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없이 살자! (요한복음 19:28-30)/(고)이중표 목사
사람이 이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한번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라.(히 9:17)
사람이 산다는데에 있어서는 모두다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죽는다고 할때는 슬프고 두렵고 모두다 마음속에 두려워 합니다.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응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반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자신에게 부정하고 왜 죽음이 내게있나 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사람은 나에게만 죽음이 있는것처럼 분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사람은 타협적으로 나를 살려주시면 내가 보다 선하게 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사람은 죽음을 부정할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에 대하여 다섯가지 반응에 연구한 크볼리서라는 심리학자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을 분별해서 그가 인터뷰한 결과의 반응 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남긴 유명한 명언들을 기록한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로부터 제자들 그리고 위대한 성자들, 시인과 정치인,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서 남긴 그 명언들.
이것들을 읽을 때마다 죽음에 대하여 고상한 표현들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 내게 잠이 오는구나 자러 가자" 이렇게 고상한 말을 한사람이 있고 또 성프렌시스코와 같이 "오 죽음의 자매여 어서오라" 이렇게 높은 경지에 도달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고 떨리고 그리고 심히 마음으로 슬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왔을 때 그는 전혀 우리가 상상할수 없는 한마디를 그는 남기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말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은 분명히 유대인들의 교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한다는 죄목을 걸었습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참담하게 한다는 죄목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목으로는 사형선고에 마땅한 것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의 법에 걸었습니다. 민중을 선동하고 세금을 거역하고 자칭 왕으로써 로마의 권력에 그는 반역하는자라고 하는 그런 고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토록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무죄가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빌라도였지만 그러나 민중들의 함성은 당신들이 예수를 처형하지 아니하면 로마의 황제의 신하가 아니다. 이렇게 떠들 때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으로 어쩔수 없이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오전9시에 자기 죽음의 형틀을 짊어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 골고다 언덕위에 주님은 못박히게 됨니다.
오전9시부터 오후3시까지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그의 창에 찔린 옷자국에서 피가 흐르고 머리에 가시관에서 피가 쏟아지고 땀도 눈물도 기름도 쏟아 그몸에서 다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오후3시에 운명할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그는 하늘을 향하여 한마디를 크게 외칩니다. "다 이루었다"하시고 고개를 숙이고 운명 하시더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늘말씀에 보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많은 무리들이 그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스폰지에 신 포도주를 묻혀서 입에 댔지만 주님은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께서 주시는 이 고난의 잔을 그는 친히 죽음으로 맞이 하면서 슬퍼하거나 그는 괴로워 하거나 절망하지 않으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로써 끝냈던 것입니다.
자기 죽음 앞에서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그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볼때에는 실패자로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로마의 사형수로 그십자가의 형틀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모습 나약한 죄인으로 강도들과 함께 죽는 그러한 모습을 볼 때 그는 분명히 실패로 보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또 권력을 누려본 일도 없으며 좋은 장막에 살만한 거처도 없었고 세상적인 명예도 없었습니다.
그가 있었다고 한다면 죄인들의 친구였고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었습니다. 그는 학력도 없었고 특별한 학위도 없었으며 그는 이세상에서 누가 우러러 볼만한 평판을 가진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이레 최고의 성공한 사람으로 우리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연구하는 학문이 도서관에 참으로 수없이 메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목숨을 걸고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수천만에 이르고 있는것입니다.
재산도 물질도 받치면서 주님을 향해서 따르면서 '오 나의 주 나의 성자 예수여 나의 생명 나의 전부 나의 행복이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눈물을 쏟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위대한 성공자 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역사에 기리기리 아름답게 우리에게 기억되면서 우리의 가슴을 울려주고 우리의 심금을 흔들면서 역사를 진동 시키고 있습니다. 분명히 당시에 예수 십자가에 달릴 때 실망한 지사들도 엠마오로 돌아가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줄로 알았노라.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죽은지 사흘째요. 이렇게 슬픈기색을 띨정도로 그에대한 실망을 했던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머라 말하던가네 그는 친히 자기 죽음에 대하여 다 이루었다 나는 성공했다 누가 머라든 누가 멀하든 머라고 말하든 나는 잘살았다. 이렇게 자기자신에 대하여 말을 했던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마지막 자기죽음 순간에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할수 있다 한다면 내가 마지막 죽는 순간에 '나는 참 잘살았다'. 이렇게 말할수 있다면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죽음으로 비젼을 성취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나름대로 이런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사는데 그 목표가 어떤사람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어느 대학을 진학한다는 목표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해야한다는 목표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사업을 시작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목표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그런 목표도 있어야 되겠지만 분명한 비젼에 대한 성취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가르켜서 참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목표가 달성될 때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성공했다. 좋은 취직을 했을 때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가치관의 얘기고, 오늘 예배를 하는 예배를 드리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여러분들은 비젼의 성취를 하고 있을 때 성공했다고 하나님도 인정을 하고, 나도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비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주신 소원입니다. 내 욕망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게 내 재능과 내 기질과 그리고 내 상황과 환경과 그리고 내게 있어서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기대하시는 바 이루실 뜻이 바로 비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목표를 이룬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결혼해서 후손도 없었고, 돈을 벌어서 그는 땅에 쌓아둔 것도 없었으며 정치를 해서 정권을 잡은 일도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무런 업적을 남긴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죄수로 괴수로 죄인의 괴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는 죄인중에 죄인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비젼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비젼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보내신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중에서 하나두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그를 살리시는 것이라. (요 6:37)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수가성 우물가에 한 여인과 몹시 그는 피곤한 가운데에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지아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나갔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을 구해서 가지고 와서 랍비여 잡수소 말할 때 내겐 먹을것이 있느니라. 선생님 누가 갔다주었습니까. 내 양식은 내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신 뜻을 이루는 것이 자기가 먹는 양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식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양식은 나를 만족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내게 힘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나를 만족케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양식으로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대학을 다니는 한 대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목표가 뭔가'
'예, 서울대학 이옵니다.'
'그래, 서울대학 들어가야지 공부열심히 해서 들어가소.'
'그 다음 목표가 뭔가'
'예,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할려고 그래'
'예, 판검사를 하던지 변호사를 하던지 그럽니다.'
'해야되 열심히 공부하소'.
'그 다음 목표가 뭔가'
'예, 이제 출세를 하던지 아니면 이제 변호사로써 돈을 많이 버는것입니다.
'그 다음 목표가 뭔가'
'예, 부잣집 딸하고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목표가 뭔가'
'예 계속 돈을 버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벌 작정인가'
'몽땅 벌 작정입니다.'
'그 다음엔 할 일이 뭐라고 생각 되는가.'
'그 다음 목표는 늙으면 은퇴해서 세계일주나 하고 편안히 먹고 살려고 생각 합니다.'
'살기만 할것인가'
'때가 되면 죽겠죠.'
'그래 그걸로 끝나는가'
'더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아 그래 자네 목표는 참 한심스럽네. 분명한 비젼을 가져야 될것이거늘 자네는 하늘이 준 비젼이 없네 겨우 땅위에 먹고 살고 그렇게 먹고 살다 죽을 바에야 뭣땜에 공부를 그렇게 죽어라고 하는가 적당히 다같이 하소. 그리고 편히 살다가 가소.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그렇게 살바에는 그게 낫겠네.'
오늘 우리는 분명히 비젼과 욕망은 다름니다.
욕망은 나의 소원이요. 비젼은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욕망은 내 정욕의 산물이고 비젼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욕망은 자기가 개인적인 야욕을 성취하는것이고, 비젼은 공동체 나라와 민족, 이웃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하는 꿈입니다.
욕망은 목표를 세워 성공 하는것이고 비젼은 자기의 위대한 인격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욕망은 의욕의 성취이나 비젼은 사명의 성취인 것입니다. 사명감을 가진 자만이 비젼이 있는 것입니다.
욕망은 죽음으로 끝나나 비젼은 죽음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단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사는것도 중요하지만은 높은 비젼 하늘로부터 준 소명을 가지고 그 소명을 성취해가는 목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한 그 그리스 헬라어의 뜻은 "τετελσται" 라는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종들이 주인의 명령에 일을 다 마치고 주인에게 가서 "τετελσται "주인님 다 했습니다. 이 뜻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제상들이 하나님 앞에 재물을 드릴 때 흠없고 점없는 깨끗한 재물을 자지고 "τετελσται" 주님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재물을 주께 드리나이다.
또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그 수없는 세월을 자기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그의 청사진을 가지고 그림을 다 완성한 후에 "τετελσται" 완성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또 "τετελσται" 는 장사하는 사람이 이제 돈을 다 빚진 것을 갚았다. 남의 돈을 꾸어쓴 것을 다 갚았다고 말할 때 "τετελσται" 다 갚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오 아버지여, 나는 종으로 이땅에 오소서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고 다 완성 했습니다'. "τετελσται"
주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화목 재물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로 만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 점없고 흠없는 어린양 예수 "τετελσται" 나는 재물이 되옵니다.
주님은 미래의 이 천국을 꿈꾸면서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머릿속에 상상하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메시아로써 완성 하면서 "τετελσται" 그러면서 우리의 죄값을 친히 치루시고 모든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 시면서 '아버지 내가 십자가 상에서 피흘림으로 만백성의 죄값을 다 이빚을 청산 하나이다.' "τετελσται"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이 주님의 송구한 마음이 우리속에 살아있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한국 기업인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랜드 회사의 박성수 집사입니다. 박성수 집사님의 제가 이랜드 쎄미나에 가서 만났을 때 그는 키도 작습니다.
인물로 봐서는 그는 그렇게 사장할만한 인물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 기독인으로 또 실업인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는 것은 그의 비젼이 탁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업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한국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기업인이 되게 하옵소서' 애국자 아닙니까. 돈벌어서 사업을 확장한다. 남의 사업을 인수한다. 이것이 목적이 아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세금을 많이 낼수 있는 기업인이 되게 하오소서. 이게 얼마나 위대한 비젼입니까.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사업하면서 나는 이제 돈을 번다. 공장을 늘린다. 이런건 세상사람들이 하는것이고, 기독교인 답다고 한다면 '주여 하나님을 위해서 십일조를 많이 바칠수 있는 기업이 되게 하오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의 비젼입니까.
왜, 하나님을 위해서. 그러면 자동적으로 십일조 많이 바치려면 사업이 잘되야 할 것 아닙니까. 돈 잘벌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은 필요 없는 거예요. 그럼 목적은 분명히 주님을 위해서 많이 바칠수 있는 그 비젼 속에서 세웠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죽음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은 생각해 보면 자기 생에 모든 걸 다 바쳤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고 인생을 마칠때에 누구든지 어떤 의미에선 목숨을 바친것입니다.
죽는 다는 것은 어떻게 살았던지 자기 산데로 목숨을 바치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목숨을 바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자기의 목숨이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목숨 바치고 일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헨릭슨" 이라고 하는 분은 이런 책을 썼습니다. 「성도여 바라보라 당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이런 책을 쓰면서 두가지 종교 계획을 얘기 했습니다.
일차 종교 계획은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을수 있도록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이렇게 종교 계획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두 번째 종교 계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옛날은 목사는 사제나 성가대 찬양이나 이런일만 거룩한 성역으로 알았지만 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공장에서 또는 직장에서 무슨일을 하든지 그게 바로 성직이라는 것입니다. 풀타임, 교회와서 예배할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 사역이 다 풀타임, 성역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숨걸고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땅을 가질때에도 병든자를 고칠때에도 기적을 행할때에도 마지막 죽을때에도 그의 목숨은 전체가 다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할 일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곰곰이 자기자신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내가 글을 쓰거나 학교에서 뭘 가르치거나 내가 어디가서 청소부를 하던지 뭘하던지 간에 나의 모든일은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있느냐 아니면 시시한것에 목숨을 걸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예수님의 "τετελσται" 의 귀한 정신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간 분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서 내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τετελσται" 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살아가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목숨을 걸고 십자가에 죽었던 "다 이루었다" 하던 그정신으로 나는 살아가노라. 예루살렘으로 가노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죽음직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주께서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이 내게만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거기 달려갈 길을 마치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달려가는 길, 어디로 가든지 주님의 뜻을 다 이루려 했습니다.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살든지 사는 것은 목숨을 건 것입니다. 그런데 시시한 것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리차드 칼슨"이 쓴 「우리는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입니다.
사소한 일에 하찮은 일에 신경쓰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일에 목숨걸고, 이웃차가 달리니까 자기도 달려 목숨걸고 옆에 사람이 뛰니까 자기도 뛰고 사고한일에.
그러면서 그책의 결론은 우리는 모두다 오늘이 내생에 마지막인줄 알고 살아야 한다. 오늘 생애 마지막인줄 알고 산다면 시시한 일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 후회 없이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그 말속에는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말입니다. 인생의 실패는 후회하고 죽는 것입니다. 후회는 실패한 인생의 고백입니다.
그럼으로 후회없이 인생을 끝낼수 있는 삶이 되기 위해 자기자신을 지금부터 정리해 가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는날 세가지를 후회한다고 말합니다.
많이 참을걸 내가 참지 못해서 흥분하고 열내고 조금더 참을 것을 두 번째 조금더 배풀 것을 내가 있을 때 배풀었으면 좋았을 것을 다 부도내고 쓰지도 못하고 남들 주지도 못하고 다 나가 버릴걸 내가 이렇게 어리석게 살았구나. 후회하고, 세 번째는 인생 짧은데 서로 재미있게 살 것을 부부간에 한번 웃어보지 못하고 티격태격 열내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살아야 할 것을 그렇게 못산 것을 후회하고 끝낸다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남의 일 아닙니다.
서로 그렇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생 짧은데 그렇게 못산다는거 얼마나 후회스런 일입니까.
어느 재벌이 임종을 앞두고 아들들을 다 불렀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돈도 많이 벌었고, 명예도 얻었고, 그리고 권세도 가지고 살았던 분입니다.
아들,딸들 다 모아놓고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잡더니 이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여기 죽어가고 있다. 그 아들,딸들이 '아버지, 아버지는 얼마나 성공하신 분입니까 아버지는 얼마나 이땅에 계시면서 사업을 했고 인생을 성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러워 하지 않습니까. 아버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다. 이세상에서 내가 돈 모으느라고 양심을 잃었고. 명예를 얻기위해서 친구를 버렸고, 출세하기 위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세상 영광을 얻고자 하나님도 외면하고, 신앙도 제대로 갖지 못한체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죽는날 나를 돌아보니 남은 것을 아무것도 없고,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가 생각하니 심히 후회스럽다.
하면서 눈물을 흘려요. 너희들이 아버지를 보면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형제간에 재판해서 돈을 빼앗고, 이렇게 살아온 것이냐가 부끄럽다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생각하면 헛된일에 인생을 바치고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기가신이 불쌍해 지는구나. 하는 그 고백을 아들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후회하고 있습니까. 내가 살아온 것이 무엇이 잘 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자신에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온 생애가 어떤 것이지.
한번은 예쁘게 생긴 아가씨가 저에게 조용히 찾아 왔어요.
'목사님, 뵙기를 원합니다.'
'무슨일인데'
'저를 쫓아다니는 남자 때문에 못살겠어요. 저아니면 죽는다고 하니 목사님, 결혼을 해야 합니까 안해야 합니까.'
'그래, 내가 말해주마. 한여자 때문에 목숨을 거는 남자하고는 절대로 결혼 하지 말아라. 사람이 태어나서 여자 때문에 죽는데서야 말이 되겠나. 세상에 여자가 한둘이냐. 너 때문에 죽는다는 남자하고 니가 살아서 되겠나. 또, 남자 때문에 죽느냐 사느냐 하는 여자 그런여자도 조용히 끝내야 되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때에 남녀가 쓴물먹이면 냉수먹고 맘돌리면 되지 그것가지고 죽느냐 사느냐 할것이 뭐있어요. 거기다 목숨을 거는 사람 이미 볼 것 없습니다.
부모들이 자식들 보고 너 이번에 대학 못들어 가면 죽어. 그 어머니도 싹수가 노란 여자죠. 한번 떨어지면 재수하고 재수 떨어지면 삼수하고 삼수도 안되면 그만두지. 대학 나왔다고 대단한거 있나요? 그냥 이래도 살고 저래도 한세상 사는데, 비젼을 가지면 되죠.
한번은 권사님 가운데서 나에게 조용히 '목사님 큰딸 공부 잘해서 칭찬해주고 온갖 다해주어서 대학나오고 유학을 갔어요.
신랑도 공부 잘하는 신랑만나서 아들하나 낳았길래 나한테 맡겨서 내가 등이 굽도록 없어주고 돌보아 주었죠. 5년만에 박사 학위 받아가지고 돌아오면서 쵸콜릿하나 사가지고 왔데요.
그리고 또 대학 교수가 되기 때문에 애기보는 할머니가 돼서 허리가 굽었어요. 둘째딸은 공부도 못한다고 구박하고 그냥 천대했는데 공장다니다가 신랑을 만나서 결혼해서 철철히 옷사가지고 명절 때 추석때 오면 어머니 등을 만지면서 '엄마, 애기 보다가 허리가 많이 굽었네.'하면서 태국에 관광 보내줘서 갔다가 선물하나 사와서 주면서 '목사님, 공부잘한다고 되는게 아니더라구요. 공부 못해도 사람이 되어야지. 예수를 잘 믿더니 효자가 되어가지고 공부 못하는 자식이라도 효자가 되니까 부모의 은혜를 알고, 눈물이 납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다 이루었다"이말이 무슨말입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천지만물을 다 이루니라.(창 2:1) 무슨말입니까. 은혜로 살아라 그말입니다.
또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 내가 십자가에 피흘려 죽느니 죄지은 너희는 이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라. 은혜로 살아라.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속에 우리가 받아야할 은혜는 딱 하나입니다.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늘의 효자가 됩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온통다 하나님의 은혜요.
십자가를 바라 볼때마나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주 그 은혜 고마워 날마다 눈물 뿌립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가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설때마다 내게 베푸신 주님의 큰 은혜"다 이루었다" 그 은혜로 살아라.
천국도 내것이오, 하나님의 영광도 내것이며, 모든은혜가 다 내것이다. 이 은혜를 받는 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 하시는 주님과 함께 내가 이땅에 살면서 부모님께도 효도하며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내게 맡겨준 일 후회없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효자 이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하시는 주님 음성을 듣는 모든 성도의 하나님의 뜻인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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