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이 사람은 다시 살려주십시오! (행 9:32-43)
욥바라는 곳에 다비다라는 여 제자가 살았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녀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죽은 다비다를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가까이에 베드로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 급히 베드로를 불러 왔습니다. 죽어갈 때 기도해 달라는 것이 아니고, 죽은 다음에 그녀가 다시 살아나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와서 기도하여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특별합니다.
우리 교회도 최근 많은 가정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하나님께 먼저 보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많은 성도들이 죽었습니다. 욥바에서도 그 동안 성도들이 여럿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사람들이 다시 살리려고 노력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을 믿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더 좋은 천국으로 가는 것을 믿으니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잠시 이별의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살리려고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오라 하시면 “예.” 하고 가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다비다는 죽어서 여기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다시 살리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다비다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바 사람들 자신들을 위해서 그러했습니다, 욥바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비다가 너무 필요하여 일찍 죽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비다가 베풀어주었던 말할 수 없는 사랑, 섬김, 그것이 너무너무 그들에게는 소중했습니다. 다비다가 이렇게 빨리 죽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비다가 너무나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서 다비다를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다비다는 살아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특히 과부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갔을 때 모든 과부들이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만들어준 여러 가지 옷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다비다에게서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욥바의 사람들은 다비다가 자기들에게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도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축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천국에 그냥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시 살아난 다비다로서는 조금 섭섭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고가 많은 고난의 인생 중에서도 많은 사랑을 베풀며 살다가 드디어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 황금으로 꾸며진 천국 문을 지나 말할 수 없이 황홀한 천국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다비다를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다비다야, 너는 세상으로 도로 가야 하겠구나. 네 동네 사람들이 너를 너무 좋아해서 안 되겠어. 조금 더 살면서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도록 수고하고 와야 하겠다.”
그때 다비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 정말이십니까?” 그랬을까요? 아니면 짜증을 냈을까요? 저는 틀림없이 다비다가 약간은 짜증스러웠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다시 돌아가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고 교우들을 만나는 기쁨이 물론 있었겠지만, 그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정말 즐겁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 중에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간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 중에도 그렇고. 그들이 천국에서 여기로 다시 오고 싶어하실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천국에 와서 다시 만나기를 그분들은 기다리시지 그분들이 이 땅에 오기를 원하시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다비다도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비다야, 네 동네 사람들이 너를 필요로 한단다. 네가 없으면 안된다고 하는구나. 네가 그 사람들을 섬길 일이 아직도 많구나. 네가 아직도 구원해야 할 사람들이 욥바에는 아직도 많아. 그러니 미안하지만 더 잠깐 다시 세상에서 살다가 와야 하겠다.” 다비다가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 “예,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러고 왔지, 정말 룰루랄라 거리면서 오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좋은 곳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자신은 당장 죽어 천국에 가서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빌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영생에 대한 믿음입니다. 지금 죽어도 좋아요. 차라리 그것이 더 좋아요. 그렇다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죽는 것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성도들의 삶은 아닙니다.
그래서 24절에서 죽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더 유익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우리가 빨리 죽기만 원하는 것은 신앙 생활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죽으면 내게 더 좋은 것입니다. 그 믿음 만큼은 분명히 가지셔야 됩니다. 이 세상보다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이 좋은 천국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빨리 죽는 것보다 늦게 죽기를 원하는 것이 신앙적으로는 더 옳습니다. 왜 그렇지요? 그것이 사람들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구원할 사람이 있고 아직도 세워야 될 교회가 있고 복음이 증거되어야 될 족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기 위해서 복음은 전 세계 모든 족속에게 전해져야 하고 아직도 영생이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에게 누군가 복음을 전해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천국 가는 것 보다 더 유익한 것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명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삶의 문제에 대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기준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축복인 점도 있습니다.
그녀는 살았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며 주님을 증거했고 다시 살아났을 때에도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였습니다. 다비다는 다니엘 12장 3절에 기록한 대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비다 사건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기적을 말하려 하기 보다, 다비다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다시 말하면 죽어서 다비다가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갔는데도, “하나님, 다비다를 그냥 보내시면 안됩니다. 다비다는 좋은 천국에 갔지만 우리에게는 다비다가 너무 필요합니다. 다비다가 없으면 안돼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정도로 사랑을 베풀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섬기며 사는 삶, 즉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를 살리게 된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베드로는 다락에 뉘여 있는 도르가의 시체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체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과 성령의 생생한 감동하심을 그곳에서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죽은 나인성 과부의 이들을 살리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보기에도 다비다는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하나님, 이 사람 살리는 것은 분명히 교회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합니다.”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경우가 일곱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셋을 살렸고, 엘리야, 엘리사, 베드로, 바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은혜를 입은 사람의 과반수가 어려운 이웃을 돌본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준 자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은 성경에 너무 많이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다비다입니다.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딤전 6:18-19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사랑으로 베풀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기쁘게 하고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복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눅 14:13-14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사랑이 우리가 미래에 대하여 준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9.11 테러가 났을 때,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로 인하여 죽어가던 사람들이 마지막 남긴 메시지들은 하나같이 똑같았습니다.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여보 ,정말 당신을 사랑해. 엄마, 사랑해. 사랑해. 사량해. 여보, 나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 ”
그 말은 죽음의 순간에 비로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지금 먹고 사는 것에 매여서 정신없이 살다보니 평소에 그것을 다 잊고 삽니다. 먹고 사는 것이 너무 급하다고 생각하니까 정신없이 살지만,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가장 가치있게 남는 것은 사랑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고 나서 어떤 평가를 받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 이 사람은 다시 살려주십시오.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예요. 그 사람 데려가시면 안됩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기도하며 죽지도 못하게 할 만큼 하나님께 소리쳐 울부짖는 삶을 살았다면 진정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비다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다비다가 재정적으로 넉넉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많이 베풀고 섬기고 도와주려면 뭔가 여유가 있어야 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다비다가 돈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비다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다비다를 다시 살려주십시오.”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다비다가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온유하고 자상한 성격의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비다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 다시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비다가 없으면 어떻게 사나? 다비다 없이 우리 교회 어떻게 하나?’그래서 정말 마음으로부터 간절하게 하나님께 그 사람만큼은 다시 살려달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단순히 성격 문제도 아니고 그가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다비다에게는 틀림없이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니 다비다를“여 제자”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당시는 철저하게 남성 중심의 사회였고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여성인 다비다를 일컬어 제자라고 부른 것은 아주 특별한 일에 속합니다. 그녀가 참으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으로서 항상“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런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비다의 성격이 사람을 섬기고 돕고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비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 다비다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비다를 볼 때 꼭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다비다를 살려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까요?
여러분, 우리 힘으로는 다비다처럼 살아보려고 애써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비다처럼 살아보아야 되겠다.’결심한다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힘으로는 가족에게 조차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없고 진정한 도움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좀 연세가 드신 분들은 이제는 자식 밖에는 바라볼 것이 없고, 그저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착각 중에 하나가 자식을 위해서 걱정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알고 보면 자식 걱정입니다. 그러나“염려”는 사랑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자녀를 더 괴롭히고,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염려와 걱정은 영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주님께 가지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짐을 맡긴 자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실제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짊어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남의 짐, 염려 보따리까지 짊어지고 삽니다. 배우자의 짐, 자녀의 짐, 교인들의 짐을 지고 삽니다. 그것이 사랑인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염려는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몸이 약한 자녀에게 어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합니다.“제발, 아프지 말아라. 너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이가‘어머니가 내 건강 때문에 염려가 많으시구나. 내가 빨리 건강해져야지.’그래서 건강해 집니까? 어머니가 염려하는 것을 알게 되면 더 아프게 됩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자녀를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교우들은 이따금 제게“목사님, 안색이 안 좋아보이세요.” 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저는 굉장히 힘들어지기 시작합니다.‘내가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구나.’사랑한다고 해주는 말이 그 사람을 오히려 더 힘들게 합니다.“제발 공부 좀 해라.”부모는 그것을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공부를 더 잘하게 되었습니까? 자녀는 더 공부가 안됩니다.“제발 결혼 좀 해라. 너 나이가 몇이냐?”하면 결혼이 더 늦어집니다.“제발 살 좀 빼라.”하면 음식이 더 먹고 싶어집니다.“제발 교회 좀 나와라.”하면 더 교회에 나오기 싫어진다고 합니다.
만약에 염려해서 정말 더 건강해지고 결혼도 빨리 하고 공부도 잘하게 되고 살도 빼게 되고 교회도 잘 나오게 된다면, 기도하지 말고 염려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염려하면 잔소리하게 되고 잔소리는 문제를 더 악화시킵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일절 자녀들에 대해서 근심도 하지 말아야 되고 염려도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해가 잘 안되는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왜? 그동안에 염려나 근심을 사랑으로 알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사랑하지 말라는 말처럼 들리실 것입니다. 그분들은 염려가 곧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근심에 잠겨 있을 때 밥맛이 좋았습니까? 염려와 근심이 있으면 밥맛도 떨어집니다. 일이 잘 되었습니까? 잠이 잘 왔습니까? 단잠도 다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이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녀에 대해서 근심과 걱정을 가지고 있으면 무서운 힘이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으면 자녀들은 반드시 그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고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알고 보면 계속해서 가족들을 괴롭힌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울하고 어두운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평생 다른 이들에게 파괴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이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기 원한다면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집에 들어갔는데 가족 중 한 사람이 우울하고 근심에 사로잡혀 있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집에 들어갈 때까지 기분이 좋았다가도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갑자기 모든 것이 가라앉아 버립니다. 밥을 한번 제대로 맛있게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잠을 한번 달게 자겠습니까? 우리가 자녀들에게 정말 좋은 부모가 되려면 자녀를 향하여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염려할 것 투성이인데 어떻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 능력의 한계가 염려입니다. 남을 돕고 싶어도, 사랑하는 가족조차도 제대로 돕지 못하고 오히려 더 괴롭게만 하다가 인생 끝납니다. 다비다처럼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내 가족도 제대로 돕지 못하고 진정한 사랑을 주지 못하는데, 누구를 제대로 돕고 베풀고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면 달라집니다.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힌 여러분의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평안과 사랑과 능력의 예수님이 여러분의 생명이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평안이시고 기쁨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을 내가 안 믿으니까 우리는 가족 조차도 제대로 돕고 사랑하고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이 되면 우선 여러분 자신이 구원을 누립니다. 두려움과 염려에서 건짐 받은 것보다 놀라운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더 이상 염려하지 않고 삽니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않고 삽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놀라운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부모가 그러면 자녀들이 비로서 숨을 쉽니다. 부모가 기쁘고 담대하고, 감사하며 살면 자녀들은 비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망을 품게 됩니다. “너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주신다. 내가 하나님께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너는 반드시 잘되게 되어있어.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셔.” 부모가 자녀들에게 분명한 확신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부모의 얼굴에 기쁨과 감사로 나타난다면 자녀들은 새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 때부터 여러분은 자녀를 파괴하는 부모가 아니고 살려주는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눈에 보이는 환경을 결론삼지 않고 진리를 결론삼고“나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나의 아이를 대하소서.”하면 자녀들이 부모를 통하여 믿음과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자녀들이나 가족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교우들에게도 믿지 않는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것이 다비다에게 일어났기 때문에 다비다가 더 좋은 곳으로 간 줄 알면서도 사람들이 그대로 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전도를 하러 마을에 갔습니다. 전도를 하러 나갔으면 "예수 믿으십시오." 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마디 말없이 마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이상해서 "선생님, 왜 전도를 안 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전도를 했는데." "아니 언제 전도를 했습니까?"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안 믿을 사람이면 우리가 예수 믿으라고 한다고 예수 믿을 수 없는 것이야."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말로 하는 전도가 소용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진정한 전도는 마음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로 사는 것을 보여 주면, "예수님이 저렇게 좋은가? 예수님을 믿으면 저렇게 되는가? 그러면 나도 믿자."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 교회의 실천 목표 중에 하나가 지역 사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일이 없겠지만 우리 교회가 만약 이전해 가게 된다면, 교회 주변의 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교회 앞에서 데모하면서 “안됩니다. 이 교회는 이전하면 안됩니다.” 하게 될까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다비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처럼 우리 교회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 다비다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로만 가능합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도는 정말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염려가 사라지고 기쁨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로 사는 자가 아니면 가족 조차 사랑하고 도울 수 없는 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다면, 이 시간 다시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부담을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진정한 사랑을 베풀며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다비다가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비다가 십자가 복음이 분명한 사람이었다는 말씀을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지금도 여러분이 십자가를 붙잡을 때 다비다에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영혼이 염려에서 건짐을 받고 가정이 어두움에서 건짐을 받고, 교회 교우들과 이웃들에게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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