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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마태복음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소원과 기대와 또 그 생각은 모두 각각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그 기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종종 실망을 주는 말씀들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는 이런 말은 참 소화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내버려두고 따라야 한다. 나를 따르려면 돌아가서 부모에게 인사하고 오는 그것도 그만두라,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등등의 이 여러 말씀들, 비상한 결단을 요구하는 이 말씀들은 주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준 것 같습니다.
마침내 한 제자는 물었습니다. "구원 얻을 자가 적으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몇 할이 구원을 얻는다든지, 몇 명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시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또 "좁은 길로 가라" 이렇게 대답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람은 많으나 예수 믿는 사람은 적습니다. 성공의 최대의 적은 안일주의입니다. 행복의 적은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입니다. 신앙의 적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진실의 적은 위선과 허영입니다. 허영과 위선이 있는 동안 진실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 그대로는 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갈릴리 사람들, 그들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혹은 기적을 바라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잠깐 비추어져 있습니다만 그들은 화평을 위하여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 화평이란 원문의 뜻은 "샬롬" 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지금도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인사하는 말이 "샬롬" 입니다.
'샬롬', 이 샬롬이라는 말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 마음의 평안이 샬롬입니다. 또 이웃과의 관계가 화평스럽게 되어 있을 때 이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화목된 관계를 가리켜 샬롬이라고 합니다. 나아가서는 건강과 번영, 물질적인 축복이나 만족스런 생활, 곧 정신과 물질을 합쳐서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를 따를 때에 샬롬을 위해서 따랐습니다. 평강을 위하여 화평을 위하여 따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능력과 그 지혜와 그 지도력과 그리고 그 기적으로 인하여 민중들은 그 '샬롬'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개인적인 화평, 사회적인, 정치적인 그런 화평을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원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실망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예수는 그들이 바라는 화평을 얻는 바른 길을 통해서만 바라는 그 평강, 그 평화가 주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사건입니다. 요세푸스라고 하는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대에 갈릴리에 큰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 제국을 반대해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리우스라는 로마 장군이 군사를 몰고 와서 이 조그만 갈릴리 지방에서 무려 2천 명을 붙잡아다가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천 명을 길거리에다가 쭉 십자가에 못박아 놓았을 때 그 비참한 죽음의 모습을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다 같이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못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듯 십자가가 고통스럽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이 얼마나 실감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처럼 목걸이 하고 다니는 그런 십자가 아닙니다. 금십자가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던 그 처절한 죽음, 시체가 매달려 죽은 바로 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가장 합리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 속에 기독교의 교리가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인의 죽음이요, 대속적인 것이요, 속죄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그런고로 계시적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십자가는 우리의 것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두 가지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런고로 "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가 아니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또 생각해야 될 문제는 이 십자가라는 말은 결코 재산적인, 혹은 물질적인 그런 인간적이며 일반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병들어 고생을 하든가, 혹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해서 가난으로 고생을 하든가, 아니면 정치적 고난을 당하던가 하는 이러한 것을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못해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십자가를 진다" 그리고, 자기 실수로 남의 비평을 듣고 욕을 먹을 때도 "십자가를 진다"고 하며, 심지어는 자기의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도 "내가 십자가를 진다" 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싸구려 십자가는 없습니다. 이런 것은 "십자가" 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잃어야 얻는 진리입니다. 잃어야 얻는 진리가 십자가입니다. 기적은 마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가 예수를 높은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뛰어 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면서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뛰어내리는 기적의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뜻입니다.
사랑 이전에 희생이 있습니다. 부활 이전에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먼저 수고와 희생이 있고 그리고 생명이 있습니다. 부정이 있고야 긍정이 있습니다. 이 잃어버리는 모험 바로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또한 이 십자가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 신뢰, 자기 교만, 혹은 편하게 되고 싶어하는 안일주의, 편리주의, 그리고 자기 향락과 자기 정욕에 관한 것과의 싸움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이런 것들을 죽이는 것, 바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앞서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사랑이 부도 나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사랑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자식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남편을 때로는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상대를 위해서입니다. 상대를 사랑한 사랑은 배신당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상대를 사랑했습니다.
정말로 상대를 사랑했느냐고 사랑에 대해서 물어 보십시다. 참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사랑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얻기 위하여 우리는 잃어버려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잃어버리는 고통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 버리는 아픔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때로는 미워해야 합니다. 이 미워해야 하는 그 쓰라림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죽여버려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 죽이는 아픔이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누가복음 14:26 이하에 오늘과 똑같은 본문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말씀하셨지만 누가복음 14장에는 "아비나 형제나 자매나 혹은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미워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혹 성서학자들은 이것을 교묘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미움이란 히브리 개념으로서는 "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해석해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어느 결정적 순간에서는 미워해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한 사람은 신학대학을 나오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쌓고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목화를 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부인이 말립니다. 그 부인은 부잣집 외동딸입니다. 부인은 말하기를 당신이 받는 그 월급으로서는 내가 살 수 없다. 당신은 재주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나와 살려거든 목사노릇 하지 말라고 결사적으로 말립니다. 결국 그는 교회 일을 그만 두고 미국 가서 갖은 고생 다 하면서 처자식을 잘 키웠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부인이 차 사고가 나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그제야 회개하고 "여보 목사노릇 하시오" 했습니다. 그 남편이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제 다 늦게 나더러 목사노릇 하라면 어떻게 하라고, 나는 장가 한 번 잘못 가서 일생을 망쳤다." 자, 이것이 결정적인 얘기가 아닙니까? 그것은 미워해야 할 순간에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사랑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술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 대답하기를 "술에 밥 말아 떡 안주에 먹겠다."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를 얻기 위해서 나머지를 버려야 합니다. 이 버려야 하는 아픔이 문제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굉장한 희생을 지불해야 합니다. 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어느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을 압니다. 그분이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를 한 그 사실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합니다. 신사 참배한 이유는 바로 처자식 때문이었답니다. 죽어야 할 시간에 죽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미워해야 할 시간에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해야 할 일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 의로운 일, 심지어는 학생들의 공부하는 것까지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제대로 되려면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끊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습니까? 이제 미워해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들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어 버리는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잘못하면 평생 원수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아십시다. 아내가 원수요, 가정이 원수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에 대해 사랑하고자 하는 내 마음이 원수입니다. 내가져야 할 십자가는 가정을 따라간다. 버린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 마음속에서 자기와의 싸움에 어떻게 임하는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만 "슈퍼스타"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성경에는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이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보았습니다. 그 기도문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면 그 보상은 무엇입니까?"
그 작가의 상상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 내가 이 희생을 하면 그 다음 보상이 무엇입니까. 보상을 많이 생각하면 희생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죽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 보상은 내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보상을 묻지 않는 그런 희생, 이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절대 순종입니다. 절대 충성입니다. 절대 사랑입니다. 이 충성 속에 죽어 갑니다. 믿음으로 죽어 갑니다. 사랑으로 죽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에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심방 갔다 돌아오는 길에 공비들에게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목사님을 꽁꽁 묶어서 창고에다 집어넣었는데, 한밤중에 인민군 하나가 들어오더니 "이 가운데 예수 믿는 동무 없소?" 그러더랍니다. 목사님은 예수 믿는 게 분명하지만 뒤에 앉아서 죽을까 걱정이 되어 벌벌 떨고 가만히 있었답니다.
한참 후에 인민군은 또 들어왔습니다. "예수 믿는 동무 없느냐" 는 말에 또 조용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마음은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인민군은 세 번째 들어오더니, 이제는 하나 하나 확인하며 물어보더랍니다. 따발총을 들고 "너 안 믿느냐?" "너 예수 믿지 않느냐?"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하고 한 명씩 확인해 오더니, 컴컴한 데서 목사님의 가슴을 쿡 찌르면서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하더랍니다. 그 때는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 "제가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너 괴수구나, 나와" 그러더랍니다.
그 목사님 자신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인민군에게 끌려나갈 때에는 마치 지옥에서 천당으로 가는 것 같더랍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답니다. 이젠 됐다. 이젠 살았다, 죽으러 가는 것이지만 이제는 승리했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끌려 나왔답니다. 그런데 인민군은 밖으로 나오더니 결박을 풀어 주면서 "목사님 빨리 가십시오." 그러더랍니다. 그 인민군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목사님이 잡혀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살려 드리려고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애먹었다고 하더랍니다. 이러한 경험을 했노라고 본인이 제게 하신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자니 문제가 많지 죽자는 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죽을 마음으로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잃어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입니다. 불가피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죽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간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그 어느 순간에 내가 예수 믿는다고 증언하고 그저 "땅" 하고 넘어지는 그런 순교는 쉬운 것입니다. 문제는 순교보다 순교적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갖 것을 다 죽여 버리고 완전히 희생해 버리면 보상 없는 죽음을 죽어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리할 때에 주께서 살리십니다.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부활의 생명
항상 그와 함께 하며 부활의 기적이 그를 따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기도 : 예수를 따르면서도 너무 멀리 따라가며, 주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나를 먼저 사랑하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나 자신의 명예를 먼저 돌아보면서 항상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고통을 이어 가는 불쌍한 저희들을 또 한 번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벗고자 하는 그런 마음에서의 신앙 생활이 아니라,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따라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분명히 십자가 안에 있는 그 영광과 함께 하는 능력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자기 십자가(마태복음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소원과 기대와 또 그 생각은 모두 각각 다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그 기대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종종 실망을 주는 말씀들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는 이런 말은 참 소화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내버려두고 따라야 한다. 나를 따르려면 돌아가서 부모에게 인사하고 오는 그것도 그만두라,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등등의 이 여러 말씀들, 비상한 결단을 요구하는 이 말씀들은 주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준 것 같습니다.
마침내 한 제자는 물었습니다. "구원 얻을 자가 적으나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몇 할이 구원을 얻는다든지, 몇 명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시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또 "좁은 길로 가라" 이렇게 대답하고 계십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사람은 많으나 예수 믿는 사람은 적습니다. 성공의 최대의 적은 안일주의입니다. 행복의 적은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입니다. 신앙의 적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진실의 적은 위선과 허영입니다. 허영과 위선이 있는 동안 진실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 그대로는 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갈릴리 사람들, 그들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혹은 기적을 바라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잠깐 비추어져 있습니다만 그들은 화평을 위하여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 화평이란 원문의 뜻은 "샬롬" 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지금도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인사하는 말이 "샬롬" 입니다.
'샬롬', 이 샬롬이라는 말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선 마음의 평안이 샬롬입니다. 또 이웃과의 관계가 화평스럽게 되어 있을 때 이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화목된 관계를 가리켜 샬롬이라고 합니다. 나아가서는 건강과 번영, 물질적인 축복이나 만족스런 생활, 곧 정신과 물질을 합쳐서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를 따를 때에 샬롬을 위해서 따랐습니다. 평강을 위하여 화평을 위하여 따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능력과 그 지혜와 그 지도력과 그리고 그 기적으로 인하여 민중들은 그 '샬롬'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개인적인 화평, 사회적인, 정치적인 그런 화평을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원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실망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예수는 그들이 바라는 화평을 얻는 바른 길을 통해서만 바라는 그 평강, 그 평화가 주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어려운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사건입니다. 요세푸스라고 하는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대에 갈릴리에 큰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다라고 하는 사람이 로마 제국을 반대해서 정치적인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리우스라는 로마 장군이 군사를 몰고 와서 이 조그만 갈릴리 지방에서 무려 2천 명을 붙잡아다가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2천 명을 길거리에다가 쭉 십자가에 못박아 놓았을 때 그 비참한 죽음의 모습을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다 같이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못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듯 십자가가 고통스럽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갈릴리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이 얼마나 실감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처럼 목걸이 하고 다니는 그런 십자가 아닙니다. 금십자가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던 그 처절한 죽음, 시체가 매달려 죽은 바로 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것은 가장 합리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그 속에 기독교의 교리가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의인의 죽음이요, 대속적인 것이요, 속죄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그런고로 계시적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십자가는 우리의 것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것입니다. 그러니 그 두 가지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런고로 "내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가 아니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또 생각해야 될 문제는 이 십자가라는 말은 결코 재산적인, 혹은 물질적인 그런 인간적이며 일반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병들어 고생을 하든가, 혹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해서 가난으로 고생을 하든가, 아니면 정치적 고난을 당하던가 하는 이러한 것을 "십자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못해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십자가를 진다" 그리고, 자기 실수로 남의 비평을 듣고 욕을 먹을 때도 "십자가를 진다"고 하며, 심지어는 자기의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도 "내가 십자가를 진다" 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싸구려 십자가는 없습니다. 이런 것은 "십자가" 라고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잃어야 얻는 진리입니다. 잃어야 얻는 진리가 십자가입니다. 기적은 마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가 예수를 높은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뛰어 내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면서 뛰어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뛰어내리는 기적의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열매를 맺는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의 뜻입니다.
사랑 이전에 희생이 있습니다. 부활 이전에 십자가의 죽음이 있습니다. 먼저 수고와 희생이 있고 그리고 생명이 있습니다. 부정이 있고야 긍정이 있습니다. 이 잃어버리는 모험 바로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또한 이 십자가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와의 싸움,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자기 신뢰, 자기 교만, 혹은 편하게 되고 싶어하는 안일주의, 편리주의, 그리고 자기 향락과 자기 정욕에 관한 것과의 싸움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이런 것들을 죽이는 것, 바로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앞서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사랑이 부도 나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사랑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자식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자식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남편을 때로는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상대를 위해서입니다. 상대를 사랑한 사랑은 배신당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상대를 사랑했습니다.
정말로 상대를 사랑했느냐고 사랑에 대해서 물어 보십시다. 참 사랑을 하려면 자기 사랑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얻기 위하여 우리는 잃어버려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잃어버리는 고통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위하여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이 버리는 아픔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때로는 미워해야 합니다. 이 미워해야 하는 그 쓰라림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죽여버려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 죽이는 아픔이 십자가의 고통입니다.
누가복음 14:26 이하에 오늘과 똑같은 본문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말씀하셨지만 누가복음 14장에는 "아비나 형제나 자매나 혹은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미워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혹 성서학자들은 이것을 교묘하게 해석하기 위해서 미움이란 히브리 개념으로서는 "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해석해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어느 결정적 순간에서는 미워해야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한 사람은 신학대학을 나오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쌓고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목화를 하려고 하는 그 순간에 부인이 말립니다. 그 부인은 부잣집 외동딸입니다. 부인은 말하기를 당신이 받는 그 월급으로서는 내가 살 수 없다. 당신은 재주도 많은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나와 살려거든 목사노릇 하지 말라고 결사적으로 말립니다. 결국 그는 교회 일을 그만 두고 미국 가서 갖은 고생 다 하면서 처자식을 잘 키웠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부인이 차 사고가 나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그제야 회개하고 "여보 목사노릇 하시오" 했습니다. 그 남편이 제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제 다 늦게 나더러 목사노릇 하라면 어떻게 하라고, 나는 장가 한 번 잘못 가서 일생을 망쳤다." 자, 이것이 결정적인 얘기가 아닙니까? 그것은 미워해야 할 순간에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둘 다 사랑할 수 없는 때가 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술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 대답하기를 "술에 밥 말아 떡 안주에 먹겠다." 그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를 얻기 위해서 나머지를 버려야 합니다. 이 버려야 하는 아픔이 문제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굉장한 희생을 지불해야 합니다. 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어느 존경하는 목사님 한 분을 압니다. 그분이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를 한 그 사실 때문에 두고두고 괴로워합니다. 신사 참배한 이유는 바로 처자식 때문이었답니다. 죽어야 할 시간에 죽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미워해야 할 시간에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해야 할 일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선한 일, 의로운 일, 심지어는 학생들의 공부하는 것까지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제대로 되려면 버려야 할 것이 많습니다. 끊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습니까? 이제 미워해야 합니다.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들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어 버리는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잘못하면 평생 원수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아십시다. 아내가 원수요, 가정이 원수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에 대해 사랑하고자 하는 내 마음이 원수입니다. 내가져야 할 십자가는 가정을 따라간다. 버린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 마음속에서 자기와의 싸움에 어떻게 임하는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별로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만 "슈퍼스타"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성경에는 간단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이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보았습니다. 그 기도문 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면 그 보상은 무엇입니까?"
그 작가의 상상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상을 바라는 마음, 내가 이 희생을 하면 그 다음 보상이 무엇입니까. 보상을 많이 생각하면 희생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죽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 보상은 내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보상을 묻지 않는 그런 희생, 이것을 십자가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절대 순종입니다. 절대 충성입니다. 절대 사랑입니다. 이 충성 속에 죽어 갑니다. 믿음으로 죽어 갑니다. 사랑으로 죽음을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여수 순천 반란 사건 때에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심방 갔다 돌아오는 길에 공비들에게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목사님을 꽁꽁 묶어서 창고에다 집어넣었는데, 한밤중에 인민군 하나가 들어오더니 "이 가운데 예수 믿는 동무 없소?" 그러더랍니다. 목사님은 예수 믿는 게 분명하지만 뒤에 앉아서 죽을까 걱정이 되어 벌벌 떨고 가만히 있었답니다.
한참 후에 인민군은 또 들어왔습니다. "예수 믿는 동무 없느냐" 는 말에 또 조용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의 마음은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인민군은 세 번째 들어오더니, 이제는 하나 하나 확인하며 물어보더랍니다. 따발총을 들고 "너 안 믿느냐?" "너 예수 믿지 않느냐?"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하고 한 명씩 확인해 오더니, 컴컴한 데서 목사님의 가슴을 쿡 찌르면서 "너 예수 믿지 않느냐?" 하더랍니다. 그 때는 사람이 한 번 죽지 두 번 죽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 "제가 목사입니다." 그랬더니 "너 괴수구나, 나와" 그러더랍니다.
그 목사님 자신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인민군에게 끌려나갈 때에는 마치 지옥에서 천당으로 가는 것 같더랍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답니다. 이젠 됐다. 이젠 살았다, 죽으러 가는 것이지만 이제는 승리했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끌려 나왔답니다. 그런데 인민군은 밖으로 나오더니 결박을 풀어 주면서 "목사님 빨리 가십시오." 그러더랍니다. 그 인민군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목사님이 잡혀왔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살려 드리려고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서 애먹었다고 하더랍니다. 이러한 경험을 했노라고 본인이 제게 하신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자니 문제가 많지 죽자는 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죽을 마음으로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잃어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택입니다. 불가피적인 얘기가 아닙니다. 죽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간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그 어느 순간에 내가 예수 믿는다고 증언하고 그저 "땅" 하고 넘어지는 그런 순교는 쉬운 것입니다. 문제는 순교보다 순교적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갖 것을 다 죽여 버리고 완전히 희생해 버리면 보상 없는 죽음을 죽어서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가는 길입니다. 그리할 때에 주께서 살리십니다.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부활의 생명
항상 그와 함께 하며 부활의 기적이 그를 따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기도 : 예수를 따르면서도 너무 멀리 따라가며, 주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나를 먼저 사랑하고, 주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나 자신의 명예를 먼저 돌아보면서 항상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고통을 이어 가는 불쌍한 저희들을 또 한 번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벗고자 하는 그런 마음에서의 신앙 생활이 아니라, 내 십자가를 내가 지고 따라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분명히 십자가 안에 있는 그 영광과 함께 하는 능력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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