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책임지시는 구원 출32:1~6

by 【고동엽】 2021. 12. 16.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책임지시는 구원 출32:1~6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종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이 권위로 세우셨다는 것은,

그들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구원을 당신이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도 계속해서 그의 종들을 세우신다.

(아래는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적 신앙관을 잘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책임, 하나님의 권위

 

▲임재(신앙생활) 가운데 우상숭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산에 올라가서 오래 동안 나타나지 않자,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게 된다.

 

이 금송아지 사건은, 앞뒤로 성막에 관한 이야기 속에 샌드위치처럼 위치해서

성막이 설명하는 뜻인 ‘하나님의 임재’와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우상 문제는 치명적인 범죄행위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사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에나 이 우상 문제는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32:4

 

▲성경은 그 책임은 “모세에게 있다”고 말한다.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께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상 숭배 문제’에 초점두기 보다

이 우상문제로 야기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파탄 문제’에 대해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 하는 문제이다.

 

쉽게 적용하면, 성도 개인이 신앙생활에 실패했을 때,

그 궁극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말이다.

 

*‘책임’의 정의 - 잘잘못을 가리고, 처벌을 누가 받을 것인가를 가리는 뜻이 아니라,

그 잘못된 것을 누가 회복할 것인가 까지 포함하여 ‘책임’을 규정한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이 일이 모세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세가 잘못해서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가 아니라

‘모세가 없어서 이 일이 벌어졌다’고 설명한다. (↙)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출32:1

 

그래서 모세를 대신할 우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저들의 불안과 초조를 대신 위로해 줄 우상을, 자기들의 지도자로 세운 것이다.

 

▲지도자의 권위 =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지도자의 위상과 권위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고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지도자는 교회가 세우기 이전에, 하나님이 세우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에 모세를 자기들의 지도자로 거부했다.(↙)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행7:27~28

 

그래서 모세는 광야로 도망가게 된다.

그 후 40년이 흘러서, 모세가 80세에, 광야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다.

 

이런 뜻에서 하나님의 종, 곧 하나님이 세우신 종은 권위적이다.

권위적이란 말뜻은, 모든 것을 제 마음대로 해도 될 만큼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을 세운다’(=권위적) 라는 의미는

그것이 곧 ‘지도자의 권위, 지도자의 위상’인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 대해 가지시는 구원과 사랑에 대하여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시겠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권위적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적 파탄에 대하여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때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겠다는 뜻에서 권위적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이 세우신다=권위적이다=책임진다)

 

모세는 하나님의 세우신 종이고,

하나님이 자기 종을 세우신 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종을 통해 인도하고 구원해 내야할 자기 백성들에 대한

작정과 애정의 발로이며,

그 일을 다 이루기까지 외면하지 않는다는(책임진다는) 뜻이다.★

 

▲세례요한도 권위적= 회복이 목적

예를 들면, 이 하나님의 권위는,

마3장에, 세례 요한의 사명과 종 된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 마3:1~10

 

우리는, 세례 요한이라 하면, 굉장히 과격한 종으로 생각하게 된다. 마3:1~10

당시 문란하고 헤이해진 신앙을 꾸짖고, 다시 견고하게 세우는 사명을 감당했다.

 

우리가 세례 요한을, 그렇게 ‘정죄와 책망에 집중’한 인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본래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이다.

예수님은 정죄,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신 분, 섬기러 오신 분, 자기 목숨을 주시려고 오신 분이시다.

그런 분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는, 그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어있다.

 

이 세례 요한을 예수님은 ‘오리라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마11:14

 

▲엘리야도 권위적= 회복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시고, 회복시키신다)

세례 요한의 이미지는 엘리야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의 악한 아합 왕 때, 모든 나라가 타락했을 때

홀로 하나님의 선지자로 신앙을 지키던 인물이다.

 

그가 갈멜 산에서 수 백 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처단한 것을 보고,

그를 대단히 과격한 이미지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엘리야=세례 요한을 (과격함과) 다르게 평하고 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말4:5~6

 

엘리야(=세례요한)는 누구인가?

그는 부모와 자식의 마음을 돌이켜,

그 깨어진 관계를 회복케 하는 사람이다. 과격한 책망자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권위적 = 백성들을 회복시킴

우리는 이런 ‘회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된다.

 

이 설교의 서두에 던진 질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로 인한 파탄을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였고,

그 답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였다.

 

하나님이 모세, 엘리야, 세례요한, 예수님을 (권위적으로) 보내시는 이유는

하나님과 파탄한 백성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그들을 책임지시겠다는 의도이다.

 

그것은 ‘종의 부재’, ‘지도자의 부재’로 인해 생긴 일이므로

(지도자의 지도력, 능력, 헌신도, 열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니고는 해결이 안 된다는 얘기며,

또한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시고 시작하신 그 일(구원)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도 된다.

 

▲모세(엘리야, 세례요한 등)는 예수님의 모형이었다.

행7:37에 보면, 너희 중에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고 하셨다.

 

모세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모형)였으며,

그 실체(↔그림자, 모형)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날 것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는 중재자로,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책임지시는 구원자로 오셨다.

그렇다면 모세도 마찬가지다! 엘리야 등 다른 종들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권적으로 회복, 구원하셨듯이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 백성들을 회복, 구원시킨다.

 

 

◑구원이란 회복이며, 회복됨을 즐거워함 이다.

 

▲구원이란 -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니셔티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 하나님에 대해 이해도, 소원도 없을 때

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 하나님이 구원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 하나님과 화목(관계 회복),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5:11

 

롬 5장은,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하나님과 화목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롬5:10~11

 

죄란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고

구원이란 그 분리된 관계가 다시 화목케 된 것이다.

 

구원이란,

우리가 윤리 도덕적 문제가 완벽히 고쳐진 게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친 것은

너희가 도덕적으로 문란하다는 그런 도덕적인 회복을 촉구하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뜻이다.

 

세례요한이 고함지르고 목청을 높인 것은

그 목적이 ‘회복’을 위한 것이지, ‘심판, 정죄’하자고 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논할 때 ‘죄로부터 구원’이란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회복이다.

그래서 즐거워 하느니라 한다. 롬5:11

 

구원이란 무엇이냐?

*죄로부터 영생을 얻은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관계로부터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회복되었으니까 하나님과 즐겁게 살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인생을 살자! 라는 것이다.

 

▲봉사하기 전에, 즐거움(=관계회복, 유지)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죽어도 천국 갈 것이 확보되었으니까

남은 생을 주를 위해 일하자고 한다.

 

일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일(봉사)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의 기쁨’을 놓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원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일(구원, 화목)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관계를 회복하면 나타나는 인격적 덕목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협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3:12~14

 

위 성경이 우리 신자들에게 신앙적으로 명령하는 것들

즉,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참음, 용납, 용서, 사랑

 

이런 것들은 다 ‘부요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덕목들이다.

강한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

가진 자만이 나눠 줄 수 있다.

약자는 용서할 수 없고, 가난하면 나눠줄 수 없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너희가 밑져라, 양보해라’고 명령하는 것은

‘너희가 가진 것이 너무 풍부하고 많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하나님과 생명이 접목된 우리는 그 모든 부요함을 수액으로 공급받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은 또한 우리를 결코 놓지 않으신다.

(일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즐거워해야 이런 덕목들이 생긴다.)

 

▲실제로 잘 안 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편드신다.

성경이 ‘사랑하라’고 명하는데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 해보면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

 

사랑이라는 수준이 너무 높은데 비해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은

커트라인(최저치)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수준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저는 ‘그래도 하나님이 편드시니까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고 권면한다.

 

신앙생활을 해 보면,

신자는 스스로 면목이 없을 때가 많다.

신자답지 못할 때도 많고, 신자로서 자랑할만한 증거들도 보통은 드물다.

그 때 성경의 누가 고상한 도덕적 기준들을 들이대면, 신자는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편드십니다.

당신의 어려움과 실패와 못남에 대하여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이렇게 권면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막 힘을 낸다.

 

이것이 없다면 = 만약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런 믿음의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이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는 사실이 거기에 녹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창피를 무릅쓰고 뻔뻔하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라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

 

누가 “네가 예수 믿는 사람이냐?” 하고 정색을 하며 노려보더라도

“너는 몰라도 돼!, 이것은 신앙의 비밀이야!” 하며 말할 수 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요?

하나님이 모세, 엘리야, 다니엘, 세례요한, 베드로를 세우시듯이

아니 예수님을 보내셔 그렇게 하셨듯이

지금도 우리를 편들고 계신다.

하나님이 권위적으로 우리 구원을 시작하셨고, 또한 끝까지 책임지신다.(주권)

 

제가 목사가 되어서 지금 사역하고 있는 것도

제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편드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가 신앙생활의 근거를 자기 자신의 의에 둘 때

아무리 성자라도, 그는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우리 구원과 신앙생활(하나님과의 관계유지)의 근거를

하나님의 손에 둘 때, 그 분의 전능하진 작정과 주도권(이니셔티브)에 둘 때

비록 우리가 부족하더라도

그것은 안정적이며 견고하다.

(이것은 신앙윤리, 의지적 결단을 부정하는 뜻은 아니다.

결단해야 하지만, 그 근거는 하나님의 권위, 책임, ‘하나님의 의’ 롬1:17 에 있다)

 

<인터넷 설교 발췌, 정리 07.04.15. *원제목: 출애굽기 39회, 출32:1~6,

 

 

[주제별 분류] 믿음론 http://blog.daum.net/bible3/8483420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박지숙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