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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마태복음 19:16-26)

by 【고동엽】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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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의 기도 /
긍휼이 한량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의 은혜로 오늘도 주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것도 은혜요 이험악한 세월을 오늘까지 믿음을 지켜 사는 것도 은혜요, 허물이 많고 죄가 많은 저희들이지만 다시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부름을 따라 응답하며 주님 앞에 나와 참회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이 시간,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신 것도 주님의 은혜인 줄 알기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게도 많은 은혜 가운데 살고 넘치는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불평,좌절 실의에 빠져 살았던 모든 일을 주님 앞에 자복합니다.
우리 앞에 확실한 약속이 있건만 그것을 다 믿지 못하고 낙심을 하며 살았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에 매여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던 일들을 생각을 하면서 주님 부끄러운 마음으로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물질, 언제든지 내 손에서 떠나야 하고 나 또한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건만 아직도 물질을 사랑하며 세상에 모든 정욕을 쏟고 여기에 노예가 되어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날에 좋은 기회들이 많았습니다. 바로 설 수도 있고 진실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선한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건만 지금은 그 많은 기회를 놓치고 후회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후회를 하게 될 것을 생각하는 어리석고 우둔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말씀 안에 살지 못한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 능력 내 의지 내 지혜로 모든 것이 가증한 것처럼 생각했던 미련한 일들을 자복하오니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용서의 선언 /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니라.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아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있느니라.」(마태복음 19:16-26)
5살의 어린 소년이 티브이를 보다가 너무나 슬퍼서 그만 아버지에게 달려가서는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름이 아닌 이디오피아 난민들이 힘들어서 또 소년이 힘겨운 숨을 쉬며 주검을 기다리는 순간에 한 걸음을 뒤로 한곳은 독수리가 그 소년의 주검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만 그가 울면서 아버지에게 울면서 저걸 어떻게 하죠? 그러면서 우니까 아버지가 야 그러지 마라 내 동창이 의사인데 지금 저곳에서 그들을 위해서 수고를 하고 있단다. 이 다섯 살짜리가 자기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성껏 모은 가방을 들고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 돈을 저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고 그래서 기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는 결심을 합니다. 나는 언제든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살겠다고. 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돈을 받으면 언제든지 셋으로 나눕니다. 하나는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하나는 자기를 위해서 저축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생활비로. 여러분 누구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직업이 프로 골프선수입니다. 상금을 제일로 많이 타는 사람입니다. 타이거 우즈라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청년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다가와서는 타이거 우즈라는 청년과는 사뭇 다른 차원이 있는 질문을 하는 겁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신 교훈의 말씀입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이 마가복음 10장 17절 이하와 누가복음 18장 18절 이하에도 기록되어 있는 이들 본문을 대조해 보면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에는 간단하게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마는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라고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께 달려나와서 아주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달려나와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질문한 것을 보면 얼마나 간절하게, 그리고 꼭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물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현대인들이 고민을 여기서 합니다. 주일이면 대단한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의 고민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목사님 나는 그 청년처럼 돈이 있으면 당연히 헌금을 하고 예수님을 따를 겁니다. 그런데 거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커다란 교회에 들어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소극적인 면에서 율법을 지킨다는 흡족한 자기만족의 모습을 말합니다. 아니 주일을 지키자니 그렇고 안 지키자니 찜찜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그곳에 있으려고 합니다. 현대인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이 청년의 고민과 같은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부자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현대인의 고민이 어디에 있습니까? 더 많이 가지려고 그게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부자의 고민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는 마태복음 5장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현대인의 특징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계를 정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돈이 얼마나 벌면 만족이 됩니까? 저는 기업의 창업주들이 어느 정도의 한계를 정하지 못해서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합니다. 돈이 권세도 되고요. 그것이 가문도 일으켜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양반이 되는 겁니다.
아무튼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하고 영생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흔히들 묻는 것처럼 "내 병을 고쳐 주십시오"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십시오" "내 아들이 죽게 되었나이다"하는 그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예수님께 나와 무엇을 구한 사람들에 비하면 상당히 수준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나 세속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영생을 묻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모든 것을 소유를 하리라는 그의 심령 깊은 곳에 고민이 있는 겁니다. 그가 심히 오해를 하는 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천국은 소유적인 속성에서 바라보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공유적인 속성을 가지고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자꾸만 소유적인 속성의 때를 버리지 못하고 삽니다. 그래서 천국이 소속적인 관계로 갑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을 향해서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너의 소유를 다 팔아 어려운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것은 공유적인 입장을 취한 것을 주님이 그에게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고민을 하면서 돌아갑니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지식의 공유화가 이루어집니다. 나만이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자꾸만 나만이 알고 나만이 소유를 하고 나만이 가지려는 그 마음이 작동을 합니다. 질투라는 게 무엇입니까? 나만이 소유를 뜻하는 겁니다. 그게 아니 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어느 가정에 아버지가 돌아기시고 나서는 형제들이 그런 싸움을 합니다. 얼마를 더 가지려고 서로 그럽디다. 형이라고 ... 동생이라고 그런 다음에 딸이라고 엄마라고 거 그렇게 욕심을 가진다고 되는 겁니까?
자 두 번째는 이런 마음이 천국을 못가 게 합니다. 그것은 가진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문제에요. 돈을 벌고서 지킨다고 되던가요? 자 청년이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 마음에는 자기의 소유된 재산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돈을 벌면 땅에 집착을 합니다. 아파트에 집착을 합니다. 그것도 이 땅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중국에 까지 가서는 상하이고 북경이고 어딘들 못가냐. 그래서 중국에 갑니다. 중국에 땅값이 많이 올랐답니다. 그런 이유가 정치도 못 믿어, 은행도 못 믿어 땅만 사면되. 땅값은 내려가는 법이 없어, 그래서 땅에다 저축을 하고 내일을 기약을 합니다. 어디다 사놔도 땅값은 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돈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지켜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지켜집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청년이 가만히 생각을 합니다. 아니 자기의 위치도 있고 재산도 있고 그런데 언제 로마에 의해서 끝이 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요즘에 한참을 인기가 있는 예수라는 그분을 만나면 해답을 주겠지 그런 연유에 찾아갑니다. 언젠가는 이 유대의 종교인들이 헤롯의 주변 인물들이 많은 이들이 원망을 하니 민중이 일어나서 혁명이 일어난다면 그나마 나의 것을 지켜야 하는데 그런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다와 같은 혁명당소속의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분이 거 인기도 있고 능력도 있고 아무리 봐도 대권을 이어갈 사람과 같거든요.
자 세 번째는 문제가 이런 겁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여러분 돈이 있는 사람과 돈이 없는 사람, 어느 쪽이 두려움이 많은 것 같습니까? 누가 잠을 편히 잘 것 같아요? 물론 없는 사람입니다. 노숙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숙자들이 여름에 잠을 자는 모습을 보면 돈이 있고 아니면 그나마 무엇인가 있는 사람은 공원에서 잠을 자는 게 틀리답니다. 없는 이는 언제든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좀 가지고 있으면 불안합니다. 그것을 지키지요. 미래에 대한 보장을 받아야지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보면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율법을 두고 이르기를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며 그저 쉽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한 마디의 말씀을 좀더 귀담아 들었더라면 감히 이런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않았습니다. '거짓증거하지 말라!'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좀 문제가 있음직도 합니다. 게다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 "내가 율법을 다 지키었나이다" 하고 나오니 이것이 어디 될 법이나 한 이야기입니까? 진정 그가 다 지켰다면 지금 그의 집에는 제대로 남아 있는 물건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옆집에는 지금도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는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네 집 물건들이 창고에 남아 있느냐? 이렇게 하고서도 나에게 율법을 다 지키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지켜보라는 뜻에서 이 율법을 들어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내어 걸고 말씀하실 때에는 이 사람이"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하는 진실한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했으며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추측컨대 예수님께서 율법들을 지키라고 하실 때에 이 사람이 대답하기를 "주여 어찌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은 지킬 사람도 없거니와 더욱이 저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저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말했더라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아들아 착하도다"하시고 또 "나를 믿으라!" 하시고는 만족해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건방지게도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함으로 어디 정말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를 보자시는 뜻에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좇으라. 그리고 나서 나를 좇으라. 전적으로 내게 헌신하라. 그리할 때 영생을 얻으리라." 여러분, 이 사람은 이 귀한 말씀을 듣고 "네"라고 순종하지 못하고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갔다. 얼마나 유감스럽습니까? 요새는 경영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유행입니다. '어떻게 하면 경영자가 될까?' '어떻게 하면 CEO가 될까?' '어떻게 하면은 좀더 유능한 지도자가 될 것인가?' 많은 책이 나와있습니다, 소위 '리더쉽'에 대해서. 그런데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일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옛것으로 벗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가지를 벗어나야 됩니다. 첫째, 나이를 벗어나야 됩니다. 내가 나이 좀 더 먹었다고 해서 뭐 선배니 뭐니. 참 우리나라처럼 선배가 소중한 나라가 없어요. 그것도 질서가 깨진다나, 뭐? 선배가 어디 있어요. 무슨 대단한 선배라고. 나이가 벼슬이 아니에요. '내가 더 선배다, 내가 더 어른이다' 그거 빨리 지워버리세요. 그러기 전에는 이 세대에서 자유할 수가 없어요. 두 번째는 지식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낡은 지식, 그거 벗어나야 됩니다. 더구나 전문성이 전부 틀립니다. 내 지식에 대해서 교만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안다고 하는 생각, 빨리 지워버려야 되고요. 셋째는 낡은 경험입니다. 잘못되면서 누적된 타성화된 경험. 이 경험 자체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런고로 이 과거로부터 깨끗이 벗어나는 자만이 CEO가 될 것이요, 지도자가 될 것이요, 이 세대를 미래로 이끌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니까 이 사람이 낡은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어차피 재산 때문에 고민도 많았고 재산 때문에 근심 걱정이 있었는데 "그러겠습니다"라는 말을 왜 못했는가 말입니다. 전 그런 생각 해봐요. "그러겠습니다. 당장 팔아서 다 주겠습니다" 그랬더라면 아마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랬을까? 전 궁금히 생각합니다. "그냥 좀 둬라" 그랬을지도 모르겠어요. 왜요? 할 일이 많잖아요. 마가복음 10장 29절로 30절에 보시면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친척이나 재산을 다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서도, 금 세상에 있어서도 100배나 받을 것이요 겸하여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공연한 걱정을 한 거예요. 다 팔아 드린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현재를 부정했더라면 그리스도를 긍정하는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었는데요 이 사람은 너무 값싼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물질주의적인 낡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고로 슬픈 기색을 하고 옛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 귀중한 시간에 어찌해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옛날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행동으로 옮기고 나를 좇으라.'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진정한 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생의 영광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가 쓰는 것만큼 부자인 것이지 손에 든 것만 가지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얼마를 주었는가?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자유하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못하여 억지로 준 것은 베푼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푸는 것, 다시 말하면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 한 만큼 부자라는 개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곧 내가 얼마를 남에게 주었다면 준 그 것 만큼, 혹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얼마든 바쳤다면 결국은 바친 그것 만큼만의 부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교인들이 부자라 하여 곧 교회가 부자인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헌금 낸 것 만큼만의 부자일 뿐 교인들이 집에 가지고 있는 돈이 아무리 많은들 그것이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장애물이 되고 많은 문제만 낳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돈이라고 하는 물량 자체와 부와는 무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의하면 그 어렵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는 것이며,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겸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난하여도 겸손하기가 어렵고, 더욱이 부하고 겸손하기는 더 어렵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해지기는 그런대로 쉽습니다. 그러나 부유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낮추어 겸손해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그는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위인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돈이 많으면서도 아주 없는 자처럼, 그리고 신분이 높으면서도 낮은 자들과 친교하며 같은 서민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그 해석하는 바가 따로이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이상한 것은 우리는 '바늘구멍' 혹은 '바늘귀'라고 하는 것에 비해 서양 사람들은 '어 니들스 아이'(a needle's eye) 곧 바늘귀로 표현하고 있으며 헬라 원문의 '트루페마토스'는 구멍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바늘눈' '바늘귀'라는 두 표현을 놓고 보면 우리말인 바늘귀가보다 정확하고 과학적이라는 생각인데 그것은 뚫렸으므로 귀지 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여기 이 바늘귀, 바늘구멍이라는 말은 그 크기가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늘귀란 그 구멍이 너무 작기 때문에 우리가 실을 낄 때에도 그냥 끼우지를 못하여 손끝으로 부벼서는 되도록 그 끝을 가늘고 뾰족하게 만듦으로 끼우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와 같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 이 바늘귀에 대한 해석에는 이러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하나의 성에 큰 성문이 있어서 아침이 되면 열었다가 필요한 활동이 끝나는 어느 시간이 되면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먼 길을 오느라 늦어진 사람들이나 어쩌다 시간을 놓친 사람들은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위하여 그 옆에 조그마한, 그야말로 비상구인 작은 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은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야 할 정도의 낮고 작은 문이어서 낙타를 들여놓으려고 할 때에는 낙타의 등에 실린 짐을 다 내려놓은 후에 그리고 낙타의 무릎을 꿇게 하여 끌어 당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그 끌어당기기가 그렇게도 힘이 든다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장면을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그래도 그것은 결국은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사람으로서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반문하고 있으며, 이에 답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으로 보아 그 해석이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그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아주 바늘귀로 들어가야 할 만큼 작아져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통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물질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으로 부유한 사람이 더욱 문제입니다. 가만히 보면 물질은 부유하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9-10절 말씀에 보면 부하려는 마음이 문제가 되고 시험이 되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게 될 때에 마음이 부유하게 됩니다. 돈이 기회이라면 부는 위기입니다. 이는 부유하게 되는 만큼 점점 더 위험한 기회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부유해지지 않도록 더욱 더 겸손하고 온유해지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대로 보면 영생을 위하여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영생을 얻는 문제로 이 자리에 나왔으나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말을 듣고는 근심하며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그야말로 멍청한 사람입니까? 저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하고 한 마디 물어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되고 말고"하시면 다 팔아 나누어주고 오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근심하며 돌아갔으니 그 하는 것으로 보아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는 영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난하여도 좋고, 병들어도 좋으며 그 외의 어떠한 희생이라도 지불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지를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내려 놓아야할 짐이 많고 벗어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가진 근심은 참으로 쓸데없는 근심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에서부터 가치와 소유권을 다 부정해 버리고 나면 오히려 그로 인해 부자도 되고 영생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말에 그 자리에서 포기하게된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 영생을 원하는 것이라면 모든 소유권을 버린 청지기로 돌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으로부터 가난하여질 때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는 약속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진 바의 모든 소유권을 깨끗이 포기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고 겸손한 마음이 되어져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선한 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로 부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하신 주님의 말씀이 결코 내게 있어서는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게 아무리 많은 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기에 나는 부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 말씀이 나에게는 조금도 걸리는 바가 없으며 "예"하고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영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정작 우리가 기억을 해야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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