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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 좋은 열매(마태복음 12 : 33 - 37)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랑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시는 비유의 말씀은 가장 평범하고도 보편적인 말씀입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계절을 따라 잎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우며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나무는 무슨 나무인지를 몰랐다가도 열매가 맺혀진 것을 보고야 그런 나무였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열매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를 정확하게 밝혀 주기 때문에 열매를 보면 누구나 다 그 나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 즉 나무와 열매는 언제나 하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과나무에서 배가 열리거나 배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는 그런 일은 없다. 사과나무이기에 사과가 열렸고 배나무이기에 배가 열린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간단한 이야기입니까? 이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마는 그러나 그 성격이 조금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그 실과로 그 나무를 아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열매가 맺혔으면 그것으로 솔직하게 그 나무됨을 인정하여야 된다는 실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완벽하고도 깨끗한 진리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오늘 본문의 배경을 한번 살펴봄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배경은 22절 말씀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이하의 내용을 읽어봄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경우에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시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한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신체 구조상으로 보아 눈이 잘못 되었거나 벙어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요즈음 말하는 개안 수술이나 청각 장애, 입의 구조를 치료하고 교정하는 등의 의술을 필요로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귀신이 들려서 그 귀신의 놀음에 의해 눈도 멀고 벙어리도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토록 불행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자 예수님께서는 이를 깨끗하게 고쳐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는 곧 귀신이 쫓겨 나가면서 입이 열리고 눈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이 일을 볼 때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교역자로서 어려운 질병도 질병이지만 특별히 귀신이 들린 상태에서 목사가 찾아가기도 한번하고 나면 귀신이 싹 나가주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 해 목회를 하는 가운데 몇 번 있기는 했습니다마는 기도를 해도 귀신이 나가 주지를 않으면 무척 답답합니다. 그래서 그럴 때이면 의례히 어떻게 좀 신통한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도 보면 이런 경우 때문에 변화산 아래에서 망신을 당한 내용이 마가 복음 9장 1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벙어리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는 이 귀신을 좀 내어쫓아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뭐라고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여기 남아 있는 아홉 제자들이 아마도 저마다 한번씩 무엇이라고 해본 모양인데 이 귀신이 안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정말 큰 망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간단한 한 마디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시자 그 아이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본 제자들이 너무도 신기하여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묻게 됩니다. 왜냐 하면 며칠 전에는 자기들도 했던 일인데 오늘은 못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왜 우리는 못합니까?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그 대답으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 외에는 되지 않는다! 내가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너희들이 산 아래에 머물면서 한 일이 무엇이냐? 그렇게 잡담이나 하고 잠만 자고서는 무슨 능력이 나올 수가 있겠느냐? 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인데 어찌 믿음의 기도가 없이 그런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시는 본문의 배경이 되는 말씀에도 보면 귀신이 들려 장님이 되고 벙어리가 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즉석에서 깨끗하게 완치시켜 주시게 됩니다. 만약 이러한 장면에 우리 자신이 함께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얼마나 놀랍고도 신통한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다운 역사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저들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속대로 할렐루야로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더니 오히려 옆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또 마음이 비뚤어져서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며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언제나 매사를 비뚤어지게만 보게 되니 그야말로 배냇병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엾던 한 불구의 인간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놀라운 역사를 보면서 "이것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구나!"하고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럴 때에도 여전히 마음이 비뚤어져서는 저렇게 된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의 힘의 대결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귀신의 왕, 즉 보다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보고 나가라고 해서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왕귀신이 들린 자로 말입니다. 정말 이렇게 매도해 버릴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정 믿기 싫으면 그저 모르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닌지 두고 보아야 알겠다고 하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을 억지로 부정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몰아붙이어 귀신 중에서도 가장 큰 귀신인 바알세불이 들려서 이제 작은 귀신을 나가라고 함으로 쫓겨 나간 것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언어도단의 이야기로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순간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 왜냐 하면 지금 분명하게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환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도 이것을 부인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몰아치는, 이렇게까지 억지로, 악의로 성령을 부인하는 이러한 죄는 절대로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회개하지도 않아요. 따라서 앞으로 보다 더한 어떠한 기적이나 사건이 나타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어떤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아무런 소용도 없이 계속 딴 소리만 할 터이니 그 때문에 이런 죄는 사함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구약적인 개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 하면 이 말씀을 하신 당시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기 전인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이 알고 있는 성령의 역사라는 개념은 먼저 진리 자체에 나타나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요, 두 번째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시는 이것이 구약적인 의미에서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진리 자체가 나타나고 그 나타난 진리를 내가 받아들이고 믿도록 내 마음을 감동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미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이런 성령의 역사를 받고도 지금 억지로 부인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완악한 마음! 이것은 정말 고칠 수 없는 구제 불능의 마음이요 인간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 주변의 인간사에서도 이런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한번 나쁘게 마음먹은 사람은 참으로 도리가 없습니다. 이제 칭찬하면 아첨한다고 하고 또 바른 말로 일러주면 비판한다며 분을 냅니다. 도대체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립니다. 그러기에 옛말에도 며느리가 미우니 며느리 발뒷축이 계란 같더라고, 발뒷축도 미운 것이란 말입니다.
그저 머리에서부터 발뒷축까지 다 나쁘게만 보여 전혀 좋게 볼 여지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지요. 여기 이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악의에 차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바알세불을 힘입었다는 말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나무와 열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되며 이 비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지는 복합적인 비유입니다.
여기에서 첫째로 생각할 것은, 선한 열매를 보았느냐? 그렇다면 그 나무도 선하다고 말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더러운 귀신 들렸던 사람이 깨끗해진 것을 보았으면 이것은 선한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이 선한 열매를 보았으면 이것은 선으로부터 온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라고 인정하며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느냐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선한 열매를 보았으면 그것을 통하여 선한 나무를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이렇게 분명한 선한 열매를 보면서도 왜 악한 나무라고 말하느냐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왜 그렇게 억지를 부리고만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한 열매가 있고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어지게 되면 이제는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라는 것을 믿으며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딴소리하고 또 딴소리하니 이것은 끝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한 열매를 보았느냐? 그렇다면 나무도 선하다고 말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사실 예수님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가슴아픈 이야기입니까? 도대체 이렇게 악한 자들을 무슨 방법으로 설득시킬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말씀은 심판적인 의미가 있는 매우 심각한 말씀입니다. 이제 여기에 나타난 선한 열매를 보았으면 지금까지는 어떤 잘못된 생각을 했었더라도 이 순간 마음을 고치어 선한 나무로 받아 들이라! 그것이 당연한 처사가 아니겠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둘 중에 어느 편이든 말해야 할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열매를 볼 때이면 그 선한 열매를 통하여 선한 나무를 보고 그 나무를 선한 것으로 인정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건을 놓고도 여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느껴질 때에는 지난날에 품었던 잘못된 생각이나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못마땅한 일이 혹 있다손치더라도 지금 여기 나타나고 있는 이 하나님의 역사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저들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를 믿지 않으려 했고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엄청난 사건을 보았으면 이제는 "주여, 당신은 메시야입니다."하는 고백이 나와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기어이 부정하려 드니 이와 같이 엉뚱한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34절에 기록되어 있는 "독사의 자식들아 너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네 입에서 바알세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니 너야말로 진짜 바알세불이로구나! 네 입에서 악한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은 네 자신이 악한 자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동만이 열매가 아니요, 기적만이 열매가 아니라 입으로 나오는 말도 열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열매! 우리는 이 열매를 통하여 그 사람의 인격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교양, 그 사람의 세계관, 그 사람의 신앙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는 한 처녀는 어떤 청년과 1년 동안 연애를 잘해 나갔습니다. 그러길래 제 생각에 그대로 결혼을 하는가 보다 하고 있는 중인데 어느날 갑자기 결혼을 안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어느날 찻집에서 만나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 한 꼬마가 껌을 팔러 와서는 우리들도 경험하는 대로 자꾸만 조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이면 흔히들 하는 대로 잔돈이 없다든지, 아니면 다음에 사줄게 하고 미안하다며 돌려보내려고 할 수도 있겠는데 자기 애인인 이 청년이 그러지를 않고 그 껌팔이 아이를 보고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마구 하더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처녀 아이가 아주 지혜로운 결단으로 "너는 틀렸다"하고서는 1년 동안이나 사귀어 온 것을 딱 끊어버리고는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제가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 지혜와 용기가 대단하지를 않습니까? 본래 총각들이 아가씨 앞에서 보통 하는 말은 거짓말이 대부분인 것이고 보면 이것이 진짜란 말입니다. 이렇게 진짜말을 한번 듣고 보면 이제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 하면 말은 인격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격이라고 하는 나무가 있고 그 나무의 열매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말대로, 인격은 인격대로 따로 나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악한 사람이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악한 사람은 결코 선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가 하면 귀신의 왕을 운운하는 것을 보니 이는 분명 악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악한 사람이라면 악한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으로 이는 매우 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지금 악한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너희 속에 악독이 있고 악령이 있다며 심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들 바리새인들의 악한 말은 예수님의 판단에 의하면 우연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어쩌다가 예수님을 질투하게 되었다거나 그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이 사건 앞에서 우연한 실수로 이 말이 튀어나온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깊은 뿌리가 너희 속에 근본적으로 있어서 그것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도 거침없이 나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근본적인 뿌리! 그것이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좋지 않은 말을 불쑥해 놓고서는 뒤에 누가 지적을 하기라도 하면, 나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실수해서 그렇게 되었다 는 변명을 하게 됩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은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이냔 말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 그런 무엇이 있었다가 이제 나온 것이겠기에 그것을 시인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말도 결코 우발적이나 일시적이며 우연한 것이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변명을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하는 말은 이미 저희들이 써온 말입니다마는 어쨌든 이 어처구니없이 악독한 말을 비록 한번만 했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저희들의 본래적인 뿌리 깊은 악한 마음이 이 사건 앞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면 다윗 왕은 참으로 위대한 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다윗 왕은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윗이 회개하는 내용을 보면 어느 부분에서도 당시의 자기 처지나 상태를 설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내가 그만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하는 한 마디의 변명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의 말은 계속 주의 인자를 간구하는 중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 : 5)라고 자기의 본체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히브리적 의미는 나는 날 때부터 그런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본래가 죄인인 나! 그 동안도 어쩌면 기회가 없었고 용기가 없었던 것뿐이지 처음부터 나쁜 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이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다윗은 이렇게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쩌다가 실수하여 그런 말을 했노라고 하는 것은 다 쓸데없는 소리일 뿐입니다. 나타난 열매가 있으면 그 열매로 알아볼 것이지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이 있으며 열매를 놓고도 변명할 작정이더냐는 말입니다. 이는 매우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무서운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생각할 의미는 말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친히 결론을 내리시어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보자면 말은 전부가 기도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름도 잘 지어야 하고 아이들을 꾸중할 때 쓰는 말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이들이 말썽을 부린다고 하여 나쁜 놈, 나쁜 놈하고 부르다 보면 결국 그 아이는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 하면 그 소리밖에 들어 온 것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어렸을 때에 말 조심을 하라는 교훈으로 어른들로부터 수없이 들어 온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요즈음 생활과는 거리가 먼 옛날 이야기로 많은 이불을 사용하면서도 이불장이 따로 없어 뒤주가 반닫이 같은 것 위에 이불을 얹어 놓게 되는데 그랬다가 저녁이 되어 잠자리를 위해 이불을 내리게 되면 거기가 비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꼬마 녀석이 냉큼 거기에 올라가서는 "에헴"하고 앉아 익살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한 집에서는 자기 아이의 그런 모습을 보고 "오, 정승 같구나"이렇게 말을 했더니 그 아이는 뒤에 정승이 되었고 다른 한 집에서는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올라가 "에헴"하는데 도둑 고양이 같다고 하였더니 그 아이는 커서 정말 도둑놈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세요! 아이들이 노는 것 하나만 보아도 이것을 귀하게 여겨 칭찬을 하고 높이면 거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제일 나쁜 말로 저들을 구속하려고 하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진정 말대로 되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지는 기도가 되는 것이 말이기에 참으로 조심스레 말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이면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랍 사람을 자기 동족으로 잘못 보아 "샬롬"이라고 인사를 했다가 조금 후에 그가 원수인 아랍 사람인 것을 알고는 이스라엘 사람이 뒤쫓아가 돈을 내면서 조금 전에 "샬롬"한 것 물리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내가 한 마디 샬롬이라고 하였으니 저가 원수임에도 분명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물리자고 했다는 것인데 이만큼 말 한 마디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특별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익한 말"이라는 것은 헬라 원문으로는 '레마 알곤'이라는 말로서 이를 영어로는 캐어리스 워드(Careless Word)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관심이나 별 생각이 없이 그렇게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을 무익한 말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특별히 책임질 말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아무 뜻 없이 그대로 내뱉은 그 말에 의해서 심판 날에 심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 하면 이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프로이드의 이론까지 빌리지 않더라도 술 취했을 때에 지껄이는 말과 맑은 정신에서 하는 이야기를 두고 볼 때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또한 무의식 중에서 잠꼬대로 하는 말과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 하는 말을 비교할 때에 어느 것이 진짜냐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무의식 속에서 하는 말이 정직한 말이요, 돌발적인 사건 앞에서 튀어나오는 말과 우발적인 언어가 진정 그 자신의 모습과 일치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심판 기준이 이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심판의 기준은 그 사람이요, 그 인격이며, 그 영혼입니다. 그런데 그 인격과 그 영혼을 무엇으로 판단하느냐 할 때에 그것은 말로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행동만 가지고 심판 받을 것이 아니에요.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 말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 나의 나됨, 내 진실의 무게를 내 말에 의해서 평가받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조금 섭섭한 마음이 있거나 생기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을 밖으로 나타내어 말하지 마십시다. 심리학에서도 과거에는 언짢은 생각같은 것은 밖으로 다 발산을 해버려야 치료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마는 요즈음에 와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오히려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 하면 말을 하면 그것이 자꾸만 더 격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슬픈 마음도 가만히 있다 보면 사라지게 되지만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면 자꾸만 더 슬퍼지게 되고 게다가 옆에서 무엇이라고 한 마디 건네게 되면 중얼중얼하면서 그 때부터 또 다시 슬픈 이유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이에요. 그 때문에 오늘 예수님이 말씀은 절대로 핑계대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익한 말!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 그 말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를 하되 나의 진실을 찾는 기준은 체면을 차리어 점잖게 있는 그런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내 말에 기준을 두고 불쑥불쑥 잘못 나오는 말이 있을 때에 그것을 통하여 내 실상을 보며, 거기에 나타난 것이 나의 진실이기에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말은 열매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말이라고 하는 그 열매에 따라서 그 인격의 나무됨을 심판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준엄한 말씀 앞에서 오늘 우리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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