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사람들
요 4:13-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
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본문을 보면 생수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중의 물은 생수입니다. 생수는 맛이 없지만 그것이 생수의 생명입니다. 물이 짜릿하고 사이다처럼 독특한 맛과 향이 있다면 그것은 생수가 아닙니다. 생수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마셔온 생명과 같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무색무취의 생명수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음료를 마시다가 이제야 사람들이 이 생수의 진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갈증을 풀 수 있습니다.
I
성경 복음서를 보면 율법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율법사는 다 가진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조건은 다 이룩한 사람입니다. 명예도 이름도 존경도 재산도 위치도 장래도 촉망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어딘지 마음 한곳은 허기졌고 배고픔이 있었고 기쁨이 없고 만족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허전함과 공허함을 채울 길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신분이 국회의원입니다. 세상 적으로 말하자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재산가입니다. 사회지도층입니다. 그만큼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러면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공허합니다. 허전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만족함과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가지고 누리고 소유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채워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인간이 지니는 값이고 존귀한 점입니다.
그것은 삭개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상당한 재산가였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지위도 얻었습니다.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도 마음이 공허했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에 충성해서 벼슬도 얻었고 그런대로 입신에 성공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시원하게 해갈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목적을 이루었으면 마음이 채워져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 명이나 됩니다. 돈도 있습니다. 육망을 마음껏 채웠을 것입니다. 환락과 부귀와 유희를 마음껏 즐겼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더 갈증이 느껴오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이 이 네 사람이 느꼈던 한 가지 공통된 점입니다.
여기 나오는 네 사람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상당한 메시지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 사람들이 누린 삶을 이루어 보겠다고 지금 몸부림을 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목적을 지향하고 지금 안간힘을 다하고 가져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안 되니까 속이기도 하고 뺏어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합니다. 모두 길을 잘못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상의 4명이 이미 그것은 길이 아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길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길은 근본이 아니고 목적도 아니라고 보여주었습니다. 자기들도 다 해 보니 그것이 아니더라고 말합니다. 다 가져보니 갈증만 더 심하더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사람들은 그 길을 가 보겠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단을 강구하고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고달프고 갈증이 더 심해지고 허기짐은 더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밋밋한 물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더 자극되고 짜릿한 콜라를 마시고 사이다를 마십니다. 탄산음료를 마실 때 목과 마음이 얼마나 짜릿합니까. 마시는 것을 보는 사람까지도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마시다 보니까 이제는 그것으로도 안 됩니다. 갈증이 더 심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짜릿한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더 도가 강한 술이 만들어지고 폭탄주가 나오고 마약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다고 갈증이 해갈 되는 것입니까. 그럴수록 더 갈증은 심화되고 목마름은 더 깊어져 갑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비명을 지르고 방법이 없어서 안달하고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안 되니까 사람들이 이즈음에 와서는 자연으로 돌아가자 하고 자연식품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은 수단이나 방법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순리대로 살아가자는 말입니다. 그 순리가 인위적으로 살지 말고 하늘의 뜻과 하늘이 준 그대로를 가지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말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그 말입니다. 다른 곳을 다 돌아다녀 보아도 별 수 없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 말입니다. 그것이 길입니다. 그것이 방법입니다. 사람들이 때가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이제 그 길을 찾은 것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그 길을 찾아서 가야 합니다. 그래야 갈증이 해갈 될 수 있습니다.
II
성경에 나오는 율법사는 다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누리고 소유하고 사람들이 부러움을 살 정도로 완벽하게 입신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벅차고 감사하고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는 늘 허기짐이 서려 있습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갈증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찾아갑니다. 예수님께 찾아가서 그는 아주 진지한 모습으로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질문처럼 진지한 질문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 사람이 지금 영생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이것은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다 얻은 사람입니다. 그도 누리고 소유하고 높은 지위까지 올라갔습니다.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만족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개운치가 않습니다. 알고 보니 지금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길이 아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가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내가 중생을 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도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동족을 괴롭혀가며 악착같이 모았습니다. 지위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갈수록 더 갈증만 심해져 갑니다. 그래서 그도 참을 수 없어서 예수를 찾아갑니다. 예수를 만나야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체면불구하고 나무 위로 올라가 먼발치에서 예수를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삭개오의 이 갈등과 허기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 명씩이나 됩니다. 욕망을 채우고 채워도 갈증만 더 심해져 갑니다. 그 여인도 그런 방식으로 욕망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역시 예수를 만납니다. 그리고 “나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십시오”하고 간구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길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길을 잃고 보니까 갈증이 심화되고 불화가 증폭되고 불만족이 깊어져 갔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길을 찾아 예수께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이렇게 길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내게 금과 은은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모든 문제의 열쇠는 예수라는 말입니다. 결국은 예수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에는 꿈에서 깨어나면 예수를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 시대를 고쳐 보겠다고 별 방법을 다 구사해 보고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그늘진 사람들을 고쳐보겠다고 사회복지에 상당히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좀 아는 사람들은 고상하게 살아보려고 자원봉사도 해 보고 자선사업도 하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설픈 일인지 모릅니다. 아주 임시변통이고 임시방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악화된 세상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악화된 이 세상 사람들이 잘대로 변화 받지 않습니다.
III
어떤 분이 생활도 넉넉하고 세상을 향해서 무슨 일인가 해보자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아를 양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아를 지성으로 보살폈습니다. 씻기고 불쌍히 여기고 잘 먹이고 따뜻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딴에는 열심히 보살핀다고 정성껏 했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그러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 자라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가 자꾸만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가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그리고 물건에 손을 댑니다. 타일러도 보고 호소도 해 보고 혼도 냈지만 그때뿐이고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해도 해도 해결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어 아이를 고아원으로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공허했겠습니까. 아마 마음으로 무엇인가 해 보려고 했던 자신의 무력감과 인간의 악화된 마음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고 탄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버려진 노인을 모셨습니다. 모셔다 어머니 같이 보살피고 편안하게 입고 마시고 걱정 없이 잠자고 살아가도록 보살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오늘 같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은 자기 부모를 버렸는데 남들이 그 버려진 노모를 모셔다 공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주는 용돈을 모아 두서너 달 만에 찾아오는 자신을 버린 자식에게 다 주었습니다. 이 아들은 두서너 달마다 수금하러 어머니를 철저하게 찾아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까지도 좋습니다.
그러다 그 할머니가 병들었습니다. 아들에게 용돈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와서 어머니를 잘못 보살펴서 병들었다고 보상하라고 행패를 부리고 떼를 씁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에 이런 사람들을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고칩니까. 이런 사람들을 돈으로 고치고 용돈으로 고쳐집니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옷을 준다고 이 화인 맞은 이 마음을 고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정성을 다해서 보살핀 그 마음이 받은 상처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어느 술꾼이 길바닥에 쓸어져 있습니다. 지나가던 자선 사업하는 목사님이 데려다 정성껏 간호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은 아주 만족한 마음과 보람과 기쁨으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수소문해서 찾아주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그런데 얼마나 후 그 부인이 찾아와서 하는 날이 “당신이 내 남편을 죽였습니다”하고 항의 하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당신의 남편을 보살펴서 원기를 회복시켜 보냈는데 사람을 죽였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남편이 병들었을 때는 선량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해지니까 나가서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고 타락해서 병이 재발되어 엊그제 길바닥에 쓸어져 죽었습니다, 당신이 죽인 것 아닙니까“ 하고 항의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자선사업도 많고 불우이웃돕기도 많고 나눔도 많고 적선도 많고 선행도 많지만 그것들은 근본적인 치유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근본이 바뀌어야지 일시적으로 잠자리를 주고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준다고 그 영혼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고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까.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준다고 다 고쳐지고 바로 잡히고 치유된다면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은 복지사업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복지사업을 목적삼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근본적인 치유방법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가 없는 복지사업, 적선, 도움, 자선 그것이 무슨 힘을 발휘합니까. 그러니까 나는 정성껏 보살폈는데도 상대방은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변화는 예수가 하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이 땅의 복지사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수고와 노력에 비해서 세상을 치유하는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 목이 마를 때 콜라나 사이다를 마셔 보십시오. 잠시는 시원하지만 조금만 있으면 더 깊은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근본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갔고 삭게오가 예수님을 찾아갔고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에게만이 길이 있고 방법이 있고 거기에 가야만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늦게라도 깨달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세상은 마음이 변해야 변화됩니다.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변화가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임시적 방법으로 세상이 변하고 사람이 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쉽겠습니까. 사람은 고향을 떠나면 고독하고 갈증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근본적인 고향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예수입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돌아가고 예수께로 돌아가야 안정을 느끼고 편안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내게로 와서 이 물을 마셔라, 이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게 금과 은은 없으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이것이 방법이고 길입니다. 예수에게 돌아갈 때 모든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도, 율법사도, 삭개오도, 사마리아 여인도 결국 예수께 찾아갔습니다. 그때 그들의 고민이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심각하게 도전되어 오던 갈증도 모두 해갈했습니다. 그렇게 해결 받은 여인은 그냥 있지 않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그 사람을 와서 보라 이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를 떠나면 모든 인간은 이렇게 목이 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입니다. 근본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할 일 가운데 가장 큰 일은 그 예수를 알리는 일입니다. 그 예수를 전해주는 일입니다. 모두 예수께로 돌아오도록 기도하는 일입니다. 내 동포가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고 내 형제와 부모와 이웃이 돌아오도록 기도할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리고 더 큰 기도는 길을 잃고 있는 나 자신이 빨리 이 길을 찾는 일입니다. 그래야 나도 더 이상 허기진 채 살아가지 않고 문제들을 해결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께로 돌아가는 일만이 길이고 목적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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