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꾸는 기도> 역대상4:9-10
최근 미국에서 자그마한 신앙서적으로서 수백만 부가 팔리는 엄청난 베스트 셀러가 된 화제의 책이 있습니다. 브루스 윌킨슨(Dr. Bruce Wilkinson)이라는 목사가 써서 작년에 출간된 이 책은 어느새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나왔는데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야베스는 성경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역대상4:9-10에서 단 한 번 언급되고 지나가는 인물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도 본문 10절에서 보듯이 아주 짧고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윌킨슨 목사의 이 책은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해설서이기도 하고 그 또한 야베스처럼 기도함으로써 야베스와 같이 하나님의 엄청난 복주심을 체험한 자신의 사역에 대한 간증서이기도 합니다. 그는 야베스의 청원 가운데서 특히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라는 청원을 자신의 기도제목으로 삼았는데 실제로 그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지를 경험하고 있다고 이 책에서 말합니다. 이 작고 간단한 책자가 판매 부수 수백만의 베스트 셀러가 된 것뿐 아니라, 각 개인과 가정이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라는 것을 돕기 위해 그가 매달 발간하는 열 가지 잡지가 무려 1억 부의 출판 부수를 돌파했고, 1998년 1월에 시작한 "WorldTeach"라는 사역은 15년 계획으로 한 사람 당 5만 명을 맡아 성경을 가르칠 교사 12만명을 양육하는 비젼을 갖고 있는데 이미 이 사역이 계획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계산해 보니까 12만 명이 5만 명씩을 가르치면 총 60억의 사람이 성경을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말 그대로 "WorldTeach", 세상을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어떤 선교지도자는 이 "WorldTeach"사역이 역사상 그 어느 기독교사역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온 것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이 책에 있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다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이 책이 이처럼 놀라운 성공을 거둔 것은 지극히 미국적인 현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저자가 말하는 대로 야베스의 기도 같은 기도의 능력, 즉 그런 기도에 놀랍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야베스 기도"의 전도사라고 불려질 수 있을 저자의 신앙과 그의 복음사역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또 그러한 사람의 글에 열광하는 미국의 그리스도인들과 서구사회 속에서는 그래도 아직 미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순박한 복음주의 신앙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폭발적 판매현상이 제게는 미국인들의 전통적 개척정신과 적극적 사고와 자본주의적 물질선호의식과 그들의 특유한 단순성(naivety),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적절히 배합하여 자극할 줄 아는 탁월한 상술이 곁들여진 결과로 보여졌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책에 관한 이야기로 오늘의 설교를 준비한 것은 이 책을 읽으며 제 마음 속에 일어난 우려 때문입니다. 그 우려란 다름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기복주의적 색채가 짙은 신앙체질과 사고경향을 지닌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피상적으로 이 책에 관해 듣거나 이 책이 미국에서 기록적인 판매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고무되어서 그 동안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반성의 제목이 되었던 물질주의적이며 세속적인 기복주의에 면죄부를 주고 그 기복주의로 돌아가려 하는 바람이 불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베스가 하나님께 '내게 복을 주시고 나의 땅을 넓혀주십시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했다, 또 오늘날에도 윌킨슨 목사가 야베스처럼 기도하니까 엄청난 복과 성공을 그대로 주셨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면 그렇지 우리도 그저 뭐든지 우리가 원하는 것 있으면 달라고 기도만 하면 돼, 우선 넓은 땅을 달라 하자, 아니면 지금 갖고있는 땅값이 팍팍 뛰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왜 기도를 하지 않느냐, 기도만 하면 다 될텐데" 등등의 생각으로 이 땅의 교인들이 가득차게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뭐든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주는 요술방망이로 알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저는 앞에서 윌킨슨 목사의 "야베스의 기도"가 폭발적 판매성공을 거두게 한 복합적 요인들로 미국인들의 전통적 개척정신과 적극적 사고와 자본주의적 물질선호의식과 그들의 특유한 단순성(naivety),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적절히 이용한 상술을 든 바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인 "적극적 사고"가 한국교회에 미친 결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웬만한 교인들은 "적극적 사고"를 간판구호(catch phrase)로 삼아 엄청난 목회성공을 거둔 미국의 목회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목사님 가운데서도 그 목회철학을 그대로 도입해서 그보다 더 큰 목회적 성과를 거둔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어떤 교계의 충고나 사회의 여론도 무시하고 밀어부치는 "적극적 사고"가 한국교회 전체에 끼치는 폐해와 사회에 남기는 부정적 영향이 얼마나 큰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야베스의 기도"가 한국에서는 긍적적 영향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그래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분명히 읽어보았지만 윌킨슨 목사는 어디에서도 자기가 살 집을 크게 해주고 자기 소유의 땅을 넓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넓혀달라고 한 것은 땅이 아니라 그의 복음사역의 기회였습니다. 즉 그는 결코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그의 지역을 넓혀주실 것을 기도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 일을 구하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위한 그의 활동영역을 확장시켜달라고 기도했음을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자체에로 눈을 돌리고 그 속에서의 야베스와 그의 기도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야베스는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역대상의 첫 아홉 장은 아담에서부터 출발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기까지의 히브리 민족의 각 지파들에 대한 공식적인 계보를 싣고있습니다. 그 가운데 야베스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 한 족속의 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4장에서 야베스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9-10절 전후해서는 유다의 자손들의 이름들만, 다른 설명은 거의 없이, 열거되고 있는데 야베스를 말할 때에는 느닷없이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불쑥 강조하며, 그의 어머니가 왜 그에게 야베스라는 이름을 주었는지 설명도 붙이고, 그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전 역사 속에서는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같이 아주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고 그에 관한 기사는 더 이상 없어서 역사 속에 거의 파묻히고 말았지만, 당대에는 상당한 인물이었으며 사실은 오늘날에도 기억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암시합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인물이 되게 했으며 그를 전후한 족보상의 이름들의 지루한 나열 속에서 특별한 조명을 받게 만든 것이겠습니까?
윌킨슨 목사도 그랬지만 우리는 자연히 그의 기도에 먼저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의 기도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 10절에 보면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개역한글판에는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로 되어있습니다)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기록 때문에 땅이든 뭐든 그저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다 주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은 다 주셔도 땅은 무조건 안 주신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땅도 주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무슨 목적으로 구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베스가 왜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기도했겠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야베스"라는 그의 이름에 눈을 돌려보아야 합니다. 본문 9절은 그가 왜 "야베스"라 불리우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여기서 "수고로이 낳았다"로 옮겨진 말을 다른 번역성경에서는 "고생하며 낳았다" 또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았다"라고 옮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또는 슬픔)을 준다", "슬프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야베스는 고통을 의미하는 말과 연관된 이름에 의해서 장애를 안고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성격과 경험에 영향을 끼친다고 여겨지던 시대에 살았던 야베스에게 그의 이름은 늘 그에게 무겁고 두려운 짐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통" 또는 "슬픔"과 관련있는 이름을 달고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를 고통스럽고 슬프게 했을 것입니다. 이름으로 인한 그의 고통은 이중적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즉, 첫째로는 그 이름 때문에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모르는 운명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 늘 짓눌려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는 "고통을 준다", "슬프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그의 이름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불행에 대한 두려움과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피하고 멀리함에 따르는 소외와 손해로 인한 고통은 더욱 그를 불안과 절망 속에 빠뜨리곤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오직 하나님께 매어달려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처지를 고려하며 그의 기도를 이해해야 하리라 봅니다. 그의 기도는 단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욕심에서 부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 소유의 땅을 넓혀 주시며 그저 무조건 편안히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의 이름 때문에 오는 소외와 무시당함을 면하며, 무엇보다도 자기 이름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불행을 안기게 될 그 환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실 것을 쉬지않고 간절히 기도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사람들로부터 그의 어느 형제보다도 존귀히 여김을 받게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이렇게 야베스의 기도는 자칫 자신도 불행하고 남도 고통스럽게 할지 모르는 그의 인생을 바꾸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드린 기도로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할 수 있었던 삶을 복된 삶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남들로부터 멸시 당하고 소외되기 쉬웠던 그의 삶을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삶으로 바뀌게 한 것입니다. 그는 그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인생만 바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생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참된 기도는 자신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기도나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야베스에게서 배울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성찰을 통해서 그는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하나님을 믿고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기도하되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바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땅을 걸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인생만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이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인생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이며,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해주시고 복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실 때에 사람은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의 삶 없이 존귀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바른 기도는 모든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야베스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으며 하나님에 의해 복되고 존귀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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