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을 받는 믿음> 마9:1-8
새문안교회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마태복음의 기자에 따르면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거라사인의 땅이라고도 하고 가다라 지방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배를 타시고 호수 맞은편에 있는 예수님의 "본 동네"로 돌아오셨을 때 있었던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본 동네"라고 한 것은 갈릴리 가버나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시던 동네가 가버나움이었기에 그곳을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가버나움에서 어떤 사람들이 중풍에 걸려 스스로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없는 한 사람을 침상에 누운 채로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게 나아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시던 곳을 입추의 여지없이 메우고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거기에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5:17).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은 당장 서기관들의 귀에 거슬리게 들렸습니다. 서기관들은 속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속으로 하고 있었던 생각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속생각은 예수님에게는 악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본문 4절에서 보는 대로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하신 것입니다. 그 서기관들이 속으로 하고 있었던 악한 생각들이란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었겠습니까?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죄 사함을 받았다니, 제가 뭔데 죄를 사해준다는 거야,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를 사하실 분이 없는데. 저 자가 아주 교활하잖아? 만일 '일어나 걸어가라' 했다가 안되면 허풍 떨던 것 들통날 테니까 하는 말이 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허긴 죄 사함 받았는지 아닌지는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으니 제 말대로 안 되도 누가 뭐라 할 말이 없을 것을 아니까 그러는 것 아니야? 아니, 그래도 그렇지, 교활한 것도 유분수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을 감히 제가 하다니. 그러면 뭐야, 제가 하나님이란 말이야? 저런 자는 죽여버려야지 가만 둬선 안되겠네" 등등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파하신 서기관들의 속생각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어떤 질병도 다 고치실 권세와 능력을 지니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심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에 그들의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리고는 중풍병자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 말씀대로 그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첫째로 자신에게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자신이 없어서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대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것이 아님을 증명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는 그의 능력이 죄를 용서하기도 하시는 그의 신적 권위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심으로써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 하신 말씀뿐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 즉 자신에게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말씀 또한 참되고 믿을 수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중풍병자와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나아온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려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봅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란 그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 모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믿음이란 과연 어떤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첫째는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된 믿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에게는 중풍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다고 믿는 믿음과, 그가 고쳐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믿음입니다. 그들의 이 확고하고 간절한 믿음은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왔는지를 볼 때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그 과정의 묘사를 생략하고 있지만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그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두 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모여있었습니다.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무리들로 인해 침상을 메고 들어갈 길을 뚫지 못하자 사람들은 그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의 지붕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들은 기와를 벗기고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거기서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 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만 가면 낳을 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려는 간절한 소망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대담하고 끈질긴 행동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라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 믿음을 보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그 중풍병자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에는 그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셨지만, 처음에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일어서서 자유롭게 걸을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엉뚱하게 여겨지는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의 마음 속에 있었던 보다 근본적인 갈망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중풍병자는 단지 자신이 자유롭게 걷지 못하는 것만을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죄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체적인 불구뿐만 아니라 영적인 불구 또한 치유 받기를 갈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의 보다 근원적이고 보다 큰 갈망인 죄 사함에 대한 갈망을 예수님께서는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서 보신 믿음에 있어서 더 크고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런 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 중풍병자뿐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침상채로 메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내려가게 할 정도로 결사적으로 예수님께로 나아오게 만든 동기도 단지 일어나 걷고 싶은 바램이었다기보다는 죄의 용서를 받고자 하는 갈망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됩니다. 단지 일어나 걷고 싶은 바램 때문에 왔었다면 도저히 예수님께로 다가갈 수 없도록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들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의 용서를 받는 문제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서라도 예수님을 뵙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한 그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자 그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말씀하시기에 앞서 "안심하라"는 말씀을 먼저 덧붙이신 것은 자신의 죄의 인식과 그 죄의 용서에 대한 갈망으로 처절한 상태에 있었던 그의 심령을 달래주시려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뜻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셋째는 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메고 나아온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기자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 곧 거라사인의 땅이라고도 하는 곳에 가셨을 때 있었던 사건에 바로 이어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다라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이 무엇입니까? 군대라고 할 정도로 수없이 많은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무덤 사이에 거처하며, 밤낮으로 어디서나 소리지르고 돌로 제 몸을 상하기도 하며, 고랑이나 쇠사슬로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셀 뿐 아니라 몹시 사나워서 아무도 접근조차 할 수 없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 그에게서 귀신들을 다 내쫓으시고 그를 온전하고 얌전한 사람으로 고쳐주신 일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이 가다라 지방에서의 사건에 곧바로 이어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잇달아 전해지는 두 사건 속에서 우리는 공통되게 예수님의 치유행위를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두 이야기 속에서 주목할 것은 꼭같은 예수님의 치유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가다라 지방에서의 거라사인들의 반응은 사뭇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혐오감과 공포심을 안겨주고 불편함과 위협이 되었지만 누구도 손대지 못하던 존재, 아무도 고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너무나 불쌍한 한 인간을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게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거라사인들은 그렇게 놀랍고 고마운 일을 해주신 예수님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에게 그들 지방에서 떠나달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일을 행하신 것을 보았다면 주위의 귀신들린 사람들, 병든 이들, 몸이 불편한 이들을 다 데리고 와서 그들도 고쳐주시기를 간청해야 마땅할 것인데, 이 거라사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이 빨리 없어져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마8:34에서 뭐라고 합니까?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그런데 갈릴리 호수 건너편 예수님의 본 동네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광경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 계신 곳에 구름처럼 몰려오는 무리들이며, 예수님께서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침상을 달아 내리면서까지 병든 이를 데리고 나아와 예수님께 그 치유를 간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 믿음을 보시고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서 보신 믿음 속에 고통받는 형제·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실천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참된 믿음에 관한 예수님의 일련의 가르침들 가운데 한 단면을 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참된 믿음의 면모를 우리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이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육간의 모든 병을 치유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죄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오늘 본문 직전에 있는 8장에서 그 어떤 병도,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리고 그 아무리 많은 귀신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음을 차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9장의 첫 이야기에서 그는 예수님께서 만유에 대한 권세를 지니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에게 죄 사하심의 권세가 있음을 힘있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갈망하는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그에 의한 해결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단지 병 낫고, 가난을 해결하며,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면 안 됩니다.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고, 죄로부터 자유해지며, 영혼의 구원을 얻는 일에 무관심할 때 참 믿음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주님께 나아옵니까?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는 이유가 그저 이런 저런 일상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얻기 위한 것뿐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을 듣기를 원하기에 앞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 듣기를 갈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우리 주위의 형제·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심과 그 실천입니다. 우리 주위의 형제·이웃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이해와 나눔의 실천 없이 참 믿음을 가졌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게 하려는 의지 없이 믿음을 논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이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참 믿음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의 침상을 메고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어내는 사랑과 헌신이 함께 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서 보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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