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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죄 사하시는 권세(마가복음 2장 1~12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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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사하시는 권세(마가복음 21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오늘의 본문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말씀은 대체로 논리적으로 전해집니다마는 때로는 격언적으로 설화적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유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비유라하면 대개 '이런 사람이 있었는데' 혹은 '이런 일이 있었는데'하며 지나간 이야기를 소재로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고 계십니다.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사건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사건을 창조해가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상징적 사건, 계시적 사건을 말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귀중한 말씀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구구절절이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에 대한 소문과 모인 군중을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 일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병자가 아닙니다. 병고치신 사건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는다'-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소문을 듣는 것과 예수님 앞에 와서 직접 말씀을 듣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 동안 행한 이적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모였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적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신뢰를 가지고 말씀을 듣게 됩니다. 혹자는 예수님의 이적을 가리켜 두부장수가 종치는 것과 같다고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 위중한 병을 고쳤다-이 소문으로 우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모인 사람들이 다 환자는 아닙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하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소문과 기적, 기적과 소문, 그로 모이는 군중과 그들에게 도를 전파하시는 예수님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일이 아니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진리를 가르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네 사람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메고 옵니다. 환자는 하나인데 이에 관계된 사람은 다섯입니다. 네 사람이 이 사람을 메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 일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네 사람-예수님께서도 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하셨습니다. 복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환자 한 사람의 믿음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를 메고 온, 침상째 둘러메고 온 그 네 사람들의 믿음까지 보시고 병을 고쳐주시기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환자는 하나인데 관계된 사람은 환자까지 다섯입니다. 이웃을 잘 둔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 일입니다. 중풍병자 이 사람, 친구를 잘 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려준 것도 친구요, 혼자 일어설 수도 없는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도 친구들입니다. '우리가 둘러 업고 가자. 아니, 둘러 업으면 몸이 아프니까 아예 침상 째 들고 가자'한 그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이 얼마나 좋은 친구들입니까? 잠언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면 지혜를 얻고 못된 친구를 사귀면 욕을 얻느니라.' 확실히 그러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일입니다. 좋은 친구들이 모여들게 되고, 그들을 통하여 좋은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로 인하여 나 또한 좋은 일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는 병석에 누워 있었습니다마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와서 말합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셨대. 이적을 나타내셨대. 자네도 예수님만 만나면 병을 고칠 수 있을 거야." 예수님을 만나보라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이 권유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입니다. 직접 제 눈으로 본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 있었는데 그럴 리가 없어. 병이 나을 리가 없어'하고 그 친구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권고하는 친구도 좋은 친구요 권고를 받아들이는 친구도 좋은 친구입니다. 친구란 일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좋은 친구에게는 좋은 친구가 연결되게 마련입니다. 저들이 둘러메고 예수님께 가겠다고 하자 순순이 따라나서는 이 환자, 훌륭한 사람입니다. 환자들은 보통 고집이 좀 센 편입니다. 병원에 가면 우선 의사의 말을 잘 들어야 할 텐데 오히려 의사를 비난합니다. 약을 가지고 와서도 '이 약은 먹어도 낫지도 않는다'라고 투덜댑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집에도 먹다 남은 약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사흘치 약을 하루 먹고는 내버린 것입니다. 사흘 먹으라고 했으면 사흘 꼬박 먹어야 합니다. 하루 이틀 먹고 낫지 않았다고 내버린 것이 어지간히 많이들 있습니다. 생각하면 모두 불 신앙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사람은 친구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로 가자'하고 뜻을 한데 모았습니다. 결국에는 큰 구원을 얻게 됩니다. 좋은 권고자, 좋은 친구, 그를 믿고 따르는 또 다른 친구-이 관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 눈으로 반드시 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친구가 보았으면 내가 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내 친구가 보고 와서 내게 말해주면 내가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마음이 중요합니다. 간접전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꼭 만져보아야 하겠습니까? 내 대신 도마가 만져보았으면 되었습니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까? 베드로가 만났으면 됩니다. 바로 이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저들은 이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보이고자 합니다. 더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모셔오려고 한 것이 아니라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한 마음입니다. 백부장에게서도 그런 믿음을 보겠습니다마는, 나는 부동자세로 앉아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내가 이 현실에서 떠나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영적으로 더 가까이 가서 예수님 앞에 나를 보이고자 하여야 합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보러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를 보이고자 나오는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자,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그대로 보이고자 이들은 정성으로 예수님께 나오게 됩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가고자 합니다.

이 사람이 환자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절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친구가 병상에 누워 있지만 않았다면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갈 마음이 생기기나 했겠습니까? 혹시 갔더라도 멀리서 바라보고는 키가 얼마고 얼굴이 어떻게 생겼고, 이런 것에나 신경을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굳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고자 했습니까?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젊은 사람들과 세례 문답을 하면서 이렇게 물어보곤 합니다. "자네, 성경은 얼마나 읽었는가?" "조금 읽었습니다." "어디까지 읽었는가?" "마태복음 보다가 말았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글을 모른다면 할 수 없지만 글도 알고 책도 많이 읽은 사람이 성경 한번 읽지 않고 어떻게 세례를 받겠는가? 성경도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이느니 안 보이느니 할 수 있는가 말일세." 우리가 왜 성경을 봅니까? 더 가까이 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왜 예배당에 나옵니까? 더 가까이 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새벽이고 저녁이고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 우리의 영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가 체험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저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이적이 나타나는 데에 주관적인 근거는 우리의 믿음이요 객관적인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믿음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소중한 그릇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그릇을 보시고 하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믿음인가 한번 보십시다. 첫째로, 나의 믿음이 아니라 저희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다섯 사람의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병이니 저런 병이니, 경하니 중하니 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행동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멀리 있으면서 '주여 주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십시오'하고 청한 것도 아닙니다.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는, 곧 강한 열망은 그 정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행동입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말고 행동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공부 많이 하고 성경 구절을 좔좔 왼다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행동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동하게 됩니다. 행동이 따라야 진정한 믿음이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행동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믿음 안에 행동의 동력인(動力因)이 잠재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써 행동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바로 옮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병이 낫는데 안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나을 것인가 하고 의심의 여지를 두어서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국과 지옥을 믿습니까? 정말로 믿는다면 예수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믿는다고 말을 하면서 일말의 의심을 남겨두는 데에 있습니다. '정말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져 있을까'하고 망설이는 것입니다. 믿으면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겨울이 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겨울 준비를 합니다.

봄이 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다음해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에는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셋째로, 이들의 믿음은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을 합니다. 지붕을 뚫고 침상째 달아 내렸습니다. 아무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생각보다 방해되는 것이 많습니다. 얽매이기 쉽습니다. 가정 문제, 경제 문제, 체면 문제까지 결부됩니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시험에 빠집니다. 그런 연후에야 정신을 차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험은 우리 가까이에 늘 있습니다. 때로 섭섭한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때로 무슨 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시험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험에 계속 빠져드는 것입니다. 장애물은 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바로, 더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시험이 다가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그날 따라 사람이 더 많습니다. 집안이 사람으로 꽉 차 더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지붕을 뚫고 말았습니다. 대단히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는 거침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버려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려라."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데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네 부모나 형제 자매, 또한 네 목숨까지 버리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까지 하십니다. 얼마나 심각하고 현실적인 말씀입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좀더 주님께 가까이 가기 위하여 진실 되고 깨끗한 마음으로 은혜의 생활을 하려고 해도 장애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애물을 다 극복하고 넘어서야 합니다.

넷째로, 이 사람들의 믿음은 손해를 꺼려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손해를 생각해보십시다. 남의 집 지붕을 뚫었으니 도대체 어쩌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당연히 물어주어야 합니다. 마구잡이로 뚫어놓고는 나몰라라 하고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원치 않은 지붕이라 할지라도 뒤에 반드시 수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는 그까짓 수고쯤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백만 원이 들든 천만 원이 들든 문제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손해를 감수하고 지붕을 뚫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희생과 손해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주님과 만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 앞에 가까이만 갈 수 있다면 물질적인 손해, 명예의 손해, 혹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손해도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언젠가는 복덕방 사람이 와서 제게 한다는 말이 교회 근방, 즉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대의 집 값이 자꾸만 올라간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도 근처에 땅을 좀 사야 하는데 값이 올라간다면 참으로 걱정입니다'라고 말했더니, 땅값 올라가는 이유가 바로 우리 소망교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인즉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교회 근방에 있는 복덕방을 돌아다니면서 값은 상관없이 집이 나오면 사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근방에 살면서 새벽기도에도 나오고 아침저녁으로 나와 그야말로 교회 중심으로 살다가 천국 가겠다는 생각에서라고 합니다. 집사는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투기의 대상이 아닙니다. 값이 계속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편히 살다가 신앙생활을 그르치느니 공기가 좋든 나쁘든 교통이 복잡하든 않든 교회 가까이서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다가 생을 깨끗하게 마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가끔 보면 집이 너무 멀어서 새벽기도에 나올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집 팔고 이사 오면 되지 않습니까? 별 대수롭지도 않은 집을 가지고 얽매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몇백 년 대를 물려 사는 집도 아니니 팔고 옮기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지붕이라도 뚫어야 합니다. 남의 집이라도 개의치 않아야 합니다. 보상하면 될 일입니다. 남의 집 지붕을 뚫어놓았으면 당연히 수리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 사건을 두고 재미있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붕을 뚫어놓고 뒤에 수리하는 것을 베드로가 보았을 거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일을 마가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해주어서 마가가 이렇듯 생생하게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장애물을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이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포착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It's now or never!-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다시없는 기회로 생각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상상해보십시다. 손님들이 돌아갈 때까지 좀 기다리면 될 거 아닙니까? , 오늘만 날입니까? 이리 야단스럽게 지붕까지 뚫을 일입니까? 우리가 쉽게 읽고 넘어가는 구절이기도 합니다마는 생각하면 할말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렇게까지 급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손님들이 다 돌아간 다음까지 천천히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저녁이면 어떻고 다음날이면 어떻습니까? 남의 집 지붕까지 뚫어가며 수선 피울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바로 지금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내일로 미루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선한 일, 중요한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하루 미루고 이틀 미루다보면 의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병을 고치실 수 있을까"-별 소문이 다 돌아서 이 사람들 결국에는 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오늘이 중요합니다. 즉각적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특별히 선행도 그렇습니다. 선한 일은 당장 해야 합니다. '조금 있다 해야지'하면 결국 못하게 되고 맙니다. 이 사람은 기회를 포착한 바로 그 시간에 서둘러서 갑니다. 당장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소자(小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5)." 사죄권을 행사하셨습니다. 큰 권능입니다. 저는 가끔 신학생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된 증거를 쓰라'라는 시험 문제를 냅니다. 성경도 많이 읽고 신학적인 것도 많이 알지만 선뜻 말을 끌어내기는 힘이 듭니다. 서너 가지의 증거가 있습니다마는 제일 큰 증거는 사죄권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네 죄를 사했느니라'라는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기에 사죄권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 사람의 병은 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죄 때문에 고민도 있고 가책도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서 중풍병이 들었고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 91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죄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병에 걸리는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죄로 내가 병에 걸리는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로 내가 애매하게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애매하지만 하나님께는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반드시 죄 때문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 환자의 병은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지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의 질병관을 역이용하여 소중한 사죄의 교리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언급하셨을 때에 이 환자는 조용히 죄 있음을 수긍합니다. 이 침묵 속에 귀한 참 믿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침묵함을 믿음으로 간주하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한번은 내과병원에 가서 어느 환자와 의사가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디가 아프십니까?" 의사가 묻습니다. 환자는 의사의 물음에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대답합니다. 의사는 여기저기 진찰을 다 해보고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도 환자는 줄곧 아프다고 합니다. '아프다' '특별한 병이 없다'하고 서로 시비를 벌입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당신한테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잠을 못 이룰 만큼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마침내 의사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환자가 버럭 화를 냅니다. "병이나 고칠 것이지 별소리를 다하십니다." 어떻게나 화를 내던지 옆에서 보고 있던 저도 속으로 '정말 무슨 말못할 고민이 있는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신의 병을 고치러 갔는데 실상은 육신의 병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이 병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보십시다.

병을 고치러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놓고 죄의 문제를 거론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타령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병고치러 왔는데 죄는 왜 들추는 거요?'라고 하며 버럭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했습니다. 이 침묵이 중요한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이끌리어 온 것도 하나의 침묵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침묵입니다. 이 사람은 침묵 가운데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침묵 가운데 예수님께 대한 기대와 믿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온유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둘러메고 온 사람들과 환자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에 옆에 있던 서기관들이 교리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 당연히 그러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더욱 귀합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9)." 사죄하는 것과 치유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사죄는 내적인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치유는 외적인 것이요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시적으로 병을 고쳐주는 일입니다.

둘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병고침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죄 사함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쪽이 더 근본적인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교회에 나왔는지를 깊이 숙고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병이야 낫든 말든 죄 사함 받는 것이 먼저 입니다. 죄 사함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 사람이 죄 사함을 받아야 병이 나을 것이고, 병이 나으려면 죄 사함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둘 다 중요합니다마는 사죄가 더 근본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근본 목적은 병이 낫고 건강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소원성취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은 연후에 병 낫고 돈벌고 할 것입니다.

근본적인 것은 사죄(赦罪)입니다. 사죄의 은총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의무로서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 병에 걸렸다면 병 걸린 그것으로 고민할 것 없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느낄 수 있으면 설사 사업에 실패했다 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하셨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 이 사람, 벌떡 일어나서 걸어나갑니다. 죄 사함을 받았고 병 나음도 받은 것입니다. 둘 다 받게 됩니다. 아니, 죄 사함 받은 증거로 병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어디서 병 고침을 받았다느니, 참 희한한 일이라느니 하며 말들을 합니다. 또 병 걸렸다 나았는데 다시 걸려 죽었다느니 합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오늘 나았다가 내일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당사자에게 물어 보십시오. 병 나은 체험,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하였기에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어도 그만입니다.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병이 낫고, 이적을 체험하고, 능력을 보고하는 문제를 놓고 남을 너무 쉽게 판단하려듭니다. 남이야 알아주건 말건 본인으로서는 체험 속에서 얻은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병이 나았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비밀한 것-하나님께서 내 죄를 사하셨고, 내 기도를 들으셨고, 내게 개인적인 사랑을 베푸셨다는 확신으로 기쁜 것입니다. 병이 나아서 기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병이 나았댔자 언젠가는 죽을 일이 아닙니까? 가장 귀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음에 대한 증거,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다는 증거로 이적이 나타났기에 그 이적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능력을 체험해보았습니까? 혹 병 걸렸다가 기도하고 나았습니까? 아니면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저로서는 참 송구스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웬 젊은 여자 분이 저한테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악수를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제 손을 잡고 하는 말인즉, 지난주간에 시험을 봐야 할 일이 있었는데 저와 악수를 하고 보면 꼭 합격할 것 같았다고 합니다. 예감대로 악수를 하고 시험을 치렀더니 정말 합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감사의 악수라는 것이었습니다. 합격했기에 망정이지 떨어졌으면 뭐라고 했겠습니까? 전 그게 걱정되었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모든 사건 속에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 죄를 사하신 증거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는 그 복음이 여기에 나타난 것으로 믿기에 기쁘고 감격해하는 것입니다.

이제 침상에 들려온 이 사람이 침상을 스스로 둘러메고 돌아갑니다. 여기에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본 모든 사람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어떤 이적이든 어떤 사건이든 어떤 믿음이든 어떤 간증이든 그 결과는 다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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