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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뿌리 되는 죄(창세기 3 : 6-13)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마는 작년 가을 장로님들의 강권에 못 이겨 생전 처음 종합진단을 받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다 좋은데 콜레스테롤(cholesterol)의 단위가 높아졌다며 몇 가지의 음식을 조심하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가령 콜레스테롤의 함유량이 많은 굴이나 새우, 장어 같은 것은 삼가하여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바로 그날, 점심을 먹는 식탁에 마침 굴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굴을 먹어 보았더니 그날 따라 그렇게 굴이 맛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먹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먹으니까 새롭게 더 맛이 좋더란 말입니다.
그 때 제가 속으로 혼자 말하기를 "너는 틀림없이 아담의 후손이구나"하였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 왜 그것만 그렇게 좋아합니까? 원래 건강한 사람은 자기 몸에 유익한 음식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식욕이 당기는 대로 먹으면 다 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은 꼭 몸에 나쁜 것만 좋아합니다. 짠것을 먹어서는 안 될 사람은 짠것을 좋아하고, 단 것을 먹어서는 안 될 사람은 죽어라 하고 단 것만 좋아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을병입니다.
중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죽을병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선호도, 그 성향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라는 일,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굳이 하지 말라는 일만 따라다니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 스릴(thrill)이 있고 재미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잠언에서도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잠 9 : 17)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윤리적으로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러하며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자면 그저 괴롭고 힘들기만 한데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 분명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런 것에만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그쪽으로 마음이 동하고 식욕이 당기며 그리고 신이 나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인가 크게 병이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실로 죽을 병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생각하여야 하며 나아가서는 그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분명히 깊은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이라는 것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현상이 아닌 것으로, 저 멀리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 때문에 이는 미래적이기도 하고 과거적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토록 원인이 깊이 숨겨져 있는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원인에는 무관심한 채 나타난 결과만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하게 됩니다. 원인에는 가까운 원인이 있는가 하면 먼 원인이 있고, 사회적, 경제적 원인이 있는가 하면, 윤리,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원인이 저 깊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서부터 문제의 해결을 보아야 되겠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되어진 현실과 결과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에 끝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우리 사람들이 앓는 병에는 3만 5천여 가지의 병이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 모르고 지나가는 병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병중에서도 병의 원인을 알고 있는 병은 5천여 가지뿐이라고 합니다. 그 외 원인 모를 나머지 병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원인을 모르는 한 치료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심리 가운데에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은, 두 가지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죽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책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든 이 죄의 가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경제적인 실패나 사회적인 직위, 명예, 그리고 건강에 대한 아쉬움을 논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죄책의 문제입니다. 설령 내가 실패했다 치더라도 그것이 단순한 물질적 손해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근원적 깊은 곳에는 분명 죄책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녀들이 잘못되었다 할 때에도 나타난 그 자체만 가지고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에 대한 죄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병들었다해서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병이란 몸이 아플 따름이지 마음까지 아픈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고통과 그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먼저 그 깊은 원인, 그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프고 괴로워도 우리는 기어이 분석해 내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죄의 원인이 되는 죄, 이것을 발견함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죄의 뿌리 되는 죄를 알고 거기에서부터 차단하며, 거기에서부터 도말 시켜야 문제 해결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놓아두는 한 악순환의 반복은 절대로 멈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출발이요 뿌리가 되는 죄, 곧 원죄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그때, 그 사건으로 되돌아가서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먼저, 죄의 뿌리는 불 신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금단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먹게 된 동기나 이유는 한 마디로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 : 17)고 하셨습니다. 아주 강경하게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었다면 저들은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못 믿고, 안 믿었기 때문에 먹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 홍수의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수가 나기 120년 전부터 방주를 짓게 하여 120년의 긴 작업 끝에 방주가 완성됩니다.
이제 홍수는 날 것이고 방주에 들어가는 생명만 살아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를 제외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 방주에 오르지 않고 있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 방주가 무엇 때문에 준비되고 있는가를 120년 동안이나 지켜보며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주에 오르지를 않았고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 승선하는 조건으로 먼저 도덕적으로 깨끗하라, 아니면 회개하라는 등의 의와 진리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조건, "방주에 오르라 그러면 살리라"는 이 한 마디를 믿지 않고 방주에 오르지 아니함으로 저들은 홍수에 멸하여지게 됩니다. 마지막 통첩, 종말론적인 메시지, 이 한 마디를 믿지 않은 죄로 저들은 죽은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 믿는다는 사실! 우리는 때때로 믿음과 행위를 따로 떼어놓고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 "믿기는 하지만 행하지는 못한다" 혹은 말을 합니다마는 그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는 하나요 같이 있습니다. 행위로 인하여 믿음이 온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온전한 믿음은 행위를 동반하게 됩니다. 오직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무제는 안 믿었고 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젊은 학생들을 향하여 "부지런히 공부하라. 너희들이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훗날 나이 들어 불행하게 된다."고 했다 합시다. 젊은 사람들이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무엇 때문에 공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공부하지 않는 이유는 가만히 보니까 공부하지 않고도 잘 살더란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예외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안 믿고, 안 믿으니까 공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 내가 부지런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나의 미래는 불행해진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진다면 공부하지 않을 학생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요는 이 또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을 심어 나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서 거슬러 올라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뱀이 하와에게 와서는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명을 간교한 수법으로 물어 봅니다. 그럴 때에 하와의 대답인즉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벌써 절반은 떨어져 나간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와의 대답은 "죽을까 하노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반감시키며 약화시킬 때에 뱀은 그 말을 곧장 알아차리고 하는 말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엄청난 제언을 하게 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이렇게 해서 먹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믿었다면 이 사건은 없었을 사건입니다. 그런데 "죽을까 하노라"하다가 조금 더 나아가서는 "죽지 않는다"하여 먹어 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불신앙이 원인입니다.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없는 국가, 믿음이 없는 사회, 믿음이 없는 인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미 파산된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만입니다. 다 먹으라. 그러나 이 하나만은 먹지 말라, 하신 이것! 이것은 분명 금단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감히 이것을 그렇게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자들은 이 선악과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활 중앙에, 구체적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간섭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나타내 세워 주신 것이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다 먹되 이것은 먹지 말라!" 그런데 하나님이 이 법에 대해서 몹시도 불만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가져라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안 된다"는 것인데 이것을 이처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의 간섭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한 가지 법마저 괴롭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 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불 신앙이요 도전입니다.
어떤 교인 한 분이 무엇이 좀 언짢고 괴로울 때면 언제나 아담과 하와를 원망하면서 불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아담과 하와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고생을 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고 계시는 목사님께서 한번은 특별히 기회를 마련하여 그 교인 내외를 집으로 초대하셨답니다. 그리하여 잘 준비된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막 함께 식사를 하려는 참인데 그 때 마침 밖에서 누가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그릇 뚜껑들을 열어 놓으면서 잠깐 나갔다 올 터이니 식지 전에 먼저 시작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면서 당부하기를 뚜껑을 열지 않은 채 남겨둔 중앙의 한 그릇을 가리키면서 "이 그릇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뚜껑을 열지 마십시오." 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내외가 그것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야말로 이것들만 해도 진수 성찬인데 이 한 가지는 또 무엇일까? 하고 살며시 뚜껑을 드는 순간, 푸드득하며 갇혔던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입니다. 누군들 그 속에 살아 있는 새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다시 새를 잡아넣을 수도 없는 처지에서 당황하고 있을 때 목사님께서 들어오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당신도 틀림없이 아담의 후예이군요, 아담과 하와를 원망할 것 없이 당신 자신이 아담이 아닙니까? 이렇게 음식이 넉넉한데 구태여 그것까지 못 먹어서 불평스럽더란 말입니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불평이 많아요.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는지! 라며 그것까지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전부인 열! 그 중에서 아홉은 제가 가지고 하나는 내게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의 물질 생활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이 10의 1조 안에서 간증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미상으로 보면 열에 하나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열에 아홉을 받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도리를 모르고 열에 하나까지 먹으려고 하다가는 허락된 아홉까지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유하게 하기 위해 그 하나는 나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십일조 생활을 하는 분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이 십일조를 드리고 나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고 하는데도 이것을 계속 자기 것으로 착각하며 붙들려고 하니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또한 주일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이라 하지 않고 주일이라 하는데 더구나 일요일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일(主日)! 주님의 날! "엿새 동안은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루는 내 날이다" 하시는데 이것을 아까워서 못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까지 일을 하다가 결국 병들고 말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다 축복으로 주셨건만 어찌하여 이 축복들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간섭이요, 괴롭다 하며 감히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까지 불평을 하려 드는 것입니까?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불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그러한 불 신앙! 이 불 신앙이 죄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곧 죄의 뿌리가 되는 죄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가하면 이는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그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불평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려 합니다. 이렇게 하여 존재의 문제에 도전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마귀가 꾀이는 말인즉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인데 이 말에 귀가 솔깃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그 마음! 피조물로서 감히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그 마음이 바로 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누구나 다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유별난 인간으로 보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하여 인간 이상이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인간 이하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나아가서 초인간이 되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비인간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다르게, 나름대로는 소위 더 낫게 살아보겠다고 하다가 결국에는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남보다 나은데 하다가 그보다 몇 배 못한 비열한 인간이 되고만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만! 이 교만 때문에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여 할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에게까지 도전하려 들고 이에 자기가 우상이 되며, 신이 되려 하는 이러한 마음들 때문에 이 세상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고, 비난과 투쟁, 그리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교만 이것 때문에 아무 것도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도, 인격도, 사랑도, 기쁨도, 성장할 수가 없어요. 이것 때문에 인간다울 수가 없고, 이것 때문에 언제 한번 평안한 마음을 바로 가져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을 때에 즉시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충분하신 은혜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범죄한 뒤에 오늘에 와서는 교만하여 본래의 진실을 되찾지 못합니다. 원인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상실해 버립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못합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요. 이 물음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네가 지금 어느 처지에 있느냐? 는 물음이신데 아담은 대답하기를 "나 여기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대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물으십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싶은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선악과를 먹었나이다"하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아담은 그 많은 말을 하는 중에 한 마디도 "내가 선악과를 먹었다" 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진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려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두려운 줄은 아는데 두려움의 원인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저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는 못하고 두려워 숨으려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숨으려고 하는 죄가 결정적으로 더 큰 죄가 됩니다. 그것이 원인입니다. 회개는 하려하지 않고 도피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변명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말씀을 드린다면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십니다. 이럴 때에 "예 제가 그만 먹었나이다" 하든지 아니면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나이다"하고 끝났어도 좋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하는 말의 내용이 묘하게 길어지면서 또 재미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대단히 심각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주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이 "하나님의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무슨 소리입니까? 원망은 하다 보면 언제나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이 여자를 주셨을 때에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좋아하더니 이제 일이 잘못되다 보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여자를 왜 내게 주셨습니까? 하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와서 감히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며 나온단 말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렇게 전가를 하는 이것이 원조입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남을 탓하는 죄입니다.
또한 하와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랬더니 여자의 대답인즉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저는 요나서를 볼 때마다 제일 감격스러운 장면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나서를 보면 다시스로 가는 배 한 척이 심한 풍랑을 만나 사경에 접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에서 원인을 몰라 불안해하고 있을 때에 비록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던 요나였고, 깊이 잠들었던 요나였지만 그는 서슴치 않고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 : 12)며 그러니 나를 바다에 던지면 이 풍랑이 잔잔해지리라고 말합니다. 제비가 뽑혔다고는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사람들을 향해 요나는 기어이 이 풍랑은 나 때문이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수가 없어요. 전부가 남 때문이라고 하니 원망과 불평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도 결혼 주례를 하면서 신랑에게 말하기를 성경에 보면 남편이란 가정의 주인이요 머리라고 하셨으니, 그러므로 남편 구실을 하려거든 아내의 모든 책임을 지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기분도, 저의 생활도, 저의 도덕 생활까지도, 저의 모든 것을 내 책임으로 생각하라. 그래야 남편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가만히 볼 것 같으면 시시한 남편들이 많아요. 그래서는 무슨 일이 잘못되면 아내 때문이라고, 아내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내는 또 아이들 때문에 그 잘못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처럼 줄줄이 남에게 전가시키기가 바쁩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꼭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나 때문입니다! 오늘 이 사람 아담이 "내가 먹었습니다" 하는 이 말을 왜 못하느냐고요? 그러기 때문에 이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문제올시다. 책임질 줄 모를 때에 결국은 거기에 원죄가 있고, 그 원죄가 계속하여 죄를 낳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불신이요, 그 뿌리는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의 길도 여기에 있습니다. 불신으로부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믿음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낮추고 낮추어 온전히 겸손하여야 되겠습니다. 어떤 비난, 어떤 고난이라도 다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그런 겸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야 진실할 수 있으며 사실에로 돌아갈 수가 있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과 이 겸손으로 죄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의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우리는 이 물으심 앞에 똑바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죄 가운데 살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으면서도 돌아올 줄 모르는 저희들! 처참한 모습으로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채 불신앙과 교만에 젖어 사는 저희들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이제는 믿음으로 서게 하시고 참으로 겸손하게 하사 앞으로의 생은 이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할 수 있는 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죄의 뿌리 되는 죄(창세기 3 : 6-13)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마는 작년 가을 장로님들의 강권에 못 이겨 생전 처음 종합진단을 받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다 좋은데 콜레스테롤(cholesterol)의 단위가 높아졌다며 몇 가지의 음식을 조심하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가령 콜레스테롤의 함유량이 많은 굴이나 새우, 장어 같은 것은 삼가하여 먹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바로 그날, 점심을 먹는 식탁에 마침 굴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굴을 먹어 보았더니 그날 따라 그렇게 굴이 맛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먹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먹으니까 새롭게 더 맛이 좋더란 말입니다.
그 때 제가 속으로 혼자 말하기를 "너는 틀림없이 아담의 후손이구나"하였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 왜 그것만 그렇게 좋아합니까? 원래 건강한 사람은 자기 몸에 유익한 음식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식욕이 당기는 대로 먹으면 다 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병든 사람은 꼭 몸에 나쁜 것만 좋아합니다. 짠것을 먹어서는 안 될 사람은 짠것을 좋아하고, 단 것을 먹어서는 안 될 사람은 죽어라 하고 단 것만 좋아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을병입니다.
중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죽을병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선호도, 그 성향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라는 일,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굳이 하지 말라는 일만 따라다니며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 스릴(thrill)이 있고 재미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잠언에서도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잠 9 : 17)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윤리적으로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그러하며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자면 그저 괴롭고 힘들기만 한데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 분명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런 것에만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그쪽으로 마음이 동하고 식욕이 당기며 그리고 신이 나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인가 크게 병이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실로 죽을 병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생각하여야 하며 나아가서는 그 원인을 발견해야 합니다. 분명히 깊은 원인이 있습니다.
원인이라는 것은 대체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난 현상이 아닌 것으로, 저 멀리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 때문에 이는 미래적이기도 하고 과거적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토록 원인이 깊이 숨겨져 있는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원인에는 무관심한 채 나타난 결과만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하게 됩니다. 원인에는 가까운 원인이 있는가 하면 먼 원인이 있고, 사회적, 경제적 원인이 있는가 하면, 윤리, 도덕적이고, 신학적인 원인이 저 깊이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서부터 문제의 해결을 보아야 되겠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되어진 현실과 결과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기 때문에 문제의 해결에 끝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우리 사람들이 앓는 병에는 3만 5천여 가지의 병이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 모르고 지나가는 병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병중에서도 병의 원인을 알고 있는 병은 5천여 가지뿐이라고 합니다. 그 외 원인 모를 나머지 병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원인을 모르는 한 치료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심리 가운데에는 영원히 잊어버리고 싶은, 두 가지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죽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책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든 이 죄의 가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그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경제적인 실패나 사회적인 직위, 명예, 그리고 건강에 대한 아쉬움을 논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죄책의 문제입니다. 설령 내가 실패했다 치더라도 그것이 단순한 물질적 손해에서 문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근원적 깊은 곳에는 분명 죄책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녀들이 잘못되었다 할 때에도 나타난 그 자체만 가지고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에 대한 죄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병들었다해서 고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병이란 몸이 아플 따름이지 마음까지 아픈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고통과 그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먼저 그 깊은 원인, 그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프고 괴로워도 우리는 기어이 분석해 내어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죄의 원인이 되는 죄, 이것을 발견함이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죄의 뿌리 되는 죄를 알고 거기에서부터 차단하며, 거기에서부터 도말 시켜야 문제 해결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놓아두는 한 악순환의 반복은 절대로 멈추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출발이요 뿌리가 되는 죄, 곧 원죄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그때, 그 사건으로 되돌아가서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먼저, 죄의 뿌리는 불 신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금단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먹게 된 동기나 이유는 한 마디로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 : 17)고 하셨습니다. 아주 강경하게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저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었다면 저들은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못 믿고, 안 믿었기 때문에 먹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노아 홍수의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홍수가 나기 120년 전부터 방주를 짓게 하여 120년의 긴 작업 끝에 방주가 완성됩니다.
이제 홍수는 날 것이고 방주에 들어가는 생명만 살아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를 제외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 방주에 오르지 않고 있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 방주가 무엇 때문에 준비되고 있는가를 120년 동안이나 지켜보며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방주에 오르지를 않았고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 승선하는 조건으로 먼저 도덕적으로 깨끗하라, 아니면 회개하라는 등의 의와 진리를 찾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조건, "방주에 오르라 그러면 살리라"는 이 한 마디를 믿지 않고 방주에 오르지 아니함으로 저들은 홍수에 멸하여지게 됩니다. 마지막 통첩, 종말론적인 메시지, 이 한 마디를 믿지 않은 죄로 저들은 죽은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이 믿는다는 사실! 우리는 때때로 믿음과 행위를 따로 떼어놓고 보려는 경향이 있어서 "믿기는 하지만 행하지는 못한다" 혹은 말을 합니다마는 그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는 하나요 같이 있습니다. 행위로 인하여 믿음이 온전하게 됩니다.
따라서 온전한 믿음은 행위를 동반하게 됩니다. 오직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무제는 안 믿었고 덜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젊은 학생들을 향하여 "부지런히 공부하라. 너희들이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훗날 나이 들어 불행하게 된다."고 했다 합시다. 젊은 사람들이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무엇 때문에 공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공부하지 않는 이유는 가만히 보니까 공부하지 않고도 잘 살더란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예외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안 믿고, 안 믿으니까 공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 내가 부지런하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나의 미래는 불행해진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진다면 공부하지 않을 학생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요는 이 또한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을 심어 나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서 거슬러 올라가 성경을 자세히 보면 뱀이 하와에게 와서는 선악과에 대한 하나님의 명을 간교한 수법으로 물어 봅니다. 그럴 때에 하와의 대답인즉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벌써 절반은 떨어져 나간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와의 대답은 "죽을까 하노라"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반감시키며 약화시킬 때에 뱀은 그 말을 곧장 알아차리고 하는 말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엄청난 제언을 하게 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이렇게 해서 먹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믿었다면 이 사건은 없었을 사건입니다. 그런데 "죽을까 하노라"하다가 조금 더 나아가서는 "죽지 않는다"하여 먹어 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불신앙이 원인입니다.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없는 국가, 믿음이 없는 사회, 믿음이 없는 인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미 파산된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불만입니다. 다 먹으라. 그러나 이 하나만은 먹지 말라, 하신 이것! 이것은 분명 금단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감히 이것을 그렇게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신학자들은 이 선악과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활 중앙에, 구체적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간섭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나타내 세워 주신 것이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다 먹되 이것은 먹지 말라!" 그런데 하나님이 이 법에 대해서 몹시도 불만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가져라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안 된다"는 것인데 이것을 이처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의 간섭으로 받아들였으며 이 한 가지 법마저 괴롭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 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불 신앙이요 도전입니다.
어떤 교인 한 분이 무엇이 좀 언짢고 괴로울 때면 언제나 아담과 하와를 원망하면서 불평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아담과 하와는 왜 그 선악과를 따먹어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고생을 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고 계시는 목사님께서 한번은 특별히 기회를 마련하여 그 교인 내외를 집으로 초대하셨답니다. 그리하여 잘 준비된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막 함께 식사를 하려는 참인데 그 때 마침 밖에서 누가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는 그릇 뚜껑들을 열어 놓으면서 잠깐 나갔다 올 터이니 식지 전에 먼저 시작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면서 당부하기를 뚜껑을 열지 않은 채 남겨둔 중앙의 한 그릇을 가리키면서 "이 그릇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뚜껑을 열지 마십시오." 하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내외가 그것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야말로 이것들만 해도 진수 성찬인데 이 한 가지는 또 무엇일까? 하고 살며시 뚜껑을 드는 순간, 푸드득하며 갇혔던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입니다. 누군들 그 속에 살아 있는 새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다시 새를 잡아넣을 수도 없는 처지에서 당황하고 있을 때 목사님께서 들어오시더니 하시는 말씀이 "당신도 틀림없이 아담의 후예이군요, 아담과 하와를 원망할 것 없이 당신 자신이 아담이 아닙니까? 이렇게 음식이 넉넉한데 구태여 그것까지 못 먹어서 불평스럽더란 말입니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불평이 많아요. 심지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셨는지! 라며 그것까지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전부인 열! 그 중에서 아홉은 제가 가지고 하나는 내게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의 물질 생활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이 10의 1조 안에서 간증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미상으로 보면 열에 하나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열에 아홉을 받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도리를 모르고 열에 하나까지 먹으려고 하다가는 허락된 아홉까지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우리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유하게 하기 위해 그 하나는 나에게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십일조 생활을 하는 분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는 이 십일조를 드리고 나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고 하는데도 이것을 계속 자기 것으로 착각하며 붙들려고 하니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또한 주일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안식일이라 하지 않고 주일이라 하는데 더구나 일요일이라는 표현은 쓰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일(主日)! 주님의 날! "엿새 동안은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하루는 내 날이다" 하시는데 이것을 아까워서 못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에까지 일을 하다가 결국 병들고 말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다 축복으로 주셨건만 어찌하여 이 축복들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간섭이요, 괴롭다 하며 감히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까지 불평을 하려 드는 것입니까? 이것이 참으로 무서운 불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그러한 불 신앙! 이 불 신앙이 죄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곧 죄의 뿌리가 되는 죄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가하면 이는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그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불평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려 합니다. 이렇게 하여 존재의 문제에 도전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마귀가 꾀이는 말인즉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인데 이 말에 귀가 솔깃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그 마음! 피조물로서 감히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그 마음이 바로 죄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누구나 다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유별난 인간으로 보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하여 인간 이상이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인간 이하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나아가서 초인간이 되어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비인간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다르게, 나름대로는 소위 더 낫게 살아보겠다고 하다가 결국에는 더 형편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남보다 나은데 하다가 그보다 몇 배 못한 비열한 인간이 되고만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만! 이 교만 때문에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여 할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에게까지 도전하려 들고 이에 자기가 우상이 되며, 신이 되려 하는 이러한 마음들 때문에 이 세상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고, 비난과 투쟁, 그리고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교만 이것 때문에 아무 것도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도, 인격도, 사랑도, 기쁨도, 성장할 수가 없어요. 이것 때문에 인간다울 수가 없고, 이것 때문에 언제 한번 평안한 마음을 바로 가져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았을 때에 즉시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충분하신 은혜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범죄한 뒤에 오늘에 와서는 교만하여 본래의 진실을 되찾지 못합니다. 원인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얻지 못했습니다. 진실을 상실해 버립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못합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요. 이 물음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네가 지금 어느 처지에 있느냐? 는 물음이신데 아담은 대답하기를 "나 여기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대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물으십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싶은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선악과를 먹었나이다"하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아담은 그 많은 말을 하는 중에 한 마디도 "내가 선악과를 먹었다" 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진실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려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고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두려운 줄은 아는데 두려움의 원인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저들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는 못하고 두려워 숨으려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숨으려고 하는 죄가 결정적으로 더 큰 죄가 됩니다. 그것이 원인입니다. 회개는 하려하지 않고 도피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변명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대로 말씀을 드린다면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하십니다. 이럴 때에 "예 제가 그만 먹었나이다" 하든지 아니면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나이다"하고 끝났어도 좋았겠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하는 말의 내용이 묘하게 길어지면서 또 재미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대단히 심각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주었다는 것인데 도대체 이 "하나님의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가 무슨 소리입니까? 원망은 하다 보면 언제나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이 여자를 주셨을 때에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좋아하더니 이제 일이 잘못되다 보니 하나님께서 이러한 여자를 왜 내게 주셨습니까? 하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와서 감히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며 나온단 말입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렇게 전가를 하는 이것이 원조입니다. 회개할 줄 모르고 남을 탓하는 죄입니다.
또한 하와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랬더니 여자의 대답인즉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 보세요! 저는 요나서를 볼 때마다 제일 감격스러운 장면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나서를 보면 다시스로 가는 배 한 척이 심한 풍랑을 만나 사경에 접하게 됩니다. 이런 위기에서 원인을 몰라 불안해하고 있을 때에 비록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던 요나였고, 깊이 잠들었던 요나였지만 그는 서슴치 않고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 1 : 12)며 그러니 나를 바다에 던지면 이 풍랑이 잔잔해지리라고 말합니다. 제비가 뽑혔다고는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사람들을 향해 요나는 기어이 이 풍랑은 나 때문이니 나를 바다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수가 없어요. 전부가 남 때문이라고 하니 원망과 불평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도 결혼 주례를 하면서 신랑에게 말하기를 성경에 보면 남편이란 가정의 주인이요 머리라고 하셨으니, 그러므로 남편 구실을 하려거든 아내의 모든 책임을 지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기분도, 저의 생활도, 저의 도덕 생활까지도, 저의 모든 것을 내 책임으로 생각하라. 그래야 남편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가만히 볼 것 같으면 시시한 남편들이 많아요. 그래서는 무슨 일이 잘못되면 아내 때문이라고, 아내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내는 또 아이들 때문에 그 잘못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처럼 줄줄이 남에게 전가시키기가 바쁩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꼭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나 때문입니다! 오늘 이 사람 아담이 "내가 먹었습니다" 하는 이 말을 왜 못하느냐고요? 그러기 때문에 이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문제올시다. 책임질 줄 모를 때에 결국은 거기에 원죄가 있고, 그 원죄가 계속하여 죄를 낳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불신이요, 그 뿌리는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의 길도 여기에 있습니다. 불신으로부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믿음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낮추고 낮추어 온전히 겸손하여야 되겠습니다. 어떤 비난, 어떤 고난이라도 다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그런 겸손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리고야 진실할 수 있으며 사실에로 돌아갈 수가 있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과 이 겸손으로 죄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의를 이루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우리는 이 물으심 앞에 똑바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자비로우신 주님! 죄 가운데 살면서도 회개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으면서도 돌아올 줄 모르는 저희들! 처참한 모습으로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채 불신앙과 교만에 젖어 사는 저희들을 이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이제는 믿음으로 서게 하시고 참으로 겸손하게 하사 앞으로의 생은 이 모든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할 수 있는 의롭고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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