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주시는 양식
요한복음 6:41~51
지난 한주간 동안 우리교회 북방선교회의 사업일환으로 외몽골과 중국 연변 용정에 다녀왔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몽골은 우리 민족과 관계가 특별한 나라입니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몽골 족이 남하하여 정착하게 된 것이 한국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비슷한 데가 아주 많습니다. 우선 생긴 외모가 비슷합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 우리와 같기 때문에 어순(語順)이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중에 어학에 재질이 있는 분은 1년만 있으면 웬만한 몽골어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비슷한 말도 많습니다. 가령 '넥타이'를 '댕기'라 합니다. '대리미'를 '인두'라고 하니다.
몽골인들은 우리한국사람더러 형제국 이라고 합니다.
물론 자기네가 내려와서 민족을 형성했으니까 자기들이 형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은 74년동안 러시아의 정권 하에 있다가 러시아의 붕괴와 더불어 문이 열린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정부청사 앞에는 레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몽골은 공사주의 지배하에 오랫동안 시달렸기 때문에 경제력으로 아주 어려운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보통 공무원의 한달 봉급이 우리 돈으로 6-7만원 정도 입니다. 그러니까 몽골인들의 소망은 한국에 가서 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버는 일입니다. 한국대사관앞에는 매일 수백명이 VISA를 얻으려고 줄을 선다고 합니다. 지금 합법적으로 혹은 불법적으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15,000명 가량 있는데 그들이 송금하는 것이 몽골의 예산중 1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지난 10년동안 예수 믿는 사람이 15,000명이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우호적입니다. 자동차만 하더라도 전체 차량의 65%가 한국자동차 이기 때문에 거의 외국에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앞으로 몽골선교에 힘쓰려 하는데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국 용정에 이미 갈보리복지관 사무실을 정하고 두 사람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데 이번에 북한 땅에서 얼마 멀지 않은 아름다운 농촌에 건물이 있는 250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수리해서 용정시장님과 직원들 그리고 우리 교회 북방선교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갈보리복지관을 개관했습니다. 작년에는 밀가루 500포를 기증했는데 이번에는 쌀 500포를 기증했습니다.
앞으로 갈보리 복지관에서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조선족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마련된 대지에 새 건물을 200평 정도 신축할 계획이고 다음달에는 우리 청년 40여명이 가서 기초를 장만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 주시고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동 중에서 세번째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는 새로운 세대마다 모든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또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 중에는 우리 심령의 평화를 밝혀 주는 영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도의 요법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세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생각한 말씀을 잠깐 더듬어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여기에 근거를 둘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 마음속을 차지하고 잇는 모든 열등감을 물리 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위해서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가지고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에 보람과 의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성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살아가는데 절대로 실패를 계획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불안의 세력을 막아내는 일입니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불안한 세상입니다. 이 불안은 우리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우리를 좌절시키고 결국 우리를 실패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는 이 짧은 기도는 우리 마음속의 모든 불안을 없애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데 우리가 왜 불안해합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 데 왜 걱정합니까? 왜 두려워합니까?
이사야 선지를 통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과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8-10)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데 우리가 왜 불안해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데 우리가 왜 불안해 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 하셨는데 우리가 왜 두려워합니까? 물론 우리가 원한다고 다 주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항상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양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양식은 우리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이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광야 생활 할 때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지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필요한 만큼 먹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욕심을 부려서 하루 먹고 남을 정도의 양으로 간수했더니 이튿날 보니까 먹을 수 없게끔 되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 꼭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순간 수간 호흡할 공기가 필요합니다.
하루라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물이 필요합니다. 책임자성경공부를 간신히 끝내고 구토설사가 나서 10여번 하고 나니 수분이 다 빠져서 탈진 상태에 빠지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라구요. 결국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만 사람에게서 수분이 빠지니까 맥을 못쓰겠더라구요. 사람의 육신에는 수분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밥은 며칠 굶어도 살 수 있어도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 먹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반드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이 좋아하는 보석은 귀하기 때문에 그 값이 비쌉니다. 그러나 보석이 없어도 사는데는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한 그릇의 밥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예포소리도, 축의 나팔소리도 없었습니다. 굉장한 축한 행렬도 없었습니다. 그저 육축들이 둘러싼 말구유에 조용히 태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 주시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란 것은 시간이 가면 낡고, 썩고, 변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게 됩니다. 옛날 왕이 살던 궁전을 구경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당시에는 그 이상의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하나의 유물에 불과하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이란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특별히 젊은 여러분에게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이 사회를 바로 세울 수가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자신감이 넘치는 적극적인 사람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유행은 발리 변하지만 성실과 희생 그리고 봉사를 삶의 바탕으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해서 십자가 중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언제나 만족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가난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끼니를 굶는 사람입니까? 물론 우리에게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가장 비참한 가난은 인간에게서 위엄을 빼앗기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점점 퇴보해서 결국 자기의 거룩한 사명을 잊어버리고 결국은 동물처럼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불쌍한 것은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보람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가난의 요소를 제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물질보다 생각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니까? 사회 복지 사업이 잘못하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손해를 주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도움만 받다 보면 노력하려고 하는 의지가 약해지기 쉽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가난을 없애기 위해서 하늘에서 돈을 비처럼 쏟아 붇는 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심각한 가난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몽골과 중국에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다 가난하게 살았는데 자유경제 체제로 바뀐지 10여년 동안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온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많은 돈을 벌어 부유하게 살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령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인 안정이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안정이 올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재정적인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삶의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용기는 모험을 하고 기회를 포착하는 체험을 통해서야만 얻을 수 잇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살의 과정 속에서 필요하다면 질 수도 있을 만큼의 용기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적인 생각,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없을 때 물질적인 것이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과 명예 그리고 권세를 누리는 사람 중에서도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 이란 "어떤 어려운 자리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때에야만 어려운 때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람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고후 4:7-9)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양식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창조적인 생각을 주십니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문제를 통해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그릇의 밥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조적인 생각을 과소평가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석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한 그릇의 밥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삶의 긍지와 보람이 없다는 것은 가난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긍정적인 걱정이 없이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난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정한 가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삶의 위엄을 상실하는 일입니다. 돈을 많이 모아서 쌓아 둘 곳이 없는 것이 부(富)가 아닙니다. 무엇이 참된 부이니까? 참된 부는 영적인 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면 밥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이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부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 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는 "삶의 의미를 주는 생각을 주옵시고"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처럼 적극적인 생각, 신선한 생각, 놀라운 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
이번 몽골에 들려서 학교를 경영해서 몽골 220개 대학중에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선정되게 한 목사님, 병원을 설립해서 운영하시는 의사님, 군 선교를 위해서 애쓰시는 육군 헌병감출신인분들을 만나 그들의 의욕에 넘치는 삶의 모습을 볼 때 과연 저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갖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뿐만 아니라 훌륭한 생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훌륭한 생각을 실현시키는데 필요한 힘과 용기까지 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생각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이를 때에도 승리의 가능성을 내다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생각을 주시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기회로 바꿉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난관에 봉착했을 때 위압당하지 아니하고 당황하지 아니하고 그 난관을 정복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도리어 유익을 가져오게 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취 속에서도 겸손이 깃들게 됩니다. 우리의 승리나 성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생각할 때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참다운 성공은 재능이나 교육이나 배경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감동을 받은 생각들을 지혜롭게 그리고 기도하면서 일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찌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일어 주시리로다" (시37:3-4)
새는 날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물고기는 헤엄치게 만들어 졌듯이 사람은 믿음의 공기를 마시며, 의심을 내뱉도록 고안된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리고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신명기 32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업는 것 같이" 이것은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는 모습입니다. 새끼독수리가 독수리가 되는데는 강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허약한 자리에서 강건한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일을 믿음 있는 사람들은 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추진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이고 승리 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가 계시므로 우리의 꿈이 실현되고, 창조성이 꽃피워지고 그의 사랑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키는 일용할 양식이 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중심에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아름답고 놀라운 생각들이 흘러 넘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주시고 나의 더러운 심령을 깨끗이 해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주님이 나에게 어떤 사랑의 봉사를 행하라고 부르시는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청년 이사야가 하나님의 전에서 성결함을 받을 때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발견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일을 행하는데는 주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데는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 일용할 양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양식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므로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6:41~51
지난 한주간 동안 우리교회 북방선교회의 사업일환으로 외몽골과 중국 연변 용정에 다녀왔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몽골은 우리 민족과 관계가 특별한 나라입니다.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몽골 족이 남하하여 정착하게 된 것이 한국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와 비슷한 데가 아주 많습니다. 우선 생긴 외모가 비슷합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 우리와 같기 때문에 어순(語順)이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교사중에 어학에 재질이 있는 분은 1년만 있으면 웬만한 몽골어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비슷한 말도 많습니다. 가령 '넥타이'를 '댕기'라 합니다. '대리미'를 '인두'라고 하니다.
몽골인들은 우리한국사람더러 형제국 이라고 합니다.
물론 자기네가 내려와서 민족을 형성했으니까 자기들이 형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몽골은 74년동안 러시아의 정권 하에 있다가 러시아의 붕괴와 더불어 문이 열린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정부청사 앞에는 레닌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몽골은 공사주의 지배하에 오랫동안 시달렸기 때문에 경제력으로 아주 어려운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보통 공무원의 한달 봉급이 우리 돈으로 6-7만원 정도 입니다. 그러니까 몽골인들의 소망은 한국에 가서 노동을 해서라도 돈을 버는 일입니다. 한국대사관앞에는 매일 수백명이 VISA를 얻으려고 줄을 선다고 합니다. 지금 합법적으로 혹은 불법적으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 15,000명 가량 있는데 그들이 송금하는 것이 몽골의 예산중 1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지난 10년동안 예수 믿는 사람이 15,000명이 되었습니다.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우호적입니다. 자동차만 하더라도 전체 차량의 65%가 한국자동차 이기 때문에 거의 외국에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앞으로 몽골선교에 힘쓰려 하는데 많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국 용정에 이미 갈보리복지관 사무실을 정하고 두 사람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데 이번에 북한 땅에서 얼마 멀지 않은 아름다운 농촌에 건물이 있는 2500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수리해서 용정시장님과 직원들 그리고 우리 교회 북방선교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갈보리복지관을 개관했습니다. 작년에는 밀가루 500포를 기증했는데 이번에는 쌀 500포를 기증했습니다.
앞으로 갈보리 복지관에서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조선족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마련된 대지에 새 건물을 200평 정도 신축할 계획이고 다음달에는 우리 청년 40여명이 가서 기초를 장만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도 많이 기도해 주시고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동 중에서 세번째 말씀을 같이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일찍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신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류는 새로운 세대마다 모든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 또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 중에는 우리 심령의 평화를 밝혀 주는 영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도의 요법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기도는 세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생각한 말씀을 잠깐 더듬어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여기에 근거를 둘 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 마음속을 차지하고 잇는 모든 열등감을 물리 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건설적이고 창의적인 삶을 위해서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가지고 보람되고 의미 있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에 보람과 의미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성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살아가는데 절대로 실패를 계획하시지 않으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물밀 듯이 밀려오는 불안의 세력을 막아내는 일입니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불안한 세상입니다. 이 불안은 우리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우리를 좌절시키고 결국 우리를 실패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하는 이 짧은 기도는 우리 마음속의 모든 불안을 없애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데 우리가 왜 불안해합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 데 왜 걱정합니까? 왜 두려워합니까?
이사야 선지를 통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과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8-10)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데 우리가 왜 불안해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데 우리가 왜 불안해 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 하셨는데 우리가 왜 두려워합니까? 물론 우리가 원한다고 다 주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항상 채워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양식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양식은 우리 삶의 기본적인 필요를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이것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떠나 광야 생활 할 때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지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셨습니다. 저희에게 필요한 만큼 먹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욕심을 부려서 하루 먹고 남을 정도의 양으로 간수했더니 이튿날 보니까 먹을 수 없게끔 되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 꼭 필요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순간 수간 호흡할 공기가 필요합니다.
하루라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물이 필요합니다. 책임자성경공부를 간신히 끝내고 구토설사가 나서 10여번 하고 나니 수분이 다 빠져서 탈진 상태에 빠지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하더라구요. 결국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만 사람에게서 수분이 빠지니까 맥을 못쓰겠더라구요. 사람의 육신에는 수분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밥은 며칠 굶어도 살 수 있어도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 먹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반드시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이 좋아하는 보석은 귀하기 때문에 그 값이 비쌉니다. 그러나 보석이 없어도 사는데는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한 그릇의 밥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예포소리도, 축의 나팔소리도 없었습니다. 굉장한 축한 행렬도 없었습니다. 그저 육축들이 둘러싼 말구유에 조용히 태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 주시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란 것은 시간이 가면 낡고, 썩고, 변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게 됩니다. 옛날 왕이 살던 궁전을 구경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당시에는 그 이상의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하나의 유물에 불과하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이란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영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특별히 젊은 여러분에게 이것이 꼭 필요합니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이 사회를 바로 세울 수가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것들은 자신감이 넘치는 적극적인 사람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유행은 발리 변하지만 성실과 희생 그리고 봉사를 삶의 바탕으로 사는 사람 다시 말해서 십자가 중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언제나 만족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가난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끼니를 굶는 사람입니까? 물론 우리에게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가장 비참한 가난은 인간에게서 위엄을 빼앗기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점점 퇴보해서 결국 자기의 거룩한 사명을 잊어버리고 결국은 동물처럼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불쌍한 것은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보람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가난의 요소를 제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물질보다 생각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니까? 사회 복지 사업이 잘못하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손해를 주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도움만 받다 보면 노력하려고 하는 의지가 약해지기 쉽습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가난을 없애기 위해서 하늘에서 돈을 비처럼 쏟아 붇는 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심각한 가난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몽골과 중국에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다 가난하게 살았는데 자유경제 체제로 바뀐지 10여년 동안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온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은 많은 돈을 벌어 부유하게 살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령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경제적인 안정이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안정이 올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재정적인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삶의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용기는 모험을 하고 기회를 포착하는 체험을 통해서야만 얻을 수 잇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살의 과정 속에서 필요하다면 질 수도 있을 만큼의 용기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적인 생각,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없을 때 물질적인 것이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과 명예 그리고 권세를 누리는 사람 중에서도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 이란 "어떤 어려운 자리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때에야만 어려운 때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람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 (고후 4:7-9)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양식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창조적인 생각을 주십니다. 어려움에 빠졌을 때에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문제를 통해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그릇의 밥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조적인 생각을 과소평가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석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한 그릇의 밥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삶의 긍지와 보람이 없다는 것은 가난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긍정적인 걱정이 없이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가난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정한 가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삶의 위엄을 상실하는 일입니다. 돈을 많이 모아서 쌓아 둘 곳이 없는 것이 부(富)가 아닙니다. 무엇이 참된 부이니까? 참된 부는 영적인 부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러면 밥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이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부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적 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는 "삶의 의미를 주는 생각을 주옵시고"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처럼 적극적인 생각, 신선한 생각, 놀라운 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
이번 몽골에 들려서 학교를 경영해서 몽골 220개 대학중에 가장 우수한 대학으로 선정되게 한 목사님, 병원을 설립해서 운영하시는 의사님, 군 선교를 위해서 애쓰시는 육군 헌병감출신인분들을 만나 그들의 의욕에 넘치는 삶의 모습을 볼 때 과연 저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생각을 가지게 되면 자연히 우리의 모든 필요한 것을 갖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뿐만 아니라 훌륭한 생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훌륭한 생각을 실현시키는데 필요한 힘과 용기까지 수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생각으로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이를 때에도 승리의 가능성을 내다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입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생각을 주시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사람은 모든 문제를 기회로 바꿉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난관에 봉착했을 때 위압당하지 아니하고 당황하지 아니하고 그 난관을 정복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도리어 유익을 가져오게 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취 속에서도 겸손이 깃들게 됩니다. 우리의 승리나 성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생각할 때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참다운 성공은 재능이나 교육이나 배경의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감동을 받은 생각들을 지혜롭게 그리고 기도하면서 일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찌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일어 주시리로다" (시37:3-4)
새는 날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물고기는 헤엄치게 만들어 졌듯이 사람은 믿음의 공기를 마시며, 의심을 내뱉도록 고안된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리고 이렇게 만드셨습니다. 신명기 32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업는 것 같이" 이것은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키는 모습입니다. 새끼독수리가 독수리가 되는데는 강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허약한 자리에서 강건한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일을 믿음 있는 사람들은 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추진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다는 뜻입니다. 적극적이고 승리 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가 계시므로 우리의 꿈이 실현되고, 창조성이 꽃피워지고 그의 사랑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가장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키는 일용할 양식이 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중심에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아름답고 놀라운 생각들이 흘러 넘치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주시고 나의 더러운 심령을 깨끗이 해주시고,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주님이 나에게 어떤 사랑의 봉사를 행하라고 부르시는 부르심을 듣게 됩니다. 청년 이사야가 하나님의 전에서 성결함을 받을 때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발견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일을 행하는데는 주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데는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신 그리스도, 일용할 양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양식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므로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기쁨 그리고 평화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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