미와 사명감과 책임감을 연료로 태우며 달려가는 존재다.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속에서 바알이라는 우상숭배주의자들을 척결하는 일은 자신의 당대에 끝날 일이 아니라 오랜 세대를 두고 완성되어야 할 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인정한 것이다. 그가 받은 새로운 사명은 바알 척결작업을 세대를 넘어 계승할 후계자들을 세우는 사명, 그리고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젊은 동역자들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토록 척결하려고 했던 그 바알 우상숭배자들, 나라의 공평과 정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리는 번영지상주의자들을 친히 척결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종들을 오랫동안 준비해 오고 계셨던 것이다. 이 새롭고 확트인 현실인식 속에서 엘리야는 영적 침체를 극복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 안에서 들려오는 지극히 작은 음성이 새로운 사명을 고취하여 영적 침체를 극복케 하는 데 결정적 지침이 됨을 발견한다. 불과 지진과 폭풍과 같은 소란스러운 환경너머로 들려오는 하나님 음성은 세미하다. 그러나 이 세미한 음성 속에는 불과 지진과 바람의 언어가 들어있다. 님시의 아들 예후와 하사엘, 엘리사가 바로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의 사자들이다. 그들은 바로 바알우상숭배자들을 한칼에 다시 쳐부수어 줄 불과 지진과 바람이 될 것이다. 불과 바람과 지진과 같은 후계자를 세우라고 명령하는 그 하나님의 음성은 지극히 세미하다. 우리가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그 음성이 위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세미하고 차가운 음성 속에 엄청난 불의 언어, 폭풍과 바람의 언어, 지진의 언어가 시한폭탄처럼 내장되어 있다. 엘리야 자신은 불과 바람과 지진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가 안수하여 세웠던 예후와 하사엘과 엘리사는 불과 지진과 바람을 가져왔다. 이들은 모두 바알우상숭배자들을 타파했다. 이렇게 하여 엘리야의 영적 침체는 극복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지금 너만 남았다”고 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시며 예비해두신 세 사람에게 안수를 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동굴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확트인 현실을 그는 보았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침체의 극복이다. 인간의 제한된 시야의 동굴 우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영적침체를 극복하는 길이다. 엘리야는 자신만 응시하다가 탈진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맞추지도 않은 순결한 청년 전사 7천명을 남겨두셨다. 엘리야가 안수하여 세울 세 사람의 후계자들과 7000명의 거룩한 전사들이 바알 척결작업을 계승할 것이며 야웨신앙을 부흥시킬 것이다. 바람의 아들 아람의 왕 하사엘을 예비하셨고, 지진같은 정치혁명으로 권력을 잡을 님시의 아들 예후를 예비하시어 하사엘이 죽이다 남은 바알 잔당들을 죽이도록 하였다. 또다시 예후가 죽이다 남은 사람을 불의 예언자 엘리사가 다 척결할 것이다. 엘리야는 자기가 불, 바람, 지진이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시고, 불의 사나이, 바람의 사나이, 지진의 사나이를 안수만 하게 하셨다. “나만 남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동역자들과 후계자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엘리야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도하는 “현실”을 본 후 다시금 광야로 달려갈 수 있는 사명자가 되었다.

 

 

결론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바알 우상숭배자들과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회의 전반적인 체제에 대한 거룩한 저항운동이자 통전적인 인적, 종교적, 그리고 정치적 척결작업이었다. 번영과 풍요를 공평과 정의의 원칙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이 오늘날의 바알주의자들이다. 목회자들이 번영과 풍요의 이데올로기에 광신적인 숭배를 보일 때 그들은 바알우상숭배주의자들이 된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의 죄악을 향한 심판의 현장인 기근과 가뭄을 온 몸으로 겪어 본 사람이 하나님의 부흥운동을 목마르게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도하는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제단에서 시작되어 세상 속으로 확장되고 세상의 우상숭배 체제의 근본을 허물어뜨리는 체제전복적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단기필마식의 영웅적인 무용담으로 지탱될 수 없고 세대를 넘어 계승되어야 할 운동이다. 한국교회의 제단이 엘리야의 제단처럼 하나님의 불꽃으로 태워지려면 영적 지도자들의 부단한 자기부인과 수도사적인 자기연마와 수련이 요청된다. 하나님의 종들이 제단에서 태워지는 향기로운 번제물이 될 때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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