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이름! (빌립보서 2:9-11)/(고)이중표목사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그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마치고 역사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이름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도 남길 수 있는 것은 생명록에 기록된 이름밖에 없습니다.
'이름'이라는 뜻의 헬라어 'o[no'는 인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그 이름이 위대한 것입니다. 물론 그의 나심과, 사심과, 죽으심이 위대하지만 그의 전 생애가 이름에 담아져 있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9-11절)
예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가장 고귀하게 불려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으로 살고, 그 이름으로 변화를 받고, 그 이름으로 역사를 창조하는 아름다운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하늘이 준 예수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자기 이름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내 인격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성한 자존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생을 마친 후에까지 자기 이름을 역사에 어떻게 비춰갈 것인가 이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름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늘 성찰해야 됩니다. 우리가 부끄러운 것은 그 이름이 부끄러운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은 그 이름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이름을 가지신 예수 안에서 내 이름을 발견해야 됩니다.
왜 예수님의 이름이 그렇게 뛰어납니까? 그 이름을 하늘이 주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름은 다 사람이 짓습니다. 사람이 짓는다고 할 때 거의 부모가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것은 그 이름속에 미래에 대한 비전과 의미를 담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불리기 좋게 짓는 이름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이름 속에 '장차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라'라는 의미를 담아서 짓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계속 이름을 부르므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입력되면서 그런 삶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준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 17:15-16).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 32:28).
'시몬'을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요 1:42)
모두 다 하나님께서 바꾸어준 그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 가운데서 최고의 이름을 가진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 요셉에게 현몽합니다.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0-21).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지어주시면서 그 뜻까지 해석해 주십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이미 그 이름에 담아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지어준 그 이름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나셨고, 또 자기 백성을 구원하면서 살았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면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로 나고,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었습니다.
그 이름대로 나고, 이름대로 살고, 이름대로 죽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름처럼 산대로 이름이 남습니다. 아름답게 산 사람은 아름답게 남고 악하게 산 사람은 악하게 남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의 이름대로 살다가 죽은 것처럼 우리도 어떻게 인생을 마감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대로 자기 백성을 위해서 대속물로 죽으러 왔고 그 이름대로 죽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나시기 전에 친히 예수의 이름대로 그를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여기 '이름'에 해당하는 헬라어 'o[noma'는 성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호칭일 뿐 아니라 개인의 진정한 본성인 내적 존재의 모습을 밝히는 지표요, 성격과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한 명칭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지위와 위엄을 말합니다.
'뛰어난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주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것 뿐 아니라 우주 전체를 주관하는 주권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 앞에 하늘도 땅도 모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이름 자체에 꿇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 그의 삶에 꿇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이 바로 그 이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복음으로, 생명으로 증거되는 것이고, 우리는 그 이름에 함께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주님과 자기 백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이 있어야 예수가 됩니다. 자기 백성이 없으면 예수도 없습니다. 구원받을 백성이 있어야 구세주가 있듯이 우리가 있으므로 예수가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예수님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주님 나를 행복하게 하소서." 여기에 머물지 말고 "주님 나 때문에 행복하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된다면 신부 없이 신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없으면 주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창세전에 나를 주 안에서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 주님, 나 때문에 행복하소서. 나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이 빛나소서."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예수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생명이여, 나의 행복인 예수여, 나의 전부인 예수여"라고 주님을 찾는 자를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머니라 불러줄 딸이 있어야 어머니가 됩니다. 아버지라 불러줄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가 됩니다. 목사라 불러줄 교인이 있어야 목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예수님은 소중히 여기십니다.
혹시 갓 결혼한 새댁이 있습니까 시아버지에게 '아버지'이라고 부르고 시어머니에게 '어머니'이라고 부르십시오. 어떤 자매는 평생동안 시아버지에게 '아버지'이라고 한번도 부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어머니'라고 한번도 부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신랑과 함께 사는 여자지 그 집 식구는 안된 것입니다. 시어머니에게 '어머니'라고 불러야 그 집 식구가 된 것입니다. 시아버지에게 '아버지'라고 불러야 그 집 식구가 된 것입니다.
12개월 된 손자가 있습니다. 요즘은 손자가 교회에 오면 자꾸 내 방문을 두드리면서 '지지' 그럽니다. 나는 그것을 '할아버지' 글자가 너무 기니까 '지 지' 그런다고 해석합니다. 나는 손자가 '지 지' 그러면 "오냐 네가 나를 할아버지라 불러주니 내가 할아버지가 된거지 고맙다. 고맙다." 그럽니다. 고마운 마음에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나를 할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보통 고마운 일입니까 엎드려 절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여" 하고 부를 때 우리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내가 마지막 죽으면서 "예수여" 하고 간다면 우리 주님이 얼마나 기뻐 맞이하겠습니까 "내가 너를 위하여 예수가 되었지" 예수님이 우리를 맞이하려고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멸망하는 사람은 예수의 이름을 안부르기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고, 구원받는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 못받았으면 나와 예수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 부르는 것이 축복이고, 예수의 이름 부르는 것이 영광이며,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최대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땅에서 하늘로, 세상에서 천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된 내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 안에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된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뛰어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름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의 이름 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뛰어나게 한다는 하나님의 뜻은 나를 뛰어나게 하려고, 나같은 죄인, 비천한 내 이름을 하늘나라에 뛰어나게 하시려고 예수의 이름을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양쪽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한쪽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면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천한 강도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그 이름을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하여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둘째, 예수의 이름으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의 이름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넘칩니다. 마가복음 10장 46-52절에 보면 소경 바디메오가 여리고성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잠히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의 이름 때문에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병을 고쳤습니다.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고"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하십시오. 마음이 답답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음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아픈 곳이 있으면 그 곳에 손을 얹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아픈 곳이 나을지어다." 하고 안수 하십시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잠들지어다." 하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아계심이 그 이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인도에 스탠리 존스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인도의 간디를 감동시킨 위대한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89세에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보스톤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자기 병실에 들어오는 모든 의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병실에 들어올 때마다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시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일어나 걸어라'라고 명해주시오." 여러번 거듭해서 부탁하자 치료하러 들어오는 의사들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일어나 걸으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간호사들도 똑같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스탠리 존스는 "아멘 아멘" 했습니다. 그렇게 치료할 때 놀랍게도 6개월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것을 명령적 기도라고 말합니다. 자녀들을 축복할 때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비노니 너에게 하나님 축복이 있을지어다." 축복 기도하십시오.
셋째, 예수의 이름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
하나님은 뛰어난 이름을 예수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마다 응답을 받습니다. 문제가 해결됩니다. 기적을 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능력이 나타났지만 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 능력은 변함없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뛰어난 것은 내 이름을 뛰어나게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이름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삶 속에서 뛰어난 이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므로 그를 지극히 높였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입으로 주라 시인했으며,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렸다." 이것은 별세하는 인격이 담아진 이름으로 얻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생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의 입으로 "그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야 존경할만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사에서 지위를 높이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아도 욕 먹는 사람이 있고, 움막집에 살아도 높임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회사에서 지위가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욕 먹는 사람이 있고, 지위가 낮아도 그 인격을 통해서 높임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 이름이 뛰어나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은 그 능력이나 권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고 섬김과 희생으로 그 인격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 인격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격에 참여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뛰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 이름이 뛰어나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명예를 빛내려는 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 이름이 빛날 때만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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