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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도행전 17장10~15절

by 【고동엽】 2023. 1. 24.

2009.10.18 주일 설교(사도행전 강해 37)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도행전 1710~15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사도행전 17장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베뢰아 그리고 아덴, 세 도시에서 전도한 기록인데, 이 세 도시 전도 기록 중 제게 가장 인상적인 도시가 베뢰아입니다.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서 베뢰아 사람들이란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 도시와 달랐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듣고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보다도 성경을 모든 판단의 절대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곧 말씀을 결론 삼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이런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성경에 유일합니다.

이런 자세로 말씀을 받은 베뢰아 사람에게서 크나큰 부흥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도 처음에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영생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들었을 때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들이라고 처음부터 선뜻 받아들이기만 했겠습니까?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깡패를 동원해서 폭행하고 그들을 내어좇았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선뜻 받아들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고 성경을 보면서 지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정말 하나님 말씀 성경에 합당한 복음이냐 하는 것을 살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살펴보니까 사도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이 예언된 그리스도가 맞구나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베뢰아에 큰 부흥이 일어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복음에 반응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했지만 베뢰아에서는 12절에 보니 믿는 사람이 많았고 헬라인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 말씀을 결론 삼는 태도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오덕호목사님이 쓴 [교회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책에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20년 동안 교회 다닌 사람과 1년 되는 사람 중에 교회에서 누가 더 교만할까요?󰡓󰡒헌금을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 중에 누가 더 교회에서 교만할까요?󰡓그 책에서는 대답은 대체로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 헌금을 많이 한 사람이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앙 생활의 연륜이 쌓일수록 신앙이 나빠진다는 뜻인데,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집니까?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설교를 많이 듣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믿음이 성숙하고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진리를 결론 삼는 태도로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들어도 자기 생각과 관점을 기준으로 오히려 성경을 평가하는 자세를 갖기 때문에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세 가지 마음 밭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말씀이 떨어지고 돌짝밭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떨어지고, 가시덤불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말씀이 떨어지는데, 말씀이 능력이 있지만 결국은 열매 맺지 못하고 옥토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100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많은 성도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또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자기 삶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이 말씀은 이해가 안돼. 이 말씀은 내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 이런 태도로 말씀을 보는 사람들은 신앙 생활 오래했다고 말씀의 역사가 나타나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 나는 도무지 이해가 완돼. 아멘이 안돼.‘’ 그런 말씀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아마 많은 분들은 그런 경험을 하셨지만 그냥 나는 이해가 안돼, 아멘을 할 수가 없어.’ 지나쳐버립니다.

그러나 베뢰아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이 정말 그런가?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확인한 다음에 그 말씀을 받을지 안받을지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절대 판단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결론 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은 21일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은 그 복음이 정말 성경적인가를 확인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이 알고 있던 가르침과 다르다고 깡패들을 동원하여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90km 떨어진 베뢰아까지 좇아와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그렇게 열심이면서도 성경을 펼쳐 볼 마음은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면 베뢰아의 유대인들의 태도는 얼마나 인상적입니까?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알고 믿고 있던 것들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먼저 그 복음이 정말 성경적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 확신이 오고 부흥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중에 지금까지 설교를 듣고 이해가 안되거나 솔직히 아멘이 안되는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셨습니까? 아니면 이해가 안돼, 믿어지지 않아하고 지나갔습니까?

 

 

지난 주간 어느 성도님이 성령의 은사와 방언에 대한 질문을 메일로 주셨습니다. 솔직히 그 분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의 은사가 그렇게 강도되어야 되며 방언을 꼭해야 되느냐는 문제로 상담을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많은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와 방언에 다하여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서로 대립되는 두 주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방언의 은사 등 성령의 은사를 굉장히 강조하는 가르침이고 또 한쪽은 그런 것을 굉장히 터부시하고 말씀 중심으로만 신앙 생활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마지막에 저는 옆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기도할 때는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답은 언제나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고 판단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방언은 이미 그쳤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주로 근거로 삼는 성경 구절이 고린도전서 138절에 방언도 그치고라는 말씀이 나오니 방언은 다 그쳤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성경이 없던 때이기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방언과 같은 특별한 성령의 은사도 필요했지만, 이제 성경이 완성된 때에는 그러한 은사가 그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도 그칠 때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방언의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은사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러므로 방언이 사도행전으로 그쳤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방언에 대한 교훈이 많이 기록된 것은 계속 방언의 은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은 해석일 것입니다. 중요한 열쇠는 성경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 생활하면서 자기는 어떤 스타일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는 스타일입니다.” “목사님, 저는 말씀 중심의 조용한 신앙 스타일입니다.” 충분히 가능하지만 여러분, 성경 스타일이 있으면 있지 성령 충만한 파가 따로 있고 말씀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으면 그것이 결론입니다. 성경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했다면 나하고 좀 잘 안맞는 스타일같아도 그 말씀대로 가야 하는 것이고 성경에 말씀 훈련 제자삼는 사역을 가르쳤으면 역시 제자훈련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기성 목사는 어떤 스타일이냐? 어떤 분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제자훈련을 받으라고 하니 제자훈련을 강조하는 것 같으면서도 금요 성령집회에서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 같고. 그래서 도대체 유목사님은 어느 쪽입니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어느 쪽도 없습니다. 성경쪽입니다. 성경에 나와있으니까 그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아미시 공동체에서는 용서가 절대 가치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용서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용서하여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정말 신학적으로 옳은 것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나 아미시 사람들은 간단히 대답합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옵시고라고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용서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성경을 인생의 참고서처럼 여깁니다. 그래서 말씀의 역사, 말씀의 부흥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성도들인 우리에게 교과서입니다. 참고서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왜 세상에 들어가 세상의 영향을 받고 오는 것입니까?

성경을 인생 참고서 정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은 성경에서 나옵니다. 성경은 말씀을 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성경대로 사는 자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진정 성경 말씀을 결론 삼는 태도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세상을 변화시킬 자로 우리를 쓰시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목사님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성경을 세 번 읽었다고 자랑삼아 말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성도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성도님을 읽은 것은 몇 번이나 되십니까?"

성경을 읽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나를 얼마나 읽었느냐 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성경에 보니까 사랑하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정작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누가 무슨 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는지자세하게 말해 달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교인들에게 빚을 좀 지고 있는데, 빚을 탕감해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랑하라 고 하면󰡐내가 남을 어떻게 사랑할까?󰡑라는 생각을 해야지,󰡐남이 나를 사랑하나 안하나?󰡑를 따지면 바로 성경을 읽은 것이겠습니까? 당신은 돈을 빌려준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기는 하지만 보나 마나 한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도 말씀이 100배로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이 나를 읽어야지 성경을 그저 참고서 정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평생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성경 한번 읽지 못하다가 최근에 창세기부터 통독을 시작하여 이제 구약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는 성도님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보니, 그 동안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믿고 살아 왔는지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럽고 후회스러울 뿐이라고 말입니다.

 

목사님 두 분이 같은 때 교회 건축을 하시다가 공교롭게도 함께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한 목사님은 감사했습니다. 교회 건축 중 죽거나 떠나거나 다친다는데, 가장 경미한 일을 겪었으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만 예배당 공사는 더 은혜롭게 잘 끝나고 교회는 크게 부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은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나?’ 그때부터 섭섭한 마음이 들더니 예배당 공사는 다 끝났지만 일찍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은퇴하실 때, 인사말을 하는데 너무 열심히 일한 것이 후회된다.”고 하시고 그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 목회를 하셔도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한 분은 말씀을 결론 삼았고 그래서 그 말씀대로 반응했고, 또 한분은 자기 감정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니까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성경을 읽되 자기 중심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말씀 그 자체가 결론이라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자유하게 되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진리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은 자유자인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죄와 마귀의 종노릇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다 죄의 종이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고 싶어서 짓습니까? 죄가 저절로 지어지니까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종노릇하는데서 우리가 어떻게 자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5:8-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요일 1:7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그렇지만 이 복음이 진정 복음이 되려면 진리를 결론 삼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진리를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아무리 놀라와도 믿지 않는 자는 결코 죄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에 나는 그 말씀을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내 죄가 씻음을 받는 것이야?” 이런 사람에게는 이 놀라운 복음이 그에게 임하지 못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인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교인은 죽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죽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리를 결론 삼는 믿음을 가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는 세례받을 때, 장례식을 치른 자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으셨다면 여러분은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장례식을 치루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로 결론 삼은 사람은 나는 죽은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내 생명이십니다.”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안 믿어져.” 그런 사람에게는 그 말씀은 절대로 그를 자유하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을 결론 삼지 않고 진리를 결론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승리한 비결이었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능력있는 사도가 되었습니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이 놀라운 십자가 복음을 결론 삼으니까 그의 삶 속에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로 사는 이 놀라운 복이 진리를 결론 삼는 사람에게는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 받고 영생 얻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결론 삼는 태도를 가질 때 우리의 삶 전체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에게 임한 부흥이 바로 이와 같이 복음을 듣고 성경으로 확인하여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맞구나!” 그러면 결론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이 임한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말씀을 결론 삼지 않으면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아무 능력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형제 사이에 불화하여 법정에 고소를 하는 교우를 상담했습니다. 결국 돈도 잃고 형제도 잃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용서하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하여도 안됩니다. 못합니다. 하더니 결국 돈 잃고 형제들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내 처지가 아니라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고 더 이상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결론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다 하더라도 내 감정에 안 맞으면 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렇더라고 그것이 내게 어려움을 줄 것같으면 내가 그 말씀대로 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게 절대 기준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은 진리가 결론 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병이 고침받기를 세 번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은 그 말씀을 결론 삼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는 그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질병을 오히려 기뻐하였고, 자랑하였습니다.

고후 12:9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하나님께서 그 사도 바울을 통하여 엄청난 능력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사나 개업, 직업을 선택할 때, 자녀들의 진학이나 결혼 등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할 때 어떻게 결정하십니까? 성경 말씀을 결론 삼으십니까? 어떤 손해가 나고 마음에 맞지 않아도 성경이 말하면 아멘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때 어떻게 결정하라고 하는가? 그렇게 결정하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은 그저 참고로만 여깁니다. “어떻게 다 이렇게 살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넘어가니 말씀이 말씀되는 역사가 안 나타나는 것입니다. 옥토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모님이 얼마 전에 폐를 절제하는 폐암 수술을 하셨습니다. 그 회복하는 과정이 힘드셨습니다. 기침을 많이 하시고 가슴이 조이는 통증을 호소하시고 그렇게 힘드시니까 무슨 밥맛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식사를 정말 열심히 하시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암 수술 후 식사를 맛있게 먹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생존과 빠른 회복을 위복을 위해서 큰 결심을 하기로 마음을 새롭게 고쳐먹었습니다. 밥 한 톨, 반찬 한 가지도 남기지 않고 다 맛있게 먹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회복되셨습니다.

저는 장모님을 보면서 영의 양식인 성경 말씀도 그런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때때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일이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죽을 것 같고 그 말씀대로 하면 손해보는 것이고, 그 말씀대로 하는 것이 도무지 내 감정이 허락하지 않고. 그러나 이때 명심해야 됩니다. 우리 육신의 회복을 위해 식사가 중요하듯이 내 심령의 충만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내 삶의 결론 삼아야 비로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리빙스턴, 16년간 아프리카 정글에서 선교, 잠시 영국으로 귀국하여 글라스고 대학에서 연설했는데 한 사람이 질문을 하였습니다.󰡒당신은 어떻게 그 고독한 환경에서 16년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주님의 두 마디 약속 때문입니다.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저는 처음 설교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주제 설교를 했습니다. 임의로 설교할 주제를 택하여 설교하였는데, 설교하다 보니 같은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그 설교가 제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의 범위를 계속 맴도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고서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전하려는 내용과 맞는 성경을 택하다 보니 성경 전체를 균형있게 설교하지 못하였습니다. 교인들이 중에는 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설교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강변했지만 솔직히 내가 정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 때 제가 강해설교를 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설교할 성경 본문을 내가 택하지 않고 주어진 본문으로 설교하자고 결단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당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성경은 설교하기 좋지만 어떤 성경은 도무지 설교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강해설교를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교를 해야 되는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제 마음 속에 더 이상 내가 하는 설교를 해서는 안되고 하나님 말씀이 설교하도록 해야 하겠다고 결단하고 강해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저는 설교자인 저 자신이 설교할 때마다 깊은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도 목사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맡겨야 하는데 그러려면 말씀을 결론 삼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면 거기에는 토를 달면 안됩니다. 변명해도 안됩니다. 그것이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으니 저는 순종합니다.” 이 태도를 분명히 가지면 반드시 여러분 심령에 부흥이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여러분도 성경 말씀을 보는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인생 참고서가 아닙니다. 교과서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계획을 결론 삼지 말고, 또 환경을 결론 삼지 말고 진리를 결론 삼아야 합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며 능력있는 삶을 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제가 그 동안에 말씀을 참고서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말씀을 교과서 삼겠습니다. 진리를 결론 삼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100배의 결실을 맺는 삶을 제게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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