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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교회의 권세(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by 【고동엽】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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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세(마태복음 161320)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여러분, 여기에 우리 교회 설립의 유공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경륜하시고 지휘하시어 친히 이 교회를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을 맞이해서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간 교회에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교회를 사회적 기관으로 보려는 데서 문제가 비롯합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엽니다. 그러나 집회가 있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에는 결사(結社)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사가 있다고 해서 다 교회인 것도 아닙니다. 또한 교회에는 친교가 있고 교제가 있고 구제가 있고 봉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해서 교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간혹 보면 교회를 잘못 이해하고는 교회를 향하여 비방의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뭘하는 곳이냐, 교회가 왜 이리 잠잠하냐 ---- 이것은 교회를 잘 모르고 하는 비판입니다. 교회는 운동기관이 아닙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회단체가 아닙니다. 먼저, 이 점을 이해하고야 교회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15년 동안 이렇듯 큰 성장을 이룬 것은 확실히 '기적적'이요 놀라운 능력입니다. 유례없는 성장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외국의 교역자들도 우리 교회의 활동과 성장을 보고는 예외 없이 묻습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교회로 교회 되게 하면 교회는 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 속하다보면 세월이 가면서 발전해 가는 가운데 그 사회적 요소가 들어와서 여러 모로 세속화함으로 본질에서부터 이탈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러한 비교회적인 것들을 얼마나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느냐에 따라 교회는 성장의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원점, 본질, 본형에로 돌아가려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교회는 그 자체로서 부흥하는 능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별도의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순수한 교회가 되고 순수한 교인이 되어 교인들의 마음속에 순수한 성서적 교회상이 정립되면 교회는 부흥하게 마련입니다.

요새 동구권에 자유화 바람이 불어 문호가 개방되면서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로 두 차례 여행을 하면서 공산치하에 있던 교회들을 방문해보았습니다. 40, 아니 70년을 공산치하에 있으면서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견디었고 많은 순교자를 냈습니다. 이렇듯 믿음을 지켜온 것을 볼 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산치하에서 창고로 사용하고, 공장으로 사용하고, 미술관으로 사용하던 그 교회들이, 이제 자유의 물결을 타고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랜 핍박 속에서 해방된 동구권의 교회를 접하는 감격스러움 가운데서도 간혹 의아하고 못마땅했던 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 핍박 속에 있으면서도 개혁을 하지 못했습니다. 화상(icon)을 섬긴다던가 그림 앞에서 절을 한다던가 하며 유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제단에 촛불을 켜놓고는 그 촛불이 다 꺼질 때까지는 집으로 돌아가도 자기의 기도가 이어진다고 믿고들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토록 오랜 핍박 속에 있으면서도 개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그 오랜 세월 동안 개혁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문제가 쌓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모순점을 지켜보면서 교회는 거듭되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이란 무엇입니까? 비교회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변질된 바를, 이제 새롭게 정신을 가다듬고 원형으로 원점으로 본래성으로 돌이키려는 행위를 종교개혁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의 참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마음속에 있는 교회상을 재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원천적 모습을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먼저, 고백적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유일한 계시자십니다. 주님은 종말론적 메시야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이 고백 위에 교회는 성립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고백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섭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 대하여 우리가 조금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고백을 우주 원리에 대한 합리적 이해나 지식을 뜻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뭘 깨닫고는 그것이 고백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하고 충성된 응답입니다. 온 인격과 온 생명을 바치는 헌신적 결단의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백과 함께 여기에 생명을 위탁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성을 맹세하는 바로 그런 시간을 고백이라고 합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고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좋은 비유가 바로 혼인서약입니다. 결혼식 때에 저는 주례를 하면서 두 사람을 세워놓고 꼭 묻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사랑하겠느뇨,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겠느뇨?"하고 묻습니다. 반드시 ""라고 대답해야만 결혼이 성립합니다. 만일 그 시간에 "아니오"라고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고백입니다. 만난 지 보름만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얼마나 알겠습니까? 얼마나 사랑하겠습니까? 서로 아는 것은 몇 가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사람을 평생 반려자로 삼겠습니다, 평생 사랑하겠습니다'하고 만천하에 사랑을 약속합니다. 이것이 고백입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자기도 못 믿는 세상에 어떻게 그 남자를 믿고 그에게 일생을 바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그를 평생 남편으로 모시고 사랑하겠습니다'하고 만천하에 사랑을 약속합니다. 여기에 운명을 겁니다. 이런 것이 고백입니다.

여러분, 신앙고백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응답하고, 나아가 여기에 내 운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내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위에 교회가 서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계시적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교회에는 계시적 성격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배우느라 수고했다고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하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도적 사역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요 깨닫게 하신 것이요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고백을 은사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 안에서 계시적 성격을 띠고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고백 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예수 안 믿으려고 어지간히 밖으로만 돌던 분들이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붙드시어 고백케 하시고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엄청난 기적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런 주도적이고 계시적인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8)"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헬라 원문에는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니"하여 ''를 가리키는 일인칭대명사 ''가 하나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마태복음 1613절로 20절에 보면 이 일인칭대명사가 여섯 번이나 나타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내가 네게 이르노니(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19)"----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증거 해주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 약속이 있는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교회에는 영원한 종말론적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천국 열쇠롤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유럽여행을 하면서 빼놓지 않고 들르게 되는 것이 크고 오래된 교회들입니다. 그곳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마당에 어김없이 사도들이나 성자들의 동상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가운데서 베드로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언제 우리가 그분을 만나 보기나 했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를 알아보는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물론 동상 밑에 베드로라고 써 붙인 것은 아닙니다. 그 동상 가운데는 손에 커다란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가하면 큰칼을 쥐고 있는 동상도 있습니다. 그분이 바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는 천국 열쇠를, 바울에게는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천국 열쇠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복을 받고,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교회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 열쇠가 교회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제를 우리는 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는 봉사기관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기관입니다. 이것이 근본이요 최우선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권세----교회에는 이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음부(陰府)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시겠다 하신 약속입니다. 이것은 최후 승리를 말씀하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최종 승리, 종말론적 승리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온 세계를 덮고 나갈 때에는 모두들 얼마나 걱정했습니까? 온 세계가 다 빨개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눈앞에서 공산주의가 이렇듯 와해되고 무너질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동구권이 개방되자마자 그곳을 방문해보았습니다. 현지의 교회 지도자, 정치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승리입니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켜보는 세대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최종 승리요 역사 끝에 있을 승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권세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기원은 그리스도시요, 고백의 내용도 그리스도시요, 섬김의 대상도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간혹 보면 표창장을 남발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당 세우는 데에 공헌했다고 표창장, 헌금 많이 했다고 표창장, 전도했다고 표창장…… 이렇듯 표창장을 너무 많이 줍니다. 저는 이것이 영 못마땅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절대로 이런 것 안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바라지들 마십시오. 여러분, 영광은 그리스도만이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맞아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15년이 되어 이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마는, 여러분들에게 교회 유공자라 해서 상주는 일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참 교회입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는 교회라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성격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이십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까지 쫓아가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길을 막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교회와 당신을 동일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당신을 하나로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정의는 사람에 따라서 구구합니다. 한스 큉(Hans Kung)"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성령의 창조적 역사, 그리스도의 몸인 모든 지체에 대한 완전한 절대 통치권이 행사될 때에 그것을 교회라 한다"라고 정의합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존재론적 사건과 현상론적 사건이 함께하는 것이 교회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월리엄스(Williams, C)교회라는 책에서 교회의 구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적 모티브가 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적 교회다. 모세적 모티브가 있다. 이것은 율법과 예배가 있는 교회다. 바울적 모티브가 있다. 이것은 오로지 믿음과 선교적 사명이 있는 교회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가지 견해를 통해 공통된 한 가지 정의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요 복음이요 선교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능력에 의한 역사다." 오늘의 본문은 교회의 권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권세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임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에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시는 그 말씀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않다고들 반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권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자세히 읽어가느라면 점점 더 깊이 예수님의 권세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거리에 나서시기만 하면 귀신들린 사람이 찾아와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 귀신을 향하여 "나가라"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그 귀신은 두말 않고 물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님, 문둥병자, 앉은뱅이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모든 어두운 것을 몰아내셨습니다. 심지어 장례식에 가셔서는 죽은 사람을 보고 "일어나라"하시는 한마디로 다시 살려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권세입니까?

성경을 가르쳐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고등학생들은 나이에 걸맞게 짓궂은 만큼 성경공부에 대한 반응도 솔직합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대목을 공부하고는 "예수님께서는 공동묘지 옆으로 지나가시면 안되겠습니다. 죽은 자가 모두 일어나면 어떡합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저희들끼리 이런 수수께끼를 주고받기도 해요. "예수님께서는 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그냥 '나오라' 말씀하시지 않고,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그 이름을 부르셨나?" 그 답인즉 나사로의 이름을 분명히 부르지 않으면 죽은 자가 모두 살아날까 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어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어둠은 걷히고, 병든 자는 일어나고, 죽은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된 자는 예수님 앞에서 숨을 곳이 없습니다. 위선과 외식(外飾)이 폭로되고, 모든 죄는 노출되고, 모든 병은 치유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죄 권을 행사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 예수님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내가 평생을 통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죄가 사해지는 줄 아십니까? 평생을 통하여 고행을 한다고 이미 지은 죄가 사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사함 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사죄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사죄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사죄 권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권세인 사죄권을 교회에 위임해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방해 없이 잡음 없이 깨끗하게 전해지고, 또한 성령의 역사, 십자가의 거룩한 역사가 한사람 한사람에게 바로 적용되는 곳이 교회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성령과 그리스도의 권세, 이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성경 중심적이요 교회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현상학적 공동체를 가집니다만, 그 실제는 그리스도의 존재적 기구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심으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교회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늘 죄송스런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강단에 섭니다. 제 얼굴을 통하여 교인들이 주님의 얼굴을 뵈옵게 해주시옵소서. 제 음성을 통하여 교인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의 모습을 뵈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 와서 친구를 만납니까? 반가운 사람을 만납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 와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뵈옵는 체험을 얻을 때에 비로소 그것이 교회요 교인입니다. 그 많은 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뵈옵지 못하고,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인이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 시각부터 참 교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섬기며 주님을 섬깁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사랑하며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 교회에 충성을 다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이 교회와 더불어 새롭게 느끼고, 우리의 신앙을 늘 새롭게 고백하세요. 진정한 교회의 지체인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권세(마태복음 161320)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여러분, 여기에 우리 교회 설립의 유공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경륜하시고 지휘하시어 친히 이 교회를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을 맞이해서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간 교회에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교회를 사회적 기관으로 보려는 데서 문제가 비롯합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엽니다. 그러나 집회가 있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에는 결사(結社)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사가 있다고 해서 다 교회인 것도 아닙니다. 또한 교회에는 친교가 있고 교제가 있고 구제가 있고 봉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해서 교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간혹 보면 교회를 잘못 이해하고는 교회를 향하여 비방의 말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뭘하는 곳이냐, 교회가 왜 이리 잠잠하냐 ---- 이것은 교회를 잘 모르고 하는 비판입니다. 교회는 운동기관이 아닙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회단체가 아닙니다. 먼저, 이 점을 이해하고야 교회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15년 동안 이렇듯 큰 성장을 이룬 것은 확실히 '기적적'이요 놀라운 능력입니다. 유례없는 성장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제게 묻습니다. 외국의 교역자들도 우리 교회의 활동과 성장을 보고는 예외 없이 묻습니다. "교회 성장의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교회로 교회 되게 하면 교회는 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사회 속에 속하다보면 세월이 가면서 발전해 가는 가운데 그 사회적 요소가 들어와서 여러 모로 세속화함으로 본질에서부터 이탈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러한 비교회적인 것들을 얼마나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느냐에 따라 교회는 성장의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원점, 본질, 본형에로 돌아가려는 역사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에 교회는 그 자체로서 부흥하는 능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별도의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순수한 교회가 되고 순수한 교인이 되어 교인들의 마음속에 순수한 성서적 교회상이 정립되면 교회는 부흥하게 마련입니다.

요새 동구권에 자유화 바람이 불어 문호가 개방되면서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로 두 차례 여행을 하면서 공산치하에 있던 교회들을 방문해보았습니다. 40, 아니 70년을 공산치하에 있으면서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견디었고 많은 순교자를 냈습니다. 이렇듯 믿음을 지켜온 것을 볼 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산치하에서 창고로 사용하고, 공장으로 사용하고, 미술관으로 사용하던 그 교회들이, 이제 자유의 물결을 타고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오랜 핍박 속에서 해방된 동구권의 교회를 접하는 감격스러움 가운데서도 간혹 의아하고 못마땅했던 점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 핍박 속에 있으면서도 개혁을 하지 못했습니다. 화상(icon)을 섬긴다던가 그림 앞에서 절을 한다던가 하며 유물을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제단에 촛불을 켜놓고는 그 촛불이 다 꺼질 때까지는 집으로 돌아가도 자기의 기도가 이어진다고 믿고들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니 아무래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토록 오랜 핍박 속에 있으면서도 개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니, 그 오랜 세월 동안 개혁 없이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문제가 쌓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모순점을 지켜보면서 교회는 거듭되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이란 무엇입니까? 비교회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변질된 바를, 이제 새롭게 정신을 가다듬고 원형으로 원점으로 본래성으로 돌이키려는 행위를 종교개혁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교회의 참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마음속에 있는 교회상을 재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원천적 모습을 설명해주시고 계십니다.

먼저, 고백적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유일한 계시자십니다. 주님은 종말론적 메시야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이 고백 위에 교회는 성립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고백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 이 고백 위에 교회가 섭니다.

그런데 이 고백에 대하여 우리가 조금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고백을 우주 원리에 대한 합리적 이해나 지식을 뜻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뭘 깨닫고는 그것이 고백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하고 충성된 응답입니다. 온 인격과 온 생명을 바치는 헌신적 결단의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백과 함께 여기에 생명을 위탁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충성을 맹세하는 바로 그런 시간을 고백이라고 합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고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좋은 비유가 바로 혼인서약입니다. 결혼식 때에 저는 주례를 하면서 두 사람을 세워놓고 꼭 묻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사랑하겠느뇨,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겠느뇨?"하고 묻습니다. 반드시 ""라고 대답해야만 결혼이 성립합니다. 만일 그 시간에 "아니오"라고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결혼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고백입니다. 만난 지 보름만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얼마나 알겠습니까? 얼마나 사랑하겠습니까? 서로 아는 것은 몇 가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사람을 평생 반려자로 삼겠습니다, 평생 사랑하겠습니다'하고 만천하에 사랑을 약속합니다. 이것이 고백입니다. 여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자기도 못 믿는 세상에 어떻게 그 남자를 믿고 그에게 일생을 바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그를 평생 남편으로 모시고 사랑하겠습니다'하고 만천하에 사랑을 약속합니다. 여기에 운명을 겁니다. 이런 것이 고백입니다.

여러분, 신앙고백이란 무엇입니까? 성경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응답하고, 나아가 여기에 내 운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충성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내 목숨을 바쳐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위에 교회가 서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계시적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교회에는 계시적 성격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배우느라 수고했다고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하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주도적 사역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요 깨닫게 하신 것이요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러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앙고백을 은사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 안에서 계시적 성격을 띠고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고백 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예수 안 믿으려고 어지간히 밖으로만 돌던 분들이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붙드시어 고백케 하시고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엄청난 기적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런 주도적이고 계시적인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세 번째,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8)"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헬라 원문에는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니"하여 ''를 가리키는 일인칭대명사 ''가 하나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마태복음 1613절로 20절에 보면 이 일인칭대명사가 여섯 번이나 나타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내가 네게 이르노니(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8)"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19)"----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증거 해주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 약속이 있는 교회를 말씀하십니다. 교회에는 영원한 종말론적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천국 열쇠롤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유럽여행을 하면서 빼놓지 않고 들르게 되는 것이 크고 오래된 교회들입니다. 그곳에 들어서면 고색창연한 마당에 어김없이 사도들이나 성자들의 동상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가운데서 베드로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언제 우리가 그분을 만나 보기나 했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를 알아보는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물론 동상 밑에 베드로라고 써 붙인 것은 아닙니다. 그 동상 가운데는 손에 커다란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가하면 큰칼을 쥐고 있는 동상도 있습니다. 그분이 바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는 천국 열쇠를, 바울에게는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천국 열쇠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복을 받고,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교회를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 열쇠가 교회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제를 우리는 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교회는 봉사기관이 아닙니다. 천국 가는 기관입니다. 이것이 근본이요 최우선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권세----교회에는 이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음부(陰府)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게 하시겠다 하신 약속입니다. 이것은 최후 승리를 말씀하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최종 승리, 종말론적 승리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온 세계를 덮고 나갈 때에는 모두들 얼마나 걱정했습니까? 온 세계가 다 빨개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눈앞에서 공산주의가 이렇듯 와해되고 무너질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동구권이 개방되자마자 그곳을 방문해보았습니다. 현지의 교회 지도자, 정치가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승리입니다"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켜보는 세대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최종 승리요 역사 끝에 있을 승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권세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기원은 그리스도시요, 고백의 내용도 그리스도시요, 섬김의 대상도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간혹 보면 표창장을 남발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당 세우는 데에 공헌했다고 표창장, 헌금 많이 했다고 표창장, 전도했다고 표창장…… 이렇듯 표창장을 너무 많이 줍니다. 저는 이것이 영 못마땅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절대로 이런 것 안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바라지들 마십시오. 여러분, 영광은 그리스도만이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맞아 우리 교회가 설립된 지 15년이 되어 이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마는, 여러분들에게 교회 유공자라 해서 상주는 일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참 교회입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고 높임을 받는 교회라면, 그것은 이미 교회의 성격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이십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메섹까지 쫓아가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길을 막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교회와 당신을 동일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교회와 당신을 하나로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정의는 사람에 따라서 구구합니다. 한스 큉(Hans Kung)"하나님의 선택된 백성, 성령의 창조적 역사, 그리스도의 몸인 모든 지체에 대한 완전한 절대 통치권이 행사될 때에 그것을 교회라 한다"라고 정의합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존재론적 사건과 현상론적 사건이 함께하는 것이 교회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월리엄스(Williams, C)교회라는 책에서 교회의 구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적 모티브가 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적 교회다. 모세적 모티브가 있다. 이것은 율법과 예배가 있는 교회다. 바울적 모티브가 있다. 이것은 오로지 믿음과 선교적 사명이 있는 교회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가지 견해를 통해 공통된 한 가지 정의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요 복음이요 선교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능력에 의한 역사다." 오늘의 본문은 교회의 권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권세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임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에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시는 그 말씀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과 같지 않다고들 반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말씀에 권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역사를 자세히 읽어가느라면 점점 더 깊이 예수님의 권세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거리에 나서시기만 하면 귀신들린 사람이 찾아와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 귀신을 향하여 "나가라"라고 한마디만 하시면 그 귀신은 두말 않고 물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님, 문둥병자, 앉은뱅이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모든 병을 고치셨습니다. 모든 어두운 것을 몰아내셨습니다. 심지어 장례식에 가셔서는 죽은 사람을 보고 "일어나라"하시는 한마디로 다시 살려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권세입니까?

성경을 가르쳐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중고등학생들은 나이에 걸맞게 짓궂은 만큼 성경공부에 대한 반응도 솔직합니다. 언젠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대목을 공부하고는 "예수님께서는 공동묘지 옆으로 지나가시면 안되겠습니다. 죽은 자가 모두 일어나면 어떡합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저희들끼리 이런 수수께끼를 주고받기도 해요. "예수님께서는 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그냥 '나오라' 말씀하시지 않고,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그 이름을 부르셨나?" 그 답인즉 나사로의 이름을 분명히 부르지 않으면 죽은 자가 모두 살아날까 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어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어둠은 걷히고, 병든 자는 일어나고, 죽은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된 자는 예수님 앞에서 숨을 곳이 없습니다. 위선과 외식(外飾)이 폭로되고, 모든 죄는 노출되고, 모든 병은 치유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죄 권을 행사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 예수님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내가 평생을 통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죄가 사해지는 줄 아십니까? 평생을 통하여 고행을 한다고 이미 지은 죄가 사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사함 받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사죄권을 지니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사죄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사죄 권을 교회에 위임하셨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9)."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권세인 사죄권을 교회에 위임해주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방해 없이 잡음 없이 깨끗하게 전해지고, 또한 성령의 역사, 십자가의 거룩한 역사가 한사람 한사람에게 바로 적용되는 곳이 교회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성령과 그리스도의 권세, 이것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성경 중심적이요 교회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현상학적 공동체를 가집니다만, 그 실제는 그리스도의 존재적 기구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임재(臨在)하심으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교회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늘 죄송스런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강단에 섭니다. 제 얼굴을 통하여 교인들이 주님의 얼굴을 뵈옵게 해주시옵소서. 제 음성을 통하여 교인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해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주님의 모습을 뵈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 와서 친구를 만납니까? 반가운 사람을 만납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 와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뵈옵는 체험을 얻을 때에 비로소 그것이 교회요 교인입니다. 그 많은 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뵈옵지 못하고, 주님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인이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그 시각부터 참 교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섬기며 주님을 섬깁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사랑하며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이 교회에 충성을 다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이 교회와 더불어 새롭게 느끼고, 우리의 신앙을 늘 새롭게 고백하세요. 진정한 교회의 지체인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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