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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과 타협(사도행전 21:17~26)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저희가 필연 그대의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게 대하여 들은 것이 헛된 것이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도 바울은 여러 날 동안의 긴 행로 끝에 지금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면서부터 되어진 이야기를 오늘부터 공부하게 됩니다. 맨 먼저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17절)"------형제들이 와서 기쁘게 저들을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행전에 있어서 예수 믿는 사람의 지칭이 첫째가 '그리스도인'이요, 둘째가 '제자'요, 셋째가 '형제'입니다. 그런 상식을 우리가 가지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또 '제자'는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금 많은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제자도'라는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제자라고 하면 열두 제자를 가리키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날에도 우리는 다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형제'입니다. 이 말이 초대교회에 상당 기간 계속 쓰입니다. 오늘날에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특별히 강조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다 형제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형제입니다.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까 형제입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 하나님 앞에 가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 형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먼저 믿었든 나중에 믿었든 다 형제입니다. 특별히 여기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을 형제라고 부르는 데는 보다 더 높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방인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이나, 유대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나, 이방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이나, 다같이 예수를 섬긴다는 입장에서 똑같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같은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 있고 다른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실 본질적으로는 같고, 기능에서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기능적으로 볼 때에는 집사요, 장로요, 권사요, 목사요, 또 남자요 여자요, 이렇게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언제든지 성도요, 제자요,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 원리를 가지고 살아야 지혜롭게 사는 생활입니다. 같은 것을 극대화하고, 다른 것은 극소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부, 즉 남녀가 같이 삽니다. 남녀가 다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육체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마음도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작은 것이고, 같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그리스도인이고, 같이 살다가 같이 죽을 것이고, 같은 운명이고, 같은 영입니다. 같은 것을 극대화하고, 다른 것은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사람은 같은 것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다른 것만 내세웁니다. 나는 공부를 많이 했다, 너는 못했다, 나는 남자다, 너는 여자다, 나는 돈을 번다, 너는 돈을 쓴다…… 사실 생각하면 돈을 잘 쓰는 것도 버는 것입니다. 집에서 번다고 기죽을 것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자꾸 차별을 합니다. 다르다 다르다, 합니다. 그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몇 가지만 다른 것이 있어요. 그러나 같은 것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이고, 큰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저들이 바울을 부를 때에 "형제여(20절)"하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형제라는 입장에서 똑같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사람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사람을 전도하는 사람이나, 이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말하면 베드로나, 바울이나, 야고보나, 요한이나, 다 형제입니다. 그 동질성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요새 흔히들 '동질성 회복'이라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까? 동질성을 크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인생에 있어 마땅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니 바울이 먼저 야고보를 만났다고 합니다. 또 갈라디아서에도 야고보를 만났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1대 감독이었고, 30년 동안을 감독으로 일하다가 마지막에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고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자마자 맨먼저 만난 사람이 야고보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요, 제1교회이기에 저를 만나게 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세계를 다니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apostolic authority-사도적 권위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에 가서도 보고를 합니다만, 특별히 맨처음 교회 되는 예루살렘교회에 와서도 교회의 감독 야고보에게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이요, 공동체 의식을 바로 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역사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고할 필요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요. 이 점에서 바울이 위대합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신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택함 받은 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로 직접 불러 택하여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은 부름을 받은 사도 야고보에게 찾아가서 그간에 지내온 바를 보고합니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의 공동체성, 교회의 유기성, 혹은 거룩한 교회, 하나됨의 교회를 말해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교회가 있고, 바울의 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예요. 다 그리스도의 교회요, 하나의 교회입니다. 그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보고하는 부분을 눈여겨보세요.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19절)"-이 짧은 문장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내가 몇 사람에게 전하고, 내가 몇 사람을 세례 주고, 어느 어느 교회를 세우고……' 이렇게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하고 보고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자기 존재는 없어요. '오직 하나님이'―이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역사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 하나님께서 놀랍게 이루신 일, 그것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되어진 사건 전부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 하시고 저렇게 역사 하시고, 누구에게는 어떻게 역사 하시고―그 전부를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있어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언제든지 이런 신앙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두고 내가 한 것이다, 또 누가 한 것이다, 하고 왈가왈부하는데,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몸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야고보에게 낱낱이 고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두 번째 보고의 내용은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입니다. 나를 통해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디아 테스 디아코니아스 아우투'-디아코니아는 ministry, 요샛말로 '서비스'입니다. '나의 봉사생활, 나의 수고, 나의 봉사를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알 것인즉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나를 통해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내 입을 통하여, 내 말을 통하여, 내가 하는 설교를 통하여, 그리고 내 지혜를 통하여, 내 건강을 통하여, 내가 하는 수고를 통하여, 내가 뿌린 눈물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내가 당한 많은 핍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것뿐입니다. 그 시작도, 그 과정도, 그 결과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요, 나는 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봉사하는 것은 별것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만이 큰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의 봉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가을에 농사를 다 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곡식을 주셨다고 우리는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쌀가마를 떨어뜨려 주신 것은 아니예요. 분명히 우리가 수고했어요. 씨를 뿌렸고, 땀을 흘렸고,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고, 모든 것을 풍족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내가 하는 수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감사기도 할 때에 "하나님, 좋은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분명히 누군가 사람이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에게 감사하기보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어느 외과의사가 이런 재미있는 얘기를 합니다. 수술을 집도하는데, 수술 받고 나온 환자 가운데 다시 돌아와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해요. 퇴원할 때에 "고맙습니다"하며 꾸벅 인사하고 나가면 그만이랍니다. 죽을 목숨 살려주었는데도 자기한테 인사 안하고 어디로 가는가, 하여 가만히 보니 교회에 가서 감사헌금 드리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칼을 들었는지, 누가 주사를 놓았는지, 누가 치료를 했든지, 문제가 안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 분을 통하여 내 병을 낫게 하셨다―이렇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약을 먹어도 이 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장소에서 이런 일 저런 일 합니다만, 참 오묘합니다. 특별히 저는 비교적 많은 경험 속에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제 유학시절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로 부족한 것도 많았고, 걱정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그 때 그 때 때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요. 좋은 교수님도 만나고, 좋은 친구도 만났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맨 처음 미시간 대학에 갔을 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유학을 온 한국사람인데, 당신도 한국사람이지요?" 제가 그렇다고 했더니 "저는 아무개입니다" 하고는 곧바로 저에게「논문 작성법」이라는 책을 한 권 사줍디다. 그리고 도서관에 데리고 가서 공부할 때에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하고, 논문은 어떻게 써야 하고…… 라며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는 그 분을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국내에서 영어 논문 작성법이라는 말은 들어본 일도 없었거든요. 60년대 초반에는 그런 것도 없었고, 달리 배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샛말로 제가 귀인을 만난 것이지요. 나중에 그 나라 사람들이 "외국에서 온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잘 아느냐?" 했을 때에 저는 "그럴 수 있지"라고 대답했습니다만, 내심 나한테 가르쳐준 그 분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저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해주었는지, 그 분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자기가 유학을 온 처음 몇 년 동안 논문 작성법 때문에 무척 고생을 했답니다. 별것도 아닌 그것을 몰라서 얼마나 업신여김을 받고 교수들한테 구박을 받았는지 말도 못한답니다. 그저 하루만 배우면 될 것을, 조그마한 책 한 권이면 될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될 수 있는 대로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처음 유학온 사람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저에게는 고마운 분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하나님께 할 수밖에요. 하나님께서 저 분을 통하여 내 길을 인도하셨습니다―이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여러 해 동안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많은 고생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봉사와 수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일을 이루셨습니다'하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봉사와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눈물과 내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 내 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께 내 노력이 필요하고, 하나님께 내 희생이 필요하고, 하나님께 내 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어린아이가 먹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즐거이 바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것을 통하여 역사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못하실 분이 아니예요. 그러나 이렇게 우리의 봉사를 통하여, 우리의 디아코니아를 통해서 역사 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을 보니, 바울이 이방 가운데서 역사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이방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래서 이방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이방사람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이방사람은 일단 유대 종교로 개종해 가지고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이방사람들은 이방사람대로 나름의 문화권에서 그대로 예수 믿도록,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격 요나서라든가 룻기라든가, 혹은 창세기 12장 등 여러 곳이나 특별히 선지서에 이방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이사야서, 에스겔서에도 이방에 대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이방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방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하는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20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사람의 편견으로 볼 때에는 별로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예수인데 쓸데없이 이방사람들이 많이 믿어 가지고 이 야단인가, 꼭 돌아다니면서 전도해야 되나?-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이방사람들이 듣고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얘기를 접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 받는 것, 중요해요. 여러분이 잘사는 것, 중요해요. 여러분의 자녀가 잘되는 것도 중요해요.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속에 정말 기쁨이 되는 것은, 아직도 예수 믿지 않는 그 누군가가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고, 그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에 새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새로이 한 사람 한 사람 예수 믿게 되는 것,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이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교회는 좁은데 왜 자꾸 나오나, 나도 앉을 자리가 없는데, 주차장도 모자라는데 왜 자꾸 와서 번거롭게 하는가……'합니다. 참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교회 부흥은 얼마가 되어도 좋습니다. 새로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구원받는 것 못지 않게 항상 소중히 여기고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었다는 소리를 듣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명심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본문에 "저희가 듣고…… 이르되(20절)"라고 나옵니다. '저희'는 야고보와 장로들이겠고, '이르되'-아마도 장로들이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20절)"-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유대인들 중에 믿는 자가 수만 명 있습니다. 여기에 좀더 설명을 하자면 이 사람들은 아직도 유대교에 매여 있습니다. 본문은 간단하게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20절)"라고 말씀합니다만 여기에 괄호하고 한마디 넣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예수는 믿으나 여전히 율법에 열심이 있는 자라,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골치가 아픈 거예요. 야고보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 고집 때문에 예수는 믿으나 아직도 유대교에 열심이 있어서 유대교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할례를 소중히 여기고 안식일을 소중히 여기고 율법을 소중히 여깁니다. 극단적인 유대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 오해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생각대로라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에 그칠 뿐이요, 세계적인 교회가, 종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바울이 만방에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계적 종교가 되는 계기를 만든 것입니다. 바울의 역사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적 이미지에서 기독교적, 좀더 나아가 세계 종교적 이미지로 바꾸는 그 큰 역사를 바울이 이루어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수만 명의 유대교 사람들이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는 꼭 받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오해가 있습니다.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21절)"-이것은 오해입니다. 유대사람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이방사람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바울은 분명히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메시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지가 어떻게 어디선가 잘못되어서 유대사람들도 할례 받을 필요가 없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가 지금 이 수만 명의 유대사람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이 나서서 이 수만 명의 고집스러운 유대교인들을 설득시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방사람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지 유대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한 일이 없습니다. 사실이 이러이러하다고 설득하고 가르쳐야겠는데, 시간이 없어요. 언젠가는 오해가 다 밝혀지고, 알아들을 때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해요. 편견으로 뭔가 잘못되어 있어요. 하지만 수만 명의 유대사람들을 설득시키기는 어렵고 해서 일단 바울 한 사람을 설득하여 타협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내놓은, 예루살렘 교회 장로가 내놓은 대책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유감스럽습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인데, 오해는 오해인데, 왜 오해를 당장 풀 생각은 안하고 타협을 요구하는 것인지요.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은 시간을 벌어야 되기 때문에, 당장 부딪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오해된 것을 푸는 것이 그렇게 쉽습니까?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까? 교육은 언제나 take time, 시간이 걸립니다. 교육은 반드시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됩니다. 자, 어떤 오해가 있어요. 당장에 가서 증거를 딱 보인다고 해서 마음이 돌아갑니까? 마음은 그렇게 빨리 돌아가는 것이 아니예요. 많은 시간이 걸려요. 더구나 상대가 수만 명이라고 할 때에는 몇 년 걸릴 것입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세계관이 한번 바뀌는 데에 40년이 걸린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북한이나 남한이나 다 그렇습니다.
상당히 서로를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믿지를 않아요. 북한 얘기를 여기에서는 안 믿어요. 남한 얘기를 북한에서도 안 믿어요. 믿게 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있는 지금 이 시간에 오해를 풀어야 됩니다. 그러나 무슨 말로 해결이 됩니까? 바울이 말한다고 됩니까? 무슨 증거를 댈 것입니까? 그런 일없습니다, 한다고 어디 됩니까? 더욱이 수만 명을 움직이는 데는 적잖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고로 당장은 바울 자신을 돌려놓으려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학교의 학장에 부임했을 때인데, 알고 보니까 학교 내부에 문제가 복잡합디다. 어느 교수님이 찾아와서는 전에 잇던 학장이나 혹은 교수들에 대해서 자꾸 나쁜 얘기를 합니다. 어느 교수가 나쁘고, 누가 나쁘고, 무엇이 나쁘고…… 한 두어 시간 듣고나니 머리가 아파요. 어쨌든 "그렇습니까? 다 알아들었습니다"하고는 그 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또 와서 또 그런 얘기를 해요. 더 이상 들어서는 안되겠기에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제가 한번 물어봅시다. 교수님 생각에는 몇 사람이 나쁘고, 몇 사람이 옳습니까?" 그랬더니 다 나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알았어요. 그러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군요. 저는 한 사람 고치기는 쉽지만, 여러 사람 고치기는 어렵습니다." 가만히 있던 그 교수님이 "그러면 저더러 그만두라는 말이군요"라고 합니다. "예. 저는 여러 교수님들을 다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다. 교수님 한 분만 생각을 바꾸시면 되겠네요. 그렇게 하든지, 나가든지 하세요."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조용해졌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여러 사람의, 수만 명의 마음의 오해를 푼다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지금 당장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판인데, 이런 사람들을 놓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런고로 '바울, 당신이 양보하시오. 그렇게 안 해도 될 일이지만 참고 이렇게 해주시오'하며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우리의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저희를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저희를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23, 24절)"-나실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원한 사람이 몇 있는데 이들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의 머리를 깎고, 거기서 결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방에 다니면서 만일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고, 율법에 어긋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유대사람이 되려고 할 때에는 회개의 뜻으로 결례 기간을 가지는데, 최소한 성전에서 7일 동안 머무릅니다. 그리고 30일 간은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동안에 잘못한 것을 다 회개하고 씻어버리고 그 다음부터 당당하게 회중 속에, 같은 유대인들 속에 들어가서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더러 바로 그 예식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오해가 풀어질 것 같고, 당신을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알게 될 것 같소'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잘못한 것 없으나, 일단 잘못한 것으로 해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평화롭다,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은혜될 것이라고 하기에 바울은 양보합니다. 교리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가 없는 바울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보면, 내가 전한 복음 외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할 만큼 그는 털끝만큼도 양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윤리 문제나, 혹은 생활 문제나, 의식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넓게 양보를 합니다. 내가 양보해서, 내가 죄인이 되어서, 내가 누명을 써서 전체가 평안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요, 하는 마음입니다. 대단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양보합니다. 타협합니다. 그는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2, 23)"-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죄인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에 참예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는 이만한 누명쯤 쓰는 것은 문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옳다고 한다고 옳은 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엄청난 타협을 합니다. 그러나 타협이기보다는 양보입니다. 양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음에 참예하는 충성이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고, 아무쪼록 교회를 평화롭게 하고, 아무쪼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 때문에 '이 정도 양보해야 된다면 양보하지요'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양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희생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의 타협을 높이 평가하게 됩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을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오해를 푸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립니까? 여러분, 당장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세요. 차라리 누명을 쓰세요. 억울함을 당하세요. 그리고 시간을 두고 기다리세요. 언젠가는 백일하에 공의가, 진리가, 바른 일이 높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된 삶의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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