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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마태복음 7장 17, 18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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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마태복음 717, 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심은대로 거둔다-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너무나도 평범하고 너무나도 절대적인 이치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알 것이라고, 나무의 본질에 비유하여 주님께서 주신 잠언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사람은 그 행실(行實)로써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곧 그 열매로써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무슨 교리로 사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평범한 진리인 것 같지만 심오하기 이를데 없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맥락으로 살펴보면 이 말씀은 저 산상수훈(山上垂訓)의 결론 부분에 있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6, 7장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이라 일컫는 그 귀중한 말씀을 도도히 펴주셨습니다. 그 긴 말씀의 마무리 부분 곧 결론 부분에서 주시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인 것입니다. 경계의 말씀입니다. 중요한 교리를 다 개진하신 다음에 '주의하라' '조심하라'하고 못박아 마무리하시는 경계의 말씀입니다.

실천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결코 추상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단순한 지식으로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들어서 행하여야 되는 말씀입니다. 듣고 나서 바로 실천해야 되는 말씀이요 또 그럴 수 있는 말씀입니다. 생활의 규범이요 생명적 진리입니다. 당연히 '주의하라'하시는 말씀이 따르게 됩니다.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당연히 당면케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이제 나아가 실천을 하려고 하면 누구나 직면하게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알고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요새도 심심찮게 만나는 일입니다 마는 외국 유학을 가게 된 학생이 찾아와 "목사님, 귀한 말씀 한마디 해주시고 기도도 해주십시오"하고 제게 부탁합니다. 저는 그를 앉혀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듣기 좋은 이야기도 해주지만 좋지 않은 이야기도 해줍니다. 가면 으레 만나게 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새로이 만날 세계는 영화로나 보던 세계와는 다릅니다. 이야기로나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잠시 바람쐬러 나갔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른바 'Culture shock'-문화충격을 받게 됩니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 ', 이럴 수가!' 깜짝깜짝 놀라고 주저앉습니다. 쇼크를 받는 것입니다. 처음 가서라고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저는 남의 나라에서 한 5년을 살아보았는데도 지금 와서 가끔 그곳에 가보면 처음 가보았을 때나 다름없이 깜짝 놀랄 일이 많은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들을 데리고 가서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줄곧 미국사람들과 함께 기숙사생활을 했었습니다. 미국사람들과 한 지붕 아래서 한솥밥 먹으면서 5년이나 살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만하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웬만큼 익숙해졌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요즘 와서 가끔 가서 보면 여전히 충격을 받곤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 많게 마련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일반이 그렇습니다. 세상에 나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래서 절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면 이런 일도 당하고 저런 일도 당한다, 꼭 만나게 될 일들이다, 그러니 미리 알고 나가야 하겠다-이렇게 경계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조심하라'하시는 다짐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말씀만이 아닙니다. 이럴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저럴 수도 있으니 경각심을 늦추지 마라,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이런 일이 보이거든 예수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신 대로구나 하고, 내가 경고하고 경계한 말씀을 생각하면서 조심하라, 그래서 바른 길을 택하라-이런 말씀인 줄 압니다. 인간에게 경계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시집가는 딸보고 어머니가 일러주는 말이 그렇습니다. 군에 입대하는 아들보고 아버지가 일러주는 말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실수하기 쉽고 저렇게 잘못되기 쉬우니 모름지기 조심하렷다---이런 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경계하고 경고하시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결단(決斷)'을 요구하심입니다. 이런저런 어려움 있고 또 시험이 있으니 비상한 결심으로 출발하라 하심입니다. 결단이 따르지 않는 행위는 다 비인간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생각이 먼저 가고 거기에 행위가 따라가야 합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간다면 비인간적입니다. 인간적인 처신일 수 없습니다. 동물적인 처신에 속합니다. 언제나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야 합니다. 사람이 공부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에도 장차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공부를 해 가지고 시집을 가고 장가를 들고 하는 법입니다. 남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여자라는 것은 또 어떤 것인지, 그리고 무슨 일 무슨 일…… 공부할 것이 많은 것입니다. 오래 전, 고등학교에서 한 3년 교편을 잡고 있는 사람의 결혼식 주례를 보게 되었습니다. 신랑 될 사람이 결혼식 전날 목욕을 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를 만나러 들렀습니다. 까닭인즉 결혼을 하게 되니 걱정이 하늘에 닿을 듯 태산같았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책이라도 보고 공부 좀 해두지 그랬니?"-도대체 결혼이 무엇인지, 결혼을 하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아무리 보아도 머리에 들어 있는 게 없는 이 '맹탕'과 한참동안이나 이야기했지만 끝내 어정쩡한 모습 그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하고 잘도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에게 인륜 지대사(人倫之大事)가 닥치고 보니 막막하고 아득한 것입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주부대학(主婦大學)같은 것이 있어서 약혼을 하면 그 때부터 3개월 내지 4개월 동안 이런 데 들어가서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들어가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밥하는 일에서부터 제반 예의범절에 아기 낳아 키우는 일까지 두루두루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것이란 이런 계제에는 헛것이요, 결혼날짜 잡아놓고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진짜'인 것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배울 것 아닙니까? 그렇거늘, 아무 공부도 없이 멍하게 일을 당하니 첫날부터 충격이 오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비상한 각오로 출발하라-주님의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본문에 거짓선지자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거짓과 참은 그 열매로 안다, 열매를 보면 거짓이냐 참이냐를 구별할 수 있다,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열매를 보면 분간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십니다. 그러면 가짜는 왜 있습니까? 다 진짜면 좋은 것을 왜 가짜가 있어서 사람을 혼란시키느냐---이에 대해서는 역설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가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가짜가 있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가짜 다이아몬드가 있는 것입니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흔한 돌멩이라면 그것에 왜 가짜가 있겠습니까? 선지자가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짜 선지자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십시오. 목사에도 가짜 목사가 참 많습니다.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한국인 가짜 목사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영주권을 얻는다 시민권을 얻는다 할 때 '목사'라고 하면 척척 나오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현상도 '목사'라는 존재가 그만큼 귀한 존재라고 하는 반증(反證)인 것입니다. '장로'라는 직분도 귀한 직분임으로 가짜 장로가 있는 것입니다. 귀하지 않는 것에는 가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귀하고 교리라는 것이 귀하기 때문에 가짜 신자가 있고 가짜 교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참 믿음의 사람은 생명적 존재입니다. 생명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거짓과 싸우고 가짜를 경계하고 투쟁을 멈추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투쟁은 ''으로 ''되게 하는 싸움입니다. 어떤 의미로는 거짓이 있음으로써 진짜가 진짜 되는 것이요, 거짓 속에 섞여 있기 때문에 진짜가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가짜들 속에서 드러나는 진짜---얼마나 귀할 것입니까? 세상일을 두고는 좀더 생각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순결을 위하여 불순(不純)이 존재한다고도 하겠습니다. 순결로 순결 되게 하기 위하여, 그 순결을 나타내기 위하여 불순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고 은혜 넘치던 초대교회는 참으로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거기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가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2천여 년에 걸친 교회사에 얼마나 많은 이단(異端)이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거짓된 사상, 거짓된 교훈, 거짓된 선지자, 거짓된 지도자, 거짓된 교사가 없었던 때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직자라 해서 다 인정하려 할 것이 아니요 목사라 해서 다 좋은 줄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가짜가 무수히 많습니다.

그런데 가짜와 진짜는 구별을 하기 어렵습니다. 가짜는 제 모습을 숨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짜요"하고 나서는 법이 없습니다. 저마다 진짜라고 목청을 높입니다. "내가 이단이오"하고 이단이 그 정체를 드러내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복음주의'라고 자처합니다. 심지어 '진짜'임을 강변하느라고 순()자 하나를 더 붙여 '순복음주의'라고까지 합니다. 우리 교회는 소망교회라 하는데 요즘은 서울 안에만도 '소망교회'라고 간판을 내건 데가 330개소나 됩니다. 설사 33천 개소가 있다해도 소망교회는 여기 이 교회입니다.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소망교회'가 진짜인 것입니다. '소망교회'라고만 해서도 성에 차지 않는지 어디어디에는 '새소망교회'들도 있습니다. 아직 '순소망교회'라는 곳은 없으니 그나마도 다행이라 해둘까요? '순소망교회'가 있다면 우리 교회는 저들에게 '가짜 소망교회'이거나 '불순 소망교회'쯤으로 취급당할 판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저마다 '내가 진짜'라는 이야기요, 저마다 이런저런 수법으로 스스로의 정체를 가리우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면서 "나 거짓말한다"하는 사람 없고 미친 사람이 스스로 "나 미쳤소"하는 법이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보고 거짓말한다고 하면 펄펄 뜁니다. 미친 사람보고 미쳤다고 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덤빕니다. 가짜는 제 모습을 묘하게 숨긴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진짜보다 더 진짜인 것 같습니다. 더 지혜롭고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저는 화장 열심히 하고 다니는 여자 분들 보면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아름다워 보이게 화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생각해보면 그게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거든요. 어차피 내 얼굴을 내가 보지는 못합니다.

거울 앞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거울 앞을 떠나는 순간부터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한 화장이 됩니까? 남에게 예뻐 보이고자 하는 화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화장은 하되 어느 만큼으로 할 것이냐, 이게 어렵습니다. 섣불리 처발랐다가는 촌닭꼴이 될 것이고, 지나치게 짙으면 천기(賤氣)가 승하다못해 창녀 꼴이 되고 맙니다. 지나쳐도 안되고 모자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화장은 위장(僞裝)입니다. 화장술은 위장술입니다. 눈이 그리 크지도 않은데 칠로 그려 가지고 커 보이게 합니다. 눈썹이 별로 없는데 시커멓게 그립니다. 속눈썹까지 가짜를 갖다 붙입니다. 이래저래 화장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합니다. 변변찮은 사람일수록 위장하는 데는 더 열심인 법입니다.

거짓일수록 위장에 더 열심입니다. 가짜일수록 위장이 많게 마련입니다. 더 아름다운 것처럼, 더 진실한 것처럼 더 열심인 것처럼, 극성을 부립니다. 그러므로 '열심'만 보고 가상타 여길 것이 아니요, 외화(外華)만 보고 내실(內實)로 착각할 것이 아닙니다. 가짜일수록 눈에 띄게 열심인 것처럼 보입니다. 참 교회보다 이단교회가 더 열심입니다. 목숨을 걸고 열심입니다. 게다가 가짜는 진짜 뺨치게 진짜인 양 처신합니다. 진짜와 구별되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들 속에 버젓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보고 알리라" 하십니다. 당장은 알 수가 없습니다. 더 열심이니까요. 두고볼 일인 것입니다. 미구(未久)에 그 열매를 보면 알 일입니다. 진실은 열심과 별개임을 명심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집사님 한 분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남들 혀를 내두를 만큼 열성을 보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집사님을 칭찬했습니다. 신뢰했습니다. 그랬는데 웬걸, 언젠가부터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어디론지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하여 눈에 띄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의 돈을 떼먹고 달아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심지어는 교회 돈까지 축을 내었더랍니다. 그 뒤 그 교회는 많은 시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왜 그런 사람을 가려보지 못했느냐, 왜 우리보고 그 사람을 믿으라 했느냐, 그런 사람을 왜 칭찬하여 우리가 믿도록 만들었느냐, 목사님이 그 사람을 높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람을 믿었다---온갖 원망의 소리가 어지럽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온 교회가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보십시오. 가짜가 더 열심입니다.

선과 악은 언제나 공존합니다. 열매가 열릴 때까지는 가라지를 곡식과 함께 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해서라고 하십니다(13 : 2430). '이단'을 한자로 쓰면 '異端'이어서 참 재미있습니다. '()이 다르다()'입니다. 처음도 엇비슷하고 중간도 엇비슷한데 끝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지니"--가르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릅니다.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사동 언저리에 제가 좋아하는 설렁탕 집이 있습니다. 집사람에게 밥 좀 차려달라고 하면 간혹 귀찮다고 투덜댑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제가 밖에서 식사해결 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눈치입니다. 그러구러 그 설렁탕 집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바쁠 때에는 그곳에서 설렁탕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제일 빠르고 낫더군요. 음식도 빨리 나오거니와 설렁탕이라는 것 자체가 10분이면 후딱 먹고 일어설 수 있는 음식이지요? 바쁜 식사로도 좋고 먹고 나서 속도 편하고 푹 끓여 위생적이어서 그런지 대개들 좋아하더군요. 제가 그 집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좀 있습니다. 첫째는 맛이 좋습니다. 음식 맛은 개인택시 기사들이 많이 모이는 집에 가면 좋습니다. 음식 맛은 그 사람들이 대체로 잘 아니까요. 기사들이 서울장안에 안가는 곳 있겠습니까? 기사들이 많이 모이는 곳 노란 옷을 입은 그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음식 맛이 좋은 집입니다. 또한 그 집은 24시간 영업을 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시간 구애 없이 가서 먹을 수 있습니다. 밤낮 상관없이 가서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좋습니다. 그 집은 어느 시간에 가든지 사람들로 가득치 있습니다. 언젠가는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아침 7시에 가보니, 그 때도 영락없이 와글와글하더군요. 저는 손님이 별로 없는 음식점에 가서 먹으려면 왠지 입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와글와글하면 괜히 기분도 좋고 음식 맛도 좋더라구요.

또 하나 제가 그 집을 자주 찾는 이유는 그 집주인들도 손님들과 똑같은 음식으로 식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가보면 그 집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설렁탕 한 그릇씩 가지고 와서는 손님들과 같이 식사를 합니다. 손님들이 먹는 음식 그대로 가져다놓고 식사를 합니다.

제게는 그 모습이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어요.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음식점 주인들은 손님에게 내놓은 음식을 정작 자기들은 먹지를 않습니다. 제약회사 사장들도 그렇습니다. 남에게는 잘 팔아먹는 약도 자기는 안 먹습니다. 이것은 제가 어느 제약회사 사장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만들기는 해놓고 왜 당신은 먹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그 약을 만드는 과정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먹음으로 병이 더할까싶어서랍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큰일이 아닙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그 약이 선전대로 좋다면 자신부터 기꺼이 먹어야 하지 않습니까? 음식이 마땅하다면 자신부터 먹어야 합니까? 나는 안 먹으면서 남보고 맛있는 음식이니 많이 먹으라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거짓선지자와도 같이 가짜입니다.

본문말씀은 거짓선지자들의 그릇됨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은 가르치기는 잘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그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남에게는 기도하라 해놓고 자기는 하지 않습니다. 남에게는 성경 읽으라 해놓고 자기는 읽지 않습니다. 남에게는 부지런 하라고 가르치면서 자기는 게으릅니다. 가짜인 것입니다. 가짜는 교훈 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목사라는 직분이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많은 돈을 번다고 해도 남는 것은 없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헌금이나 구제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처럼 견디기 힘든 일이 없습니다.

가진 것을 다 바쳐버려야 마음이 시원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선지자인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종자에, 행하는 것은 열매에 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원리적으로 말하면 윤리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당장 그렇게 행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윤리성, 중심이 올바르다면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 문둥병자와 거지와 더불어 살지는 않습니다. 지금 당장 옷을 몽땅 벗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 생활 자세가 중요합니다. 윤리성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이 주는 효과를 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다는 약이면 뭣합니까? 먹고 효과가 있어야지요.

씻은듯이 나아야지요. 약봉지가 좋다고 되겠습니까? 약사발이 좋다고 되겠습니까? 먹고 나아야 약인 것입니다. 효과가 있어야 약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교훈이란 무엇입니까? 참 진리란 어떤 것입니까? 이단과 참 진리는 확연히 다릅니다. 한 가정이 복음과 진리가 들어갈 때에 화목함이 있는지 분쟁이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정이 파괴되는 교리는 이단이요 바른 종교가 아닙니다.

바르게 살던 사람도 일단 잘못된 교리에 빠지면 성격이 삐뚤어지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가까이하다보면 내 심령까지 황폐해집니다. 그런데 학벌과 재산에 상관없이, 고향사람과 타향사람에 상관없이 그 사람과 가까이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신앙도 좋아지고 성격도 밝아지고 사람들과도 화목해집니다. 그를 만나보면 내가 이렇게 감화를 받게 되는 바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요,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멀쩡해 보이는데도 그와 사귀기만 하면 나의 신앙이 황폐해지고 교회 봉사활동도 하지 않게 되고 세상을 점점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의 말만 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나의 신앙이 병들게 됩니다. 이렇듯 사람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인격, 이것이 가짜입니다. 그 교훈이 가짜인 것입니다. 그 교훈을 받은 자, 그 말씀을 들은 자들에게 끼치는 후속영향이 이렇듯 막대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단이 숱합니다. 그 교훈만 들어가면 겸손했던 사람이 교만해지고 황폐해지고 독선적으로 됩니다. 직업도 내버리고 가정까지도 무너집니다. 날로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타락한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황폐케 하고, 여러분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것이 가짜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밝게 하고 충만케 하고 은혜 되게 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과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내가 저 사람과 사귄 뒤로 신앙이 이상해졌고, 교회활동이 병들었고,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싫어졌고, 사는 것 자체가 싫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가짜에, 이단에 감염된 것입니다. 나에게 이상한 교훈이 전염되고 만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친구를 잘못 사귀어 잘못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줄을 잘못 서서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별히 신앙 생활에서는 잘못된 사람을 사귐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어 치유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교훈은 사람의 마음을 황폐케 합니다. 평안한 마음을 주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을 줍니다. 은혜를 주지 못하고 늘 근심걱정에 매이게 합니다. 잘못된 교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사람을 거칠게 만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던 사람이 이상하게 거칠어지고 말을 함부로 한다면 그것은 필시 잘못된 교훈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아홉 열매가 맺힘으로 우리는 그 사람과의 사귐이, 그 사람이 준 교훈이 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육체의 열매가 맺힘으로 우리는 확실히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실한지 잘못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교훈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조금 깊이 들어가 설명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거짓된 교훈은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이 아닙니다. 이단에는 하나같이 또 다른 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늘 혼합주의에 빠져 있으며, 교리도 자꾸 변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내일은 저렇게 말합니다. 혼합주의적이고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는 것이 거짓된 교훈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두 번째, 거짓된 교훈은 한 가지 측면만 강조합니다. 신앙과 교리를 전체적으로 입체적으로 인격적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거짓된 교훈은 편파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이단으로 대표적인 것이 마르시온(Marcion)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단입니다. 마르시온은 하나님의 사랑은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무시합니다. 그들은 "독생자를 보내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원한 지옥을 만드실 수 있느냐,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를 좀 지었다고 인간을 영원한 지옥에 보내시겠느냐, 지옥은 없다, 만약 있다면 잠시 거쳐가는 교도소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사랑이라는 단면만을 자꾸 강조하다보니 공의나 심판은 무시하게 됩니다. 무릇 그리스도의 신성도 강조하고 은혜도 강조하고 인성도 강조하고 심판도 강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만 이야기하고 강조하느라 심판은 무시하고, 심판만 주장하느라 은혜는 무시하고…… 이런 것이 이단의 색깔입니다. 편파적이고 편협적입니다.

세 번째, 거짓된 교훈은 독선적이고 교만합니다. 언제나 자기네만 옳다고 주장합니다. 가만히 보면 몇 사람되지 않는 교단에서도 그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열 명이면 열 명, 백 명이면 백 명-이렇게 미리 정해놓은 숫자만큼의 사람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저 나와 친한 사람만, 내 교리를 따른 사람만 구원을 받습니다. 그밖에는 어떤 사람도 어떤 곳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이것도 이단의 특징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17, 18)."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잠깐 맺는 듯할 뿐입니다. 반면에 좋은 열매,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국에 가서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깐 실수는 할 수 있어도 궁극에 가서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본색이 드러날 것입니다.

본문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말라, 지금 겉으로 나타난 것 하나만 보고 평가하지 말라, 그 속에는 딴것이 있다, 문제는 언제나 속에 있는 것이다, 이단도 좋은 일을 할 수는 있다, 악한 사람도 겉으로는 좋은 일을 하는 척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다, 그러므로 속단하지 말라'하는 경고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열매는 당장 맺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속단하지 말고 잠시 기다려보십시오. 너무 급히 따라가지도 말고 급히 배반하지도 말고 조용히 기다리면 언젠가는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시간적으로도 그렇지만, 핍박받거나 비난받을 때에 본색이 나타납니다. 일이 잘될 때에 본색이 나타납니다. 인가가 있을 때에 본색이 나타납니다. 그 때에 비로소 속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참 진리를 따르며, 참 신앙에 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스스로에게 속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스스로 겸손히 생각하면서 거짓됨을 배제하고 늘 진실을 찾는, 좋은 열매를 맺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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