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인생// 20001112 주일 낮예배
2001-12-08 17:51:16 read : 652
전도서 1장 1-7절
요새 연예계 스타, 스포츠 스타들 돈 버는 것을 보면 대단합니다.
박찬호 선수는 앞으로 연봉이 백억 원이 넘을 거라는 얘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타들의 미래가 꼭 밝은 것만은 아님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땀을 흘리는 것 이상으로 돈을 버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의 돈이 꼭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보도된 6-70년대 전국민의 우상 박치기 왕 김일의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분이 병들었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고 다닙니다.
30이 넘은 분 중에서 무하마드 알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제일 강하다고 말로 얼마나 떠버렸는지 그의 별명이 떠버리였습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파킨슨씨병에 걸려서 한참 나이에 투병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애틀랜타 올림픽 성화 점화를 하면서 떠는 모습을 다 보았을 것입니다.
성화 점화 후 기자 회견을 할 때 그는 더 이상 떠버리지 않고 겸손히 말했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하나님이 강하심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제가 이 병에 걸렸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무엇을 느낍니까? 인간의 영광은 한 때라는 것을 느낍니다.
흔히 스타는 인기를 먹고 산다고 합니다. 그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그처럼 남의 눈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니까 속은 점차 메말라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인기를 먹고 살지 말고 기쁨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기가 있어도 영혼을 위한 삶의 내용이 없기에 공허해집니다.
그러한 삶의 원리를 잘 말해주는 본문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의 입에서 나온 고백입니다(1절).
어떤 고백입니까?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고백입니다.
솔로몬은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이었고 누릴 것은 다 누려보았습니다.
그의 옆에는 수많은 여성이 있었고, 왕으로서 수고한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수고와 쾌락 뒤에는 항상 동일한 결론밖에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것이 다 쓸데없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전제를 답니다.
그것은 해 아래서 사는 삶은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하나님 아래에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래서, 주님과 동행하며 살면 어떤 행복이 주어집니까?
1. 첫째, 우리의 인생길이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아파트 앞을 지나가다 보면 가끔 버려진 가구들을 보게 됩니다.
그처럼 버림받은 가구들을 볼 때마다 가끔 가슴에 찡한 아픔이 밀려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 세상에서 당하는 제일 슬픈 일이 무엇입니까?
언제는 좋다고 하면서 이용하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그런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인생길이 고독해집니다.
사람들이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도 진정한 동반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옆에 동반자가 있다는 느낌은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은 가장 소중한 행복의 조건입니다.
요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다시 구조 조정의 태풍이 불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땀을 흘릴 수 있는 일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가끔 일하면서 힘이 드는 것을 느끼지만 그 힘이 드는 기회가 축복입니다.
얼마 전 구조 조정으로 실직한 한 가장이 아내 앞에서 푸념을 했습니다.
"살기가 힘든데, 이런 때 백지 수표라도 한 장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한숨을 쉬는데 딸아이가 아빠 옆구리를 칩니다. "아빠! 이거 받으세요."
딸아이를 보면서 아빠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집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게 뭔데."
"제가 만든 백지 수표예요."
귀여운 고사리 손을 하고 내미는 흰 종이를 보고 아빠가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지혜야! 수표 줘서 고마워. 잘 쓸게. 그런데 진짜 백지수표는 바로 너야!"
그리고 어린 딸아이를 꼭 껴안아 주니까 딸아이가 아주 행복한 표정을 합니다.
그 표정을 보니까 실직한 상태이지만 이 가장은 그 때만큼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이 이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도 인간의 가정이기에 간혹 단절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단절의 순간에 주어지는 고독감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살 때도 그렇게 죽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도 행복하게 죽습니다.
옛날에는 목사님들이 직접 죽은 사람의 염을 해 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분들 말에 의하면 수의를 입힐 때 신자와 불신자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다가 죽은 시체들은 나긋나긋해서 수의를 쉽게 입히는데,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은 뻣뻣해 가지고 수의를 입히는데 애를 먹는다고 합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죽을 때 편안히 죽는 것과 경직된 상태로 죽는 것의 차이입니다.
저도 죽은 사람을 상당히 많이 본 편에 속하는데
자세히 보면 시체에도 얼굴 표정이 있습니다.
어떤 시체를 보면 편안한 모습으로 웃고 있고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체를 보면 얼굴이 화난 표정이고 근육이 경직되어 있습니다.
그 얼굴 모습에 벌써 천국의 삶과 지옥의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반자가 되면 이처럼 죽음의 순간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얻은 가장 소중한 축복은 갈 데가 있다는 축복입니다.
사람은 갈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모습이 많습니다.
그러나 "갈 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결코 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돌아갈 데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은 항상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약해지는 이유는 갈 데에 대한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갈 데를 모르는 인생은 가지 말아야 할 데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갈 데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에게 주님이 없다면 우리는 갈 데 없는 고독한 존재이지만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2. 둘째, 삶의 소중한 의미와 목표가 생기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전도자 솔로몬의 고백을 보십시오.
해 아래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의미 없는 삶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래에서 살면 삶의 의미가 생기고, 사실상 그것이 행복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 인생의 목적을 찾고 주님의 일꾼이 됩니다.
그것 때문에 고생도 합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고생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사실상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장 7절을 보면 바울은 주님의 일꾼이 된 행복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바울은 돈을 벌고, 명예가 높아지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지 않고,
주님의 일꾼이 된 것을 무엇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일꾼이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여길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주님의 은혜의 선물을 나눠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눠주고, 주고받아야 은혜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외로운 사람에게 다가가서 벗이 되어 주는 것도 선물이고,
그 벗의 위로로 새로운 힘을 얻어서 힘차게 사는 모습으로 보답하는 것도
위로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삶이 됩니다.
또한 인정에 굶주린 사람에게 따뜻한 눈빛, 다정한 언어를 주는 것도 선물이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불편을 덜어주려는 작은 실천도 선물이며,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언제나 넉넉함으로 기다려 주는 것도 선물입니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들 틈에서 묵묵히 몸을 굽혀 사는 것도 선물이고,
피조물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연을 잘 관리하려는 것도 선물이며,
방황하는 사람에게 주님과 복음을 소개하는 것은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을 살면서 선물을 주고받으며 사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로 살아가는 나와 너가 모여 우리가 되어 살아갈 때
우리는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될 것이며, 우리 교회도 희망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제 서로의 차이를 넘어 서로 선물이 되려는 마음으로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의 밝은 얼굴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소중한 삶이 있는데도 어떤 분을 보면 삶의 의미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의 선물을 따라 사는 삶이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대재벌이 죽었습니다. 돈은 많았으나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은 내세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다 쓴 휴지가 휴지통에 들어가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평생 수고한 것이 죽을 때에 역효과만 낸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많은 재산을 자손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자녀들이 고맙게 여깁니까?
그런 부모에 대해 진지하게 고맙게 여기는 자녀는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애쓰고 힘써서 땀흘려 모으는 재미조차 빼앗아 버렸으니
그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것은 삶의 무의미와 서툰 인생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게 먹고 별로 화려한 것을 먹지 못한다 할지라도
삶의 의미가 있고, 가치 있는 목적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서 살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일본 오사카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거지 부부가 출석합니다.
그 거지 부부는 다리 밑에 움막을 치고 사는데, 자식도 있습니다.
부인은 하루 종일 동냥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남편이 밥을 얻어 오면 절대로 찬밥을 주지 않고 따뜻하게 데워 줍니다.
그리고 두 부부는 거지지만 주일날 교회에는 정성스런 마음으로 꼭 나옵니다.
부인이 이빨도 다 빠지고 머리도 수세미를 하고 교회에 나오는데
남편이 그 부인을 끔찍이 위해주며 손을 잡고 데리고 나옵니다.
하루는 한국에서 방문한 한 목사님이 그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사는 것이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불행해요? 남편이 있는데요."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 그 교회 나오는 사람 중에 제일 행복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으니까 별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식 걱정도 안 하고, 부동산 걱정도 안 하고, 직장 걱정도 안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둘이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기도를 합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그러니까 오사카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오히려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누가 진짜로 부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끔 강가에서 고기를 잡았다고 목사님 드시라고 들고 옵니다.
받기만 하지 않고 줄 줄도 압니다. 그런 식으로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거지 부부가 거지 부대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리 밑에서 전도한 사람들과 함께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고 삽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한국에서 방문한 C 목사님이 묘한 매력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것은 신속히 갑니다. 부자도 가고 거지 나사로도 갑니다.
그리고 진짜 참된 삶은 이 세상의 삶이 끝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속아 살지 말고, 이 세상에 잡히지 말고,
이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3.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내 인생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 영혼은 항상 패배감을 느끼고 살 것입니다.
우리는 이해해야 되는데 이해하기 싫고 용서해야 되는데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 영혼을 우리가 어떻게 혼자 끌고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어느 날 중동으로 파견 나갔던 한 근로자가 2년만에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가출한 상태였습니다. 마음에 증오심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상대방을 파멸시켜 버리겠다고 각오를 했지만 뜻대로 안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우연히 한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따라 목사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이 남자의 증오심은 더욱 활활 타올랐습니다.
견디지 못하고 예배 후에 이 남자는 목사님에게 찾아 가 따졌습니다.
자기의 사정을 다 얘기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나왔습니다.
"누가 용서하라고 했습니까?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런 용서는 혼자 못하고,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복수를 포기하십시오. 그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 용서해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저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반드시 용서의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서의 능력을 얻을 수 있다면 거기에 바로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에 가장 가까울 때는 자비를 베풀고 용서할 때입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인간이 가장 영광스럽게 될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포기해 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저도 가끔 목회를 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대신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저의 책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표현입니다.
바로 그 순간, 신기하게도 새로운 힘과 새로운 용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LA에서 목회하시는 한 목사님이 처음으로 지진을 경험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곳이 흔들리니까 소름이 오싹 끼쳤습니다.
TV가 떨어지고 어항이 굴러 떨어졌습니다. 정신이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목사님은 침대 밑으로 머리를 밀고 들어가 있었습니다.
본능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줄 처음으로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어느새 아이들을 몸으로 감싸안고 있었습니다.
그 일 후에 집의 힘이 균형이 갑자기 사모님 쪽으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사모님이 지진 후에 목사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위기 때의 자세가 중요한데, 그때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진이 난 후에 집에 지각변동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위기 때 극복하는 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힘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헌신할 수 있고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직분을 임명할 때 "저는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못하는 사람들을 귀히 쓰셨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자격이 충분히 있어서 직분을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받는 우리의 타이틀은 언제나 우리에게 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족하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부족함을 알기에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겸손한 참 사람이 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래서 사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해 아래 사는 사람들은 교만한 자리가 행복이고 겸손한 자리가 불행인 줄 압니다.
그러나 사실상 진정한 행복은 겸손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어느 고등학생이 장래 희망 난에 <사람>이라고 적었습니다.
교사가 장난하는 줄 알고 그 학생을 불러서 야단을 쳤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항상 희망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차가움을 전파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따뜻함을 전파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사랑의 빛이 흘러나오도록 해야 하고,
우리의 가슴이 머무는 곳마다 생명의 향기가 배어 나오게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손길이 머무는 곳마다 따뜻한 평화가 자리잡게 되어야 하고,
우리의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세상의 소용돌이가 잠잠하게 되어야 합니다.
가끔 사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정말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런 말도 절제해야 합니다.
물론 힘들겠지요. 그러나 살아있다는 사실, 건강이 있다는 사실 한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주님의 크신 은총을 입은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처럼 은혜를 알고, 감사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일이 순조롭게 풀릴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도 겸손입니다.
대개 일이 잘될 때, 순조로울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벽장 속에 모셔 넣고 있습니다.
그러다 어려움 만나면 하나님 앞에 나와 노래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여러분! 어두운 순간에 그늘진 곳에서만 하나님을 찾지 마시고,
생의 한 복판에, 햇빛과 같은 인생 속에서 한번 하나님을 찾아보십시오.
지금 무엇을 품고 사십니까? 돈, 저금통장, 땅문서를 품고 사십니까?
어떤 분은 학위를 품고, 어떤 분은 야망을 품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엉뚱하게도 복수심과 질투심을 품고 삽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뜻을 품고 삽니다.
무엇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가치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품고 살아야 할 분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꼭 붙잡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꼭 붙잡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길입니다.
진리의 길은 포장도로가 아니라 비포장도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비포장도로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 악인의 길이 지름길처럼 보여 우리의 구미를 당기게 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내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일의 비전을 품고 주님 품에 안겨서 사는 삶이 진정 행복한 삶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가난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공부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항상 꿈을 가지고 노래했습니다.
"가난 너머에는 분명히 하나님이 준비하신 찬란한 미래가 있을 겁니다."
그 노래를 계속 부르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신사가 그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데려다가 교육을 시키고 길렀는데 그가 바로 루터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반드시 찬란한 미래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시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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