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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은사(고린도전서 12장 31절~13장 3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회 문제, 정치 문제, 가정 문제, 그리고 종교․도덕 문제, 전쟁과 재난과 기근과 질병-세상에는 너무도 문제가 많습니다. 현대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에는 통틀어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끝없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을 보았는가 하면 그것이 또다른 문제의 시작이 됩니다. 문제가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다하다 지치면 굳이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느니 차라리 그냥 안고 살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까지 생깁니다.
둘째는 '불확실성'입니다. 문제 자체를 놓고 우리는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봅니다.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종잡지를 못합니다. 해결을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내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 전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방향감각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이 세대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막연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문제의 원인도 모르고 대책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고민하되 제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모든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남편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침부터 아내가 바가지를 긁습니다. 쌀도 없고 땔나무도 없고 옷도 없고 뭐도 없고 뭐도 없다고 연신 잔소리를 해댑니다. 그러자 남편이 짜증스럽다는 듯 툭 내쏩니다.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은가? 돈 없다고 한마디만 하면 그만인 걸 가지고!" 여러분, 세상 문제 치고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만큼 간단하고 쉬운 것도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로 인간 문제가 그렇습니다. 비인간화가 문제입니다. 인간성 상실이 문제요, 인간 존재의 파괴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사회 문제, 혹은 다른 사람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시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좁혀봅시다. 너무 넓게 생각하지 말고 좀더 단순하게 좁혀서 생각해봅시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요, 사회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인간, 나 자신으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 자신에게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문제란 도대체 어떤 문제입니까? 그것은 건강의 문제도, 소유의 문제도, 지위의 문제도, 명예의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사랑의 문제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요 그의 유서라고 하는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미래에 되어질 일을 멀리 내다보며 예언합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딤후 3:1~2)." 사랑의 변질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있으되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인 사랑, 물질적인 사랑, 자본주의적이며 유물주의적인 사랑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쾌락적이고 향락주의적인 사랑으로 병들어가고 있음을 내다봅시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 예언이 지금 우리 시대에 당했습니다. 사랑의 타락이 왔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온 세상에 불법이 성하므로 믿는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겠다, 불법을 탓하다가 결국은 사랑이 식어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아무리 불법이 성해도 끝까지 사랑이 식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인간 존재가 파괴되어 갑니다. 이것을 구제하는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량주의, 업적주의, 성공주의-이것으로는 인간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참사랑만이 인간 회복의 궁극적 처방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랑의 힘으로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화초를 가꾸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물을 주고 거름을 주지만 사랑을 주지 않으면 화초는 자랄 수 없습니다. 곧 죽어버립니다. 어떤 곳에 나무 열두 그루를 심어 놓고 거기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붙였답니다. 그런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의 열한 그루는 모두 잘 자라는데 똑같이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도 가룟 유다의 나무는 번번이 죽어버리더랍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욕을 하고 미워하니까 그 나무가 말라버리더라는 것입니다.
화초도 사랑을 받아야 잘 자라나봅니다.
아시다시피 소련에는 집단농장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나라에는 어디나 집단농장 제도가 있는데 이것이 늘 잘되지 않아서 흉년이 듭니다. 그래서 한 번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대개 정치범들로 구성된 소련 인구의 1%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가장 나쁜 땅을 사유지로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 박토(薄土)에서 자유롭게 농사를 지어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정산(精算)을 해보니 매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 1%의 농민들의 생산량이 소련의 전체 농업 생산량의 27%를 차지한 것입니다. 감자는 전체 생산량의 62%, 우유와 소고기는 34%, 달걀은 47% - 종합해서 전 생산물의 27%가 그 1%의 농민들 손으로 생산되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인민공사 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중국이 차츰 자유화되어 가는 중이요, 소련이 공산주의를 수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만 가지고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농사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어떠한 일에고 사랑이 없으면 그 일이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근본 문제는 이것입니다. 실로 절박한 문제입니다. 사랑의 문제, 내 사랑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내 사랑이 건재한가, 내 사랑이 변질되지 않았는가-반드시 재점검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흔한 통속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중생한 사랑,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그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사랑의 뜻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태반이 바로 이 아가페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사랑,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고,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으로 방편을 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무한합니다.
이에 비하여 에로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이요, 수평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욕망에서 출발하여 자기 만족을 목적 삼고, 인간을 속박하고 구속하며, 마침내는 증오와 원망으로 끝나는 사랑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에『살로메』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 성경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저는 대학생 때 읽은 인상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살로메는 헤롯 왕의 왕후 헤로디아의 딸입니다. 헤로디아는 원래 헤롯의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남편의 형인 헤롯 안티파스가 더 큰 것을 보고 남편을 버립니다. 그리고 안티파스와 결혼한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의 딸이기에 살로메는 생각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선택한 저 의붓아버지보다 더 크고 더 높은 사람과 결혼하리라.' 그래서 온 유대땅을 둘러보니 어디 그만한 사람이 있어야지요, 결국 살로메는 세례 요한을 택합니다.
그녀는 약대 털옷을 입고 거칠게 살아가는 세례 요한에게서 야성미를 느낍니다. 게다가 그의 우렁찬 외침하며, 그 앞에 끓어 엎드려 회개하는 많은 사람들이라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 인기 있고 훌륭한 남자로구나 싶어 살로메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될 법이나 한 이야기입니까? 안되니까 그녀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다 집어넣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밤마다 찾아가 줄기차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거침없이 외치던 세례 요한이고 보면 살로메한테는 또 얼마나 욕을 퍼부었겠습니까? 지독한 욕을 퍼부었겠지요. 그래도 여자는 끈질기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정 들어주지 않으니까 무서운 생각을 한 가지 해냅니다. 헤롯 왕의 생일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 살로메가 앞에 나아가서 요염하게 춤을 춥니다. 그것에 홀린 헤롯이 묻습니다.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살로메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합니다. "세례요한의 목입니다. 그의 목을 제게 주십시오." 결국 세례요한의 목은 쟁반에 받쳐져서 그녀에게로 옵니다.
살로메는 피가 철철 흐르는 세례 요한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것이 소설 『살로메』의 줄거리입니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적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높은 것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고 갖지 못하면 빼앗고, 죽여서라도 제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것이 인간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적 사랑이 어떻게 끝나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시작된 사랑은 마침내 남을 죽이고 자기도 죽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사랑 끝에 남는 것은 결국 허무입니다. 이것을 인간적 사랑의 극치라고 오스카 와일드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출발하여 자기 희생을 방편으로 삼고, 그리고 창조적으로 역사 합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본문은 사랑을 '은사'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카리스마'-신령한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선물됨을 바로 이해하여야 됩니다. 진실한 사랑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깨달을 수 있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물을 받았다 하더라도 선물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선물되지 않습니다. 선물로 인하여 속박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뇌물입니다.
선물일 수도 없고 사랑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고 바른 사랑의 응답을 하는 것-그 응답 자체가, 그 사랑 자체가 선물입니다. 주어진 사랑도 선물이요, 사랑을 깨닫는 것도 선물이요, 사랑을 받아 사랑 안에 사는 것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이 은사 가운데에 살아갑니다.
『살로메』의 오스카 와일드가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성찬이다. 받는 자가 무릎을 꿇고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을 받는 입술이나 마음에서 '주여 저는 낮은 자입니다. 저는 무자격합니다.'하고 감격의 소리가 울려나와야 한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성찬식과 같습니다. 무릎을 꿇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을 때에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받아들입니까?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들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야 합니까? 무릎을 꿇고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제불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 같은 죄인을 이리도 사랑하십니까?' 하며 감사와 감격과 눈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사랑은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이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깨달을 때에 그 사랑으로 우리가 나를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 이하에 여러 가지 은사가 나와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 방언 하는 은사, 통역하는 은사…… 다 열거한 다음에 결론을 짓듯 말씀합니다. 제일 좋은 길, 가장 큰 은사를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확실히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가운데 으뜸가는 선물입니다. 가장 큰 은사입니다. 이 은사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고린도전서 13장은 유명한 사랑의 장입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사랑만이 동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만이 그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생각해봅시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방언이란 무엇입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다른 나라 말을 하여 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방언입니다. 그런데 사랑 없는 대화는 어떻게 됩니까? 요즘은 툭하면 대화, 대화 하지만 사랑 없는 대화이기에 소리만 시끄럽습니다. 말(언어)의 전시장입니다. 좋게 대화한다고 시작했다가 싸움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 말만 하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르다보니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뜻도 의미도 없이 허공에 흩어지고 마는 소음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말이 적어서 대화가 안됩니까?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대화가 싸움으로 끝납니다. 사랑만이 가치 기준이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식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교만과 남을 멸시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믿음도 기적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합니다. 희생도 봉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성경은 극단적으로 표현합니다. 간결하고도 분명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변론을 일삼습니다.
보니까 신부한테 굉장한 선물을 합니다. 다이아반지로 시작해서 이것저것 분수에 넘치도록 선물을 합니다. 제가 깜짝 놀라서 "자네가 어떻게 이처럼 많은 선물을 하는가?"하고 물으니 이 신랑 하는 말 좀 들어보십시오. "어차피 다 가지고 올 것인데 무엇을 걱정합니까? 필요하면 팔아서 쓰지요 뭐.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사랑입니까? 선물은 주지만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 없는 선물이 선물일 수 없습니다. 뇌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결혼해서 20년 동안 살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 낳아주고,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20년 동안 희생만 했다면서 한숨을 푹푹 쉽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20년 동안 천하없는 수고를 했다 해도 알맹이가 쏙 빠졌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 없는 수고는 한숨과 절망과 원망으로 끝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리한 판단도 있고 수고도 있으나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일은 어떠한 일이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효력도 없고 유익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만이 인간화를 가능케 합니다. 사랑만이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것이요, 성도로 성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인간됨의 의미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은사입니다.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사랑의 영을 받아야, 사랑의 선물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 하고 부끄러워서 갈릴리 바다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앞으로 큰 일을 하여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를 찾아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속에 대답이 있습니다. 그 속에 문제의 원인이,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되었는지 아느냐?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앞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역시 사랑에 있다."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의 대답, 하나의 해결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 짧은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고 허무가 있고 실망이 있습니까? 진실하게 산다고 하는데 왜 이처럼 허무합니까? 착실하게 사느라고 살았는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합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낙심도, 피곤도,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험한 세상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경쓰지 맙시다 문제는 나요, 나의 사랑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큰 일은 못해도, 이렇다할 업적, 이렇다할 성공은 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불붙는 사랑-이것만은 온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그 큰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나의 인간됨이 있고, 그것이 성도의 소재(所在)이며, 거기에 믿는 사람이 가는 영광의 길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가장 큰 은사(고린도전서 12장 31절~13장 3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회 문제, 정치 문제, 가정 문제, 그리고 종교․도덕 문제, 전쟁과 재난과 기근과 질병-세상에는 너무도 문제가 많습니다. 현대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에는 통틀어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끝없는 문제'라는 점입니다. 어떤 문제가 해결을 보았는가 하면 그것이 또다른 문제의 시작이 됩니다. 문제가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다하다 지치면 굳이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느니 차라리 그냥 안고 살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까지 생깁니다.
둘째는 '불확실성'입니다. 문제 자체를 놓고 우리는 이렇게도 보고 저렇게도 봅니다.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종잡지를 못합니다. 해결을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내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 전혀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방향감각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이 세대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막연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문제의 원인도 모르고 대책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고민하되 제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모든 문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남편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침부터 아내가 바가지를 긁습니다. 쌀도 없고 땔나무도 없고 옷도 없고 뭐도 없고 뭐도 없다고 연신 잔소리를 해댑니다. 그러자 남편이 짜증스럽다는 듯 툭 내쏩니다. "무슨 말이 그렇게도 많은가? 돈 없다고 한마디만 하면 그만인 걸 가지고!" 여러분, 세상 문제 치고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만큼 간단하고 쉬운 것도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바로 인간 문제가 그렇습니다. 비인간화가 문제입니다. 인간성 상실이 문제요, 인간 존재의 파괴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사회 문제, 혹은 다른 사람의 문제로 책임을 전가시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좁혀봅시다. 너무 넓게 생각하지 말고 좀더 단순하게 좁혀서 생각해봅시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요, 사회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내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인간, 나 자신으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 자신에게부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문제란 도대체 어떤 문제입니까? 그것은 건강의 문제도, 소유의 문제도, 지위의 문제도, 명예의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사랑의 문제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요 그의 유서라고 하는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미래에 되어질 일을 멀리 내다보며 예언합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딤후 3:1~2)." 사랑의 변질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있으되 철저하게 이기주의적인 사랑, 물질적인 사랑, 자본주의적이며 유물주의적인 사랑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쾌락적이고 향락주의적인 사랑으로 병들어가고 있음을 내다봅시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 예언이 지금 우리 시대에 당했습니다. 사랑의 타락이 왔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온 세상에 불법이 성하므로 믿는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겠다, 불법을 탓하다가 결국은 사랑이 식어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아무리 불법이 성해도 끝까지 사랑이 식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인간 존재가 파괴되어 갑니다. 이것을 구제하는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량주의, 업적주의, 성공주의-이것으로는 인간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참사랑만이 인간 회복의 궁극적 처방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사랑의 힘으로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화초를 가꾸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물을 주고 거름을 주지만 사랑을 주지 않으면 화초는 자랄 수 없습니다. 곧 죽어버립니다. 어떤 곳에 나무 열두 그루를 심어 놓고 거기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이름을 붙였답니다. 그런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의 열한 그루는 모두 잘 자라는데 똑같이 거름을 주고 물을 주어도 가룟 유다의 나무는 번번이 죽어버리더랍니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욕을 하고 미워하니까 그 나무가 말라버리더라는 것입니다.
화초도 사랑을 받아야 잘 자라나봅니다.
아시다시피 소련에는 집단농장이 있습니다. 공산주의 나라에는 어디나 집단농장 제도가 있는데 이것이 늘 잘되지 않아서 흉년이 듭니다. 그래서 한 번은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대개 정치범들로 구성된 소련 인구의 1%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가장 나쁜 땅을 사유지로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 박토(薄土)에서 자유롭게 농사를 지어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정산(精算)을 해보니 매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 1%의 농민들의 생산량이 소련의 전체 농업 생산량의 27%를 차지한 것입니다. 감자는 전체 생산량의 62%, 우유와 소고기는 34%, 달걀은 47% - 종합해서 전 생산물의 27%가 그 1%의 농민들 손으로 생산되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인민공사 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중국이 차츰 자유화되어 가는 중이요, 소련이 공산주의를 수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만 가지고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으면 농사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어떠한 일에고 사랑이 없으면 그 일이 성사될 수 없습니다.
근본 문제는 이것입니다. 실로 절박한 문제입니다. 사랑의 문제, 내 사랑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내 사랑이 건재한가, 내 사랑이 변질되지 않았는가-반드시 재점검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흔한 통속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중생한 사랑,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그 사랑을 아는 사람만이 사랑의 뜻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아가페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태반이 바로 이 아가페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사랑, 하나님께 뿌리를 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고,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것으로 방편을 삼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무한합니다.
이에 비하여 에로스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사랑이요, 수평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욕망에서 출발하여 자기 만족을 목적 삼고, 인간을 속박하고 구속하며, 마침내는 증오와 원망으로 끝나는 사랑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에『살로메』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 성경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저는 대학생 때 읽은 인상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살로메는 헤롯 왕의 왕후 헤로디아의 딸입니다. 헤로디아는 원래 헤롯의 이복동생 빌립의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남편의 형인 헤롯 안티파스가 더 큰 것을 보고 남편을 버립니다. 그리고 안티파스와 결혼한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의 딸이기에 살로메는 생각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선택한 저 의붓아버지보다 더 크고 더 높은 사람과 결혼하리라.' 그래서 온 유대땅을 둘러보니 어디 그만한 사람이 있어야지요, 결국 살로메는 세례 요한을 택합니다.
그녀는 약대 털옷을 입고 거칠게 살아가는 세례 요한에게서 야성미를 느낍니다. 게다가 그의 우렁찬 외침하며, 그 앞에 끓어 엎드려 회개하는 많은 사람들이라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 인기 있고 훌륭한 남자로구나 싶어 살로메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될 법이나 한 이야기입니까? 안되니까 그녀는 세례 요한을 감옥에다 집어넣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밤마다 찾아가 줄기차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거침없이 외치던 세례 요한이고 보면 살로메한테는 또 얼마나 욕을 퍼부었겠습니까? 지독한 욕을 퍼부었겠지요. 그래도 여자는 끈질기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정 들어주지 않으니까 무서운 생각을 한 가지 해냅니다. 헤롯 왕의 생일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 살로메가 앞에 나아가서 요염하게 춤을 춥니다. 그것에 홀린 헤롯이 묻습니다.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살로메는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합니다. "세례요한의 목입니다. 그의 목을 제게 주십시오." 결국 세례요한의 목은 쟁반에 받쳐져서 그녀에게로 옵니다.
살로메는 피가 철철 흐르는 세례 요한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이것이 소설 『살로메』의 줄거리입니다.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것이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적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높은 것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하고 갖지 못하면 빼앗고, 죽여서라도 제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것이 인간적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적 사랑이 어떻게 끝나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시작된 사랑은 마침내 남을 죽이고 자기도 죽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사랑 끝에 남는 것은 결국 허무입니다. 이것을 인간적 사랑의 극치라고 오스카 와일드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온전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출발하여 자기 희생을 방편으로 삼고, 그리고 창조적으로 역사 합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본문은 사랑을 '은사'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카리스마'-신령한 선물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선물됨을 바로 이해하여야 됩니다. 진실한 사랑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깨달을 수 있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선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물을 받았다 하더라도 선물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선물되지 않습니다. 선물로 인하여 속박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뇌물입니다.
선물일 수도 없고 사랑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에 감격하고 바른 사랑의 응답을 하는 것-그 응답 자체가, 그 사랑 자체가 선물입니다. 주어진 사랑도 선물이요, 사랑을 깨닫는 것도 선물이요, 사랑을 받아 사랑 안에 사는 것도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이 은사 가운데에 살아갑니다.
『살로메』의 오스카 와일드가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사랑은 성찬이다. 받는 자가 무릎을 꿇고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을 받는 입술이나 마음에서 '주여 저는 낮은 자입니다. 저는 무자격합니다.'하고 감격의 소리가 울려나와야 한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성찬식과 같습니다. 무릎을 꿇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을 때에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받아들입니까?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들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랑은 거짓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해야 합니까? 무릎을 꿇고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구제불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 같은 죄인을 이리도 사랑하십니까?' 하며 감사와 감격과 눈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사랑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사랑은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이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깨달을 때에 그 사랑으로 우리가 나를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 이하에 여러 가지 은사가 나와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 방언 하는 은사, 통역하는 은사…… 다 열거한 다음에 결론을 짓듯 말씀합니다. 제일 좋은 길, 가장 큰 은사를 보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확실히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가운데 으뜸가는 선물입니다. 가장 큰 은사입니다. 이 은사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고린도전서 13장은 유명한 사랑의 장입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상고해보면 사랑만이 동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만이 그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생각해봅시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방언이란 무엇입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다른 나라 말을 하여 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방언입니다. 그런데 사랑 없는 대화는 어떻게 됩니까? 요즘은 툭하면 대화, 대화 하지만 사랑 없는 대화이기에 소리만 시끄럽습니다. 말(언어)의 전시장입니다. 좋게 대화한다고 시작했다가 싸움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이 없습니다. 자기 말만 하겠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지르다보니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뜻도 의미도 없이 허공에 흩어지고 마는 소음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세태입니다.
말이 적어서 대화가 안됩니까? 근본적으로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대화가 싸움으로 끝납니다. 사랑만이 가치 기준이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식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교만과 남을 멸시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믿음도 기적도 사랑이 없으면 무가치합니다. 희생도 봉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성경은 극단적으로 표현합니다. 간결하고도 분명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변론을 일삼습니다.
보니까 신부한테 굉장한 선물을 합니다. 다이아반지로 시작해서 이것저것 분수에 넘치도록 선물을 합니다. 제가 깜짝 놀라서 "자네가 어떻게 이처럼 많은 선물을 하는가?"하고 물으니 이 신랑 하는 말 좀 들어보십시오. "어차피 다 가지고 올 것인데 무엇을 걱정합니까? 필요하면 팔아서 쓰지요 뭐.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사랑입니까? 선물은 주지만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 없는 선물이 선물일 수 없습니다. 뇌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결혼해서 20년 동안 살고 불평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 낳아주고,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20년 동안 희생만 했다면서 한숨을 푹푹 쉽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20년 동안 천하없는 수고를 했다 해도 알맹이가 쏙 빠졌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 없는 수고는 한숨과 절망과 원망으로 끝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리한 판단도 있고 수고도 있으나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 없는 일은 어떠한 일이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물론 효력도 없고 유익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만이 인간화를 가능케 합니다. 사랑만이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것이요, 성도로 성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인간됨의 의미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은사입니다.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사랑의 영을 받아야, 사랑의 선물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 하고 부끄러워서 갈릴리 바다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앞으로 큰 일을 하여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를 찾아가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 속에 대답이 있습니다. 그 속에 문제의 원인이,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되었는지 아느냐?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앞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역시 사랑에 있다."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의 대답, 하나의 해결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 짧은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우리에게 두려움이 있고 허무가 있고 실망이 있습니까? 진실하게 산다고 하는데 왜 이처럼 허무합니까? 착실하게 사느라고 살았는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합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낙심도, 피곤도,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험한 세상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경쓰지 맙시다 문제는 나요, 나의 사랑이 문제입니다. 사랑이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큰 일은 못해도, 이렇다할 업적, 이렇다할 성공은 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불붙는 사랑-이것만은 온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앞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그 큰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거기에 나의 인간됨이 있고, 그것이 성도의 소재(所在)이며, 거기에 믿는 사람이 가는 영광의 길이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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