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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달라지는 인생! (딤전 1:13-15)

by 【고동엽】 2021. 12. 21.

은혜로 달라지는 인생

 

딤전 1:13-15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

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제 생애 가운데 가장 큰 은혜입음은 “내가 예수를 알게 된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두고두고 생각해 봐도 이것은 저에게는 일대 사건입니다. 이 만남은 내 생애에서 가장 큰 행운이고 은혜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면 이것이 어찌 나만의 일이겠습니까. 예수를 알고 난 후 변화 받은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김익두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이분이 사람들에게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뭘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김익두 목사는 “나를 보고 믿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내가 변한 것을 보면 예수를 믿을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는 그만큼 예수를 만나고 나서 크게 변화된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 한번은 부흥회를 하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그때 옆자리에 노인 한분이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데 자기를 향해서 연기를 뿜어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피해 앉으면 따라와서 곁에서 연신 연기를 뿜어냅니다. 그래서 참다못해 그 노인은 밀쳤는데 그만 넘어져 담뱃대가 부러졌습니다. 그때 그 노인이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말하기를 “그러면 그렇지 김익두가 별수 있나”하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김익두가 “나를 아느냐”고 물으니 “언젠가 자네에게 맞아 죽을 뻔 했던 사람인데 듣자니까 김익두가 변했다 해서 일부러 정말 변했나 시험해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잘못했으니 용서하라”고 하자 노인은 “그만하면 되었네, 예전 같았으면 내가 오늘 자네에게 맞아죽었을 것이네”하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참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결과입니다.

백락준은 아버지가 박수무당이었습니다. 그분도 예수를 몰랐더라면 분명 무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그는 과감하게 예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나고 나서 그는 후에 이 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인생을 이렇게 뒤바꾸어 놓습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바울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바울도 예수를 알고 나서 180도 변화된 사람입니다. 가던 길을 완전히 되돌아 유턴해 간 사람입니다. 변해도 이렇게 변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변화한 후에 바울이 본문에서 이렇게 간증합니다. “나는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그 말은 “나는 전에 깡패였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전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고 박해자 핍박자 쉽게 말하자면 깡패였다.” 그 말입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진두지휘했던 사람입니다. 깡패도 그런 깡패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을 입어 용서받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고백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간증했습니다. 참 극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으면 사람이 이렇게 변화하고 바뀝니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게 되면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때 뜨는 눈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보는 눈”이 뜨입니다.

 

예수를 만나서 깊은 체험을 하게 되면 이 세상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이 세상이 정떨어지고 비관되고 사기와 거짓과 부패와 소란으로 가득 찬 소망 없는 세상으로 보였는데 이렇게 변화하고 나면 이 세상이 망할 세상이 아니고 살만한 세상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시골은 시골대로 도시는 도시대로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고 섭리가 있고 은혜가 있고 소망이 있는 한번 살아볼만한 세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사람이 은혜를 입고 나면 이렇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오는 찬양이 495장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던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이 찬송은 버틀러(Butler)라는 사람이 예수를 알고 은혜를 받고 나서 변화된 마음으로 작사한 고백입니다. 얼마나 소망적인 눈으로 바뀌었습니까. 일반사람들 특히 삶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 부정만 본 사람들, 비관자들은 이 세상이 슬픔 많은 세상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는 말마다 비관적이고 느낌마다 불행한 모습만 생각되고 보일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불의, 부정, 실망스런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소망적인 부분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고 나면 평소에 보이지 않는 깊은 부분들 희망적인 부분들을 보게 됩니다. 평소에도 그런 부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없었던 것이 아니고 아주 작게 보이거나 안보였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면 평소에 안보이던 곳이 크게 확대되어 보이고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침침하고 어둡게 느껴지던 세상이 밝고 환하고 소망적이고 한번 살아볼 만한 세상으로 열려진 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를 입고 보면 세상은 그냥 있는데 내 마음이 변하고 바뀌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은혜를 입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이 슬픔 많던 이 세상도 천국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을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사람은 날마다 사람들과 만나고 교제하고 친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좋게 보이는 것만 아닙니다. 살다보면 좋은 사람도 있지만 보기 싫은 사람, 미운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사람 중에는 아주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면 평소 가까이 하지 않던 사람들도 예쁘게 보이고 그 영혼이 귀하게 여겨지고 전에는 무관심했던 사람이었는데 내가 은혜를 입고 보니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내가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얼마나 큰 변화입니까. 그것이 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내 마음으로는 흉내도 낼 수도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이 은혜를 입으면 먼저 “너를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비로소 “너의 값을 알게 되고 너의 존재를 알게 되고 너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 너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눈이 뜨여야 관계가 좋아집니다. 내가 은혜를 입어야 너를 보고 너를 생각하는 눈이 뜨이게 되어 살아가면서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소란한지 아십니까. 이 너를 보는 눈이 감겨져 있어서 너의 존재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갈등이 있는 집안, 관계, 이웃을 보십시오. 모두 이 눈이 뜨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관계가 껄끄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 관계들이 얼마나 소중한 관계들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 소중한 관계를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눈이 뜨이질 않아서 그렇습니다. 은혜를 입어야 비로소 너를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이 뜨입니다.

 

내가 나를 보는 눈이 뜨이면 내가 갑자기 날씬해 보이고 예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 눈이 뜨이게 되면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똑같은 나이지만 내가 은혜를 입고 보면 나의 삶, 나의 존재, 나의 인생의 소중함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소중한 존재로, 소중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바치고 드리고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소중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태도가 참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디라고 삶을 포기하고 인생을 포기하고 자신을 증오하고 그렇습니까.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값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의미도 가치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볼 때 한탄스럽고 불행하게 보이고 나는 왜 태어났는가 하는 비관하는 마음도 들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 보면 흑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참 불쌍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왜 저렇게 만드셨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또 참 무지하게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값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들을 값없이 대하는 것입니다.

흑인가운데도 큰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말콤 엑스 같은 분은 참 훌륭한 흑인 지도자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 민권운동가로 존중받는 흑인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말콤 엑스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이 분이 젊어서 인생을 참 많이 비관했다고 합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검은 피부를 보며 자신을 혐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제로 자신의 검은 피부를 하루 종일 닦아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다고 검은 피부가 희어집니까.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마음을 움츠리고 비관하면서 집안에 들어앉아 두문불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을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 뜨인 눈으로 그는 자신에게는 무한한 값이 부여되었고 소중한 하나님의 의미를 담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그가 고백한 말이 “black is beautiful"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셨으니 검은 피부도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깊이 있는 깨달음이고 재발견입니까. 그러고 나서 이분이 어깨에 두 날개를 단 것처럼 훨훨 날아다니듯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상을 잘 발표해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고 보면 이런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감추어졌던 소중한 뜻을 발견하게 되고 심오한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값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 밝은 생각과 밝은 마음을 그대로 책으로 써서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그 결과 소망을 잃고 살아가던 수많은 흑인들이 그 책을 통해서 격려를 받고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값입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만나서 주어진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은 참 좋은 배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똑똑했습니다. 공부도 잘했습니다. 좋은 대학에서 공부도 했습니다.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앞길이 훤히 보장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았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좋은 조건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조건이 아주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조건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소중하고 우월하게 하고 우상일는지 모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조건들이 별로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알기 전에는 그 조건들을 대단히 자랑스러운 조건으로 알고 만족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조건들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조건을 자랑하면 그는 보란 듯이 나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화려한 조건들을 자신 있게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알고 난 후에는 그 좋아하고 자랑하던 조건들을 모두 분토와 같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미련 없이 버렸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알고 난후에는 그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값이 없는 것들이 아닙니다. 모두 값나가는 조건들이고 간판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상당히 위력 있는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은혜를 받고 난 후에는 그 은혜에 비해 보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고 그 말합니다. 그 보다 숨겨진 진정한 값을 알고 의미를 알고 가치를 알고 나니까 그런 것들은 별로더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들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전도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깨달음이 없이 바울이 그 험한 전도자의 길을 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눈을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보는 눈을 뜨는 일이 가장 좋은 은혜입니다. 이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주어진 값을 알고 느끼게 되고 나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눈”이 뜨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오늘 청소년들에게 가장 큰 고민은 “장차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장래문제라고 합니다. 오늘 청소년들에게 장차 미래에 나는 어떤 목표를 갖고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합니다. 아직 결정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결정하지 못한 상태가 가장 괴로운 때입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장차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일찌감치 나의 미래를 결정하고 나니까 그런 고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청소년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래 계획이 무엇이냐”하고 물으면 “그런 복잡한 질문은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합니다. 나에게 그런 은사, 달란트,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일찍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르면 상당기간 방황하게 되고 갈등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직업도 단순했습니다. 농사를 짓던가 아니면 장사를 했습니다. 아니면 선생하든지 면서기 하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넥타이도 가게에 가 보면 몇 개 걸렸고 결혼을 해도 동네나 이웃동네에 처녀 총각이 몇 명뿐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고르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많습니다. 사람도 많고 직업도 다양하고 물건도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갈등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으면 이것을 분수 있는 눈이 뜨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밝히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바울은 야망가였습니다. 바리새인 사회에서 크게 출세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메섹을 걸을 때 그를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련 없이 주저하지 않고 사도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도의 길을 걸으며 한번도 회의에 빠지거나 갈등을 느끼지 않고 누구보다 행복하고 확신 있게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참 바울은 여한 없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 마지막에서 가서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 그 말은 “나는 이 길을 만족하게 걸었다” 그 말입니다. 얼마나 성공적인 인생입니까. 이것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나는 이 길을 만족하게 걸었다, 후회가 없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그것이 성공한 삶입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로 부름 받아 달라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삶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가치 있고 소중하게 나를 활용하고 인식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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