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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3)

by 【고동엽】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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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 같이 말할찌어다. 여화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용서의 선언 /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예수님의 비유들은 대체로 평화스러운 것들입니다. 씨 뿌리는 농부, 잃었던 한 마리의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 등 평화로운 이야기들로 일관합니다. 예수님은 매우 생소하고 두렵기까지 한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22장 36절에 "검을 사라, 칼을 준비하라."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겉옷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저 그냥 옷감을 몸에 감아 말아서 두르면 그것이 옷이고 그대로 누우면 이불이 되고 그런 것이 겉옷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하십니다. 비상한 결단 즉 군인들의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군인이 무엇입니까? 군인이란 전쟁시에 목숨을 걸고 나가 싸우는 사람 아닙니까? 죽고 죽이는---다시 말해 사느냐죽느냐 하는 생명 문제를 걸고 싸우는 사람을 우리는 군인이라고 합니다. 군인한테는 승리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언젠가 친구가 인천으로 놀러오라고 그래서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갈만한 곳이 없어서 관광지를 안내하라고 했더니 자유공원으로 안내를 합디다. 공원 안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동상 앞에 한글과 영문으로 된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 끝에는 맥아더 장군이 평생 좋아하고 자주 인용했던 좌우명이 씌어 있습니다. "There is no substitute for victory."---승리에는 대체물(代替物)이 없다. 승리는 승리일 뿐 승리에 대체시킬 수 있는 것은 승리 외에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승리에는 승리만이 있습니다. 승리하지 못했다면 결국 패배인 것을,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고 변명이 있겠습니까? 승리는 승리일 뿐 그 외에는 아무 대체물도 대명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군인은 승리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군인한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 고민은 '이 싸움이 과연 목적 있는 싸움인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전에 미국인들이 유학을 간 우리의 청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너희 나라는 왜 너희 나라 사람들끼리 싸우면서 아까운 우리 미국 청년들까지 데려다 죽였느냐?"왜 너희는 한 나라 민족끼리 싸우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싸움은 힘이 듭니다.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이 싸움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뚜렷하지 못한 목적을 가지고 싸우는 것처럼 피곤한 일은 없습니다.

월남전이 그랬습니다. 이유를 모르고 싸우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또한 목적이 있다 해도 그것이 의로운 목적이 아닐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물질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강도질입니다. 전쟁이란 물질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물질을 빼앗기 위함이라면 나라와 나라 사이의 다툼이라 해도 그것은 강도질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리고 성 함락 사건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목적은 여리고 성을 심판하시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쳐들어가더라도 물건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 금붙이 하나, 옷 한 벌이라도 탐내지 말고 모두 불살라 버려라." 그런데 어리석게도 아간은 몇 가지를 숨겼다가 큰 해를 당하지 않습니까? 이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이지 강도 행위가 아니었던 까닭입니다. 결국 물질을 탈취하는 것이 전쟁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전쟁이 아니요 강도질입니다.

전쟁하는 군인으로서 참 힘든 것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대장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군대의 질서가 엄한 것을 아시죠? 사병은 장교가 "뛰어라" 하면 뜁니다. "엎드려" 하면 엎드립니다.

쏘라면 쏘고 기다리라면 기다립니다. 그런데 사병이 장교의 명령에 이러쿵저러쿵 질문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뛰어라" 했는데 "왜 뛰나요?" 한다든가, "후퇴하라" 했는데 "왜 지금 후퇴합니까?" 하고 묻는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전쟁의 확실한 목적은 지휘관만이 알고 있습니다. 대장만이 모든 계획을 머릿속에 넣고 있습니다. 나는 순종할 따름입니다. "동으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가고 "엎드리라" 하면 엎드리는 것으로 그만입니다. 왜 동으로 가고 왜 엎드려야 하는지는 나의 알 바가 아닙니다. 절대 순종해야합니다. 절대 순종, 절대 복종, 이것이 군인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군인은 마음이 나뉘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겁니다. 왜 후퇴를 해야 하고 전진은 왜 해야 합니까? 그런 질문은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이 이것을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저 순종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해서는 좀 거리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대사에서 잊지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박선홍이라는 영관입니다. 그가 나는 군인입니다. 나는 그저 명령에 따라서 사는 군인입니다. 그때 한 부사관을 향해서 재판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가 나도 역시 군인입니다. 그리고서는 그의 유명한 대답이 나온 겁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여러분, 우리가 왜 싸워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서 싸웁니까? 이 싸움의 마지막 결과가 누구를 위하는 것입니까?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는 것입니까? 그 많은 싸움 끝에 다 폐허가 될 터인데 거기에서 무엇을 얻겠다는 말입니까? 누가 전쟁의 원인과 목적을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의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다 좋습니다. 목적도 결과도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죄와 악령, 그리고 마귀와 더불어 싸우는 군사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기에서는 승리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주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가운데 무려 150번이나 쓰고 있는 귀한 전용어입니다. '주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라는 말들에는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나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함받은 자로서, 의롭다함을 얻은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주님 밖에서 되어지는 일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힘의 능력으로'라는 말은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무력이 아닙니다. 총이나 대포의 힘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사람 중 열 사람은 비관적인 보고를 합니다. 키 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큰 아낙 자손들을 보고 기가 질렸습니다. 그래서 보고하기를, 아낙 자손들에 비하면 저희는 메뚜기와 같더라고 합니다. 이것을 '메뚜기 콤플렉스'라 합니다. 믿음 없이 볼 때에 저쪽은 크지만 이쪽은 작고 형편없습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저 요단강 건너가나안 땅을 바라봅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민 14 : 8-9)."

미국은 흑인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무서운 전쟁을 치렀습니다.

남북전쟁---피해는 여간 큰 것이 아니었으나 그 전쟁의 승리로 숭고하고 의로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전쟁은 칼의 승리 일뿐만 아니라 붓의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칼로 싸워 이긴 사람이 링컨이라면 붓으로 싸워 이긴 사람은 스토우 부인이었습니다. 그녀는「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용기를 주어 노예 해방을 이루는 데 불씨를 당겼던 인물입니다. 언젠가 이 두 사람이 마주 앉게 되었을 때의 일화입니다. 링컨은 스토우 부인을 보는 순간 '이런 여자가 어떻게 그처럼 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토우 부인은 노예 해방의 도화선이 된 여성답지 않게 몹시 나약하고 왜소해 보였던 것입니다. 링컨은 우락부락하고 강한 여장부를 상상해 오던 터라, 바람만 불어도 곧 날려가 버릴 것 같은 스토우 부인의 실체를 보고 조금은 아이러니컬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링컨은 솔직하게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엉클 톰스 캐빈'을 쓴 부인이 이렇게 연약한 여성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스토우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 글은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노예 해방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저는 다만 잠시 동안 그분의 대필자가 되어드렸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하여 이 엄청난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믿음, 여기에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자 이들이 한 마음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북전쟁이 승리의 전쟁이 되었던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읽었던 말씀에서 우리는 한 가지 귀중한 진리를 봐야 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라는 겁니다. 그리고 복장이 전체가 군인이 전투를 하는데 집중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의 초점에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강한 점은 오직 하나의 초점에 집중을 한다는 겁니다. 주도 바라볼지라가 아닙니다, 주만 바라볼지라 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계십니다. 그 고백이 우리를 강하게 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강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3절-14절은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라고 고백을 합니다. 끝까지 한 가지를 추구하는 그런 인생이기에 그는 강한 사람이 사도가 되었던 겁니다.

살다가 보면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하는 일들이 어떤 일이 가장 큰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마음을 나뉘게 합니다. 예배시간에 마귀의 시험은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가도 딴 생각이 나게 합니다. 그것이 마음이 나뉘는 겁니다. 부부간에는 아내 말고 다른 여자가, 남편 말고 다른 남자가 멋있어 보이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갈등이 옵니다. 두 마음이지요. 교회로 갈까나 아니면 저기 들에 나가 볼까나. 교회도 그럽디다. 이교회를 가야 하나. 아니면 저쪽으로 가야 하나. 갈등은 언제나 있습니다. 마귀는 자꾸만 나뉘게 합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책상에 앉으면 많은 과목이 생각이 난다는 겁니다. 수학에는 영어가, 영어를 하려면 국어가 생각이 나고 그런 답니다. 장가를 못가고 시집을 못가는 이들이 집중을 못합니다. 그러니 사랑을 하는 이들을 보면 집중을 합니다. 너도 사랑해라고 말하지 아니 합니다. 너만 사랑해. 그럽니다. 헌신할 교회가 오직 창동중앙교회면 되는 겁니다. 자꾸만 예전에 이렇게 했는데 그러면 끝이 납니다. 결혼을 하고도 자꾸만 그때 헤어진 그 사람을 생각한다면 결혼생활이 지옥이 됩니다.

집중을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 기억이 나야 하는 게 있습니다. 군대에 가면 사격을 합니다. 그런데 사격을 잘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그게 다른 게 아닙니다. 집중을 한다면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총을 쏘는데 필요한 것은 가늠자와 가늠쇠를 통해서 표적을 보면서 숨을 고르게 하고 살며시 방아쇠를 당기면 됩니다. 이게 정조준이라는 겁니다. 다른 것이 보이면 게임은 끝이 나고 맙니다.

요즘은 박찬호선수가 보스턴을 이기고 잘 나갑니다. 그런데 언젠가 재기를 하면서 어느 팀과의 시합인지는 잊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해설자가 하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좌타자들만 올라오면 박찬호선수가 자꾸만 실수를 하거든요. 그때 해설자가 저 선수에게 박찬호선수 한번 홈런을 준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겁을 내는데 안타깝습니다. 한번 그런 것이 있어서 자꾸만 겁을 내는데 박선수과거를 빨리 잊어야 합니다. 지금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과거에 대한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과거든 나쁜 과거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조준이란 겁니다. 이때 우리는 집중을 하고서는 이제 방아쇠를 당기는 일만이 남은 겁니다. 그런데 그때 숨을 멈추고 살며시 당기는 일이 남은 겁니다. 확신이 서야 합니다. 시편을 읽다가보면 여러분 셀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때 셀라는 읽는 게 아닙니다. 잠시 쉬라는 겁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숨을 한 번 고르고 음미한 다음에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자 이게 기도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떠한 순간에도 숨을 고르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기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일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제가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제가 목사님이 아니잖아요. 목사만 기도 하는 겁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 그리고 어떤 싸움을 하는 겁니까? 그것을 우리는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육체에 대한 것, 혈기에 대한 것, 이런 것이 아닙니다. 소유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정복도 아닙니다. 누구를 누르고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싸움은 살아남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하고서 원수를 위하여 기도를 드리면서 죽어가는 승리를 말합니다. 이것이 이긴 겁니다. 이제는 아무런 소득이 되지를 아니하는 무의미한 그런 싸움을 벗어버립시다. 여러분 너무나 정직히 살다가 너무나 손해를 보는 게 많아요. 그런데 그게 이긴 겁니다.

어떤 초등학교 선생님의 수기입니다. 당신이 시험감독을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다 쓰고서는 마지막에 한 문제를 쓰지를 못하고 끙끙거립니다. 그래도 그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까 하여서는 지켜봅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놈이 가만히 보니까 쉬운 문제도 못 풀고서는 있거든요. 그래서 의리를 지킨다고 쿡쿡 찌르면서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아이다 보지를 않고선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다가는 마지막에 그것을 봅니다. 그때 선생님이 그 아이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다 답안지를 내고서는 나가는데 그 아이는 내지를 않고서는 그냥 앉아서 마지막으로 답안지를 냅니다. 그러면서 그 놈이 이런 말을 합니다. 빵점주세요. 선생님이 그 아이를 끌어안고서는 울었답니다. 그리고서는 아니야 내가 다 봤어 네가 안 보려고 노력을 하는 것을 선생님이 다 봤어 마귀의 시험을 이기려는 너의 모습을 하나님도 아신다. 여러분, 커닝해서 맞은 백점은 빵점입니다. 정직하게 빵점을 맞아도 이 학생은 백점입니다. 주님이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은 세상적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싸움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사실 우리가 싸우는 싸움은 죄와 싸우는 싸움이요 사망과 싸우는 싸움입니다. 사단과 싸우는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과연 승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쓸데없이 남의 일, 세상 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는가, 어느 사이에 패자가 되어 버렸는가, 어느 사이에 마귀의 밥이 되어 버렸는가, 마음의 평화가 없어지고 남은 것은 증오와 불신뿐이 아닌가.

믿음의 싸움이라는 것은 불신과 싸우는 것이요, 증오와 게으름과 교만과 이기심, 그리고 허영, 거짓과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 싸움을 '마귀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루터의 책을 읽다 보면 그의 글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눈에 띄는 말이 있습니다. '마귀와 더불어'라는 말입니다. 그는 흰 마귀, 검은 마귀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검은 마귀는 세상 마귀요, 흰 마귀는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란시키는 마귀입니다. 루터는 언제나 마귀와 더불어 싸웠습니다. 눈앞에 마귀가 어른거린다고 잉크병을 내던진 일까지 있습니다. 그가 싸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마지막 전쟁은 악령과의 싸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누구와 더불어 싸우는 지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불투명한 싸움에는 승리가 없습니다. 언제나 악과 더불어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니 방위적 무기가 있습니다.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전신갑주를 입으라." 말씀과 성령, 믿음과 순종으로 무장했습니까? 이제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승리를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 33)."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승리하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아침에 승리의 영광을 누리셨습니다. 그 승리는 이제 우리들의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선한 싸움, 이 영적인 싸움에서 결코 좌절하거나 낙오자가 되지 맙시다. 바르게 싸워 바른 승리를 얻읍시다.

주님께서 항상 그 영광과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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