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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충성으로(디모데전서 1:12-17)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나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아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에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현대 지성인에게 죄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지성을 자부하고 배우지 않는 죄입니다. 사실은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교만해서 누구 말을 받아들이려 하는 수용성이 없어집니다. 누구에게나 배우고 그 어느 시간에나 겸손하게 배워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려 들지 않는 그런 죄가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아는 바대로 행하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있는데 지식은 지식대로 남아 있고 행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지식에 대하여 자기 자신도 받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나 행함이 너무 부족합니다.
혹은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행하지 않습니다. 마치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이정표 같아서 저리로 가라고 가르쳐 주지 않은 사람을 그 길로 보내고, 자기는 움직이지 않는 그러한 지성인, 이것이 지성인의 죄입니다.
셋째는 아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에 빠져서 그런지 모르나 어쨌든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려고 하는 책임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그에게 마지막 소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21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구하는 중에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부귀도 영화도 그리고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전쟁 없이 지혜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면서 40여 년의 왕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생각합니다. 이제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성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입에서 허탈한 말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죽기 전에 이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을 잠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청년 때의 그의 소원은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끝낼 때의 그의 소원은 성실이었습니다.
진실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 때, 진실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진실하기 위해서 애써 본 사람이 아니면 진실이 얼마나 어렵다 하는 것을 모릅니다. 진실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실이 가장 귀하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이보다 큰 보화도 없고, 이보다 큰 영광도 없고, 진실보다 무서운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이웃에 대하여 진실하고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진실한 이보다 큰 영광과 지혜와 보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충성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어 여겼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충성이란 헬라 원문대로 보면 "진실, 성실, 충성"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 중심에 있는 진실을 보십니다.
사무엘 선지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왕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이 있습니다. "신장도 보지 말라, 건강도 보지 말라, 이것은 내가 다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오직 중심, 오직 진실 그것만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왕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다윗 왕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에도 마찬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어느 날 아버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암나귀 한 마리를 잃어 버렸는데 네가 찾아오너라." 이 아들이 찾아 나서서 사흘 길을 헤맸습니다. 잠깐 찾아보고 "없습니다" 했으면 됐지 그것을 찾아서 사흘을 헤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1대 왕 사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과 그 성실을 보신 것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능력이 없으면 오늘 본문 말씀대로 능하게 하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 오래오래 기다려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만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뚫어진 전대와 같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혹 회사를 경영하고 계십니까? 직장에 있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재주있는 사람이 무섭습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겁납니다. 지식이 없는 것은 배우면 됩니다. 경험 없는 것은 경험하면 됩니다. 문제는 성실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고 싶고 일을 맡기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성실한 사람입니다. 재주 없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학생들에게 간혹 이런 말을 해 봅니다. 공부 잘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공부 않는 것이 죄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성실하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 성실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의도 없었습니다.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진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 대하여 오늘 성경 말씀대로 상고해 보면 일체 오래 참으셨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도 참아 주셨습니다.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능력도 주셨습니다. 능하게 해주셨습니다.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근본이 하나 있었습니다. 진실을 보시고 이같이 해 주셨습니다. 깊은 곳에 충성이 있었고 그 충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부터 그 진실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인정하신 믿음, 그리스도께서 보신 진실과 충성, 이것은 절대 조건이었습니다.
먼저는 지식에 대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무지에 대한 진실과 지식에 대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꼭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를 때에 모른다고 하지 않는 거짓,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모르고 아는 척하는 것 말입니다. 이 무지의 교만, 이것은 구제불능입니다. 가장 무서운 죄악입니다. 모르고도 아는 척, 끝까지 아는 척합니다. 그러니 배우지 않습니다. 다시 길이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무지,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죄가 됩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할 수 있는 그 성실이 필요합니다.
또 모르는 중에도 그대로의 진실이 있습니다. 아는 바 비록 적은 지식이지만 그 안에서 진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다메섹까지 가서 피난간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오려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름대로의 진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요, 율법의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고 신실했습니다. 이래서 로마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극성스럽게 핍박한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대로 진실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위해서 이렇게 해야만 된다고 그는 믿었고, 그 믿는 바에 대해서 성실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러나 진실했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박해하는 사람을 봐도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박해하는 사람은 기다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돌아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읍시다" 할 때에 "그럼요 믿어야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별 볼일 없습니다. 성실치 못합니다. 박해를 하려거든 철저하게 박해하는 사람, 그는 어딘가 부딪히고 돌아옵니다. 사람에게는 성실이 필요합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성실한 것입니다. 뭐 꼭 알아야만 되고 능력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진 처지대로 최선의 성실이 필요합니다.
바울을 보세요. 성실하기에 깨닫는 순간은 깨달음에 성실했습니다.
수십년 동안을 믿어 왔고, 배워 왔고, 율법을 믿어 왔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를 만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고 하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대로 돌아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철저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소중히 여기던 지식과 자기의 믿음과 확신과 그 과거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빌립보서 3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부정에 대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깨끗이 부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체면이고 뭐고 하나도 돌아도 본 것이 없었습니다. 지식에 대해 성실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또 행하였습니다. 깨달았으니 이제 행해야지요.
그런데 현대 지성인들은 알고도 행하지 않고, 모르고도 행하지 않고 알고도 모른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합니다.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는 순간 즉각적으로 주저 없이 실천했습니다.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성실입니다. 그는 아는 바 지식에 대한, 깨달은 바 지식에 대한, 믿는 바에 대한 철저한 성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방금 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가던 다메섹에 들어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도했습니다. 자, 이런 변화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바울입니다.
또한 그는 능력에 대한 성실이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성실입니다.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또한 최대한 자기 능력을 다해서 감행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보면 할 수 있는 일은 쉽다고 안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못 해서 못 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은 극대화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능케 한 것은 가능케 해야 합니다.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실입니다. 할 수 있는 일, 마땅히 해야 할 일, 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게을러서 안하고 시시해서 안하고 맙니다. 이것이 불성실입니다.
바울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 불가능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를 했다. 하나님이 하게 해서 했다,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 내가 되었다 하며 그는 성실하게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가능케 한 나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게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할 수 있다 하며 주저없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유감이 없었습니다. 또한 뒤로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야보고서에 보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함은 죄니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실을 잃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사실에 대한 진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진실만이 아닙니다. 은혜로 시작해서 끝까지 은혜로 행하였습니다. 그 어느 순간이라도 은혜를 자기 능력으로 소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를 내 능력이라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은혜는 은혜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난 과거에 대하여 성실했습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요, 나는 죄인의 괴수였다"고 고백합니다. 부끄럽지만 그는 과거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죄인의 괴수였노라." 깨끗하게 과거를 인정했습니다. 과거를 인정하는 성실이 없는 자는 미래의 성실은 더 더욱 없는 것입니다.
이제 또한 현재의 성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로서 어떻게 이렇게 진실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서 7장에 보면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 고 했습니다. 그는 성실했습니다. 고민과 갈등이 있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성실하게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위장이나 가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에 때로는 억지로 전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얼마나 성실했습니까? 그는 또한 미래에 대하여 성실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어도 저렇게 되어도 불평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성실만으로 대하려 했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그는 끝까지 성실했습니다. 앞에 순교가 있든지 어떤 비참한 핍박이 있든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내 진실을 믿어 주실 때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충성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진실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쓸 만한 사람으로 보아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그래도 알지 못하고 한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었으니 감사하고, 기다려 주었으니 감사하고, 잘못한 것, 허물된 것이 그렇게 많아도 그 깊은 곳에 있는 진실 하나만은 인정해 주신 그 하나님, 그 그리스도가 너무 고마웠단 말입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에게 온 생명을 다 바칩니다.
어느 사형수 한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변호사에 대답도 없고 재판장의 물음에도 대답 없이 사형수로서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과는 얘기했습니다. 새문안교회 모 여 집사님과 편지로 교통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집행 전에 예수를 믿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그 집사님이 그에게 편지하는 중에 "당신은 비록 살인을 했지만 중심은 착한 사람이요.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 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마음 문을 열고 이 집사님과 편지로 소통한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내 진실과 중심을 알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비록 어쩌다가 살인을 했지만 그래도 그 중심에 한 가닥의 진실이 있는 것, 이것 하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웠단 말입니다.
진실은 생명입니다. 비록 우리가 실패하고 죄투성이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나 하나님과 나 사이의 하나의 진실, 오직 하나의 진실 그것만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적은 진실을 믿어 주는 그 그리스도께 내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진실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내가 진실치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나로 하여금 성실케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건강도 잃어버리고 재산도 잃어버리고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로 하여금 진실케 하시면 그것이 최대의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정직하게 하소서." 이 귀한 은혜가 있고야 그 위에 모든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 성실치 못한 사람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성실하기까지 기다려 주시는 그 거룩한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실패와 낙담과 그리고 좌절뿐이오나, 주여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붉은 중심과 깨끗한 진실 그것 하나만은 꼭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믿음 위에 주시는 모든 은사를 함께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실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직 충성으로(디모데전서 1:12-17)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나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아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에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현대 지성인에게 죄가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지성을 자부하고 배우지 않는 죄입니다. 사실은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교만해서 누구 말을 받아들이려 하는 수용성이 없어집니다. 누구에게나 배우고 그 어느 시간에나 겸손하게 배워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려 들지 않는 그런 죄가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아는 바대로 행하지 않는 죄가 있습니다. 아는 것은 있는데 지식은 지식대로 남아 있고 행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지식에 대하여 자기 자신도 받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나 행함이 너무 부족합니다.
혹은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행하지 않습니다. 마치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이정표 같아서 저리로 가라고 가르쳐 주지 않은 사람을 그 길로 보내고, 자기는 움직이지 않는 그러한 지성인, 이것이 지성인의 죄입니다.
셋째는 아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에 빠져서 그런지 모르나 어쨌든 모르는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하려고 하는 책임 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그에게 마지막 소원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21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구하는 중에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부귀도 영화도 그리고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는 전쟁 없이 지혜로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리면서 40여 년의 왕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아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생각합니다. 이제 마지막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성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입에서 허탈한 말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죽기 전에 이 소원을 이루어 주세요." 이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을 잠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청년 때의 그의 소원은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끝낼 때의 그의 소원은 성실이었습니다.
진실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 때, 진실이 가장 귀한 것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진실하기 위해서 애써 본 사람이 아니면 진실이 얼마나 어렵다 하는 것을 모릅니다. 진실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실이 가장 귀하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이보다 큰 보화도 없고, 이보다 큰 영광도 없고, 진실보다 무서운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이웃에 대하여 진실하고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진실한 이보다 큰 영광과 지혜와 보화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충성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충성되어 여겼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충성이란 헬라 원문대로 보면 "진실, 성실, 충성"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 중심에 있는 진실을 보십니다.
사무엘 선지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왕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기준이 있습니다. "신장도 보지 말라, 건강도 보지 말라, 이것은 내가 다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오직 중심, 오직 진실 그것만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왕을 삼으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다윗 왕입니다.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에도 마찬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어느 날 아버지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암나귀 한 마리를 잃어 버렸는데 네가 찾아오너라." 이 아들이 찾아 나서서 사흘 길을 헤맸습니다. 잠깐 찾아보고 "없습니다" 했으면 됐지 그것을 찾아서 사흘을 헤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1대 왕 사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과 그 성실을 보신 것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능력이 없으면 오늘 본문 말씀대로 능하게 하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 오래오래 기다려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만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뚫어진 전대와 같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혹 회사를 경영하고 계십니까? 직장에 있습니까?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재주있는 사람이 무섭습니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겁납니다. 지식이 없는 것은 배우면 됩니다. 경험 없는 것은 경험하면 됩니다. 문제는 성실입니다. 우리가 함께 있고 싶고 일을 맡기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성실한 사람입니다. 재주 없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학생들에게 간혹 이런 말을 해 봅니다. 공부 잘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공부 않는 것이 죄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성실하지 못한 것이 죄입니다. 여러분, 성실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의도 없었습니다.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진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 대하여 오늘 성경 말씀대로 상고해 보면 일체 오래 참으셨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도 참아 주셨습니다.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능력도 주셨습니다. 능하게 해주셨습니다.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근본이 하나 있었습니다. 진실을 보시고 이같이 해 주셨습니다. 깊은 곳에 충성이 있었고 그 충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부터 그 진실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인정하신 믿음, 그리스도께서 보신 진실과 충성, 이것은 절대 조건이었습니다.
먼저는 지식에 대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무지에 대한 진실과 지식에 대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꼭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를 때에 모른다고 하지 않는 거짓,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모르고 아는 척하는 것 말입니다. 이 무지의 교만, 이것은 구제불능입니다. 가장 무서운 죄악입니다. 모르고도 아는 척, 끝까지 아는 척합니다. 그러니 배우지 않습니다. 다시 길이 없습니다. 무지에 대한 무지,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죄가 됩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할 수 있는 그 성실이 필요합니다.
또 모르는 중에도 그대로의 진실이 있습니다. 아는 바 비록 적은 지식이지만 그 안에서 진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다메섹까지 가서 피난간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오려고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름대로의 진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요, 율법의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고 신실했습니다. 이래서 로마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극성스럽게 핍박한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대로 진실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위해서 이렇게 해야만 된다고 그는 믿었고, 그 믿는 바에 대해서 성실했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그러나 진실했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박해하는 사람을 봐도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박해하는 사람은 기다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돌아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읍시다" 할 때에 "그럼요 믿어야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별 볼일 없습니다. 성실치 못합니다. 박해를 하려거든 철저하게 박해하는 사람, 그는 어딘가 부딪히고 돌아옵니다. 사람에게는 성실이 필요합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성실한 것입니다. 뭐 꼭 알아야만 되고 능력이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진 처지대로 최선의 성실이 필요합니다.
바울을 보세요. 성실하기에 깨닫는 순간은 깨달음에 성실했습니다.
수십년 동안을 믿어 왔고, 배워 왔고, 율법을 믿어 왔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를 만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고 하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그대로 돌아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철저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소중히 여기던 지식과 자기의 믿음과 확신과 그 과거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빌립보서 3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부정에 대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깨끗이 부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체면이고 뭐고 하나도 돌아도 본 것이 없었습니다. 지식에 대해 성실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또 행하였습니다. 깨달았으니 이제 행해야지요.
그런데 현대 지성인들은 알고도 행하지 않고, 모르고도 행하지 않고 알고도 모른 척 모르고도 아는 척합니다. 어디까지가 참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는 순간 즉각적으로 주저 없이 실천했습니다.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성실입니다. 그는 아는 바 지식에 대한, 깨달은 바 지식에 대한, 믿는 바에 대한 철저한 성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방금 까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가던 다메섹에 들어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도했습니다. 자, 이런 변화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바울입니다.
또한 그는 능력에 대한 성실이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성실입니다.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또한 최대한 자기 능력을 다해서 감행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보면 할 수 있는 일은 쉽다고 안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못 해서 못 합니다. 할 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은 극대화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능케 한 것은 가능케 해야 합니다. 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성실입니다. 할 수 있는 일, 마땅히 해야 할 일, 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게을러서 안하고 시시해서 안하고 맙니다. 이것이 불성실입니다.
바울은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 불가능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를 했다. 하나님이 하게 해서 했다,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오늘 내가 되었다 하며 그는 성실하게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가능케 한 나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게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할 수 있다 하며 주저없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유감이 없었습니다. 또한 뒤로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야보고서에 보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함은 죄니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실을 잃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사실에 대한 진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은혜에 대한 진실만이 아닙니다. 은혜로 시작해서 끝까지 은혜로 행하였습니다. 그 어느 순간이라도 은혜를 자기 능력으로 소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를 내 능력이라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은혜는 은혜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난 과거에 대하여 성실했습니다. "핍박자요, 포행자요, 나는 죄인의 괴수였다"고 고백합니다. 부끄럽지만 그는 과거를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변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죄인의 괴수였노라." 깨끗하게 과거를 인정했습니다. 과거를 인정하는 성실이 없는 자는 미래의 성실은 더 더욱 없는 것입니다.
이제 또한 현재의 성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로서 어떻게 이렇게 진실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서 7장에 보면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 고 했습니다. 그는 성실했습니다. 고민과 갈등이 있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성실하게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위장이나 가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에 때로는 억지로 전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얼마나 성실했습니까? 그는 또한 미래에 대하여 성실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어도 저렇게 되어도 불평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성실만으로 대하려 했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그는 끝까지 성실했습니다. 앞에 순교가 있든지 어떤 비참한 핍박이 있든지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내 진실을 믿어 주실 때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충성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진실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충성되이 여겨 쓸 만한 사람으로 보아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 핍박자요, 포행자였으나 그래도 알지 못하고 한 것을 하나님께서 알아주었으니 감사하고, 기다려 주었으니 감사하고, 잘못한 것, 허물된 것이 그렇게 많아도 그 깊은 곳에 있는 진실 하나만은 인정해 주신 그 하나님, 그 그리스도가 너무 고마웠단 말입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에게 온 생명을 다 바칩니다.
어느 사형수 한 사람이 아무 말 없이 변호사에 대답도 없고 재판장의 물음에도 대답 없이 사형수로서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과는 얘기했습니다. 새문안교회 모 여 집사님과 편지로 교통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집행 전에 예수를 믿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이유는 그 집사님이 그에게 편지하는 중에 "당신은 비록 살인을 했지만 중심은 착한 사람이요.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 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마음 문을 열고 이 집사님과 편지로 소통한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내 진실과 중심을 알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비록 어쩌다가 살인을 했지만 그래도 그 중심에 한 가닥의 진실이 있는 것, 이것 하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마웠단 말입니다.
진실은 생명입니다. 비록 우리가 실패하고 죄투성이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으나 하나님과 나 사이의 하나의 진실, 오직 하나의 진실 그것만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충성을 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적은 진실을 믿어 주는 그 그리스도께 내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진실이 제일 큰 축복입니다. 내가 진실치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나로 하여금 성실케 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건강도 잃어버리고 재산도 잃어버리고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나로 하여금 진실케 하시면 그것이 최대의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로 하여금 정직하게 하소서." 이 귀한 은혜가 있고야 그 위에 모든 은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 성실치 못한 사람들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성실하기까지 기다려 주시는 그 거룩한 은혜를 감사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실패와 낙담과 그리고 좌절뿐이오나, 주여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붉은 중심과 깨끗한 진실 그것 하나만은 꼭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믿음 위에 주시는 모든 은사를 함께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실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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