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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 이해의 진리(요 6:41~5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한복음이 기록된 목적은, 믿어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임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믿지 않는 자에게 믿게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게 많은 이적과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도 그가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메시야이심을 믿게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들은 끝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표적만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다"(요 6:37)라고 저들이 깨닫지 못함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않았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앞장에서 공부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옥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부자는,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겨있는 나사로를 향해 "나사로가 다시 세상으로 나가 나의 아버지 집에 가서 형제들에게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전도할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부탁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대답하기를 "그 곳에는 모세와 선지자가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말했으며, 부자는 "아닙니다. 만일 죽은 자가 가서 전하면 그들이 회개하리이다"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비록 죽은 자가 살아서 전한다 해도 모세와 선지자에게서 듣지 아니한 자는 마찬가지라고 그의 청을 거절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병을 고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있다 해도, 기적 자체가 믿음을 갖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않음을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그 많은 기적을 보고 경험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인간적인 가치와 지식으로, 즉 세상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요 6 : 42).
부모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을 보았기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육신적인 가문을 아는 것이 큰 병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한 사람을 알고자 할 때, 대체적으로 기준을 삼는 것은 그의 출생, 부모, 환경, 학벌, 나이, 직업 등으로써 이 사항들만 알면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하나님의 형상됨을 생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그 사람의 존재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성적으로 예수를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믿어야지 인간주의, 합리주의로 믿으면 위험한 신앙이 됩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셨다 하면, 말씀 그대로 깨끗하고 순수하게 믿어야 하는데, 혹자는 사람의 지식으로 이성적으로 풀어보려고 노력합니다. 가령 어린 소년이 보리떡과 물고기를 주님께 내어놓으니 그것을 본 어른들이 각자 자기들이 갖고 있던 음식들을 모두 내놓아 이것들을 합쳐서 먹고 남았다는 해석입니다. 앞 뒤 문맥으로 보아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므로 분명히 각자 음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 것입니다. 그럴듯한 해석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밝히기를 그 곳은 광야였고 빌립에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나를 미리 물어보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떡을 먹고 남았던 사실에 대해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게 향한 소중한 뜻을 알게 됩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좁은 범위에 집착하는 자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믿지 않는 자가 남도 믿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남도 사랑한다는 이론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의심의 요소가 항상 나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들려지고 보여지는 모든 것이 다 나에게 달려 있단 말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을 놓고 그 터널로 예수님을 바라보니 무엇이 바로 보입니까? 어거스틴은 "판단 중지"라는 말까지 했습니다만 어느 단계에 가면 내 이성과 판단은 중단시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이성은 다분히 가변적이므로 언제 어떻게 변할지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늘로서 내려 왔다 함에 대해 수군거렸습니다. 이 때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요6:43)고 나무라십니다. 수군거림은 믿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로서 직접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지나치게 의논하고 수군거리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토론이란 하다 보면 자기 의견을 고집하게 되고 고집을 부리다 보면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려 나중에는 변론과 토론만 남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수군거리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결론을 얻을 수가 없고 동시에 진리에 대해서 모르게 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우선 말씀을 열심히 듣고 배우는 것이 지름길인데 그들은 반대부터 했습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도 말씀을 듣다가,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유대인들은 인간적인 정욕과 시기로 가득차서 많은 기적을 경험했지만 잘 듣지를 못했습니다. 아니 듣긴 들었어도 예수님과 그들의 채널이 다르기 때문에 표적으로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듣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소원을 아뢰고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듣고 깨닫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중요한 진리도 배워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배우는 자의 태도란 우선 겸손하고 상대방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를 배우면 나를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의 뜻, 그의 행위를 배움으로써 내가 가진 고집, 생각, 편견 등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예수님과 같은 성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만나시어 책망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5-26) 예수님은 곧바로 제자들의 뒤를 따라 가셨지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세상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고난의 메시야, 십자가의 메시야보다는 영광의 메시야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네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고난을 함께 하며 배울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각자 자기 형편에 맞추어서 자기 생각대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병든 자는 의사로, 재산을 잃은 자는 재판관으로,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자기 민족을 구원해 주실 위대한 지도자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이제 우리는 비록 20년 30년을 믿었다고 해도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어찌되었던 오늘 이 순간부터 옳은 것은 용감하게 받아들이는 개혁적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외형적인 우리들의 생활은 이제 좋은 환경에서 풍요롭게 변한 것 같지만, 아직도 생각은 옛 모습 그대로 과거지향적인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가진 고정관념 전 이해를 다 버리고 수용하는 자세가 바로 진리를 배우는 자세입니다.
다음 "이끄신다"라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요6:44). 이끄신다(ελκυω)라는 말은 그물을 잡아끈다라는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이끄신다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대략 다음 세 가지 의미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은 예정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근본적으로 택정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적으로 생각해서 언제, 어느 때부터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있어야 구원의 역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믿어지고 들려지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둘째로 "이끄신다"라는 말은 사건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우리가 누구에겐가 전도를 하기 위해서는 심방도 하고, 기도도 하며 여러 가지로 노력합니다만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이끄셔야 합니다. 마음 문을 열기까지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희생과 투자와 오래 참으시는 역사가 합해져서 그 결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라는 것은 역사적인 구체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건을 들어 설명하면, 일차 대전 바로 직전에 성경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자유주의가 범람했습니다. 그대로 가다가는 성경은 휴지가 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이성으로 대치하려 하던 참이었습니다. 드디어 일차 전쟁이 터져서 구라파가 불바다로 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즉 복음으로 돌아와 순수한 성서적인 진리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이끄심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를 의미합니다. 겸손케 만들고, 듣게 만들고, 순종케 만들고, 결단케 만들어 자기를 부인하게 하고 그리고 성령이 감동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루디아가 사도 바울을 받아들일 때, "주께서 마음 문을 열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주께서 기회를 주셨고 듣게 하셨고 겸손하게, 순종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감동하므로 써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이끌어 주시는 역사입니다. 한 사람 속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감동하는,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시적으로 강하게 역사 하므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45절에서 "아버지께 듣고 배우는 자마다 내게로 온다"는 말씀이 있는데 역시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다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는 현재사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단지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끄셨고, 말씀이 전해지고, 성령이 감동하면 벌써 영생은 가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시고 이루신 역사이므로 영생을 가졌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나라의 생명으로 오늘 현재적으로도 그 영생이 벌써 들어와 있습니다. 영원과 시간의 만남은 오묘한 것으로, 시간 끝에 영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벌써 영원의 일부가 시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받는 순간 벌써 영생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영원적이며 동시에 현재적인 것입니다.
"내가 산 떡이다. 내가 곧 생명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가 생명 되심을 믿는 사건은 바로 영생을 의미하므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진리는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한된 사람만이 이 진리를 알게 되고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실 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오천 명을 일시에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들은 먹고 배부른 것 외에는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제한된 사람에게만 허락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오늘 내가 여기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이끄셨다고 고백하는 신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나간 과거 속에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건을 통하여 이만큼 겸손하게 하셨으므로 지금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이 아니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께서 이끄시고 역사 하셨습니다. 이 역사를 믿고 믿음 안에서 성장해 나갈 때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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