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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되고 지혜 있는(마태복음 24 : 45-51)

by 【고동엽】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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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되고 지혜 있는

(마태복음 24 : 45-51)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요즘에 인터넷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단어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신나는 일은 기도 세레모니로 유명한 축구선수 박주영입니다. 아마 요즘 박주영을 모르면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스무살을 넘기지 못한 그 청년이 나이지리아와의 시합에서도 이기는데 공헌을 한 청년입니다. 그 청년이 온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게 그게 중요합니다. 때로는 행복감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브라운관에 앉으면 볼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좀 볼 것이 있습니다. 그는 축구공만 있으면 어디서든 드리볼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의 드리볼은 아주 탁월합니다. 그래서 골을 집어넣고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오면 신앙인으로서 흐믓 합니다. 나중에 자신은 축구선교사가 꿈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에게서 찾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입니다. 하나는 공에 충성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충성을 합니다. 공에 충성은 자기의 일에 철저하게 매진을 한다는 겁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일에 충성한다는 뜻입니다.

본 비유는 예수님의 재림을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예비하여야 주님의 재림을 맞는 바른 자세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충성된 종과 악한종이라는 두 형태의 종을 비교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앞장에서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여 이분하신 것과 같이 오늘 본문 역시주님이 오실 때에 충성된 종으로 상급을 받을 종이 있는가 하면 악한 종으로 매를 맞고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종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심판의 두 가지 양상을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합니다. 충성이란 말을 좋은 말로 표현을 한다면 신실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충성스런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좀 부정적인 의미를 들여다보면 집착을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관심을 쏟아 붓는다는 뜻에서 충성이라는 말과 집착이라는 말이 비슷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이란 말은 집착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떤 점이 다른가를 보면 충성은 상대방을 높인다는 겁니다. 충성이 상대방을 귀히 여기려도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집착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지만 근본적으로 내 이익을 추구합니다. 내 욕심과 관련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상대방을 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인가 아니면 집착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충성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할 때 이를 헬라 원문으로는 '피스토스 둘로스'라고 하며, 원어 그대로를 영역할 때에는 페이스풀 서번트(faithful servant) 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피스토스'라는 말은 간단하게 '충성되다'는 표현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실하다' '성실하다' 그리고 '충성되다'는 말들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믿음직하다'는 그런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믿으실만한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충성, 어떤 성실을 원하시는가 할 때 오늘본문이 뜻하는 바에 의하면 먼저 자기 신분에 대하여 성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는 종입니다. 종이란 아무리 큰일을 맡아 하더라도 변함없이 종일뿐만 아니라, 주인이 있고 없고 관계없이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종으로서의 자기 신분을 명확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분에 대하여 성실해야 합니다. 이는 요즈음 흔히 쓰는 말대로 자기 페이스(pace)를 분명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러나 저러나 나는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종인고로 주인이 따로 있으며, 나의 일하는 바는 주인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 그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소유는 다 주인의 것입니다. 가진 바 물건은 물론, 심지어는 나의 몸이나, 건강, 재능까지도 다 주인의 것으로, 주인을 위해서 쓰여 질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신분, 그 목적, 그 자기됨이 어떤 경우에도 변해서는 아니 됩니다. 야사에 있는 대로 정승 태운 당나귀가 많은 사람들이 정승에게 절을 하자 당나귀인 자기보고 절을 하는 줄 알고 꾸벅 꾸벅 인사를 받더라는 것인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저 어디까지나 당나귀는 당나귀일 뿐 정승을 태웠다하여 건방지게 정승 행세를 하거나 정승에게 하는 절을 받아서 대신 답례를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종은 어느 순간이든지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꾸준하게 자기 위치, 자기 신분을 꼭 지킬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곧 충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의 물건 빌어다가 오래 쓰다보면 내 물건 같아진다는 말이 있듯이 좀 오랫동안 주인의 살림을 맡아서 능숙하게 관리를 하게 되면 어느 사이에 내가 주인인 것처럼 행세를 하려든단 말입니다. 이는 실로 크게 잘못된 처사요 불 충성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주인은 지금 집을 떠나 멀리 여행 중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이 없는 동안에도 종은 종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주인이 없으니 내가 고참이라 하고서는 주인 행세를 하고 돌아간다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는 사도 바울도 언급한 것처럼 눈가림으로(엡 6:6)하지 말고 주인이 있든 없든,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성실해야합니다.

어떤 분이 우리가 쉽게 말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말하는 그 장면을 두고 재미있는 수필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내용인즉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누워 있을 때에 이것을 보고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만 것인데 이 작가는 이를 추리하기를 사건의 현장이 여리고의 외진 길이요, 사람들이 아무도 보지 않는 데였기에 그렇지 만일 그 일이 예루살렘 거리의 한 가운데서 벌어진 일이라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결코 그냥 지나갔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팔을 걷어 부치고 "아!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지!"하면서 도와주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아무도보지도 않는데서 선한 일을 해보았자 그렇고, 그러다가 죽으면 괜히 헛수고만 한 채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손만 더렵혀질 일을 왜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무슨 일을 좀 하는 것 같아서 가만히 보면, 그렇게 이름 내기를 좋아하고, 무슨 일에나 꼭 자기가 앞서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치사하고도 병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명예, 이름 석자 아무 것도 아닌데 그렇게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이름 내는 것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어쩌자고 기도를 드려도 사람 앞에, 헌금을 바쳐도 사람 앞에, 봉사를 하면서도 신문에 먼저 내고 시작을 하며, 심지어는 기자회견을 하기까지 하니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충성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금 여기에 주인이 있든 없든, 누가 보든 안 보든 상관없이 종은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충성이란 말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를 향하고 집중하여 분명한 목표를 두면서 그것에 내 사랑을 쏟아 붓는 겁니다. 忠誠은 한자로 충성忠에 정성誠입니다. 충은 가운데 중자에 마음 심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두는 겁니다. 한 가운데 하나의 일에 한곳에 집중을 한다는 겁니다. 성자는 말씀언에 이룰 성 입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말씀이 내 속에 채워지는 것을 말씀이 내 삶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나를 하나님께 집중을 하게 합니다. 마음에 한눈을 팔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6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합니다. 눈이 좋다는 것은 초점이 잘 모아진다는 겁니다. 눈이 나쁘다는 것은 초점이 안 모아 진다는 겁니다. 충성은 거기서 찾아 봐야 합니다. 자꾸만 다른 게 보이면 그것은 좀 문제가 심각한 신앙인입니다.

그런데 본문 48절 말씀에 보면 악한 종은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오리라 하여" 그러니까 주인이 내일 온다고 하면 충성스럽게 잘하겠습니다마는 더디 올 것이니, 다시 말하면 주인이 오는 때에 신경을 쓰면서 그 때쯤에 가서 충성을 하리라는 생각으로 지금은 마구 놀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기회주의자의 처사요 악한 종의 행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주인이 언제 오시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오셔도 좋고, 오늘 저녁에 오셔도 좋으며, 내일 아침에 오셔도 좋습니다. 사람이야 보든 말든 표리가 부동하지 않아야 하며 언제나 한결같이 성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충성이 갖는 의미를 보면 여기에 매우 재미있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일하다가 주인을 맞는 것이 충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인이 오리라 하여 하던 일을 그만둔 채 그야말로 흰옷으로 갈아입고 준비하고 섰다가 "어서 오십시오"하고 맞는다면 그것은 결코 반가운 것이 못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분명 부지런히 일하다가 맞는 것이 충성이요 그래야 착한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이 주님이 오실 것이라 하여 미리 부흥회를 하고 그것에만 신경 쓰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저 언제나 열심히 그리고 정성을 다해 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지런히 일하다가 전도하다가, 정말 봉사하다가 주님을 만나면 안 됩니까?

여러분! 가만히 손 털고 앉아서 맞을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맞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부지런히 일하다가, 그대로 주인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 주인이 얼마나 기뻐하겠으며 그 종 또한 얼마나 복된 종이 되겠습니까? 일하는 모습으로 보여진 종! 그가 복된 종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초대 교회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어서 아시다시피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테마(theme)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상황인 즉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며 일은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먹다보니 자기가 가졌던 것은 이미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는 옆집에 가서 "이제 곧 주님께서 오실 터인데 있는 것이나 같이 나누어 먹읍시다."하고서는 또 먹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하여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잘못된 재림관을 전해들은 사도 바울은 저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 : 10)는 편지를 쓰게 됩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자기 양식으로 먹지 못하면 남의 양식을 먹기 마련입니다. 불한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놀고먹는 사람이 불한당이요 땀 흘리지 않는 것이 불한당입니다. 내가 내 양식으로 먹지 않으면 결국은 남의 양식을 빼앗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은"자식에게 밥벌이를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도둑놈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유명한 격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도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먹기는 먹어야 하겠는데 밥벌이 할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남의 것을 먹었다면 그것이 도둑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심정이라면 참으로 부지런히, 새벽부터 밤까지 뛸 수 있는데 까지 열심히 뛰고 일하다가 주님 맞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절망을 하고 넋 놓고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가 어떤 것이냐 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장 성실하게 일하면서 기다리는 자의 자세요, 그것이 또한 충성된 종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또한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이 종은 혼자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럿이 협동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일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도우면서 서로 서로 협력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약에 그렇지가 못하고 나만이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고, 나만이 주의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곤란합니다. 나 잘 보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은 못하게 하는 것은 충성된 종의 자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성실하게 도우며 서로 협력하여 주의 일을 하는 그러한 종이 주인을 기쁘게 하는 종이요 충성된 종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 말씀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종은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자기가 일할 뿐더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 밀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지도력이 있고 감화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비해 반대되는 인물은 언제나 남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기회만 있으면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여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고는 일할 마음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잘 하다가도 그 사람만 만나게 되면 아예 일할 마음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하시는 편입니까? 여러분은 만나는 사람들이 약해졌다가도 힘을 내며 게으름을 부리다가도 여러분을 만남으로 활기를 찾고 열심을 내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처럼 마음먹고 일하려 일어서는 사람을 그대로 쓰러뜨리는 그런 인물은 아닙니까? 남에게 힘을 주는 사람입니까? 피곤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충성된 종은 다른 사람도 성실히 일하게 하는 격려형의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일을 하면서 실수를 하거나 잘못한 것을 보았다면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이것 저것 잘못을 꼬집어 가면서 상대의 마음을 상할 대로 상하게 해놓고서 처리하려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아서 하는 짓이겠지만 사실 마지막에는 다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약간의 잘못이 눈에 뜨이더라도 덮어주고 감싸주며 좀 잘하는 것이 있을 때에는 크게 칭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소 격에 어긋난 점이 있다하더라도 "그 정도면 참으로 훌륭합니다"하고 한 마디 칭찬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여유가 있는 그런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하든 부하든, 명예가 있든 없든 간에 남에게 봉사하는 일을 보거든 진정으로 서로가 격려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갖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찬물을 끼얹으니 문제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하여 일을 하던 사람이 섭섭하여 울어야 하는가 하면 심지어 사표까지 내게 하는 소동을 벌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심방을 다닐 수 없으니 그저 집에 계시는 장로님과 그렇게 심방을 다녀오셨답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어 몇 분이 같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심방한 이야기들을 하게 되자 어떤 분이 하는 말이 "뭐 심방했나?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지"하고 쏘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들은 그 장로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우시더랍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렇게 가난하게 보이더냐?"고 "내가 음식을 못 먹고사는 사람이냐?"고 하시면서 되묻자 이제는 아무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이 수고를 했으면 "장로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연로하신 가운데 매우 힘드셨을 터인데"하는 이 부드러운 한 마디가 왜 나오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그 비뚤어진 마음 가지고 어떻게, 무엇이 되겠습니까? 사람은 정말 입이 중생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충성된 종은 나도 일할뿐더러 다른 사람도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 이 충성된 종은 피동적인 종이 아닙니다. 45절 말씀에 보면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다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면서 격려하고 일하도록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자율적인 충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충성에도 자율적인 충성이 있고 타율적인 충성이 있습니다. 종이란 원래 타율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이것을 하라하면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라하면 "예"하고 저것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그렇게만 하는 종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양식도 나누어 주지만 "주인이 안 계시는데 어찌 주인의 명령만 기다리겠습니까?"하고서는 "오늘은 이것을 합시다." "지금은 이것을 할 때입니다."하면서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그리고 창의적으로 일하는 종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할 일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인이 이것 하라고 하면 이것하고 서 있고, 저것 하라면 저것하고 서 있는 정도라면 그런 종을 데리고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충성된 종은 없는 일도 만들어 가면서, 전에 했던 일도 새롭게 고쳐가면서 능동적이고도 창의적으로 일해 나가는 것입니다.

중학교에 재학 중에 외상을 당해서 망막박리로 실명을 한 후에 실명의 고통과 사회의 온갖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고 한국인으로 최초의 시각장애자 박사가 되었으며 미국의 장애인 차관보자리에 오른 강영우 박사님을 아실 겁니다. 그 분이 요즘에 책을 한권 출판을 하셨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도전과 기회 3c혁명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실력, 인격, 헌신적인 자세.

지금은 성장을 해서는 듀크대학의 안과전문의로 있는 그의 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들이 세살 때 식사를 할 때면 돌아가면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이 두 손을 모으고서는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 우리아버지 눈을 떠서는 나와 같이 야구도 하고 운전도 하고요 세발자전거도 타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듣고 있는 마음은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눈이 떠진다고 말을 하기도 그렇고 그러니 거짓말을 하기도 실망을 시키기도 그러니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을 합니다. 많은 생각을 하던 중에 이런 지혜를 생각을 합니다. 그날부터 아이가 잠이 들기 전에 아들을 붙들고 성경을 읽어줍니다. 동화책을 읽어줍니다. 그런데 언제나 불을 끄고서는 읽어줍니다. 아들은 어두운 방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때 아이는 가슴으로 아버지의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상상력의 세계를 마음껏 넓혀갑니다. 그때 아버지는 말씀을 합니다. 야구나 운전이나 자전거는 네 엄마가 하면 되고 나는 엄마가 못하는 것을 즉 깜깜한 밤에 성경을 읽어주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은 상상의 그림을 그리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아빠만이 할 수 있다. 이렇게 위로를 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누구도 할 수가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에 있어서도 좀 능동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때마다 누군가가 말해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힘이 자라는데 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다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거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또 한 가지 깊이 생각할 것은 이렇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면서 일할 자가 누구인지 바로 그 종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인데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모두가 다 주인의 일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일하는 목적은 주인에게 있으며, 주인을 위하고 주인의 소유를 늘려나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라는 생각은 끝까지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생각을 하고서는 그 기간에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놀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왜 때렸을까 할 때에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해 봅니다. 그것은 분명 자기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보고는 내 몫까지 하라고 하자 "내가 왜 하나?"하고 나옴으로 이제는 완력으로 때리면서 자기의 일을 남에게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는 술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며 놀고 있는 터인데 이런 중에 주인이 왔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충성된 종은 자기의 맡은 일을 성실히 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주기까지 하는데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전제하에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맡기면서 그것이 잘 안 된다고 하여 동무를 폭력으로 휘두르며 방탕과 술 취함으로 지낸다니 이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분명한 것은 오늘도 이 두 형태의 사람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은 그 결론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그러니까 충성된 종이 부지런히 일하는 중에 그 주인이 오면 그 종이 복이 있겠다는 말입니다. 이어 47절 말씀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찌어다"라고 한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같은 결론의 말씀인 것입니다.

충성된 종에게는 더 많은 것을 맡길 것입니다. 충성이야말로 복을 받는 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되기 때문에 더 많이 주시고 더 큰 은사로 채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어차피 주님의 재림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셔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은 어떤 종이라는 생각이드십니까? 하지만 우리 모두는 부끄럽지 않는 충성된 종이 되어 오늘도, 내일도 부지런히 일하다가 그대로 주님을 맞는 복된 종들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영화 빠삐용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감옥에 갇힌 주인공이 하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저는 무죄입니다.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나도 너를 안다. 너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유죄다. 왜 그렇습니까? 너는 사람은 죽이지 않았지만 너는 인생의 시간을 허비했다. 그것이 너의 죄다. 지금 다른 일에 시간을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이 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여호와의 집 우리 하나님의 전정에 섰는 너희여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지니라.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주의 은혜 가운데 살던 저희들이 다시 주의 은혜에 이끌리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주의 거룩한 밝은 빛 앞에 비추어 볼 때 고개를 들 수 없는 추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 하면서 부끄러운 마음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셨지마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자인 것처럼 원망하고 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건만 사랑에 응답이 없이 살았습니다. 때때로 주의 은혜에 감격할 때도 있습니다마는 내 뜻대로 안될 때는 모든 것을 저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불신앙적으로 산 모든 것을 자복하오니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좋은 기회를 많이 주셨지만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쳤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지마는 오히려 그 지혜를 선한 일에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주의 일을 위하여 물질을 주셨지만 너무나도 헛되이 사용을 하였습니다. 써야 할 바른 곳에 쓰지 못하고 쓰지 말아야 할 곳에 너무나 많이 쓰며 산일을 주 앞에 자복합니다.

주께서 주신 그 소중한 시간을 게으름에 나태함에 잘못 보냈습니다. 사랑해야 할 시간에 미워했고 믿음을 가져야 하건만 의심으로 살았습니다. 충성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성실하지 못 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을 붙들고 주님 앞에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는 우리에게 바른길을 보여주시건만 우리는 그 길을 애써 가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살면서도 땅에 것에 매이기도 하고, 이기적인 생각에 나의 아픔은 아파하면서 나로 인하여 아픈 이들은 애써 외면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내가 배부르기에 배고픈 자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아니하며 살았습니다. 이 모든 죄와 허물을 주님 앞에 자복하오니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 깊으신 뜻에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에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아멘.

 

 

목회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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