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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찌우는 5대 자산

by 【고동엽】 2021. 12. 16.

인생을 살찌우는 5대 자산

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 주일설교(100404)

 

< 죽음을 정복하신 주님 >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오래 살려고 좋다는 것은 다 잡아먹는다. 개구리가 좋다니까 겨울잠 자는 개구리를 마구 잡고, 언제는 까마귀가 몸에 좋다니까 까마귀 한 마리가 몇 십만 원에 팔렸다. 차라리 그 노력으로 욕심과 미움을 조금만 버려도 훨씬 몸에 좋을 것이다. 그처럼 사람들은 오래 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죽는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간의 모든 성공은 결국 허무한 것이다.

 

어떻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가? 예수님의 부활이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래서 부활은 소중한 진리이다. 어떤 사람은 부활의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한다. 아직 죽음을 잘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음을 실감할 때 철이 든다. 장례식이 있으면 힘써 참석하라.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철이 든다. 사람은 가끔 죽음의 냄새를 맡아야 겸손을 잃지 않고 정신을 차린다. 죽음은 사실 두려운 것이다. 특히 자신에게 그 문제가 닥치면 너무 큰 문제이다. 그런데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어도 다시 산다는 소망을 주셨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죽음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어떤 사람이 늦게 외동딸을 얻었다. 어느 날, 그 딸아이가 봉고차에 치어 10미터나 끌려가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딸아이의 시체를 안은 그에게 부활은 얼마나 소중한 진리인가? 거짓말이라도 부활을 믿고 싶을 텐데 그것이 정말이라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본문 57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했는데, 그런 깊은 감사가 있을 것이다.

 

주님의 부활이 진짜로 믿어지고 감사하게 느껴질 때 그 믿음은 철든 믿음이 된다. 그때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고, 성도의 죽음은 최상의 행복이 된다. 그런 부활의 믿음이 없다면 모든 삶이 허무해진다. 일전에 성철 스님은 돌아가실 때 “나는 무간지옥으로 간다.”고 했다. 그 외침도 부활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성철 스님 서재에는 여러 권의 성경이 있었고, 성경도 수십 번 읽었다고 한다. 인간적으로는 한 시대의 큰 스승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교훈의 의미를 살펴야 한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많은 수양과 배움이 얼마나 허무한가? 로마 시대에 씨세로란 최대의 논객이 있었다. 그는 모든 논쟁에서는 다 이겼다. 그러나 딸의 무덤 앞에서는 인생의 허무함에 질식할 것 같아 “나는 졌다!”고 했다. 죽음은 어떤 인간도 무너뜨린다. 그 죽음을 주님이 정복했다.

 

< 인생을 살찌우는 5대 자산 >

 

주님의 부활에 감사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으라. 더 나아가 현재의 삶에서 부활의 삶을 살라. 삶에서 꼭 부활시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 시간에 5가지만 살펴보겠는데, 이 5가지는 인생을 살찌우는 중요한 영적 자산이다.

 

1. 바른 인간성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없는 인생은 우유부단한 인생이다. 중심이 없으면 클 수가 없고 결단이 없으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진리와 성공은 우유부단함을 제일 싫어한다. 나중에 손해를 보고 죽는 한이 있어도 선한 감동이 생기면 일단 결단하고 나가라. 특히 결단할 때는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라. 그래야 인간성이 부활한다.

 

어느 교회에 성향이 전혀 다른 철수 성도와 민수 성도가 있었다. 철수 성도는 목회자에게 요구가 많았다. “왜 목회자가 사랑도 없어! 왜 예수님처럼 살지 않아!” 반대로 민수 성도는 목회자를 많이 이해했다. “리더가 많은 사람을 이끌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두세 명 되는 자녀들 잘 인도하는 것도 힘든데 정말 힘들 거야!”

 

어느 날 둘이 모두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다. 그때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철수는 평신도 때 항상 목회자한테 “왜 예수님처럼 살지 않아!”라고 말했기에 예수님처럼 목회할 것 같은데 또 자기중심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평신도가 조금만 불평해도 “성도들이 못됐어! 염소야!”라고 성도만 탓했다. 왜 그런가? 모든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옹졸하고 부끄러운 모습인가?

 

반대로 평신도 때 목회자를 이해하려고 했던 민수는 목회자가 되면 오히려 평신도를 더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인내하면서 평신도를 품어주었다. “평신도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내가 참고 노력하자!” 결국 “왜 예수님처럼 안 살아!”라고 하는 사람이 더 예수님처럼 살지 않고, “믿는 사람도 부족한 점이 많지!”라고 하는 분이 더 예수님처럼 산다. 진정한 은혜는 민수형 인간성의 옷을 입을 때 주어진다.

 

이런 경우도 있다. 두 명의 개척 교회 목사가 있었다. 십 년 목회 했는데 교회가 어려웠다. 그러자 철수 목사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을 큰 교회 탓으로 여기고 큰 교회만 보면 “저 교회는 선교도 안 하고 남의 교인을 빼앗아간다!”고 욕했다. 반대로 민수 목사는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내일을 준비하면서 “큰 교회도 공헌하는 일이 많지!”하고 품어주었다. 작은 교회 목사지만 마음은 컸다.

 

그 후, 철수 목사와 민수 목사가 모두 축복을 받았다. 신도시에 들어가 교회가 크게 부흥하면서 10년 만에 대교회가 되었다. 그러자 주변의 개척교회로부터 이런 얘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저 교회는 자기만 생각해! 선교도 안 하고 이웃 교회들은 생각하지 않아!”

 

예전에 철수 목사가 하던 소리다. 그러면 옛날에 그런 소리를 자주 했던 철수 목사는 더 잘 이해할 것 같은데 더 이해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그럼 작은 교회는 잘 하나? 옹졸한 자들이야!” 반면에 민수 목사는 “작은 교회들의 심정을 이해해!”하고 작은 교회를 배려하는 조치를 취한다. 누가 바른 목자인가? 이제 철수형 인간이 아닌 민수형 인간을 꿈꾸며 자기를 성찰하고 남을 배려하라.

 

이런 블랙 유머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소방관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소방관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시각장애인이다. 눈에 뵈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짜 무서운 사람이 있다. 바로 자기의 허물은 못 보고 남만 칼질하는 사람이다. 이제 자기의 부족함을 보는 안목을 부활시키라. 그 안목이 일종의 영안이고, 그런 영안이 있을 때 인간성도 부활한다.

 

2. 바른 가치관

 

성공이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은 자기의 욕구를 채울 능력이 있으면 성공했다고 한다. 또한 일등을 하고, 명예를 얻고, 돈을 많이 벌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 진짜 성공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자기의 나은 삶뿐만 아니라 타인의 나은 삶을 위해서도 기여해야 성공한 것이다. 남의 필요를 외면한 성공은 결코 성공이 아니다.

 

항상 남을 생각하며 살라. 요새 사람들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서 마음이 각박하고 황폐해져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 영어에서 먼저 가라고 양보할 때는 “go ahead(앞서 가세요).”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go ahead.”라는 말보다 “go away(저리로 가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제 “go away(저리로 가라).”보다 “go ahead(앞서 가세요).”를 즐겨 쓰라. 남을 살피지 않는 긍정주의와 성공주의는 결국 실패를 부른다.

 

교인 중에도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섬기는 교인’이고, 또 하나는 ‘섬김 받는 교인’이다. 교회생활의 진정한 성공은 ‘섬김 받는 교인’이 ‘섬겨주는 교인’으로 변하는 것이다. 결국 주는 삶이 성공이다. 이제 받기만 하려는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주려고 하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라. 그래야 삶이 변화된다.

 

어떤 사람은 자기 변화가 없는 것을 교회 탓이나 설교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자기 변화가 없는 것은 교회나 설교 때문만은 아니다. 왜 똑같은 교회에서 똑같은 설교를 듣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아 삶이 변하고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그것은 마음 밭과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기도해도 삶의 변화가 없다. 왜 그런가? 세상적인 가치관과 욕심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심을 죽이고 성경적인 가치관을 따라 살면 이런 소리를 듣는다. “저 사람 예수 믿더니 확실히 변했어! 어떻게 저렇게 겸손할까? 예수 믿고 정말 멋쟁이가 됐어!”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가장 성공한 사람이다. 그처럼 욕심을 죽이고 선한 가치관을 부활시켜서 질적인 삶의 변화를 이루라.

 

3. 비전과 희망

 

성도는 최종 승리가 보장된 자이다. 그러므로 힘들어도 패배의식에서 일어서서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나가라. 비전이 뚜렷하면 낙심과 불평은 줄고 결국 승리하지만 비전이 희미하면 낙심과 불평은 늘고 결국 패배한다. 다윗은 찬란한 비전이 있을 때 엄청난 골리앗도 이겼지만 비전을 잃고 나태해지자 한 여인도 이길 수 없어 간음죄를 짓고 큰 어려움에 빠졌다.

 

잃어버린 비전을 되찾으라. 그리고 비전을 가졌으면 그 비전을 이루려고 정당한 대가를 치르려고 하라. 비전을 이루려면 안락한 삶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위대한 인물들은 비전을 위해 자기의 안락함을 포기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포기의 경험이 없이 비전을 이룬 사람은 없고, 어떤 비전도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비전을 이루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대가를 치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선택이다. 선택은 어떤 것의 포기를 전제로 하기에 늘 어렵다. 사람들은 갈림길을 만나면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더 나은 듯한 길을 택하지만 그 길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험과 지식 이전에 주님의 뜻을 앞세워 선택하라.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면 최종적인 의미에서 절망과 패배는 없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 가장 안전하고 복된 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내 뜻에 집착하면 염려만 커지지만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 염려가 사라진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품고 낙심과 염려와 두려움의 자리에서 일어서라. 사람은 일어설 때 가장 아름답다. 하늘의 뜻을 읽고 일어선 사람이 진짜 복된 사람이고, 그렇게 일어선 사람이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힘이 정의이고 넓은 길이 복된 길이라는 정신적인 압제에서 영적 독립선언을 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쓰라. 성도에게는 수시로 “자신의 욕망을 따를 것인가? 주님의 비전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로 갈등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 주님의 비전을 따르고 좁은 문을 선택하고 개척자의 길을 선택하라. 바로 그때부터 예수 믿고 인물 되는 복된 역사가 펼쳐진다.

 

1800년대 중반에 자신의 욕망보다 주님의 뜻을 따랐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유명한 은행가였다. 그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나폴레옹 대제를 만나 불란서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을 이끌어내서 거대한 부의 주인공이 되려고 했다. 그 꿈을 가지고 파리로 갔지만 나폴레옹이 바로 전에 전쟁터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려고 전쟁터로 갔다가 불란서와 오스트리아의 치열한 전투를 목격했다.

 

전투가 끝나자 그의 눈앞에는 지옥이 펼쳐졌다. 그는 양군의 즐비한 시체와 부상자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마을사람들과 힘을 합쳐 부상병들을 치료했다. 그 후 나폴레옹을 만나러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기도하고 싶었다. 그때 마음속에 나폴레옹과의 협상을 통해 엄청난 부를 획득하려는 꿈 대신에 새로운 꿈이 만들어졌다. 그 꿈은 인류 평화의 꿈이었다. 그가 바로 국제 적십자 운동을 일으킨 앙리 뒤낭이다.

 

살면서 한 가지 꿈이 깨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그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새로운 꿈이 생긴다. 결국 성도의 사전에는 실패가 없다. 그러므로 어제의 사라진 꿈 때문에 내일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 실패를 통해 내 꿈이 아닌 하나님의 꿈을 붙잡으면 그때부터 인생은 주님의 꿈을 이루는 멋진 도구가 된다. 이제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꿈을 내 꿈으로 만들라. 그처럼 꿈을 부활시킬 때 인생의 내일도 찬란하게 된다.

 

4. 넘치는 기쁨

 

살다 보면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가 많다. 그런데 성도는 신기하게도 그 상처가 금방 아문다. 주님이 그 상한 심령을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이싱하게도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 상처 입으신 주님이 내 상처를 잘 아신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급속한 치유가 임한다. 가재는 게 편이듯이 상처 입으신 주님은 상처 입은 사람의 편이다. 그 사실만 깊이 인식해도 기쁨과 자신감이 회복된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큰 수치를 겪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옷이 벗겨져 팬티만 입은 채 선생님으로부터 맞았다. 그때부터 대중공포증이 생겼다. 그래서 대중 앞에서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부터 그 공포증이 점차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은 설교자까지 되었다. 신기하게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어떤 불쾌한 감정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나온다. 더 나아가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기쁨과 폭소까지 나온다.

 

성도는 외롭게 길을 걸을 때도 실제로는 혼자가 아니다. 그때 주님이 함께 걸어주신다. 그 사실을 생각해도 기쁨과 폭소가 나온다. 이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 힘든 일 앞에서 폭소를 터뜨리라. 죽어서 부활한 다음에 폭소를 터뜨리지 말고 죽음을 눈앞에 둔 현실 속에서 폭소를 터뜨리라. 또한 부활절에만 폭소를 터뜨리지 말고 매일의 삶에서 폭소를 터뜨리며 살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은 ‘웃음꽃’이다. 이제 웃음꽃을 피우며 살라. 부활신앙을 가지고 죽음 앞에서 폭소를 터뜨린 사람들에게는 어떤 문제도 폭소의 대상이 된다. 그때 가정문제, 자녀문제, 사업문제도 다 재미있는 일이 된다. 재미있게 생각하면 진짜로 재미있어진다. 그처럼 죽음에 대해 폭소를 터뜨리면 삶의 모든 순간이 재미있게 되고 감동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신앙이 얼마나 복된 신앙인가?

 

어느 날, 한 화가가 무서운 풍랑으로 조난당할 위험에 처한 배를 그렸다. 그런데 배 안의 사람들이 아주 평안했다. 그 배의 선장이 예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배의 선장이 예수님이라면 그저 평안한 모습을 그리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더 나아가 깔깔대고 기쁘게 웃는 모습까지 그려내야 한다. 그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시련과 고난조차 재미있고 기쁜 일로 승화시킬 때 그를 통해서 기쁜 일도 많이 생기고 더욱 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5. 의지적 사랑

 

오늘날 많은 고민과 문제는 대부분 사랑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이다. 결국 인생의 가장 큰 장애는 ‘큰 시련’과 ‘큰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부족’이다. 가정에서도 큰 시련을 당하면 오히려 부부간에 마음이 하나가 된다. 그러나 “당신은 매사에 왜 그래?”라는 사랑이 없는 말 한 마디가 부부관계를 망친다.

 

인간관계의 고민을 해결하는 제일의 길은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첫 사랑을 많이 그리워한다. 그러나 첫 사랑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첫 사랑은 달콤하고 감정적이지만 대개 미성숙한 사랑이기에 첫 사랑만 좋아하면 인생의 쓴 맛을 자주 본다. 첫 사랑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단점도 의지적으로 덮어주는 성숙한 사랑이다.

 

어느 날, 한 남편이 연애시절의 첫 사랑을 회복하자고 아내에게 꽃을 사주었다. 그때 아내가 “평소에 잘하세요.”라고 핀잔을 주어서 오히려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꽃을 사주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숙한 의지적 사랑을 주는 것이다. 첫 사랑의 기분과 감정만 생각하면 상처를 주고받기 딱 좋다. 중요한 것은 부족한 점을 덮어줄 수 있는 의지적인 참 사랑의 회복이다.

 

이제 육적인 사랑이나 감정적 첫 사랑이 아닌 단점을 덮어주는 의지적인 사랑을 회복시키라. 그리고 선교하는 마음을 가지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의 꼴을 많이 나눠주라. 그때 삶은 더 아름답게 보이고, 입술에서는 찬송이 넘치고, 말과 표정도 밝아지고, 범사에 감사하게 되면서 그 삶에 주님의 은혜와 축복도 넘치게 된다.

 

< 주는 삶을 꿈꾸고 실천하라 >

 

요새 경제가 많이 어렵다. 며칠 전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이 전한 말에 의하면 지금 미국은 너무 살기 힘들다고 한다. 집값이 떨어지면서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있다. 선교사님이 선교보고를 다니면서 방문한 애틀랜타, 샌디에고, LA, 뉴욕, 시카고 등의 여러 도시의 사정이 한결같이 어렵다고 한다. 주정부 재정이 없으니까 속도위반 티켓을 1100불짜리까지 끊고, 주차위반 티켓 값이 100불까지 올라갔다. 또한 현재의 재정난을 타개하려면 세율을 60%까지 올려야 된다고 한다.

 

나와 가깝게 지내는 어떤 목사님은 유능한 부흥사로 한국에도 자주 방문해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최근에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분은 약 4년 전에 4만 불을 다운페이하고 40만 불짜리 집을 샀다. 미국 생활 25년 만에 처음 집을 산 것입니다. 그 집이 그 뒤 2년 만에 1.5배로 올랐다. 너무 행복해하면서 한국에 올 때마다 내게 잔소리를 했다. “이 목사님! 어려워도 반드시 집을 사세요. 은퇴 후에 어떻게 살래요? 작은 집이라도 있어야지요. <저질러야만> 집을 사지 <저축해서는> 집을 못 사요.”

 

나는 그분이 왜 그렇게 잔소리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지나가는 잔소리가 아닌 진정한 애정의 발로였다. 그분은 내가 선교사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니까 내가 상당히 잘 사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2006년에 우리 집에 와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 다음부터 동료 목사들에게 “이 목사가 그렇게 사는 줄 몰랐다.”고 말하고 다녔고, 나를 만나면 귀가 따가울 정도로 “저지르라!”는 얘기를 했다.

 

나는 그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웃으며 넘겼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에 와도 그분이 그런 소리를 안 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를 이번에 임병철 선교사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분의 집이 매달 모기지(mortgage)를 내지 못해 넘어간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급히 그분에게 전화하자 사실이었다. 처음 2년 동안은 40만 불짜리 집이 60만 불까지 갔지만 그 다음에 순식간에 30만 불로 떨어지면서 더 이상 회복의 가망성이 없자 매달 3500불의 모기지 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은행에 집을 넘긴 것이다.

 

결국 집값 파동 때문에 유능한 부흥사까지 신용불량자가 된 것이다. 그 얘기를 하면서 그 목사님이 말했다. “이 목사님! 이제 빚으로는 집을 사지 마세요. 집을 사려고 할 때는 <저축해서> 사되 <저질러서> 사지는 마세요.”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 선교사들의 형편도 아주 어렵다.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은 채소를 먹지 못해서 화장실 작업이 힘드니까 채소 먹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채소를 몽골 현지로 공수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처럼 주위에는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멋지게 주는 삶을 꿈꾸고 실천하라. 그때 세상은 밝아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혜 체험도 생생하게 될 것이고, 이 땅에서는 축복받고, 천국상급도 커질 것이다. 항상 부활신앙으로 무장해서 세상을 맑게 하는 해맑은 영혼들이 되라.


ⓒ 설교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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