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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자의 복(시편 32 : 1-7)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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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자의 복(시편 32 : 1-7)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현대인의 행복을 세 가지 조건으로 말하는 하나의 유행어가 있는데 그 첫째가 젊음이요, 둘째는 자유, 그리고 셋째가 독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세 가지 조건 모두가 다 위험한 동기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그 뜻이 선하거나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찌 현대인의 행복을 이 세 가지 조건에 의존하겠습니까? 여기에는 의와 진실과 믿음이 빠졌습니다. 의도, 믿음도, 진실도 없는 곳에서 어찌 행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갖는 고민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죽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실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죄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죄책이 희미해져 간다는 점입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지, 창조시에서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죄는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에 대한 가책, 그 가책에 대한 고민이 점점 둔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그러기에 죄의식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다 읽어보고, 깊이 사고해 보면, 가난하고 부하고, 병들고 건강하며, 잘 살고 못 살고, 오래 살고 짧게 살고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주제는 언제나 죄의 문제가 그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이유가 죄 때문이요,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길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메시지(message)입니다. 죄책! 그것이 고민의 뿌리인 것입니다. 가령 내가 몸이 아프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에도 몸이 아픈 것이 문제입니까? 마음이 아파서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마음이 아픈 이유가 어디에 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책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그 때문에 몸도 아프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책 없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어찌 고통이라고 하겠습니까? 만일에 죄책 없는 죽음이 있다면 그 죽음을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습니까?

숨길 수 없는 사실은 그 모두가 다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듣기도 싫어하고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 죄 문제 좀 이야기하지 마시라" 고 목사에게 주문까지 한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죄의 문제를 빼어 놓고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나왔다고 하여도 조금도 잘못된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죄의 문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여러분, 혹 자식이 말썽을 부립니까? 그 때문에 고민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모에게 불효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내가 병들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병상에서 생각해 보니 모든 잘못된 일들이 생각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죽음이 앞에 다가온다고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죄인 이대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숨길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의 원인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말하기를 불안이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불안은 왜? 무엇이냐? 할 때에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민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누가 물어오면 왜 불안하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추위에 떠는 것도 아니며 당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어라고 설명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저 불안합니다. 하지만, 정말 원인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분명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숨겨진 죄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죄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더욱 어려운 것은 원인을 부정하는 죄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몰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든 알든 죄는 죄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식 이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짓는 죄도 죄요, 모르고 짓는 죄도 죄는 죄입니다. 저는 가끔 환자를 방문하는 중에 제일 괴로운 시간은 지금 죽을병이 걸려 순간 순간 생명을 재촉하고 있으면서도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제 며칠 후에는 죽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이렇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모두가 다 죽을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인은 모르고 있으면서 여기가 아픈데 이것만 안 아프면 살겠고, 요것만 아니면 되겠어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본인이 병의 상태를 알든 모르든, 죽어 가는 병은 죽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알게 된다면 더욱 괴로움이 심하겠지요. 그러나 그 괴로움은 겪어야 할 괴로움이요, 넘어서야 할 괴로움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고학을 하면서 자취를 하는 몇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남자들끼리 자취를 하다보니 그 살림살이며 음식이 오죽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는 대충대충 끓여먹고 지냈는데, 어느 날 식사 당번인 한 친구가 간장을 좀 떠내려고 간장 항아리에 가 보았더니 무엇이 떠 있기에 자세히 보니 큰 쥐 한 마리가 죽어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 동안 얼마나 이 썩은 것을 먹어왔나 싶은 것이 오장 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온갖 병이 있다손 치더라도 꼼짝 못하고 먹었지, 모르는 한 별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고 보니까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아는 그 순간부터 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알든 모르든 죄는 죄요, 그 죄에 대한 가책과 그로 인해서오는 고통은 있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할 수 없었다고도 말하고, 이것은 내 책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며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시인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성향을 두고 현대 심리학에서는 하나의 인간 심리적 현상이라고도 말하고 사회 규범에 대한 거역이라고도 하며, 건강치 못한 심리 상태에서 오는 것이라고도 말해 봅니다. 아무튼 무슨 말로 설명을 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은 바로 이 죄책인 것입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에프스키(Dostoevski)가 쓴 장편소설 "죄와 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소설에 의하면 주인공 되는 라스콜리니코프라고 하는 가난한 청년 대학생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었던 허무주의적 초인사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누가 나폴레옹의 살인죄를 물었던가?"라며 나폴레옹처럼 선택된 비범인인 그런 천재적인 인간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어떠한 범죄적인 수단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결론짓고 여기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존재의 이유도 없는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내리쳐 살해하게 됩니다. 자기는 비범인으로서 범인인 노파를 살해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돈으로 무엇인가 큰 일을 해 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범행 직후부터 양심의 가책과 고민을 느끼기 시작하며 죄의식에서 떠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소냐라고 하는 여인을 찾아가 자기의 범죄를 고백하게 되는데 그 때에 그는 "나는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인 거야.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의 짓이었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책에 평생을 괴로워하게 됩니다.

단순한 심리적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 죄입니다. 알든 모르든 죄는 죄대로 엄연히 있습니다.

그 결과 죄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두려움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듯이 네가 선을 행했으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4 : 7)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면 그 이유는 죄 때문이요,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그것도 죄 때문입니다. 그 외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윗 왕이 그의 깊은 고민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에 보면 "토설치 아니할 때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말하지 아니할 때에, 원문대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 비밀을 지킬 때에란 말입니다. 그런 상태로 있을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고 진액이 가뭄에 마름같이 말랐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공동번역의 성경으로 보면 "나 아뢰옵지 않으렸더니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나고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 가뭄에 풀 시들듯 진액이 다 말라빠지고 말았습니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는 자의 괴로움과 숨겨진 죄로 인한 자기만의 고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짜증스럽고, 원망스러우며, 행동은 점점 거칠어지고 생활은 썩어만 갑니다. 그리고 자기 상실, 자기 파멸, 자기 부정의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칭찬을 하거나 욕을 한다해도 옳고, 옳지 않음은 내 양심이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진실이 나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회개만이 죄의 문제의 유일한 열쇠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깊이 고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혹 어떤 이들은 이제부터 결심하고 의롭게 살며, 고행을 하고, 공로를 세워 지난 날의 불의를 보상하고 속죄하리라 생각도 합니다만 이는 넌센스(nonsense)입니다. 결코 인간 스스로 속죄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두고 비유한다면 마치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사람이 자기 머리카락을 자기 손으로 잡아 끄집어올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상태로는 아무리 애를 쓰며 수고하여도 자기는 자기대로 계속 더 멀리 떠내려 갈 뿐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 배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뉘우치고 후회하며 마침내 목을 매달아 죽는 속죄의 요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죄는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체면 불구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외에는 절대로 사함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회개하는 자의 기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벌을 받는 때문도 아니요, 잘 살기 위함도 아니며, 명예와 출세를 위해서도 아닌, 다만 죄 사함 받기 위하여 깨끗한 마음, 순수한 마음, 간사함이 없는 마음으로 주께 나아와 문자 그대로 토설하고 자복하며 숨김 없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나이다! 참으로 몹쓸 죄를 지었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그 때에 주께서 저를 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왕은 실로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기타의 많은 죄가 있었겠습니다만 대표적인 죄가 밧세바를 취한 것으로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그의 남편을 죽였으며 그리고 깊이깊이 숨겨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이 와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할 때에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내가 몹쓸 죄를 지었나이다! 다윗의 참회록을 보면 계속되는 그 많은 회개의 말 가운데서 밧세바를 원망하거나 책망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그 요사스러운 여자 때문이었는데 하는 원망의 소리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세상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하는 간사함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복할 뿐입니다. 그럴 때에 주께서 죄를 사하여 주셨고 그를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그 거룩하신 은혜로 용서받게 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무섭기만 하던 하나님이 이제는 반가운 하나님이요, 전에는 진노의 하나님이더니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이요, 지난날의 음성은 저주스럽고 심판적이었으나 이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그리고 주님을 뵈올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소중해졌습니다. 나를 위하여 지불한 십자가의 댓가! 나를 위하여 지불하신 그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격한지! 내가 죄를 지을 때에도 하나님은 참아 주셨습니다. 내가 형편없는 길로 갈 때에 당장 벼락이라도 치셨더라DTXT툟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아 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 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끝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놓쳤기에 뒤에 뉘우쳤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개의 용기도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감화가 그를 충만케 하기 전에는 진정한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입장으로 말하자면그는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일국의 왕으로서 "내가 이런 죄를 지었 나이다"하고 무릎을 꿇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주심으로 이제 그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그 엄청난 댓가를 생각하면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를 소중한 존재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를 사랑하며, 그리고 나아가 이웃을 반가와 하게 됩니다. 죄 사함 받은 자는 모든 사람이 반갑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해집니다.회개하고 용서받은 자, 속죄받은 자의 심령으로 대할 때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화목하고 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 오늘 본문을 보면 대단히 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아요.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실 것입니다. 그 어떤 환난도 문제가 되지를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데에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죄책이 없는 고난, 저주 의식이 없는 환난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달리 무엇을 더 두려워하겠습니까? 홍수도, 대환난도 문제가 아니요 이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듯 싶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죄 문제 외에 무슨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정책이나 정치입니까? 우리의 걱정은 부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가난하고 부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숨겨진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깊이 숨겨진 죄악! 그것이 걱정입니다.

또한 나의 죄 때문입니다. 숨겨진 죄, 숨겨진 악, 회개 못한 허물, 회개의 기회를 놓친 지난날의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이 기회는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하는 진실될 회개의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께서 내 죄를 사하실 것이요, 사죄의 기쁨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며 그를 고쳐 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서기관들이 저가 누군데 죄를 사한다 하느냐며 비난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며 되물어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둘 다 마찬가지란 말씀입니다. 이 문제 역시 죄의 문제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노라"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죄 사함 받은 사람이, 침상에 누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속죄 받은 자의 생활은 그간에 누워있던 그 낡아빠진 상을 둘러메고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요, 바로 거기에 크리스천의 참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기도

은혜로운 아버지시여! 죄의 고통은 알고 있으면서도 죄 때문임을 부정하며, 나의 죄 때문임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로 전가시키고, 그로 인해 가중되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의 가증된 의를 버리고 오직 주님 앞에 나아와 십자가를 부여잡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사죄 받은 의인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귀와 영화는 바라지 않습니다. 죄 사함 받기를 원하오며, 의롭게 살기를 비옵니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 앞에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원하오니 우리에게 시간 시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는 내 자녀"라고 하는 확실한 말씀을 주시옵소서. 그 사랑과 그 은총 속에 이제는 죄와는 상관없는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참회자의 복(시편 32 : 1-7)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현대인의 행복을 세 가지 조건으로 말하는 하나의 유행어가 있는데 그 첫째가 젊음이요, 둘째는 자유, 그리고 셋째가 독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세 가지 조건 모두가 다 위험한 동기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그 뜻이 선하거나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어찌 현대인의 행복을 이 세 가지 조건에 의존하겠습니까? 여기에는 의와 진실과 믿음이 빠졌습니다. 의도, 믿음도, 진실도 없는 곳에서 어찌 행복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갖는 고민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가 죽음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죄라고 합니다. 그런데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사실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죄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결정적으로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죄책이 희미해져 간다는 점입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지, 창조시에서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죄는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죄에 대한 가책, 그 가책에 대한 고민이 점점 둔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마비되어 가고, 그러기에 죄의식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66권을 다 읽어보고, 깊이 사고해 보면, 가난하고 부하고, 병들고 건강하며, 잘 살고 못 살고, 오래 살고 짧게 살고 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주제는 언제나 죄의 문제가 그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불행한 이유가 죄 때문이요,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길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메시지(message)입니다. 죄책! 그것이 고민의 뿌리인 것입니다. 가령 내가 몸이 아프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에도 몸이 아픈 것이 문제입니까? 마음이 아파서 문제이지요. 그렇다면 마음이 아픈 이유가 어디에 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책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그 때문에 몸도 아프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죄책 없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을 어찌 고통이라고 하겠습니까? 만일에 죄책 없는 죽음이 있다면 그 죽음을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겠습니까?

숨길 수 없는 사실은 그 모두가 다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듣기도 싫어하고 말하기도 싫어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 죄 문제 좀 이야기하지 마시라" 고 목사에게 주문까지 한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죄의 문제를 빼어 놓고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나왔다고 하여도 조금도 잘못된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죄의 문제는 참으로 심각합니다. 여러분, 혹 자식이 말썽을 부립니까? 그 때문에 고민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모에게 불효했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내가 병들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병상에서 생각해 보니 모든 잘못된 일들이 생각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죽음이 앞에 다가온다고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죄인 이대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숨길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책의 원인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말하기를 불안이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불안은 왜? 무엇이냐? 할 때에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민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누가 물어오면 왜 불안하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추위에 떠는 것도 아니며 당장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어라고 설명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 그저 불안합니다. 하지만, 정말 원인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분명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숨겨진 죄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죄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더욱 어려운 것은 원인을 부정하는 죄책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몰랐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든 알든 죄는 죄인 것입니다. 이것은 인식 이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짓는 죄도 죄요, 모르고 짓는 죄도 죄는 죄입니다. 저는 가끔 환자를 방문하는 중에 제일 괴로운 시간은 지금 죽을병이 걸려 순간 순간 생명을 재촉하고 있으면서도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제 며칠 후에는 죽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도 그렇고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도 이렇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모두가 다 죽을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인은 모르고 있으면서 여기가 아픈데 이것만 안 아프면 살겠고, 요것만 아니면 되겠어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본인이 병의 상태를 알든 모르든, 죽어 가는 병은 죽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알게 된다면 더욱 괴로움이 심하겠지요. 그러나 그 괴로움은 겪어야 할 괴로움이요, 넘어서야 할 괴로움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고학을 하면서 자취를 하는 몇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남자들끼리 자취를 하다보니 그 살림살이며 음식이 오죽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는 대충대충 끓여먹고 지냈는데, 어느 날 식사 당번인 한 친구가 간장을 좀 떠내려고 간장 항아리에 가 보았더니 무엇이 떠 있기에 자세히 보니 큰 쥐 한 마리가 죽어 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 동안 얼마나 이 썩은 것을 먹어왔나 싶은 것이 오장 육부가 다 뒤틀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온갖 병이 있다손 치더라도 꼼짝 못하고 먹었지, 모르는 한 별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알고 보니까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아는 그 순간부터 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알든 모르든 죄는 죄요, 그 죄에 대한 가책과 그로 인해서오는 고통은 있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할 수 없었다고도 말하고, 이것은 내 책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며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시인하려 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성향을 두고 현대 심리학에서는 하나의 인간 심리적 현상이라고도 말하고 사회 규범에 대한 거역이라고도 하며, 건강치 못한 심리 상태에서 오는 것이라고도 말해 봅니다. 아무튼 무슨 말로 설명을 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은 바로 이 죄책인 것입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에프스키(Dostoevski)가 쓴 장편소설 "죄와 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소설에 의하면 주인공 되는 라스콜리니코프라고 하는 가난한 청년 대학생이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었던 허무주의적 초인사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누가 나폴레옹의 살인죄를 물었던가?"라며 나폴레옹처럼 선택된 비범인인 그런 천재적인 인간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어떠한 범죄적인 수단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결론짓고 여기에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존재의 이유도 없는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내리쳐 살해하게 됩니다. 자기는 비범인으로서 범인인 노파를 살해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돈으로 무엇인가 큰 일을 해 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범행 직후부터 양심의 가책과 고민을 느끼기 시작하며 죄의식에서 떠나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소냐라고 하는 여인을 찾아가 자기의 범죄를 고백하게 되는데 그 때에 그는 "나는 노파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인 거야. 노파를 죽인 것은 악마의 짓이었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죄책에 평생을 괴로워하게 됩니다.

단순한 심리적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 죄입니다. 알든 모르든 죄는 죄대로 엄연히 있습니다.

그 결과 죄책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두려움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듯이 네가 선을 행했으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4 : 7)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있다면 그 이유는 죄 때문이요,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그것도 죄 때문입니다. 그 외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다윗 왕이 그의 깊은 고민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 말씀에 보면 "토설치 아니할 때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말하지 아니할 때에, 원문대로 보면, 하나님 앞에서 비밀을 지킬 때에란 말입니다. 그런 상태로 있을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고 진액이 가뭄에 마름같이 말랐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공동번역의 성경으로 보면 "나 아뢰옵지 않으렸더니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나고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눌러 이 몸은 여름 가뭄에 풀 시들듯 진액이 다 말라빠지고 말았습니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는 자의 괴로움과 숨겨진 죄로 인한 자기만의 고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짜증스럽고, 원망스러우며, 행동은 점점 거칠어지고 생활은 썩어만 갑니다. 그리고 자기 상실, 자기 파멸, 자기 부정의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칭찬을 하거나 욕을 한다해도 옳고, 옳지 않음은 내 양심이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진실이 나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회개만이 죄의 문제의 유일한 열쇠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깊이 고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혹 어떤 이들은 이제부터 결심하고 의롭게 살며, 고행을 하고, 공로를 세워 지난 날의 불의를 보상하고 속죄하리라 생각도 합니다만 이는 넌센스(nonsense)입니다. 결코 인간 스스로 속죄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두고 비유한다면 마치 물에 빠져 떠내려가는 사람이 자기 머리카락을 자기 손으로 잡아 끄집어올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상태로는 아무리 애를 쓰며 수고하여도 자기는 자기대로 계속 더 멀리 떠내려 갈 뿐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 배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뉘우치고 후회하며 마침내 목을 매달아 죽는 속죄의 요청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죄는 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체면 불구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외에는 절대로 사함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회개하는 자의 기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벌을 받는 때문도 아니요, 잘 살기 위함도 아니며, 명예와 출세를 위해서도 아닌, 다만 죄 사함 받기 위하여 깨끗한 마음, 순수한 마음, 간사함이 없는 마음으로 주께 나아와 문자 그대로 토설하고 자복하며 숨김 없는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런 죄를 지었나이다! 참으로 몹쓸 죄를 지었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그 때에 주께서 저를 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왕은 실로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기타의 많은 죄가 있었겠습니다만 대표적인 죄가 밧세바를 취한 것으로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그의 남편을 죽였으며 그리고 깊이깊이 숨겨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나단이 와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할 때에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내가 몹쓸 죄를 지었나이다! 다윗의 참회록을 보면 계속되는 그 많은 회개의 말 가운데서 밧세바를 원망하거나 책망하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은 그 요사스러운 여자 때문이었는데 하는 원망의 소리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세상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하는 간사함이 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자복할 뿐입니다. 그럴 때에 주께서 죄를 사하여 주셨고 그를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그 거룩하신 은혜로 용서받게 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무섭기만 하던 하나님이 이제는 반가운 하나님이요, 전에는 진노의 하나님이더니 이제는 사랑의 하나님이요, 지난날의 음성은 저주스럽고 심판적이었으나 이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그리고 주님을 뵈올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소중해졌습니다. 나를 위하여 지불한 십자가의 댓가! 나를 위하여 지불하신 그 엄청난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할 때에 얼마나 감격한지! 내가 죄를 지을 때에도 하나님은 참아 주셨습니다. 내가 형편없는 길로 갈 때에 당장 벼락이라도 치셨더라DTXT툟면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아 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 오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끝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놓쳤기에 뒤에 뉘우쳤지만 도리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개의 용기도 주셔야 합니다. 성령의 감화가 그를 충만케 하기 전에는 진정한 회개를 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입장으로 말하자면그는 한 나라의 왕입니다. 일국의 왕으로서 "내가 이런 죄를 지었 나이다"하고 무릎을 꿇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용기를 주심으로 이제 그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그 엄청난 댓가를 생각하면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를 소중한 존재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를 사랑하며, 그리고 나아가 이웃을 반가와 하게 됩니다. 죄 사함 받은 자는 모든 사람이 반갑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해집니다.회개하고 용서받은 자, 속죄받은 자의 심령으로 대할 때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화목하고 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좀더 나아가 오늘 본문을 보면 대단히 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는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아요.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실 것입니다. 그 어떤 환난도 문제가 되지를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는 데에야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죄책이 없는 고난, 저주 의식이 없는 환난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달리 무엇을 더 두려워하겠습니까? 홍수도, 대환난도 문제가 아니요 이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됩니다. 여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듯 싶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죄 문제 외에 무슨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정책이나 정치입니까? 우리의 걱정은 부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가난하고 부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에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숨겨진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깊이 숨겨진 죄악! 그것이 걱정입니다.

또한 나의 죄 때문입니다. 숨겨진 죄, 숨겨진 악, 회개 못한 허물, 회개의 기회를 놓친 지난날의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이 기회는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하는 진실될 회개의 고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께서 내 죄를 사하실 것이요, 사죄의 기쁨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며 그를 고쳐 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서기관들이 저가 누군데 죄를 사한다 하느냐며 비난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며 되물어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둘 다 마찬가지란 말씀입니다. 이 문제 역시 죄의 문제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노라"하시고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죄 사함 받은 사람이, 침상에 누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속죄 받은 자의 생활은 그간에 누워있던 그 낡아빠진 상을 둘러메고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요, 바로 거기에 크리스천의 참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기도

은혜로운 아버지시여! 죄의 고통은 알고 있으면서도 죄 때문임을 부정하며, 나의 죄 때문임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로 전가시키고, 그로 인해 가중되는 고통과 불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의 가증된 의를 버리고 오직 주님 앞에 나아와 십자가를 부여잡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사죄 받은 의인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부귀와 영화는 바라지 않습니다. 죄 사함 받기를 원하오며, 의롭게 살기를 비옵니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 앞에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원하오니 우리에게 시간 시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너는 내 자녀"라고 하는 확실한 말씀을 주시옵소서. 그 사랑과 그 은총 속에 이제는 죄와는 상관없는 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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