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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룹바벨의 꿈을 가지십시오 (학개 2장 20-23절) < 경제와 교회를 살리는 길 >

by 【고동엽】 2021. 12. 21.

스룹바벨의 꿈을 가지십시오 (학개 2장 20-23절)
< 경제와 교회를 살리는 길 >

주전 586년에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솔로몬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약 50년간 모진 고생을 했습니다. 그 후 주전 538년에 하나님이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과 본토귀환을 허락했습니다. 게다가 성전건축을 허락하고 빼앗긴 성전 기물들을 돌려주면서 성전 건축비까지 국고로 보조하게 했습니다.

결국 유다 멸망 후 50년이 지난 희년인 주전 536년에 49897명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스 2:64-65). 그리고 곧 눈물과 감격으로 성전 기초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방해와 여러 문제에 부딪혀 성전건축은 14년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자 뜻 깊은 사람들은 좌절했고 백성들은 자기 일에 빠져 성전건축을 외면했습니다.

그때부터 천재지변이 생기고 병충해가 창궐하고 농산물 수확이 줄면서 원인모를 경제 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더 성전건축에 나설 여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상황을 만나면 경제가 힘들어서 성전건축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건축을 외면해서 경제가 힘들어지는 것이란 성경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성전건축의 중요성을 한때 한국 교회가 잘못 남용해서 지나치게 무리한 교회건축에 나설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교회건축이 꼭 필요한 교회들이 있었고 그런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속 인터넷 시대에 현재 한국 상황에서 무리한 교회건축에 나서는 것은 욕심이나 오판이 되어 당사자 교회와 리더를 무너뜨리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더 나아가 한국 교회와 한국 성도에게도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지금 한국 상황에서 ‘성전건축’의 개념은 ‘비전건축’이란 개념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각자의 장점을 주셨듯이 교회마다 각자의 장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이 샘이 나서 세미나에 무분별하게 참석해 자기의 본래 길을 잃기보다는 자기 교회에 최적화된 비전을 세워 그 비전을 잘 세워나가는 개념의 성전건축을 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건축의 비전은 어떤 비전보다 강력하고 구체적입니다. 눈앞에서 건물이 올라가고 그것을 위해 큰 물질적인 헌신을 하면 하나님의 집을 세운다는 뿌듯함과 감격이 실감됩니다. 게다가 무리해서라도 교회건축을 끝내면 90년대까지는 거의 예외 없이 대 부흥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교회건축의 비전을 세웠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무리하게 교회건축에 나서면 내부적인 반발과 외부적인 비난을 낳고 교회건축 후에도 부흥은커녕 경매로 넘겨지는 파멸적인 상황도 생깁니다. 얼마나 허탈한 일입니까?

옛날에는 교회건물이 경매로 넘어간다고 눈물로 호소하면 해결사 역할을 해주는 독지가 성도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눈물에 잘 감동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의식도 높아지면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더 선교하고 더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건축의 비전이 최강의 비전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성도들이 구체적인 비전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헌신도 덩달아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뜻 깊고 좋은 구체적인 비전을 새롭게 세우고 그 비전에 헌신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경제가 힘들어서 비전에 헌신할 여력이 없다고 하지만 신실한 성도는 비전에 헌신하지 않기에 경제가 힘들어진다고 여기고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할 새로운 비전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사모했던 교회건축의 비전 외에 각 교회들이 각자의 특징과 장점을 살려서 많은 영혼을 구하고 도울 수 있는 특화된 비전을 찾아 그 비전에 헌신해야 한국 교회도 살고 한국 경제도 살 것입니다.

< 결심만 해도 복을 주십니다 >

그처럼 백성들의 성전건축에 대한 열정이 약화되고 경제도 망가지면서 성전건축의 비전을 새롭게 할 필요를 느끼고 일어났던 두 명의 선지자가 바로 학개와 스가랴입니다. 먼저 학개가 주전 520년인 다리오 왕 2년 6월 1일에 백성들의 불신과 나태를 질책하는 첫째 말씀을 전합니다. “성전이 이렇게 황폐해졌는데 너희들만 고급 판잣집에 거하는 것이 맞느냐? 너희는 스스로의 행위들을 살펴보라(학 1:1-5).”

그 질책으로 백성들은 각성해서 곧 스룹바벨 총독을 중심으로 다시 성전건축에 나섰습니다(학 1:15). 그러나 번영시대에 솔로몬 왕의 주도로 건축된 솔로몬 성전과 비교해서 스룹바벨 성전은 너무 초라했습니다. 게다가 물자도 부족하니까 수시로 백성들이 낙심했습니다. 그래서 학개는 첫째 말씀을 선포하고 50일 후인 7월 21일에 낙심한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는 둘째 말씀을 전해서 또 성전 건축을 독려합니다(학 2:1).

그때 학개는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하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하라! 이 땅 모든 백성들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내 언약과 내 영이 계속 너희와 함께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학 2:4-5).” 그렇게 세 번이나 스스로 굳세게 하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당시 낙심의 기운이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처럼 낙심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굳센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격려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은 다시 힘을 얻고 성전건축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비전도 더러운 손길에 의해 이뤄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둘째 말씀 후 63일이 지난 9월 24일에 백성들에게 성결한 삶을 도전하는 셋째 말씀을 주신 후 결론으로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9). 그때 하나님은 성전 건축을 끝냈기 때문에 복을 주겠다고 하지 않고 성결한 마음으로 성전건축을 지속하겠다고 결심만 해도 복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지금 우리 경제가 아주 어렵습니다. 빈익빈부익부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생산부터 판매까지 자동화시스템이 진행되면서 일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빈곤층은 확대되고 청년실업도 큰 문제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도들이 깨끗한 마음으로 비전건축에 나서야 합니다. 그 비전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비전건축에 깨끗한 마음으로 나서기만 해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부터 내가 복을 주겠다.”

성전건축에 나서는 결심만 해도 복을 주시겠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큰 의미로 성전건축은 비전건축을 뜻하기에 성결한 마음으로 거룩한 비전건축에 나서겠다고 결심하고 실천의 발걸음을 내딛기만 해도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찬란한 비전을 성취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사람은 성취를 보지만 하나님은 성취 이전에 마음과 동기를 먼저 보십니다.

< 헌신할 때 복을 주십니다 >

그처럼 비전건축을 위해 나서기만 해도 바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 후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바로 성전건축을 진두지휘하는 총독 스룹바벨입니다. 그에게도 백성들처럼 위로의 말씀이 필요함을 아시고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백성들에게 셋째 말씀을 주신 같은 날에 따로 스룹바벨에게 넷째 말씀을 주셨습니다.

결국 학개서는 하나님이 학개를 통해 하신 네 번의 말씀으로 이뤄진 성경입니다. 첫째 말씀(1:1)은 다리오 왕 2년 6월 1일에 주어진 ‘성전 건축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말씀(2:1)은 다리오 왕 2년 7월 21일에 주어진 ‘성전 건축 중에 낙심한 백성들을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셋째 말씀(2:10)은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에 주어진 ‘성전 건축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성결한 삶을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넷째 말씀(학 2;20)은 셋째 말씀이 주어진 같은 날에 백성들이 아닌 ‘스룹바벨 개인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스룹바벨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본문 21-22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를 강력한 주권을 가지고 심판하는 분으로 묘사했습니다. 왜 그렇게 묘사했습니까? 스룹바벨의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까? 본문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세우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내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다윗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만큼 스룹바벨이 복된 존재란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를 세우고 인장으로 삼고 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대적들이 모함하는 상황에서도 자기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성전건축에 나선 스룹바벨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스룹바벨처럼 자기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교회를 세워가고 비전을 세워가는 헌신적인 성도를 누구보다 축복하십니다. 말라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은 그런 헌신적인 심령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넘치게 주시는데 정말 그런지 한번 지켜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도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행위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전해진다고 했습니다(막 14:9). 그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소중한 것을 기쁘게 드리고 나누고 베풀면 하나님도 기쁘게 그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드리고 나누고 베풀 줄 모르는데 많이 주어지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입니다. 드리고 나누고 베풀 줄 알아야 축복이 진짜 축복이 되고 영혼도 풍성해집니다. 살면서 가끔 영적인 빈곤을 느끼면 “더욱 드나베의 삶을 실천하라!”는 내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십시오. 지금 초라한 모습이라도 헌신을 각오하고 나서면 먼저 마음과 정신부터 가난과 억눌림에서 해방되면서 점차 사는 길이 열리고 그 길은 결국 축복의 대로로 변할 것입니다.

< 스룹바벨의 꿈을 가지십시오 >

하나님은 성도를 축복하실 때 여러 모습으로 축복하십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가 스룹바벨처럼 비전건축에 헌신해서 스룹바벨에게 약속된 축복을 같이 공유해 얻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란 이름의 뜻은 ‘바벨론에서 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났지만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음을 지킴으로 리더로 선택되고 더 나아가 사심 없이 헌신함으로 결국 성전건축의 비전을 멋지게 이뤄냈습니다.

이제 모두 스룹바벨이 되는 꿈을 다시 한 번 품으십시오. 자녀 중에 스룹바벨이 나오는 꿈을 꾸며 기도하십시오. 또한 우리 교인 중에도 스룹바벨이 나오는 꿈을 품고 계속 기도하고 기대하며 준비하십시오.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이름을 날리면서도 늘 겸손하게 하나님을 앞세우며 살고 또한 후방의 암행선교사로서 선교와 구제의 이름 없는 큰 손이 되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며 살겠다는 꿈을 가지십시오.

꿈은 소중한 재산입니다. 다른 것은 잃어도 찬란한 꿈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시간은 찬란한 꿈을 다듬고 격려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꿈을 품고 기대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꿈을 포기하지 않는 성도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상으로 도와주실 것입니다. 때로 환난과 역경이 닥쳐도 그것들도 꿈을 이루게 하는 멋진 재료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황이 힘들어도 마음을 가다듬고 꿈과 비전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러면 위기는 반드시 기회가 됩니다.

실패가 있어도 거룩한 비전을 계속 품고 “비전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믿음만 잃지 않으면 그 실패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성도에게는 사실상 실패가 없습니다. 그저 또 하나의 좋은 경험을 한 것뿐입니다. 즉 “이런 길로 가면 안 되는구나. 이렇게 살면 안 되는구나!”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 8:28). 그러므로 스룹바벨의 꿈을 포기하지 말고 시련이 있을 때는 더욱 꿈을 새롭고 뚜렷하게 하십시오.

성도에게는 천국 가기 전에 이 땅에서 어떤 소중한 일을 이루겠다는 각자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 그 비전을 이루게 될지 몰라도 자신의 피와 땀이 담긴 거룩한 비전의 열매를 남기고 천국에 가겠다는 꿈만은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처럼 늘 거룩한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뜻과 일에 더 관심을 기울이면서 헌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 자녀 중에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하는 위대한 스룹바벨을 반드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 문제가 주어지는 이유 >

그처럼 학개를 통해 4번의 말씀을 주시며 성전건축을 독려했지만 성전건축 과정에서 여전히 어려운 문제들이 계속 터졌습니다. 그러자 성전건축을 주도했던 총독 스룹바벨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학개가 넷째 말씀을 전한지 정확하게 2달 후인 주전 520년 11월 24일에 하루만에 8가지 환상을 스가랴에게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학개 다음에 나오는 스가랴서 1-6장의 말씀입니다.

그 환상 중에 다섯 번째 환상인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환상>이 있기 전에 천사가 스가랴를 깨워 질문했습니다(슥 4:2). “스가랴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 질문은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문제를 보지 말고 약속을 바라보고, 비참한 현실을 보지 말고 거룩한 비전을 바라보고, 자신의 무능함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자신의 죄와 허물만 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암시가 담긴 질문입니다.

그때 갑자기 스가랴의 눈에 순금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의 환상이 펼쳐졌습니다. 스가랴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천사가 환상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대신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스룹바벨에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고 하셨다.” 성전건축 문제로 힘들어하는 스룹바벨에게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안 되어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된다는 말씀을 전해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스룹바벨에게 힘을 주는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 4:7).” 아무리 큰 문제의 산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평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말씀은 동일합니다. 큰 문제가 있으면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고 비전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는 성공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고 하늘로 오르는 야곱의 사닥다리가 됩니다.

왜 하나님은 성전건축의 귀한 비전을 가지고 나가는데 큰 산과 같은 문제를 주십니까? 그것은 “네 힘으로는 안 된다! 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신실한 성도들은 간절히 눈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지켜주세요.” 그러면서 문득 이런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기도하는 모습과 은혜에 굶주린 모습을 원하시는구나!” 그것이 바로 문제가 주어지는 이유입니다.

왜 어떤 문제는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인데도 잘 안 풀립니까? 그런 쉬운 문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가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어떤 일은 어려운 일인데 너무나 쉽게 잘 풀립니다. 그때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느낍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영이 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때 엄청나게 큰일을 했습니다. 나귀 턱 뼈 하나로 1천명의 훈련된 대적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잘리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 두 눈이 뽑히고 초라한 종이 되어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성도에게 가장 큰 불행이 무엇입니까? 영력과 영안과 영감을 잃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힘과 능력이 있어도 성령이 떠나면 무력해지고 매력 없는 인생이 됩니다. 반면에 아무리 부족하고 연약해도 성령이 함께 하시면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능력 있고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천사는 큰 산이 평지가 될 때 스룹바벨 앞에서 그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스룹바벨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전건축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스룹바벨의 꿈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전을 향해 나가는 길에 큰 문제의 산이 있어도 그 산들이 평지가 되면서 결국 비전을 이루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것입니다.

< 비전건축에 나서십시오 >

지금은 말세입니다. 지구촌에 한 동안 큰 전쟁이 없었기에 뭔가 진짜 큰 전쟁이 올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점점 주님 오실 날이 가까이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일단 두려워하지 말고 호들갑도 떨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종말의 날을 계산하고 종말에 펼쳐질 상세한 미래에 대한 연구나 예언에도 몰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에 몰두하면 담대한 구원의 믿음은 약해지고 두려움이 생기고 종말장사꾼들을 의지하려는 마음만 커지면서 종말장사꾼들만 배불리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내일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할 일을 하며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면 됩니다. 특별히 3가지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첫째, 주님이 오시려면 유대인의 거국적인 회개가 필수적입니다(마 23:37-39). 그러므로 유대인의 회개 및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이 오시려면 땅 끝까지 선교해야 합니다(마 24:14). 그러므로 세계선교를 위해 힘써 기도하고 동참해야 합니다. 셋째, 주님이 오시려면 제 4성전의 회복이 필요합니다(살후 2:4; 사 2:2-3). 그러므로 제 4성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제 1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제 2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스룹바벨이 건축한 소박한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이 5백 년 이상 지나면서 초라하게 변하자 그 성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해서 거대하고 화려하게 지은 제 3성전이 바로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성전은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철저히 파괴됩니다. 즉 주후 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 장군이 4개 군단의 8만 군사를 몰고 와서 유대인 110만 명을 죽이고 9만 7천명을 포로로 잡아가면서 헤롯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흩어졌고 성전이 있었던 자리에는 나중에 이슬람 사원인 거대한 오말(Omar) 사원이 세워졌습니다. 이슬람교에서도 예루살렘은 3대 성지 중의 하나이고 그 중에 성전이 세워졌던 자리는 성지 중의 성지로 여깁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차지한 유대인들도 성전 자리에 세워진 오말 사원은 맘대로 부수지 못합니다. 전 세계의 눈도 있고 만약 그렇게 하면 모슬렘 국가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반발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말세에 나타날 제 4성전은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에서 통곡하며 기도합니까?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 중의 하나가 오말 사원 자리에 제 4성전을 세우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1991년 걸프 전쟁 때, 이라크의 후세인이 39발 스커드 미사일을 이스라엘을 향해 쏘자 정통 유대인들은 통곡의 벽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스커드 미사일을 통해 오말 사원이 부서지고 저 자리에 제 4성전이 세워지게 하소서.” 언젠가 역사적인 급변상황이 생겨 오말 사원 자리에 제 4성전이 세워지면 종말 시계는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예수님의 재림도 더욱 가까워질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특히 유대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고 세계선교에 힘써 동참하면서 제 4성전의 건축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제 4성전이 문자적인 의미로는 예루살렘의 감람산에 세워질 성전이지만 큰 의미로는 성도 각자에게 주신 거룩한 비전입니다. 그처럼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비전건축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결국은 종말을 대비하는 최적의 삶입니다. 항상 스룹바벨의 꿈을 가지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비전건축에 최선을 다함으로 결국 비전을 멋지게 이뤄내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주일설교(140119) - <성경66권설교파일에 완성된 학개전체설교 17편이 있습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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