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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7,537편)〓/유기성 목사 설교

사명을 위하여 울어 보았는가? /사도행전 17장 1~9절

by 고동엽. 2023. 1. 24.

2009.10.11(사도행전 강해 37)

 

사명을 위하여 울어 보았는가?

사도행전 171~9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어제 한 TV 퀴즈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남녀노소를 망라하여 국민 의 표본이 될만한 300명을 모아놓고 현장에서 즉석 앙케트 조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퀴즈 도전자가 맞추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질문이 만약 당신이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독립군이 되었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1/3이 못되는 89명이 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결과를 보고 사회자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예상보다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독립군이 되었겠습니까? 아마 마음이 흔들리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우리 자신이 애국자라고 생각하지만 생각만 그렇지 실제는 아닙니다. 축구 시합이나 야구 시합 때 열광한다고 다 애국자는 아닙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올 때 내 이익을 구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서 살 수 있는 준비가 되어져있어야 애국자입니다.

고난의 길이라도 나라를 위한 길이라면 그 길을 갈 수 있어야 애국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생명도 모든 소유도 다 내놓을 수 있는 결단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사명 없이 신앙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고 희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길게 내다보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1년 뒤, 10년 뒤, 100년 뒤 자손들에게까지 정말 복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삶을 눈 앞에 있는 것만 판단하면 안됩니다. 1년 뒤를 생각하고 10년 뒤도 내다보고 또 100년 뒤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판단하고 오늘 내게 되어지는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에 복음이 전해져 교회가 세워진 과정에 대한 짤막한 기록입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에서 두 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빌립보에 교회를 개척하고 사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가서 3주간 머물며 회당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거칠고 험한 곳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시기심에 가득한 유대인들이 저자의 불량한 자들을 동원하여 사도 바울이 머물고 있었던 야손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복음 전도를 끈질기게 방해했습니다.

이때 마침 바울과 실라가 외출하고 없었으므로 유대인들은 그 집 주인인 야손을 대신 잡아서 읍장에게 끌고 갔습니다. 불량배들이니까 공손하게 모시고 갔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야손이 얼마나 맞았고 어려움을 겪었으리라고 하는 것은 뻔합니다. 그리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하며 고발했습니다. 천하를 어지럽히며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고 다른 임금을 섬긴다는 말은 엄청난 죄목이었습니다. 반역죄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참소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선교에 치명적인 방해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읍장과 무리들은 대단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태가 심각해졌습니다. 이들은 예수 믿은지 3주도 안되는 사람입니다. 새신자 중의 새신자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였는데, 이런 핍박을 받는다면 예수를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문제는 길게 보아야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핍박을 겪으면서 세워진 데살로니가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저는 이것이 교회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믿습니다.

6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사도행전 17장의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흉악한 일들을 겪으면서 그들이 그래도 예수 믿겠다고 하고 교회가 된 것을 말합니다. 데살로니가는 예수 믿으면 깡패들한테 맞아 죽던 곳입니다. 나중에 이 사람들은 베뢰아까지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를 가로막습니다. 그랬던 곳이 데살로니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 믿고 교회가 섰던 소문이 마게도니아 아가야지역 뿐만이 아니고 각지에 소문이 다 났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17-8절에 계속 됩니다. 그런 환난과 핍박 속에서 7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했습니다.

8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아름다운 소문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지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더 할 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런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고난도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런 교회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바로 야손과 그 형제들이 말할 수 없는 봉변을 당하는 일을 씨앗 삼아서 이 교회가 그렇게 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한목자 교회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가 된다면, 우리가 어떤 수고를 해도 보람이 있겠지요? 이런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여기에 계신 여러분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한결같이 다 사명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예수는 믿었는데 사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단 사명을 거부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부담스럽다고, 너무 힘들다고 나 자신도 지금 너무 버겁다고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있어도 사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명 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단 사명을 벗어버리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저도 사명이 버겁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성령님께서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김동호 목사님께서,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고 계시는 은퇴 장로님 한 분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분을 부러워하는데 정작 본인은 자신의 삶을 깊이 후회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후회하는 것은 실패가 두려워서 늘 안정적인 삶만 선택하며 살아 왔었다면서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성공을 이루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설 때, 한번도 믿음으로 도전해 보지 못하고 평탄한 길만 찾아 산 자신의 어떤 평가를 받을까 너무나 두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때는 정말 내게 주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내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나면 훨훨 날 것 같이 자유로울 것 같습니까? 사명을 외면하고 사는 삶은 편안함이 아니라 쓸쓸히 가슴을 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사명없는 사람, 십자가 벗어버린 사람처럼 두려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무거운 짐이 감사하고 고생이 감사하고 고통이 감사할 제목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힘들었던 일 고난 당한 일 내가 치루었던 대가가 있었던 일 밖에 하나님 앞에 설 때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야손은 폭도들에게 끌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사실은 바울 일행이 끌려가야 되는데 야손이 그만 대신 끌려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을 집에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야손은 일방적으로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피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폭도들의 목적은 바울과 실라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디 있는지 그 곳을 알려 주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지 않겠소!”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손과 그 형제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달게 받았습니다.

야손은 그 때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묵상 중에 야손이 눈물로 기도했다는 것을 강하게 감동으로 느꼈습니다. 야손은 복음을 들은지 3부 밖에 안됩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다급한 상황 중에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자기 살 길을 찾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자 사도 바울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가는 곳마다 겪었을 것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까지 와서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니 바울 일행을 고자질할 수 있었겠습니까? 야손은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야손은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주여, 바울 사도 일행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자기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재판을 받으면 시간을 벌어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이 도망갈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예수를 믿은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은 잘 아는 이웃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알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그들의 영혼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어찌 눈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가 선 것입니다. 눈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야손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사명이 무엇입니까? 눈물입니다.

자신이 사명자로 사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눈물나는 기도가 있으면 사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고민이 있었습니다. 어떤 설교도 쉬운 것은 없지만, 제가 말씀을 전하면 은혜를 받는 것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설교자인 제 자신이 압니다. 어떤 설교는 은혜의 역사가 성도들에게 깊이 임하고 어떤 설교는 별로 그렇지 못한 것을 느낍니다. 나라와 민족과 통일을 위한 설교,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설교가 힘든 것이었습니다. 원론적인 문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지만 성도들의 가슴을 치는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눈물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나라를 위하여 울어 본 적이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생각도 의견도 많지만 눈물의 기도가 있었는가 자신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해본 적은 많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통곡하는 기도를 드려보았는가? 집안이 월남한 피난민 집안이기에 통일에 관심이 많지만 통일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울면서 기도해 본 기억이 별로 없었습니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기에 억울한 사람, 어려운 이웃에 대하여 의식이 있다고 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 위한 설교, 통일 위한 설교, 사회 불의를 향한 제 설교에 감동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위하여 울어본 적은 많습니다. “하나님, 왜 저는 이 모양입니까?”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 온전한 믿음이 없는 나, 죄를 이기지 못하는 나, 자아 덩어리인 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나에 대하여 울어 본 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개인적인 신앙 문제 죄와의 싸움 자아와의 싸움에 대하여 설교할 때 교인들 중에 은혜 받았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위하여 통곡하고 운 적이 많았습니다. “하나님, 교회는 왜 이 모양입니까? 왜 교회가 천국과 같은 곳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교회에 대하여 설교할 때 은혜받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설교 속에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그릇은 여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저는 교단, 나라 문제가 나오면 마음은 안타깝지만 내 신앙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면서 내 가정 하나 바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내 교회도 문제가 많은데,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향하여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하는 문제로 시달렸습니다. 선교하겠다고 하면 가족들이 네 방이나 제대로 청소하라.”고 빈정거리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너 자신의 문제에만 매여 있을 것이냐?’ 끊임없이 나! ! ‘나 하나도 안되는데!’ 이것이 마귀의 전략에 속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나 나 하면서 평생 자신에게 묶여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는 길은 염려하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히려 사명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내 문제 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이러면서 고민하고 근심하고 갈등하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었고 십자가 복음을 알았다면 내 문제 내 문제 하다가 평생 그렇게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네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시고는 역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으실 것입니다. 교회 문제, 누군가는 해야 되겠지만, 지금 나는 내 문제 하나가 해결이 안돼. 우리 집안 문제도 하나 해결이 안돼. 내가 무슨 교회 일을 할 수가 있겠어! 나라 민족, 지금 나하고는 거리가 먼 문제야. 지금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이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 그렇게 삽니다. 마귀가 우리를 주의 일 못하도록 묶어두는 것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문제에 매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 살게 되고 평생 해결이 안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너무나 놀라운 복음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리교 사태로 인하여 교단을 위하여 울게 하셨습니다! 제 속에 그런 눈물이 있었는가 제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렇게 통곡을 하고 울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감리 교회를 살려주십시오!”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교단 문제는 제 사명이 되었습니다. 교단 문제가 나오면 가슴이 떨림을 느낍니다. 눈물이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라 민족 위하여 울게 하십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하여 울게 하십니다.

 

누가 사명자요, 자격자입니까? 눈물로 기도하는 자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우십니까? 교회 직분을 감당할 자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의견은 아마 많으실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나도 할 말이 있다.” 이것은 아직 사명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하여 눈물의 기도가 있습니까? 그러면 이 교회를 위한 사명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 직분을 맡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하여 눈물이 없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교회를 위해서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에 한번 울었던 적은 있지만, 지금은 눈물이 없습니다. 그러면 임원 자격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우십니까? 나라를 위한 지도자가 될 사람입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지만, 나라를 위한 눈물이 없는 사람은 전부 자기를 위해서 써버립니다.그것 때문에 국민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서 국민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지도자가 될 자격이 무엇입니까? 나라를 위한 눈물이 있어서 그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내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정말 나라를 위해서 나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나라가 사는 것이 아닙니까?

한 번 울어본 정도가 아니라 계속하여 눈물의 기도를 가진 자가 나라 일을 맡아야 자신의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직책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나라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지도자가 됩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사명자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제자가 아니라 진정한 사도직에 대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던 사람인데 무슨 사도냐? 그런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이 직접 세운 사도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때 눈물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을 스스로가 고백했고 그것은 성도들이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사도 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증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우리 자신 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되었습니다. 무엇이 변화되었습니까? 전에는 나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다시는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진짜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복입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주셨으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시는 것 이미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는 주님을 위해 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동안 기독교에 위기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예수 믿으면 성공한다, 복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설교의 원조 격이었던 목사가 짐베커 목사입니다.

짐베커는 1970-80년 대에 미국 기독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유명한 TV 설교자였고 미국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짓고 있었습니다. 짐베커가 던진 메시지의 핵심은 성공 복음, 기복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점에서 성추문과 공금 횡령죄로 45년 형을 선고 받고 나이 50이 되어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화려한 목회를 하던 사람이 졸지에 미국에서 가장 추악한 이름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짐베커는 감옥에서 성경을 다시 읽고 자신이 틀렸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빙자한 하나님의 사업, 선교사업, 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고도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성공 복음’(기복신앙)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봉했습니다. 예수 믿고 복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안 믿는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꼬리표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와 반대로, 나는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을 설교하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건강이나 물질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해서는 안된다고 설교했습니다. 만일 새 차를 원할 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는 대신에, 어떠한 종류의 차를 원하는 지, 어떤 옵션과 어떤 색을 원하는 지 하나님께 당당히 요구하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고난이나 희생은 예수님이 다 담당하였으니 우리는 오직 축복만 누려도 된다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성경 말씀을 깊이 공부하다가 자신이 틀렸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틀렸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정반대의 것을 가르치고 있었음을 깨닫고 소름이 끼쳤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했음을 안 후 가슴이 무너졌습니다.

나는 몇 년 동안 그릇된 교리를 설교하고 있었고 그러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돈과 사랑에 빠지도록 가르침으로 주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짓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교묘하게 사람들에게 예수님보다는 물질에 마음을 두도록 독려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고 나의 입술로 그분을 ’()님이라고 불렀지만, 나의 가슴과 삶에서 그 분이 나의 주()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렇게나 틀렸다는 것에 질겁했고, 하나님이 나를 거짓 예언자로서 죽도록 때리시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오히려 너무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기를 감옥에 가게 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은총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애쓰던 모든 노력을 포기했습니다. 또한 자신을 감옥으로 내몰았던 사람들을 용서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어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부유하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가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인 것 뿐입니다. 그것을 주시면 주님을 위해서 살 뿐이지요. 목적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 얼마나 복을 받았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받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다른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세상에서 가진 것과 성공한 것으로 평가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산 것,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고 살았던 것을 통해서 평가받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집에 사는 것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으로 시기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더 많은 것을 포기하며 더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시기 질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두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처음 믿을 때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를수록 잃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존귀한 성도들은 희생의 증거를 가지고 주님을 맞이하러 나올텐데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포기한 것이 없이 어떻게 그 영광된 무리들 가운데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건강하고 부유하고 성공한 것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면 죄입니다. 건강과 부유함과 성공은 오직 주님을 위한 사명일 때 복된 것입니다.

 

 

미국 서부 오레곤주에서 제재소를 하며 유복하게 살던 홀트 여사 부부는 19556·25 전쟁 고아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우리부터 이 아이들의 부모가 돼 주자며 낯선 코리아의 고아8명을 입양한 이후 홀트복지회를 만들고 40여 년간 한국 고아 7만여 명에게 새 가정을 찾아줍니다. 홀트 여사는 일평생 매일 오전 445분에 일어나 조깅을 하며 건강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아직도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왜 건강해야 됩니까?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왜 성공해야 됩니까? 내가 구원할 영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당할 사업이 많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제는 지쳤다, 왜 나만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되는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분이 있다면 오늘 성령님께서 마음을 바꾸어주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사명을 위해서 제가 더 달려가기 원합니다. 지금 제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이 눈물의 기도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사명, 제가 눈물의 기도로 감당하기 원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에서든지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물의 기도를 쓰시고 나중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하나님,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했을 때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아무개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실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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