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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10장 35절~45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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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되어야 하리라(마가복음 10354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 우편에 안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 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 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 공부할 잠언은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하신 본문 44절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너무나 멀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격조 높은 말씀이라 여겨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까마득하게 높아서 나 같은 사람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경지를 말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종이 되어야 한다 --이 같은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크게 오해를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 초인간, 이를테면 성자 같은 사람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보통사람으로야 어떻게 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합니다. 남이 가진 것도 빼앗는 세상인데 내 것을 남 주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권리 내가 찾아 챙기고자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한다 파업을 한다 혁명을 한다 하는 판인데, 그렇듯 투쟁하는 세상인데, 내 권리를 포기하고 남의 종이 되라니, 그 윤리 기준이 너무 동떨어지게 높다고 생각합니다. 나 같은 보통사람으로야 쳐다볼 엄두도 못 내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지(境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내가 남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남을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양보하자, 내가 낮아지자,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되자 -이렇게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특별한 사람, 이를테면 성인군자라든가 훌륭한 도덕가쯤 되는 사람들이나 이런 생각으로 살지 우리 같은 보통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것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하고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도 않은 것은 아닙니까? 남을 섬기자, 남의 종이 되어 살자고 하면 '인권' 운운하면서 펄쩍 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남의 위에 올라서고자 합니다. 남보다 더 낫고자 하는 욕심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남의 종이 될 것이라고, 밑바닥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기에는 심리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섬기려 하는 사람은 자유 합니다.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신경질적이고 고달픕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리적으로 이미 노예근성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제 본문의 맥락에 잇대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예수믿는 사람들, 우리 믿는 사람들로 가장 어려운 것은 남의 이야기나 세상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진실하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고민이 있다면 그 고민은 절대로 세상 문제가 아닙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대한다든가 일이 잘 안 된다든가 안 풀린다든가, 경제가 어떻다든가 하는 정도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런 유의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살든 죽든, 부하든 가난하든, 뭐가 잘되든 못되든, 그런 것은 I don't care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가장 큰 고민은 '자신'입니다. 자기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 고민입니다. 자기욕심, 자기욕망…… '자기'라고 하는 것이 꿈틀거리기 때문에 자신과의 싸움이야말로 가장 치열한 싸움이요, 실패하는 싸움이요, 연전연패해서 가슴을 치게 되는 싸움입니다.

여러분, 고민 얼마나 해보셨습니까? 어떤 종류의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아직도 물질에 대하여 고민하십니까? 아직도 대접 못 받는 데 대하여 고민하십니까? 사람취급 못 받는 데 대하여 고민하십니까? 여러분의 고민이란 고작 그런 것입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시시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유치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리스도인 된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체험해보지 못한 교인입니다. 사람이란 그가 하고 있는 고민이 무엇인가에 따라 값어치가 평가되는 법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가장 큰 고민은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10:38)"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 : 24)." ''라고 하는 문제, 소위 자기 처분 -내가 나를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이 참으로 큰 문제인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믿고 충성, 헌신, 봉사한다고 할 때에 여기에도 시험이 있으니, 바로 '자기'가 시험이 됩니다. 무의식중에 자기 본위적으로 돌아갑니다. 툭하면 낙심하게 되는 것은 자기본위로 교회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알아준다느니 몰라준다느니, 왜 문제가 됩니까? 자기본위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귀한 뜻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다할 가치가 없는 저러한 고민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동정하시지 않습니다. 내 소원이 안 이루어지고 내가 무시당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고민에 빠지는 것은 ''라고 하는 존재 때문입니다. 으뜸이 되고 싶고 크고 싶고 이기고 싶어 열심히 하는 것이요, 남의 위에 올라앉고 싶어서 생기는 고민인 것입니다. 내가 더 칭찬 받고 내가 더 실적을 인정받고 싶어서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다시 본문을 상고해보십시다. 많지도 않은 열두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부터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5천 명 먹이실 때에 그 자리에 있어서 그 떡 하나 얻어먹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통 떡이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떡 얻어먹은 그 날의 5천 명이 어디 예수님께 다 충성을 바쳤습니까? 다 정신을 차렸습니까? 예사 떡이 아닌 그런 떡을 얻어먹고도 정신을 못차렸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겠느냐 싶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많은 이적을 내 눈으로 번연히 본 사람들인데도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 않습니까? 하물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만하면 과분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만 해도 엄청난데 하물며 열두 사도의 하나라니…… 그런데 보십시오. 그것도 성에 차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정말 이렇듯 끝이 없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우편에 앉느냐 좌편에 앉느냐 --이렇게 꼭 일등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어서 그 '일등'을 하게 되었다면 나중에는 예수님 위에까지 올라앉으려 할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세계 도처에 '제일교회'라고 간판을 내건 교회가 있습니다. '제일교회' 없는 곳이 없습니다. 자그마한 예배당 하나 세 얻어 들고도 '제일교회'입니다. 방금 문을 연 교회도 '제일교회'입니다. '제일교회'뿐입니까? '중앙교회'라는 것도 있습니다. 'First Church''Central Church'는 어디에를 가나 쉽사리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이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지구의 중심이기 때문에 '중화민국'이다." 이런 현상들이 모두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서 '제일' 찾고 '중앙'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제일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무조건 비판하고 물리치신 것이 아닙니다. 우편에 앉겠다 좌편에 앉겠다 하고 욕심을 보였을 때, ", 정신나간 소리 하지 마라" "그따위 생각 가지고 날 따르면 못써!" --이런 식으로 나무라시지 않았습니다. "Don't give up."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되겠다는 마음 나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종이 되는 데 제일 되라 하셨습니다. 섬기는 일에 으뜸이 되라 하셨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데에 으뜸이 되라 하셨습니다. 순교하는 데 으뜸이 되라 하셨습니다.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편이냐 좌편이냐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던 야고보 -그가 사도들 중에서 맨 먼저 순교했습니다. 주님께서 그 소원을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높아지는 일에가 아니라 낮아지는 일에 으뜸이 되라 하십니다. 섬김을 받는 일에가 아니라 섬기는 일에 제일이 되라 하십니다. 욕망을 거기에 두라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본문에는 핵심이 되는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의 두 표본(two patterns of philosophy)을 볼 수 있습니다. 극과 극으로 맞서는 두 표본입니다. 하나는 로마사람들의 철학에 입각한 팍스(Pax) 사상입니다.

영어의 'peace(평화)'가 이 'Pax'에서 유래했습니다. 'peace'의 라틴어가 'Pax'입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의 이 '팍스'는 평화로되 권력하의 평화, 강제된 평화입니다. 권력이 강한 힘을 행사할 때에 표면상으로 조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전날의 소비에트 연방이 강력한 힘을 행사할 때에는 연방의 많은 나라들이 꼼짝을 못하고 숨을 죽였습니다.

시끄럽지 않았으니 '평화'였습니다. 조용했으니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십시오. 중앙의 힘이 약해지니까 너도나도 들고일어났지 않습니까? 지난날 하나로 묶여 있던 연방들이 뿔뿔이 흩어졌지 않습니까? 로마인들이 말하는 '팍스'가 바로 강한 힘에 눌려 숨을 죽인 노예적 평화였습니다. 말 한마디 못하고 죽어지내는 평화였습니다. 어떤 분들 보면 "우리는 한번도 부부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라고 자랑삼아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저는 늘 생각합니다. '그 부부생활, 참 재미없었겠다.' 어느 한쪽이 오죽이나 눌려 살았으면 싸움 한번 못해봤을까 싶어요.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런 평화는 십중팔구 노예적 평화일 것 같습니다. 할말 다 하면서 기내야 그것이 평화입니다. 한 사람은 눈을 부라리는데, 한 사람은 거기 주눅이 들어 할말 못하고 죽어 지낸다면야 그게 무덤이지 평화입니까? 둘 사이가 그렇고 보니 생전가야 싸움 한번 있을 턱이 없지요. 이 곽목사는 그런 '금실' 부럽지 않습니다. 그런 평화는 값으로 치지 않습니다.

참 평화는 '샬롬'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인 화해에서만 비롯됩니다. 사랑과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같은 화목의 상징이 화목제(和睦祭)입니다. 하나님 앞에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가 '평화'입니다. 힘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참 평화인 것입니다. 개성을 죽임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와 개성을 살리면서 이루어지는 평화는 다릅니다. 조화(調和) 속에 있는 평화가 '평화'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이 두 평화를 대비하고 계십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로마사람들을 지칭하고 계십니다. 로마의 가이사의 권세가 온 세계를 덮고 있고, 그 대행자들이 이 땅에 와서 총독이다 뭐다 하고 방방곡곡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로마의 집권 앞에 그 누가 일어나더냐 하는-말씀입니다. 조용합니다. 온 세계가 그 권세 앞에 숨죽여 조용한 것 같습니다. 힘에 의한 노예적 평화인 것입니다. 이런 평화에는 권세가 강할수록 효험이 있습니다. 주관자가 강해야 합니다. 전권적일수록, 절대적일수록 잘 유지되는 평화입니다. 높아야 합니다. 높이 섬김을 받아야 합니다. 소위 카리스마적 존재를 높여야만 시끄럽지 않습니다. 북한 땅이 평화롭습니다. 조용합니다. 곁으로 보기에는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북한 땅만이 아니라 공산주의나 독재사회에서의 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상징적 존재가 필요한 법입니다. 중국에 모택동이 있었고, 북한에 소위 '어버이 수령님'이 있습니다. 하늘같이 높게 떠받듭니다. 그래놓고 구호를 외칩니다. 절대성, 무조건성을 외치고 신조화 합니다. 그리고 조용합니다. 이것이 평화입니까? 무릇 세상적인 평화에는 이렇듯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절대자를 요구합니다. 절대주권자가, 가당치도 않지만, 그런 개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있고야 평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다 무너집니다. 가이사가 그렇고 알렉산더가 그렇고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일본의 천황이 절대주권자였습니다. 그런 개인의 권력이 셀수록 평화로워요. 그 앞에 아무도 감히 할말을 못합니다.

오늘도 종종 그렇게들 생각하지 않습니까? 조금 혼란스럽다 싶으면 하는 소리 -"좀더 강력한 정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뭐가 되지 이렇게 흔들려서야 뭐가 된단 말인가" --이런 조바심이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세상은 강력한 주권, 강력한 주권자를 필요로 하지만, 그래야 평화가 있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다---전혀 다른 체제, 전혀 다른 구조, 다른 철학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본문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철학의 구조는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의 세계는 독특합니다. 세상적인 것과는 이질(異質)입니다.

전혀, 너무 다릅니다. Differences -세상 평화의 구조와 기독교적 평화의 구조는 판이합니다. 희생을 하지요, 사랑을 하지요, 이름도 빛도 없이 죽어지지요. 능력은 있으나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리고 Contrast --대조되어 있습니다. 극단과 극단의 대조입니다. 전혀 비교가 안됩니다. 철학이 대조적입니다. 한쪽에는 강한 힘이요, 한쪽에는 썩어지는 밀알입니다. 한쪽은 크게 소리지르고 우상을 만들고 요란을 떠는데 한쪽은 예루살렘 한구석에서 조용하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엄청난 대조입니다.

또한 Alternative-대안사회(代案社會)라 할 수 없습니다. 전혀 타협이 없습니다. 둘 중의 어느 하나일 뿐입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힘을 논하고 권세를, Power를 논한다면 이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철저하게 아니었으니까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이 사회는 탁월한 사회입니다. Excellence가 있습니다.

교회만이 가지는 독특한 세계입니다.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앙 없는 사람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죽으셨는지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죽는다는 말인가 하고 십자가를 지신 그런 순간에도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하며 희롱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 때에 예수님께서 과연 십자가에서 껑충 뛰어내려오셨다고 합시다. 그랬다면 그들이 믿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다만 저들을 용서하시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죽으심이 승리인지 실패인지 저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택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탁월한 사건입니다. Eschatological event입니다. 눈앞에서는 분명히 없어지는 것 같고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힘이 거기에 있어요.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이라는 것을 일으켜서 교회를 전부 불지르고 창고를 만들고 문닫아버리고 할 때에, 중국에서만 하더라도 1950년에 교회를 문닫아버릴 때에 이젠 끝나는가 했습니다. 그 때에 기독교인은 3백만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982년의 통계를 보니 오히려 8천만 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그 같은 핍박 속에서 어떻게 전도가 됐기에 이토록 도리어 늘어났다는 말입니까?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중국에 가보면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요. 본당에만이 아니라 마당에까지 가득 차요. 그렇다고 마당에다 스피커 장치를 해놓는 것도 아닙니다. 텔레비전도 없어요. 그냥 앉았다가들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사라지는 것 같고 죽어 없어지는 것 같았으나 가장 위대한 힘에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뚜렷한 의식, 특별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느끼는 것도 세상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남들 슬퍼하는 대로 같이 슬퍼하고 남들 기뻐하는 대로 같이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기뻐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깨달음도 별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잃어버렸다고 슬퍼하는데 기독교인은 잘했다고 기뻐합니다. 다른 사람은 건강을 잃어버렸다고 괴로워하는데 믿는 사람들은 믿음을 얻었다고 즐거워합니다. 어떤 교인이 억울하게 감옥에 두 달 갔다가 온 일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하고 인사했더니 "고생이라니요. 모처럼 성경 한번 기차게 봤습니다. 명색 집사라는 제가 사실은 성경 한번 통독해보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이번 기회에 자나깨나 성경만 보았으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습니까?"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식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의지도 다릅니다. 기쁨의 기준도 다르고 성공의 기준도 다르고 성취감도 다르고 영광도 다릅니다. 세상사람들은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부끄러움입니다. 부끄러운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가지는 영광은 다른 것입니다. 특별한 것입니다. 탁월한 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도 다 세상 안에 삽니다. 살기는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71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우리의 관심사가 다릅니다. 세상은 대접받으려고 애씁니다. 전부가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칭찬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관심이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섬기려 할뿐입니다. 섬길 대상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윗자리 바라지 않습니다. 아랫자리가 좋습니다. 편한 곳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힘든 곳을 찾아갑니다. 좁은 길 넓은 길이 있으면 좁은 길로 갑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어디에 하나님의 뜻이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이미 충분히 가르쳐주셨습니다. 힘든 일이 있거든 그것을 택하십시오. 나를 요구하거든 주기에 아까워하지 마십시오. 무슨 대단한 큰일이나 하겠다고 이건 싫다, 거기로 가겠다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묵묵히 순종해갈 뿐입니다. 크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작고자 합니다.

이름을 내려 하지 않고 숨기려 합니다. 거기서부터 자유인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훌륭한 것은 한평생을 바칠 수 있는 사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괴테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추상적인 목적이 아니라 구체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후회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위해서라면 일생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일입니다.

그런 직업, 그런 일을 오늘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래선 안되지' 하면서도 임시로 한다든가, 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고 있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온 생을 걸 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보답을 바라지 말 것입니다. 다소라도 보답을 바라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일하기 전에 돌아올 보답부터 계산합니다. 이만큼 수고할 것이니 얼마 주겠느냐 -이런 생각이지요. 마음을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헤아리는 마음이 앞섭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전혀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일 행복하다고 시인 괴테도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내가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중요한 신학적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종은 물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사회학적 현상도 아닙니다. 종은 분명히 그 영혼의 상태가 종이어서 종입니다. 스스로 종된 자는 이미 종이 아닙니다. 내가 있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메여 있을 패에 종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고 싶어 있으면 종이 아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종이지만 나는 자유인입니다. 내가 선택했으니까요. 내가 어떤 팔자에 어떤 고생을 하고 있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순간, 나는 이미 자유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굉장한 자리에 있다 해도 말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자리라면 정말로 괴로운 시간입니다. 원치 않는 곳에 억지로 매여 있으면 바로 그 시간은 종입니다. 총장 의자도 종이요, 회장 의자도 종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라도 노예상태라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가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건강을 주셨고 직장을 주셨구나, 감사합니다 하고 출근을 한다면 자유인이지만, 아이구 졸려 죽겠구나, 힘들어 죽겠구나. 나 혼자라면 당장 집어치울 텐데 처자식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할 수 있나 - 이래가면서 억지로 억지로 일어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짐승처럼 끌려간다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사람이 노예입니다.

노예 의식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노예와 노예성은 별개입니다. 노예성에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공부만 해도 그렇습니다. 공부가 재미있다 생각되어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합니다. 깨달을 때마다 무릎을 탁탁 치면서 '그렇지, 그렇지'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러나 공부가 싫어서 내 어쩌다 이 신세가 됐누,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 고생인고, 하면서 억지로 끌려간다면 그건 공부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인데 몸은 약한데다 공부는 잘 안되고 날마다 스트레스가 쌓이니까 만날 때마다 푸념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우린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이런 고생을 하지요? 아마도 큰 죄를 지었나보외다"합니다. 이런 억지 공부를 한 터이니 그게 소용 있을 턱이 없습니다. 수십 년을 가만히 두고 봤더니 그 사람, 과연 시원치 않더군요. 그런 마음으로 살았으니 무엇이 되겠어요?

여러분, 노예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결혼생활을 하든 어느 처지에 있든 있는 그 자리를 오늘 내가 선택하세요. 오늘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그러면 자유인일 것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렇게 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스스로 노예입니다. 영원히 풀려나지 못하는 노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이다.

동시에 만인의 종이다.' 이제 섬기려 합니다. 섬기는 것을 내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섬기는 것을 내 목적으로 삼습니다. 받으려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섬기려는 마음으로만 내 마음이 정해졌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자유인입니다. 내가 스스로 높이려 하고 크려고 한다면 나는 무한히 헤어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 순간에 나는 작아지는 심판을 받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원문대로 자세히 살펴보면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높아지기 위해서 낮아짐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낮아져야 될 것이다 -심판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기어이 가장 낮은 사람이 될 것이다. 섬김을 받으려고 바득바득 애쓰는 사람은 두고보아라, 반드시 남 섬기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하는 심판입니다. 우리 신변에서 오늘도 많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보십시오. 정말 평생토록 남을 섬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예근성에서 살아요. 왜요? 섬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려는 사람은 자유인일 뿐더러 자연히 높은 위치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섬긴다'의 헬라어 원어는 일에 관련된 말입니다. 일에 매인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을 사랑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노예라는 것은 주인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가 늘 쓰는 말 가운데 아주 재미있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지도자로서 성공한 사람, 그리고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일반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비 이기심이요, 하나는 남을 도우려는 정열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다소라도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 이기심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기심에 매여 있는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대속물로 준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대신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섬김 받으려는 생각은 없어요.

추호도 없어요. 대속물로 주어버리니까요.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 나는 그 마음으로 왔고 그 마음으로 산다 하심입니다.

아마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얼굴이 뜨거웠을 것입니다. 나는 나를 대속물로 주고자 왔는데 너희는 섬김을 받으려고 이렇게들 서로 경쟁을 하고 있는 거냐 --한심한 사람들이지요. 이제 다시 한번 행복의 원리를 찾아보십시다. 마음을 돌릴 것입니다. 대접받으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대접하려는 마음으로, 섬김 받으려는 마음을 지워버리고 섬기는 마음으로 돌려볼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바람이 없이 말입니다. 그럴 때에야 여러분은 비로소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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