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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부활신앙의 진수(요한복음 11장 17절~27절)

by 【고동엽】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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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신앙의 진수(요한복음 11장 17절~27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목회자로서 자주 접하는 일입니다마는, 여러 해 전에 경험했던 하나의 사건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채 넘지 않은 한 젊은 실업가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실업에만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때 그는 외국에 유학도 갔고, 많은 고생을 하며 공부도 했고, 학위도 땄습니다. 또 고국에 돌아와서는 회사에 취직을 하여 정열적으로 일을 했고, 나름대로 성공을 했습니다. 1년의 3분의 1은 해외에 나가 살고, 3분의 2는 국내에 있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감기에 걸렸습니다.

두 주일이 지나도 영 몸이 개운치 않아서 오랜만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결과는 뜻밖에도 급성간암이었습니다. 앞으로 얼마 못살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내게 올 줄을, 이러한 일이 내게 있을 줄을 미리 알았더면 결코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한마디가 그렇게 충격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내게 올 줄을 미리 알았더면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참으로 충격적이요, 참으로 중요한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상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이야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런 날이 있을 줄 몰랐던가요? 그 많은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그래, 그것이 내 차례가 될 줄 몰랐던가요? 죽는 데에 어디 순서가 있던가요? 칠 팔십이 되어야 죽는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언제나 죽음이란 현실적인 것이고, 아직 어리거나 젊거나 간에 오늘에 내 사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죽음을 앞둔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지성인을 대표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날 외국유학 시절의 고학하던 얘기를 했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제가 옛날에 고생하던 것과 비슷해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식을 추구했습니다, 학위를 추구했습니다, 돈을 추구했습니다, 사랑도 얻었습니다, 귀한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명예도 얻었습니다.

소위 업적을 쌓고 그것을 즐기는, 성취감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촉망을 받으며 세계를 향해 뛰는 젊은 실업가였습니다. 양심과 도덕을 떠나서 무리하게 어떤 일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싹바싹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몇 달의 시한부 선언을 받은 지금, 그는 허무와 무상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냐, 이렇게 끝난다면 나는 무엇이냐'하고 말입니다. '그 많은 수고가 무슨 쓸데없는 것이었느냐'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코 나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채 진행하는 모든 일은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허무하고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도 같이 한없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 죽음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는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궁극적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관심의 초점을 생명문제로 돌려야 합니다.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명예롭고 수치스럽고……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온 국민이 만세를 부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수많은 표창장을 받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나를 치하해준다고 해서 그래, 그것이 내 생명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생명문제는 심각하게, 보다 더 중요하게, 그리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욕망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향하는 욕망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생명보다 더 큰 욕망이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욕망에는 버려야 할 욕망이 있고, 가져야 할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에보다 더 중요한 욕망은 없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났으니, 내가 원하는 학교에 못 들어갔으니, 내가 원하는 지위를 못 얻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입니다.

특별히 노인들이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뭐가 마음대로 안되면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 한번 옆에서 '그러면 죽으세요'한다면 펄펄 뛰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하도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라고 말하니까 손자가 밥풀을 밀가루에 묻혀 가지고 "할머니, 이게 죽는 약이랍니다" 하고 드렸는데, 그 날부터 할머니가 한 달 동안 말을 안 하더랍니다.

'나쁜 놈, 나보고 죽으라고 했것다' 하고요. 아니 그렇게 입버릇처럼 '죽어야지 죽어야지'하는데 '그러면 죽으세요'한 것이 잘못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죽고 싶다는 말도 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구체적인 욕망이 있는데 자, 이것과 생명을 바꿀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이것이 바꿀 수 있는 것입니까? 요새 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건강을 참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건강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명예고 지식이고 뭐고, 다 있어보았자 어디 건강과 바꾸겠느냐?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부활의 문제는 장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의 문제도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는 건강의 문제와 관계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자, 건강해본들 어떻다는 것입니까? 장수해본들 그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욕망이 있는데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죽고 싶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자기 문제이겠습니다 마는 좀더 나아가서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남을 죽이려고 듭니다. 죽여서 자기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생명문제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이 몇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9, 50절에 보면 가야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원흉입니다. 이 가야바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한 사람을 죽여서 모두가 편할 수 있다면 죽이는 것이 옳지 않느냐, 죽고 사는 것이 문제냐, 편안한 것이 문제지, 내 욕망을 위해서라면 몇 사람을 죽인들 그 무슨 대단한 문제가 되겠느냐 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 빌라도가 있습니다. 예수를 죽여서라도 자기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기 명예를 확고히 하고, 자기 정치적 생명을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 개의치 않습니다. '그까짓 한 사람쯤이야, 의인이냐 죄인이냐 그것도 알아볼 것 없다. 죽여!' 이것이 빌라도의 재판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생명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모든 것보다 위에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부활의 문제는 곧 죽음의 문제입니다. 부활의 문제는 죽음에 대한 해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지 않겠다는, 혹은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인생은 불행하다'-----사람은 죽게 되어 있는데 안 죽으려 하고 안 죽을 것이라는, 이런 생각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말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죽는다는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데에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동물과 이야기를 못해보고 알 길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동물은 죽음을 모릅니다. 죽는 시간까지도 죽음을 모릅니다. 동물에게는 죽음을 생각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의 생각은 죽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죽음이 끝일 수가 없다는, 이것이 인간의 생명에로의 욕망입니다.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슬픔이라면 슬픔이요, 고민이라면 고민이요, 모순이라면 모순입니다. 분명히 죽는 인간이 안 죽겠다고 합니다. 분명히 죽는 것 같은데 죽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영원하고 영원지향적인 생명에로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죽음의 위력이란 대단합니다. 가진 것, 소유한 것, 무엇이든 죽음과 함께 다 없어집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많은 소유나 그 많은 노력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죽음을 피해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고, 죽지 아니해서 해결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래오래 장수하고자 불로초를 구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나 대신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라도 내가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바 죽음에 대한 해답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한 변화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은 부활로써 죽음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힘있게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 26절)"---엄청난 말씀입니다. 이것은 장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귀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를 죽이고 죽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부활의 문제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죽는다는 과정, 생명의 단계, 생명의 변화, 이것은 별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영원하고 영원지향적인 생명에로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죽음의 위력이란 대단합니다. 가진 것, 소유한 것, 무엇이든 죽음과 함께 다 없어집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많은 소유나 그 많은 노력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죽음을 피해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고, 죽지 아니해서 해결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래오래 장수하고자 불로초를 구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나 대신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라도 내가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바 죽음에 대한 해답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한 변화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은 부활로써 죽음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여러 해 동안 평양감옥에 있을 때에 한 감방에서 주영이라고 하는 공산주의자와 같이 생활했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함께 지내도록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기철, 주영하--공교롭게도 같은 주씨입니다. 그래서인지 서로 툭 터놓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주영하라는 사람은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상당한 고관으로 지내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주영하가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던가봅니다. 이에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틀림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주영하가 끝으로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을 이루고, 이 땅에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아주 희색이 만면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서 죽더군요. 그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여러분, 죽지 않는 것이 능사가 아입니다. 죽음을 생명의 단계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과정을 아주 즐겁게 환희 속에서 영접할 수 있을 때에, 거기에 죽음에 대한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또는 죽음의 문제를 그 심층에서 살펴보면 곧 죄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죽음의 뒤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전혀 예수 믿지 않는, 심지어 아들이 예수 믿는 것까지 핍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제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아들이 그 아버지를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을 해서 제가 찾아갔습니다. 저는 '이 완악한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될까'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 끝에 이렇게 농담조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마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럼요. 안 믿어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만일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할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는 어느 쪽으로 갈 것 같습니까?" 이 할아버지, 가만히 있더니 "만일에 있다면 그거야 지옥이겠지요"하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다 믿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준비는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만일에 천당과 지옥이 정말로 있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로 마음 문을 열어서 전도할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사망의 문제가 문제되는 것입니까? 불확실하고 막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은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죄와 사망, 사망과 죄를 함께 취급하는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이 안 믿어져서가 아닙니다. 죄가 많아서 문제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의 구름, 죄의 억압, 죄의 장막 때문에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이렇듯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이렇듯 엄청나게 우리를 위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죄가 없고,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에 부끄러움 없는 양심이라면, 죽음의 문제와 어느 때 어느 경우에 마주쳐도 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보면 계속해서 죄와 부활, 부활과 죄, 사망과 죄의 문제를 함께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로 우리의 의를 증거 해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바른 해결을 보는 순간, 죽음의 장막 저쪽으로 확실한 부활의 세계가, 하늘나라가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라'---인생에 의해서 부활이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기적 큰 사건인 이 부활사건에 의해서, 이 계시적 사건에 의해서 내 생명과 내 미래의 문제가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십자가도 그러하고 부활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엄연한 계시적 사건입니다.

이 속에 말씀이 있고, 나를 향한 강한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해석하고 있고, 우리의 모든 사생활에 대한 문제까지도 여기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 그것은 곧 내 부활입니다. 예수 부활로 오늘의 내 생활의 의미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진수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이것은 회생(回生)의 문제가 아니고, 환생의 문제도 아니고, 윤회의 문제도 아니고, 영혼불멸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관념적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다, 나는 너희의 부활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만이 부활이요 그리스도 사건만이 부활입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보면, 공산주의의 열렬한 실천자인 레닌의 묘지가 있습니다. 묘지라고 이름하지만, 포르말린에 담긴 유리관에 시체를 넣어서 보관해놓았습니다. 그 유리관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나라, 모든 인민의 지도자였다. 그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주었다'---얼핏보기에는 위대한 사람을 일컫는 굉장한 칭송인 것 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민의 지도자였다. 그가 이 세상에서 한 모든 일은 훌륭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현재입니다. 영원히 현재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활이다, 내가 부활할 것이다, 내가 너를 부활시키는 능력이다, 그런고로 나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바로 이 믿음 앞에서 바로 서게 될 때에 모든 문제가 안개 걷히듯이 다 해결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메시지가 오늘 여러분의 생명에 새롭게 약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신앙의 진수(요한복음 11장 17절~27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목회자로서 자주 접하는 일입니다마는, 여러 해 전에 경험했던 하나의 사건은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채 넘지 않은 한 젊은 실업가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실업에만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때 그는 외국에 유학도 갔고, 많은 고생을 하며 공부도 했고, 학위도 땄습니다. 또 고국에 돌아와서는 회사에 취직을 하여 정열적으로 일을 했고, 나름대로 성공을 했습니다. 1년의 3분의 1은 해외에 나가 살고, 3분의 2는 국내에 있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감기에 걸렸습니다.

두 주일이 지나도 영 몸이 개운치 않아서 오랜만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결과는 뜻밖에도 급성간암이었습니다. 앞으로 얼마 못살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내게 올 줄을, 이러한 일이 내게 있을 줄을 미리 알았더면 결코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한마디가 그렇게 충격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내게 올 줄을 미리 알았더면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참으로 충격적이요, 참으로 중요한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상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이야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런 날이 있을 줄 몰랐던가요? 그 많은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그래, 그것이 내 차례가 될 줄 몰랐던가요? 죽는 데에 어디 순서가 있던가요? 칠 팔십이 되어야 죽는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언제나 죽음이란 현실적인 것이고, 아직 어리거나 젊거나 간에 오늘에 내 사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죽음을 앞둔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지성인을 대표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난날 외국유학 시절의 고학하던 얘기를 했습니다. 어딘가 모르게 제가 옛날에 고생하던 것과 비슷해서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그에 관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식을 추구했습니다, 학위를 추구했습니다, 돈을 추구했습니다, 사랑도 얻었습니다, 귀한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명예도 얻었습니다.

소위 업적을 쌓고 그것을 즐기는, 성취감도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촉망을 받으며 세계를 향해 뛰는 젊은 실업가였습니다. 양심과 도덕을 떠나서 무리하게 어떤 일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싹바싹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몇 달의 시한부 선언을 받은 지금, 그는 허무와 무상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냐, 이렇게 끝난다면 나는 무엇이냐'하고 말입니다. '그 많은 수고가 무슨 쓸데없는 것이었느냐'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코 나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채 진행하는 모든 일은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허무하고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도 같이 한없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이 죽음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는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궁극적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관심의 초점을 생명문제로 돌려야 합니다.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명예롭고 수치스럽고……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온 국민이 만세를 부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수많은 표창장을 받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나를 치하해준다고 해서 그래, 그것이 내 생명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생명문제는 심각하게, 보다 더 중요하게, 그리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욕망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향하는 욕망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생명보다 더 큰 욕망이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욕망에는 버려야 할 욕망이 있고, 가져야 할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에보다 더 중요한 욕망은 없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고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났으니, 내가 원하는 학교에 못 들어갔으니, 내가 원하는 지위를 못 얻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입니다.

특별히 노인들이 이렇게 얘기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뭐가 마음대로 안되면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 한번 옆에서 '그러면 죽으세요'한다면 펄펄 뛰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하도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라고 말하니까 손자가 밥풀을 밀가루에 묻혀 가지고 "할머니, 이게 죽는 약이랍니다" 하고 드렸는데, 그 날부터 할머니가 한 달 동안 말을 안 하더랍니다.

'나쁜 놈, 나보고 죽으라고 했것다' 하고요. 아니 그렇게 입버릇처럼 '죽어야지 죽어야지'하는데 '그러면 죽으세요'한 것이 잘못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죽고 싶다는 말도 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구체적인 욕망이 있는데 자, 이것과 생명을 바꿀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이것이 바꿀 수 있는 것입니까? 요새 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건강을 참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건강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명예고 지식이고 뭐고, 다 있어보았자 어디 건강과 바꾸겠느냐?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부활의 문제는 장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의 문제도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는 건강의 문제와 관계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자, 건강해본들 어떻다는 것입니까? 장수해본들 그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욕망이 있는데 이것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해서,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죽고 싶다고 합니다. 거기까지는 자기 문제이겠습니다 마는 좀더 나아가서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남을 죽이려고 듭니다. 죽여서 자기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생명문제보다 더 큰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이 몇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9, 50절에 보면 가야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원흉입니다. 이 가야바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한 사람을 죽여서 모두가 편할 수 있다면 죽이는 것이 옳지 않느냐, 죽고 사는 것이 문제냐, 편안한 것이 문제지, 내 욕망을 위해서라면 몇 사람을 죽인들 그 무슨 대단한 문제가 되겠느냐 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 빌라도가 있습니다. 예수를 죽여서라도 자기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기 명예를 확고히 하고, 자기 정치적 생명을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 개의치 않습니다. '그까짓 한 사람쯤이야, 의인이냐 죄인이냐 그것도 알아볼 것 없다. 죽여!' 이것이 빌라도의 재판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생명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모든 것보다 위에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부활의 문제는 곧 죽음의 문제입니다. 부활의 문제는 죽음에 대한 해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지 않겠다는, 혹은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인생은 불행하다'-----사람은 죽게 되어 있는데 안 죽으려 하고 안 죽을 것이라는, 이런 생각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말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죽는다는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데에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동물과 이야기를 못해보고 알 길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동물은 죽음을 모릅니다. 죽는 시간까지도 죽음을 모릅니다. 동물에게는 죽음을 생각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의 생각은 죽음에 매이지 않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죽음이 끝일 수가 없다는, 이것이 인간의 생명에로의 욕망입니다.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슬픔이라면 슬픔이요, 고민이라면 고민이요, 모순이라면 모순입니다. 분명히 죽는 인간이 안 죽겠다고 합니다. 분명히 죽는 것 같은데 죽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영원하고 영원지향적인 생명에로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죽음의 위력이란 대단합니다. 가진 것, 소유한 것, 무엇이든 죽음과 함께 다 없어집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많은 소유나 그 많은 노력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죽음을 피해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고, 죽지 아니해서 해결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래오래 장수하고자 불로초를 구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나 대신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라도 내가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바 죽음에 대한 해답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한 변화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은 부활로써 죽음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힘있게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 26절)"---엄청난 말씀입니다. 이것은 장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귀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를 죽이고 죽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부활의 문제입니다.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죽는다는 과정, 생명의 단계, 생명의 변화, 이것은 별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영원하고 영원지향적인 생명에로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죽음의 위력이란 대단합니다. 가진 것, 소유한 것, 무엇이든 죽음과 함께 다 없어집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많은 소유나 그 많은 노력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죽음을 피해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고, 죽지 아니해서 해결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래오래 장수하고자 불로초를 구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나 대신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라도 내가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바 죽음에 대한 해답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한 변화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죽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은 부활로써 죽음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여러 해 동안 평양감옥에 있을 때에 한 감방에서 주영이라고 하는 공산주의자와 같이 생활했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함께 지내도록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기철, 주영하--공교롭게도 같은 주씨입니다. 그래서인지 서로 툭 터놓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주영하라는 사람은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상당한 고관으로 지내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주영하가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던가봅니다. 이에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틀림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주영하가 끝으로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을 이루고, 이 땅에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아주 희색이 만면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서 죽더군요. 그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여러분, 죽지 않는 것이 능사가 아입니다. 죽음을 생명의 단계로 받아들일 수 있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과정을 아주 즐겁게 환희 속에서 영접할 수 있을 때에, 거기에 죽음에 대한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또는 죽음의 문제를 그 심층에서 살펴보면 곧 죄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죽음의 뒤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전혀 예수 믿지 않는, 심지어 아들이 예수 믿는 것까지 핍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제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아들이 그 아버지를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을 해서 제가 찾아갔습니다. 저는 '이 완악한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될까'하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 끝에 이렇게 농담조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마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럼요. 안 믿어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만일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할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는 어느 쪽으로 갈 것 같습니까?" 이 할아버지, 가만히 있더니 "만일에 있다면 그거야 지옥이겠지요"하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다 믿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준비는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만일에 천당과 지옥이 정말로 있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로 마음 문을 열어서 전도할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사망의 문제가 문제되는 것입니까? 불확실하고 막연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사실은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죄와 사망, 사망과 죄를 함께 취급하는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이 안 믿어져서가 아닙니다. 죄가 많아서 문제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의 구름, 죄의 억압, 죄의 장막 때문에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이렇듯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이렇듯 엄청나게 우리를 위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죄가 없고,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에 부끄러움 없는 양심이라면, 죽음의 문제와 어느 때 어느 경우에 마주쳐도 짐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보면 계속해서 죄와 부활, 부활과 죄, 사망과 죄의 문제를 함께 취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로 우리의 의를 증거 해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바른 해결을 보는 순간, 죽음의 장막 저쪽으로 확실한 부활의 세계가, 하늘나라가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라'---인생에 의해서 부활이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기적 큰 사건인 이 부활사건에 의해서, 이 계시적 사건에 의해서 내 생명과 내 미래의 문제가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 것입니다. 십자가도 그러하고 부활도 그러합니다. 이것은 엄연한 계시적 사건입니다.

이 속에 말씀이 있고, 나를 향한 강한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해석하고 있고, 우리의 모든 사생활에 대한 문제까지도 여기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 그것은 곧 내 부활입니다. 예수 부활로 오늘의 내 생활의 의미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진수는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이것은 회생(回生)의 문제가 아니고, 환생의 문제도 아니고, 윤회의 문제도 아니고, 영혼불멸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관념적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다, 나는 너희의 부활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만이 부활이요 그리스도 사건만이 부활입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가보면, 공산주의의 열렬한 실천자인 레닌의 묘지가 있습니다. 묘지라고 이름하지만, 포르말린에 담긴 유리관에 시체를 넣어서 보관해놓았습니다. 그 유리관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나라, 모든 인민의 지도자였다. 그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주었다'---얼핏보기에는 위대한 사람을 일컫는 굉장한 칭송인 것 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민의 지도자였다. 그가 이 세상에서 한 모든 일은 훌륭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현재입니다. 영원히 현재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활이다, 내가 부활할 것이다, 내가 너를 부활시키는 능력이다, 그런고로 나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바로 이 믿음 앞에서 바로 서게 될 때에 모든 문제가 안개 걷히듯이 다 해결될 것입니다. 이 부활의 메시지가 오늘 여러분의 생명에 새롭게 약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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