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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혼자 둘 때 / 요한복음 16 : 25∼33

by 【고동엽】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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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혼자 둘 때 설교자 이재철

말씀: 요한복음 16 : 25∼33


 

약 20년전에 `속독법 강좌'가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빠를 속' 자에 `읽을 독' 자를 쓰는 속독이란 문자 그대로 빠르게 글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빠른 속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글을 읽을 때에는 대게 한자 한자씩, 혹은 한 단어씩 읽어 가기 마련입니다. 좀더 빠르게 읽는 자는 한 줄씩도 읽을 수 있지만 그러나 속독이란 한 글자나 한 단어, 혹은 한 행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책의 오른쪽 위에서 대각선으로 왼쪽 아래로, 그리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대각선으로, 두 번을 훑는 것으로 2 페이지의 글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속독입니다. 따라서 300 페이지의 책을 읽는데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속독론자의 주장입니다. 20년전 사업을 하고 있던 저는 속독 강사를 초빙하여 전 직원으로 하여금 속독훈련을 받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나도 그 훈련에 빠짐없이 참석하였습니다. 책 한 페이지를 2초내에 읽을 수 있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속독론자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집니다. 그 경우 그 사람의 눈썹 모양이 어떠했는지, 코끝이 어떤 형태이었던지, 치아의 색깔은 어떠했는지, 뺨에 점은 몇 개나 있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처럼 얼굴의 한 부위 부위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 그 사람을 다시 보는 순간 우리는 그를 알아보게 됩니다. 입술모양이 그 사람과 맞는지, 눈동자의 색깔이 분명 그 사람인지 우리는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냥 척 보는 순간에 그를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분적인 것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전체는 어김없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비록 그 사람을 잠시 보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얼굴전체 윤곽이 우리의 뇌 속에 입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상대의 이목구비를 부분적으로는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도,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아! 저 사람이 그 사람이구나, 우리의 뇌는 즉시 그를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속독이란 책을 읽는다는 것이라기보다도, 매 페이지를 좌우 대각선으로 두번 훑으면서 뇌 속에 입력시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촬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에 대한 속독이 끝났을 때, 세부적인 내용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전체적인 윤곽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정보홍수 시대를 살면서 제한된 시간 내에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속독은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속독론자들은 주장합니다.

 

적어도 속독 그 자체의 논리로써는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주에 걸친 속독훈련이 끝난 뒤에 제가 얻은 한가지 중요한 결론이 있다면, 살다보면 속독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든 책은 속독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 채 책의 윤곽만 안다는 것은, 그 책을 아니 읽음만 못합니다. 차라리 읽지 않으면 오해는 없겠지만, 정확한 내용을 모른 채 20여분만에 한 권의 책을 속독으로 끝낸다는 것은, 반드시 그 책의 내용을 왜곡 되이 이해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속독이란 오히려 그 책과 동떨어지게 만드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우리가 잠시 본 사람의 얼굴 윤곽을 기억하고, 그 사람을 다시 알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겉모습일 뿐, 속마음이나 인격, 성품을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얼굴 윤곽을 아는 것으로 정말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착각한다면, 그 사람을 수백번 만나도 바로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빠를 `속', 속히 해치우려는 일치고 해롭지 않은 일이 드뭅니다. 속도란 대단히 편리하기도 하고 그 자체가 쾌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동 장치 없는 속도, 브레이크 없는 스피드란 흉기요, 죽음일 뿐입니다. 속전속결로 처리되는 일이나 공사 치고 졸속 아닌 것이 없습니다. 태속에 있는 태아가 10달이 되기도 전에 속히 나오면 그것은 조산이요,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위태로운 일입니다. 속히 먹은 음식은 반드시 채하기 마련입니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잠 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란, 무조건 화부터 내고 보는 사람입니다. 모든 일을 감정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매사를 감정으로 처리하는 사람은 자고 나면 후회할 어리석은 짓만을 계속하는 자일 테니,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가 사람들로부터 진심에 찬 존경과 사랑을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잠 20:21)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절대로 반석 위의 집일 수가 없습니다. 반석 위의 집은 속히 잡히는 것이 아닙니다. 속히 잡힌 것은 사장누각일 수밖에 없으니,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복이기는커녕, 결국엔 화로 되돌아올 뿐입니다.

 

무엇이든 구별 없이 무턱대고 속히 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속히 해서 될 것이 있고 안될 것이 있습니다. 속해 해서는 안될 것을 속히 하고자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망치는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진리를 좇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속히 해서는 안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속단, 깊은 생각없이 속히 판단하는 것입니다.

 

작년 11월 셋째 주일, 안경을 쓰지 못한 채 강단에 섰던 적이 있습니다. 그 날 아침 안경을 떨어 뜨려 깨어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적지 않은 교인들로부터 `콘택트렌즈'를 끼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한참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할 청춘 때라면 모르되, 이 나이에, 게다가 목사가, 잘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무엇 때문에 새삼스럽게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겠습니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바른 대답일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매일 쓰던 안경을 어느 날 갑자기 쓰지 않고 나타난 것을 콘택트렌즈 착용 때문일 것이라고 속단해 버린다면, 인간 이재철을 바로 알 수 있는 길은, 실은, 영영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속단이 금물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속단의 대상도 아니요, 속단될 수도 없고, 속단하려해서도 안됩니다. 만약 속단한다면 속단이 빠르면 빠른 만큼 하나님으로부터는 더 멀어지고 맙니다.

 

오늘 본문이 주님의 말씀에 대한 속단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많은 비사, 즉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21절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21)

 

즉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한 제자들의 근심과 기쁨을, 여인의 해산에 비유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비사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 일러 줄 것이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비사를 상용치 않을 `그때'는 도대체 언제입니까? 이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모든 의문이 사라져 버리기에 더 이상 비사로 말씀하실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때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밝히 깨달을 수 있도록 영적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의 해석이 타당하든, 중요한 것은 `그때'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문을 말씀하고 계시는 지금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체포당하시기 직전으로, 부활의 때도 아니요, 더더구나 성령강림의 때도 아닌 까닭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한 말을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29-30)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때가 되어야 더 이상 비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밝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주님께서 비사를 말씀치 않으셨다고 해서 그때를 지금이라고 속단, 주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밝히 알았다고 속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속단한 제자들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당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을 밝히 알았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주님을 자기 식으로 속단하므로 인한 불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1-32a)

 

제자들이 주님을 혼자 두고 각기 제 곳으로 흩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주님을 버리고 배신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주님을 밝히 알고 주님을 믿노라 확신에 찬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정말 나를 믿느냐, 오히려 너희가 나를 배신할 때가 벌써 왔다고 응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몇 십분 후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배신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처럼 돌아가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다 알았다고 속단하던 때가 곧 배신의 때요, 속단의 결과는 참담한 배신이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수차례나 예고하셨지만, 그때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자기 좋은 대로 속단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거듭 거듭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속단의 대상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시 1:2). 하나님의 말씀은 속단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음성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속단치 않은 자요, 오히려 그 말씀의 참 의미를 깊이 상고하며 묵상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주옥같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기록케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이 아침에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속단이 있는 곳에는 오직 한가지 배반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자기 식으로 속단하면 기둥이나 벽 혹은 천정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코끼리에 대한 배반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차이는 코끼리와 장님간의 차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차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속단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장님이 코끼리를 오해하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무서운 배반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속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사람에 대해 속단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실 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실 지 우리가 알 수 없는 연고입니다.

 

흉악범이라 하여 끝난 인생이라 속단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형 집행장에서 교도관들을 감동시키고 이 세상을 떠나는 의인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겉으로 의인처럼 보인다 해서 다 의인이라 속단치 마십시오. 주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 매도했던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완벽한 의인들이었습니다. 가난한자는 후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속단치 마십시오. 성경 속의 위인들은 거의가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큰 종이 될 수 없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땅이 다 자기 소유일 정도로 갑부였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무식한 자들은 하나님의 바른 도구가 될 수 없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무식꾼들이었습니다. 유식한 자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없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모세나 이사야나 예레미야, 혹은 바울처럼 성경을 기록한 자는 거의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속단하지 않는 힘입니다. 자기부인과 자제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속단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속단하지 않는 구체적인 행동이요 삶입니다. 속단하는 자가 있는 곳에는 배반과 분열이 있는 반면에, 속단하지 않는 자가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속단하지 않는, 주님을 향해 겸손하게 열린 자를 통해 주님께서 역사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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