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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 합당한 열매(마태복음 3:5-12)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 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 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나는 너 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자동차 도둑이 차를 훔쳐 달아나 며칠 동안 제 마음대로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에게 다시 자동차를 돌려주면서 차안에 이런 쪽지를 남겼습니다. '자동차 속에 있던 라디오는 제 친구가 떼어갔습니다. 하필 당신의 차를 훔친 것은 미안합니다만, 이 차만이 자동차 열쇠가 그대로 꽂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브레이크가 시원치 않던데 손보아야 하겠더군요. 깜빡이도 하나는 고쳐야 하겠고, 기름은 다 떨어졌습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까? 죄의식도 엿보이지 않고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더욱이 꽤 신사연(紳士然)하는 자기만족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훔쳤던 차를 돌려주면서, 마치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큰 인심이라도 쓰는 듯이 쪽지를 남겼습니다. 죄의식이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도덕성의 근본적인 상실입니다.
파스칼은 유저(遺著)「팡세」에서 '인간은 천사도 아니거니와 짐승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은 천사가 되고 싶으면서 행동은 짐승같이 하는, 이 같은 모순에 인간의 불행이 있습니다. 마음은 인격자가 되고 도덕가가 되는 것이 소원이어서 입으로는 잘난 소리 하고 다니지만 실제로 사는 꼴은 짐승 아닌 사람이라 할 수 없게 생겼으니 탈인 것입니다. 무릇 이상(理想)과 현실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인간다운 정신적 건강은 유지할 수 없는 법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사함 받을 수 없는 죄목들 가운데서 특별히 두 가지 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한다고 하면서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지은 죄를 다시 짓지 않겠다고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회개를 하고도 그 죄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죄, 회개하고 죄짓고, 다시 회개하고 다시 죄짓는 죄입니다. 이 두 가지 죄는 결코 사함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상당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말씀하는 '회개'를 정의한다면 한마디로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3장 18절이나 에스겔 33장 11절, 호세아 14장 1, 2절 등의 성경말씀에서도 '회개란 죄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회개를 나타내는 단어가 대표적으로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모세 오경」에 주로 나타나는 '아샴'입니다. 죄를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잘못을 충분히 느끼고 뉘우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제사의식을 행할 때나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에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서(先知書)에서는 '슈브'라고 하는 말로 나타납니다.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상당한 도덕적 요구와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말입니다. 죄를 뉘우칠 뿐만 아니라 뉘우침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도덕적 생활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약에 와서는 '메타노에오'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은 그실 군사적 용어입니다. 지금까지 해오던 생활을 완전히 버리고 무조건 항복을 하여 새로운 주인, 새로운 주권을 영접하라고 하는 뜻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하는 말씀은, 단순히 죄로부터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생활과 지난날의 모든 것으로부터 관계를 끊어버리고 은혜를 영접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진노와 율법에서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은혜와 감격 속에서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는 뜻입니다. 복음과 은혜를 반드시 영접하라는 적극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6, 17절에 보면, 이 같은 회개의 과정을 아홉 가지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伸寃)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 말씀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스스로 씻으라'---깊은 뉘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깨끗케 하라'---옛날 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내 목전에서 악을 버리라'---악을 버리고 악행을 중단해야 합니다. '선행을 배우라'---악에서 떠나려고 할 때, 단순히 악을 떠나려는 노력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선을 배워야 합니다. 악도 없고 선도 없는 '진공상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선을 배우지 아니하고는 악을 떠날 수 없습니다. 악을 버리려면 선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공의를 구해야 합니다. 단순히 악에서 떠나겠다고만 하는 소극적인 회개는 참회개가 아닙니다. 적극적인 회개는 선을 배우는 데에 있습니다. 공의를 행하며, 학대받는 자들을 도와줍니다. 에베소서 4장 28절에서도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내 향락을 위해서도 아니고 내가 먹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남을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만 도적질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를 모르겠다 하지 않습니다.
요샛사람들, 하도 똑똑해서 뭐가 잘못인지는 곧잘 압니다.
똘똘하게들 압니다. 뉘우치기도 하고, 절망도 잘합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회개한다고 하면서 내 죄를 생각하지만 남의 죄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남에게 사과하러 갔으면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아야 되겠는데 "잘못했습니다" 해놓고는 "그러나 당신도" 어쩌고 하면서 본전 챙기려 하다가 도리어 더 싸우고 맙니다. 회개에 변명이 많은 것입니다. 회개에 구실이 많습니다.
회개에 설명이 따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이런 생각은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어느 교회학교 아이들이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뉘우치는 것과 회개하는 것이 어떻게 달라요?" 그 선생님, 이 질문에 아주 지혜롭게 대답하신 것 같습니다. "글쎄, 그것 참 구별하기 어렵구나. 하지만, 뉘우친다는 것과 회개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란다. 가룟 유다는 뉘우쳤을 뿐이고 베드로는 회개하였지 않니?" 그렇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나서는 뼈아프게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
이보다 더 강한 뉘우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회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회개는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수제자가 되어 참으로 부끄러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다시 부르실 때에 베드로는 뉘우칠 뿐더러 다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여전히 자기 의에 얽매여서 '내가 이런 죄인이라니, 내가 이럴 수 있다니, 나 같은 놈은 구제불능이구나'--이러고 말아서는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내 마음을 돌리고 그 은혜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그런데 보십시오.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은 드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행복일 뿐만 아니라 평강이요 기쁨이요 새로운 감사와 용기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왜 없습니까? 본문은 말씀합니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하나님 전에 나오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이 꾸짖는 말씀입니다. 그 뜻을 알만합니다. 진노를 피하려는 마음, 진노를 피하기에만 급급한 마음, 진노와 형벌의식에 쫓기는 마음----이런 마음은 회개가 아닙니다. 강요된 회개는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떤 이유로도 강요된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내가 망하게 되었으니까 뉘우치는 것, 내가 지은 죄의 결과로 불행이 오고 불이익을 당할 판이어서 할 수 없이 회개하는 것은 결코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현세에서도 그렇거니와 지옥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어떤 분이 임종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자녀들이 저를 찾아와 그 아버지를 찾아봐 달라고 너무나 안타깝게 부탁하므로 찾아갔습니다. 숨이 몇 시간도 남지 않은 환자에게 막 바로 물어보았습니다. "천당 지옥을 믿습니까?" 그랬더니 이 고집 많은 아버지는 "안 믿으니까 여태 예수를 안 믿었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렇겠군요. 그럼 한가지 더 묻겠습니다. 만일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갈 것 같습니까?" "있다면 지옥이겠지요." 알기는 번연히 알고 있습디다. "그래,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렇게 물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가 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지옥 형벌이 무서워서 회개하는 것도 참회개가 아닙니다. 회개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만 죄로 인한 불행과 불이익을 피하기만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함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할 일이지 형벌을 피하자는 생각에 급급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죄를 떠나지 아니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죄가 잘못되었으면 죄스러운 생활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뉘우치면서 죄스러운 생활은 잘 개혁하려 하지 않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그대로 머물려고 합니다. 언젠가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성적이 잘 오르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병으로 누워버린 일이 있습니다. 하도 딱해 보여서 제가 나서서 병원에 데리고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사선생님은 아이가 병이 없다고 합디다. 아이는 아파 죽겠다고 하고, 보기에도 비쩍 마르고 안색이 아주 안 좋아 보이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이 학생에게 물어보았지요. "이 녀석, 너 진정으로 낫고 싶으냐?" "예. 빨리 낫고 싶어요." "그래? 그러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제 시간에 먹고 해야 될 것 아니냐? 듣자하니, 너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낮 12시이고, 밤늦도록 무질서하게 생활하는 것 같구나. 밥도 먹었다 안 먹었다, 입맛 없다고 굶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 실인즉 이 아이가 제 성적 떨어진 것을 정당화하려고 병든 척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 키우면서 보통 때는 이렇게 하거라 저렇게 하거라 하고 엄하게 키우다가도 아프다고만 하면 온 집안이 온통 그 아이한테 매달려서 '이것 해줄까? 저것 해줄까?'하고 안쓰러워하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고 보니 아이들은 병나는 것을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것입니다. 온 집안 식구가 전부 자기만 위해주니까 이런 타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이러한데, 하물며 우리 자신은 어떻습니까? 죄는 싫어하면서도 죄에 끌리는 것은 여전합니다. 죄스러운 생활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그 생활에 끌리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죄를 떠나려면 죄 자체를 미워해야 합니다. 저주스럽게 더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죄스러운 생활에 여전히 매력을 느낍니다. 이런 사람의 회개도 참 회개가 아닙니다. 당연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을 수밖에요. 자기성찰에도 진실이 없습니다.
자기를 당당히 대면해야 합니다. 직선적으로 대면해야 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저는 요즈음 거울을 안봅니다. 주름살 자꾸 늘어나는 것이 보기 싫어서요." 여러분, 주름살이 자꾸 늘고 있습니까? 젊었을 때보다 더 열심히 거울을 보십시오. 내가 얼마나 늙어가고 있는지를 열심히 확인하세요. 그리고 준비하세요. 어떤 사람은 스스로 몸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면 병도 짐작할 수 있다고 합디다. 그런데 병원에는 가기 싫어합니다. 보나마나 아주 몹씁 병이라고 지레 짚으면서 말입니다. 병원에 가야 합니다. 사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Courage to be'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존재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다윗은 진실하고자 하는 그 시간에 그로 인한 어떠한 불이익에 대해서도 괘념하지 않았습니다. 왕이 되어 가지고 신하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뺏는 등,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다윗은 우선 자신 앞에 진실했습니다. 자기존재를 향하여 용기가 있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 "이 고백 이외의 어떠한 변명도 없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도, 환경 탓으로도 돌리지 않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용기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실을 진실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용기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내가 진실을 되찾을 때까지는 참으로 용기 있게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은 없다.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없다.' 여러분, 부끄러움도 불이익도 괘념치 말고 '모든 것은 내 잘못입니다'라고 한번 말하여보십시오. 비로소 훨훨 날을 듯이 마음이 가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마음이 무겁고, 몸도 약하고,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납덩이를 달고 사는 것처럼 무겁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나 자신을 정면으로 대마는 진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도 원인을 귀속시키려들지 말 것이요, 모든 책임을 나 자신의 진실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선민은 육체적으로 혈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 선민이 선민입니다. 아브라함은 진실했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회개와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따르지 않고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죄의 원인을 바로 규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원인적 치유가 중요합니다. 도대체 죄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교만과 불신앙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8, 29절에서 말씀합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불 신앙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셨습니다. 상실(喪失)한 마음으로 give up----내버려둠으로써 그 같은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원인을 분명히 아십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길은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 되이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만 회개는 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회개의 열매도 가능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11시까지 기다려서 회개하겠다는 사람은 10시 반에 죽는다"------회개도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됩니다. 미루고 미루다보면 마침내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기회에 바로 회개하고 당장 바로 서야 합니다. 그 어떠한 불이익도 염두에 두지 말 것입니다. 새로워질 때, 은혜 안에 회개할 때, 은혜 안에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는 큰 기쁨과 자유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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