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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더하소서(누가복음 17장 5절~10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어느 날, 결혼한 지 10년쯤 되는 한 부부가 이혼을 하겠다며 주례자였던 저를 찾아왔습니다. 10년 전에 서로 사랑하여 아름답게 시작해서 아이까지 있는 그들이, 이제 와서 왜 헤어져야 하는지 안타까웠습니다. 까닭인즉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거나 지식 수준의 차이나, 성격에서 오는 불화까지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상대를 믿을 수 없는 데는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약속을 믿을 수 없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믿을 수 없으니, 대화가 무슨 소용이며 사랑의 표현이 무슨 소용입니까? 믿음이란 마지막 보루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개인 문제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공자의 말씀 중에, 나라가 튼튼하려면 식량(경제)이 넉넉하고 군비(국방)가 충실하며 공신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만일 하나를 뺀다면 군비요, 또 하나를 뺀다면 식량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라가 튼튼히 서기 위해서는 이상의 세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이 있어야 한다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제 문제, 국방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국제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한 방에 두 사람씩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과 함께 하루 밤을 지내는데, 서로 인사를 하고 보니 상대방의 인상이 아주 고약했습니다. 한마디로 도둑놈같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마침내 귀중품을 싸들고 호텔 지배인을 찾아갔습니다. "아무래도 한 방 사람이 믿어지지 않아 귀중품을 가져왔으니 좀 보관해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호텔 지배인은 "조금 전에 목사님의 한 방 사람도 저에게 다녀갔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쉽게 하면서도, 바로 내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흔히 젊은 세대들은 기성 세대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젊은 세대들은 믿을만합니까? 상대방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신은 믿을만한지 묻고 싶습니다. 나 자신이 불신의 원인이요,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한 가지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행하신 일을 보고, 제자들에게는 상당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이렇게 간청하기까지에는 몇 가지의 배경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문제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교리나 율법의 해석이나 의의 문제 같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나 결단에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따금 남편들이 소식도 없이 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에, 부인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혹시나 교통 사고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누구를 만날까, 무슨 일을 할까 하다가 점점 비약하여 좋지 못한 방향으로 의심을 하게 됩니다.
한번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의심에 의심이 이어져서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수렁에 빠져 버립니다. 그리하여, 누가 뭐라고 설명해도 의심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머지 믿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은 사단의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상대를 믿을 수 있다면 그는 복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셋째, 예수님께는 믿음이란 지식에 대한 이해나 진리에 대한 수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추상적 진리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곧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믿고 풍랑 속에서 편안하게 쉬셨으며, 믿고 바람을 향해서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믿고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서 나가라고 소리쳤고, 믿고 죽은 나사로까지도 살리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믿음을 주님 곁에서 보고 경험하면서, 필경은 그와 같은 능력의 믿음을 간청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고치실 때에도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능력의 뿌리가 되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믿음을 더하는 길을 세 가지 비유로 제자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얼핏보기에는 동문서답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이 말씀 안에 정답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비유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무슨 뜻입니까?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으로, 작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입니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이 믿음에 믿음을 더해 달라고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근본적이고도 질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서두에서 이혼 부부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그들의 불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믿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을 믿지 못하여 헤어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는 믿을 수 있었습니까? 사실 처음부터 전적으로 믿고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안에서 남편을 믿었고,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안에서 아내를 믿은 것뿐입니다. 세상에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기에 그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믿음의 방향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만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하신 그 엄청난 사랑과 그 부활의 능력을 정말 믿고 있느냐 말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는가를 물어야겠습니다. 믿음의 유무(有無)를 생각하고 믿음의 질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겨자씨는 살아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죽은 믿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금은보화가 아무리 좋아도 땅 속에 들어가면 녹슬어 소용이 없지만, 겨자씨는 묻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영혼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고기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런고로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 즉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으로 믿음이 없음을 야곱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대로, 행함은 행함대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행함 없이도 믿음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행치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믿음은 없고, 또 자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둘째 비유는 뽕나무입니다.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뽕나무를 들어 말씀하셨을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뽕나무의 뿌리가 제일 깊이 뻗어 내리기 때문에 이 뿌리를 뽑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뽑을 수 없는 것이라도 믿음은 명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상식 위에 믿음을 더하거나 나의 주관적인 경험에다 믿음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경험이나 지식이나 역사에도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끔 "이런 나쁜 사람도 믿음으로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충분히 가능하며 소망이 있습니다. 핍박자인 바울도 거듭나서 사도 바울이 되지 않았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고 있습니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도 변화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가능한 것입니다. 뽑히지 않는 뽕나무를 향하여 믿고 외칠 때에 뽑히게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긍정적이고도 창조적인 기적을 믿는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야, 대단하다"는 기분을 맛봅니다. 과거에는 그저 사람이란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동시에 사오백 명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즘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날아다닙니다. 하늘을 날아 보겠다고 상상하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생각해낸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달을 쳐다보며 계수나무와 토끼를 생각하던 차원에서, 달나라에 직접 올라가 산책을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상입니까?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오늘날에 와서는 사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떤 분야에 얼마만큼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까? 뽕나무를 향하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고 명령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라야 성장이 가능합니다.
셋째 비유는 무익한 종(slave)입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종이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왔을 때, 그 종한테 칭찬하며 사례하겠느냐, 종은 어디까지나 종인고로, 하루종일 일하고도 하는 말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하고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차원 높은 경지의 이야기입니다. 가끔 교회 생활에서 보면, 처음에는 잘 믿다가 중간에 흐지부지하게 믿음이 약해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이 자기 이름도 모른다고 실망하여 교회를 등지기도 하고, 또는 무엇인가 일을 좀 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시시한 이유로 쓰러져서 되겠습니까? 수고했으면 수고한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부부간이나 형제간이나 부모 자식간에도 그저 희생하기로 했으면 희생한 것으로, 봉사하기로 했으면 봉사한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무엇을 되돌려 받겠다는 것입니까? 알아준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고아원을 돕거나 교회를 위해 수고했더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소박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변변치 못한 일들을 가지고 알아주기를 바라다가는 곧 낙심되며, 믿음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의 나됨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자세는, 겸손과 충성과 진실을 바친 깨끗한 마음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이 겸허한 자리에서만 믿음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의지를 믿음으로 착각하지도 말고 나의 감정을 계시로 오해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은 오직 선물이며, 그것을 받는 믿음도 선물입니다. 의심과 불신은 시험이요 악의 뿌리이나, 믿음은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뽕나무를 향하여, 바다를 향하여 믿음으로 외칠 수 있을 때에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창조적인 믿음,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주여, 믿음을 더하소서.
믿음을 더하소서(누가복음 17장 5절~10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어느 날, 결혼한 지 10년쯤 되는 한 부부가 이혼을 하겠다며 주례자였던 저를 찾아왔습니다. 10년 전에 서로 사랑하여 아름답게 시작해서 아이까지 있는 그들이, 이제 와서 왜 헤어져야 하는지 안타까웠습니다. 까닭인즉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다거나 지식 수준의 차이나, 성격에서 오는 불화까지도 참고 견딜 수 있지만, 상대를 믿을 수 없는 데는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고, 약속을 믿을 수 없으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믿을 수 없으니, 대화가 무슨 소용이며 사랑의 표현이 무슨 소용입니까? 믿음이란 마지막 보루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개인 문제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바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공자의 말씀 중에, 나라가 튼튼하려면 식량(경제)이 넉넉하고 군비(국방)가 충실하며 공신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서 만일 하나를 뺀다면 군비요, 또 하나를 뺀다면 식량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라가 튼튼히 서기 위해서는 이상의 세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이 있어야 한다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제 문제, 국방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국제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한 방에 두 사람씩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과 함께 하루 밤을 지내는데, 서로 인사를 하고 보니 상대방의 인상이 아주 고약했습니다. 한마디로 도둑놈같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마침내 귀중품을 싸들고 호텔 지배인을 찾아갔습니다. "아무래도 한 방 사람이 믿어지지 않아 귀중품을 가져왔으니 좀 보관해 주십시오"하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호텔 지배인은 "조금 전에 목사님의 한 방 사람도 저에게 다녀갔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쉽게 하면서도, 바로 내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흔히 젊은 세대들은 기성 세대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젊은 세대들은 믿을만합니까? 상대방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신은 믿을만한지 묻고 싶습니다. 나 자신이 불신의 원인이요,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한 가지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행하신 일을 보고, 제자들에게는 상당한 깨달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이렇게 간청하기까지에는 몇 가지의 배경이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문제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알게 된 것은 교리나 율법의 해석이나 의의 문제 같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지나 결단에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서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따금 남편들이 소식도 없이 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에, 부인들은 무슨 생각들을 하십니까? 혹시나 교통 사고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누구를 만날까, 무슨 일을 할까 하다가 점점 비약하여 좋지 못한 방향으로 의심을 하게 됩니다.
한번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의심에 의심이 이어져서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수렁에 빠져 버립니다. 그리하여, 누가 뭐라고 설명해도 의심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 나머지 믿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은 사단의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상대를 믿을 수 있다면 그는 복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셋째, 예수님께는 믿음이란 지식에 대한 이해나 진리에 대한 수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추상적 진리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곧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믿고 풍랑 속에서 편안하게 쉬셨으며, 믿고 바람을 향해서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믿고 귀신들린 사람을 향해서 나가라고 소리쳤고, 믿고 죽은 나사로까지도 살리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놀라운 믿음을 주님 곁에서 보고 경험하면서, 필경은 그와 같은 능력의 믿음을 간청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고치실 때에도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능력의 뿌리가 되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믿음을 더하는 길을 세 가지 비유로 제자들에게 대답하십니다. 얼핏보기에는 동문서답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이 말씀 안에 정답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비유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무슨 뜻입니까? 겨자씨는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씨앗으로, 작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입니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이 믿음에 믿음을 더해 달라고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근본적이고도 질적으로 그들의 믿음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서두에서 이혼 부부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그들의 불신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믿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을 믿지 못하여 헤어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는 믿을 수 있었습니까? 사실 처음부터 전적으로 믿고 결혼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안에서 남편을 믿었고,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안에서 아내를 믿은 것뿐입니다. 세상에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기에 그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믿음의 방향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만큼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믿음을 한번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하신 그 엄청난 사랑과 그 부활의 능력을 정말 믿고 있느냐 말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는가를 물어야겠습니다. 믿음의 유무(有無)를 생각하고 믿음의 질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또한 겨자씨는 살아 있는 믿음을 뜻합니다. 죽은 믿음은 소용이 없습니다. 금은보화가 아무리 좋아도 땅 속에 들어가면 녹슬어 소용이 없지만, 겨자씨는 묻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동감 넘치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도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영혼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고기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런고로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 즉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으로 믿음이 없음을 야곱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믿음대로, 행함은 행함대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행함 없이도 믿음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행치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자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믿음은 없고, 또 자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둘째 비유는 뽕나무입니다.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뽕나무를 들어 말씀하셨을까요?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뽕나무의 뿌리가 제일 깊이 뻗어 내리기 때문에 이 뿌리를 뽑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처럼 뽑을 수 없는 것이라도 믿음은 명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상식 위에 믿음을 더하거나 나의 주관적인 경험에다 믿음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경험이나 지식이나 역사에도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끔 "이런 나쁜 사람도 믿음으로 가능할까요?"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충분히 가능하며 소망이 있습니다. 핍박자인 바울도 거듭나서 사도 바울이 되지 않았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고 있습니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도 변화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가능한 것입니다. 뽑히지 않는 뽕나무를 향하여 믿고 외칠 때에 뽑히게 할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긍정적이고도 창조적인 기적을 믿는 여기에 믿음이 있습니다.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야, 대단하다"는 기분을 맛봅니다. 과거에는 그저 사람이란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동시에 사오백 명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즘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날아다닙니다. 하늘을 날아 보겠다고 상상하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생각해낸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달을 쳐다보며 계수나무와 토끼를 생각하던 차원에서, 달나라에 직접 올라가 산책을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상입니까?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오늘날에 와서는 사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떤 분야에 얼마만큼의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까? 뽕나무를 향하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고 명령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라야 성장이 가능합니다.
셋째 비유는 무익한 종(slave)입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종이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왔을 때, 그 종한테 칭찬하며 사례하겠느냐, 종은 어디까지나 종인고로, 하루종일 일하고도 하는 말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하고 자기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차원 높은 경지의 이야기입니다. 가끔 교회 생활에서 보면, 처음에는 잘 믿다가 중간에 흐지부지하게 믿음이 약해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님이 자기 이름도 모른다고 실망하여 교회를 등지기도 하고, 또는 무엇인가 일을 좀 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그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시시한 이유로 쓰러져서 되겠습니까? 수고했으면 수고한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부부간이나 형제간이나 부모 자식간에도 그저 희생하기로 했으면 희생한 것으로, 봉사하기로 했으면 봉사한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무엇을 되돌려 받겠다는 것입니까? 알아준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고아원을 돕거나 교회를 위해 수고했더라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소박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변변치 못한 일들을 가지고 알아주기를 바라다가는 곧 낙심되며, 믿음에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판에 신경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의 나됨의 위치를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자세는, 겸손과 충성과 진실을 바친 깨끗한 마음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는 이 겸허한 자리에서만 믿음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지식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의지를 믿음으로 착각하지도 말고 나의 감정을 계시로 오해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은 오직 선물이며, 그것을 받는 믿음도 선물입니다. 의심과 불신은 시험이요 악의 뿌리이나, 믿음은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뽕나무를 향하여, 바다를 향하여 믿음으로 외칠 수 있을 때에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창조적인 믿음,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주여, 믿음을 더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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