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누가복음 17장 1절~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1946년, 지슬로 카돌로스키라는 사람이 독일의 한 농가에 물건을 약탈하러 들어갔다가 강도로 돌변해 일가족 열 명을 향하여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인 하멜만씨만 살아 남고, 가족 아홉 명이 그대로 사살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인인 카돌로스키는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고, 드디어 석방 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할 가족이나 후견인이 없어 석방을 보류해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멜만씨는 자기가 그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그를 석방시켰으며,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엄청난 일에 놀라며 감탄했고 신문기자들은 "당신 가족을 다 죽인 원수 같은 그를 어떻게 식구로 영접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내가 그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오히려 되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의 뿌리는 용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랑까지도 물질로 환산하려는 그릇된 가치관에 묻혀 있습니다. 이만큼 사랑했으니 이만큼만 주고받자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까지도 우리들의 욕망을 중심으로 해서 판단하려 합니다. 가령, 병이 들었으면 나아야 하고 가난하면 부해져야 하며 눌렸으면 자유롭게 되어 자기 소원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계시하신 십자가의 사랑은 의롭다 하는 사랑이요,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요새 통일이다 화해다 일치다 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립니다만 용서 없는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용서 없는 사회적인 화해, 정치적인 화해, 윤리적인 화해란 모두가 헛것이란 말입니다. 용서에는 증오와 비판과 복수와 비난을 잠시 중단하는 소극적인 의미와, 온유와 사랑의 실천인 적극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용서만이 벌을 완전히 면제케 하고 자유케 하여 참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용서에 대해서 간결하면서도 농축된 몇 가지의 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문자대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친구가 하루에 일곱 번씩 드나들면서 나에게 잘못을 반복하며 용서를 구한다면 나의 인내심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두세 번만 반복되면 구제 불능이다, 용서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포기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22에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더 넓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490번 용서하라 하심은 용서의 무제한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용서를 제한할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흔히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고 쉽게 말합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만 실현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우리들은 그 사건에 대해서만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람 전체를 나쁜 인간으로 보려 합니다. 또한 죄인을 사랑한다고 하다가 죄까지 사랑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정말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죄와 죄인에 대한 구별이 분명해야 합니다.
용서에는 세 가지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3 이하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듯이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인격이나 수양으로 내 마음대로 용서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용서하되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 용서하라 하심은 우리들이 심판자나 판단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아니, 그런 권리가 우리들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권한이고 우리들은 오직 용서할 뿐입니다. 셋째는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뉘우침으로 본래성(원점)으로 돌아옴을 의미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면 용서하라 하십니다. 죄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범하는 자를 용서하면 이것은 죄를 묵인하는 것이요 죄를 장려하는 것이 됩니다. 죄와 연합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우리들이 죄에 물들거나 가담하지 않도록 당부하시며, 그러나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자칫하면 자기 주관적인 의미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나 중심적 판단에서 내게 잘하니 용서하고 내게 돌아오니 용서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객관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생각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고 세속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에 합당하다 아니다가 아니라 그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징계하실 날짜까지 정하셨다가도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요나가 불평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니느웨 성을 40일 후에 망하게 하시겠다고 요나에게 가서 통고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요나는 정말 싫었지만 니느웨에 가서 40일 후면 망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왕을 비롯하여 온 백성들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요나는 매우 화가 나서, 이럴 줄 알았기에 처음부터 전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는 자는 용서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자를 사람들이 벌하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용서하고 자유케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죄인을 살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죄인은 그 죄와 저주 의식과 형벌 때문에 스스로 자유하지 못합니다. "호리(毫釐)라도 갚지 않으면 나오지 못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절대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마치 빚진 자와 같습니다. 빚을 졌으면 갚든지 아니면 채권자로부터 탕감을 받아야 자유하지 않습니까? 서쪽에서 빚지고 동쪽에서 선한 일 한다고 자유할 수 있습니까? 한국에서 죄 짓고 미국으로 도망가서 선한 일 한다고 자유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자유케 하는 자로부터 자유하는 것이지 스스로 뉘우치고 결심한다고 자유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갚을 것은 갚아야 합니다. 즉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뉴욕의 복잡한 밤거리에 한 젊은 청년이 병들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죄와 병고에 시달려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경찰관이 살펴보니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나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중얼거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경찰은 그를 부축하며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당시 뉴욕의 저명한 재벌이었습니다. 경찰은 곧 그의 아버지께 전화를 해서 지금 당신 아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아버지는 옛날에 그런 아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 잊었다고 아들을 거부했습니다. 평생을 괴롭힌 아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그 아버지와 아들을 전화로 연결시켜, 아들이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아버지께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 말에 아버지는 "그래, 너를 용서한다. 좀더 빨리 회개했으면 그 때에 용서할 터인데 왜 이제야 회개하느냐"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들 역시 더 일찍 돌아오지 못했음을 뉘우치면서 용서를 받고 나서야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용서받지 못하고는 절대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용서란 사람을 자유케 하며 소망을 줍니다.
셋째, 용서는 자기 자신을 살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승리란 무엇입니까? 용서하는 것이 승리요, 사랑하는 것이 승리입니다. 조금이라도 미워하는 생각이 있다면 패배한 것입니다.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최후의 만찬」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림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얼굴을 위시하여 열두 제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얼굴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나가다가 가룟 유다를 그릴 때에는, 자기를 일생동안 괴롭힌 원수 같은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만 생각하면 마귀 같은 느낌이 들어, 가룟 유다의 얼굴은 그 친구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야겠는데 좀처럼 영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몇 달, 몇 해를 두고 고심해도 예수님의 얼굴은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수도사를 만나서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수도사는 대번에 "자네를 괴롭히는 그 친구를 용서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을 걸세"하며 충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곧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스스로 회개했으며 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는 비로소 마음이 열려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내가 살지를 못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모기 한 마리를 잡겠다고 온 집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고 에머슨이 말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것으로 인해 내 마음이 어두워지고 황폐해지기까지 해서 가정이고 직장이고 나의 생활 모두가 망가지고 맙니다. 몸도 마음도 함께 죽어 가는 것입니다. 모기 한 마리를 잡겠다고 온 집을 불태워서야 되겠습니까? 남을 용서함은 바로 자신이 자유할 수 있는 길입니다. 누가복음 6:37이나 마태복음 6:14-15에서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네가 남을 용서하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나, 만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진리만이 아니라 오늘 당장 생활 현장에서 경험하는 일입니다. 용서함이 없이는 용서받지 못하고, 용서받지 못하면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라도 용서하고 용서받아야만 참된 구원과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하지 않는 자는 어찌해야 합니까? 불쌍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기다려야 합니다. 어느 때라도 회개하면 즉시 용서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영접하듯이 기쁘게 영접할 것입니다. "너희가 어떤 죄를 범했더라도 돌아만 오면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리라"고 에스겔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도 기억하지 말고 저도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용서하고 용서받는 그 속에서 화해와 평안과 창조적인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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