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종의 멍을 메지 말라(5장 1~12절)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종의 멍을 메지 말라(5112)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오늘의 본문 말씀 가운데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라는 요절이 있습니다. 이 요절을 제목으로 하여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 강해가 5장에 이르렀습니다마는 바울의 모든 서신들은 대체로 그렇듯이 전반부에서는 교리, 후반부에서는 윤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논리의 구조는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걱정을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하는 문제는 '왜 사느냐?'하는 문제로부터 풀어나가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오늘은 어떻게 할까-이러한 걱정은 아무리 많이 해도 해답이 없거니와 끝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의 풀이는 바로 왜 사느냐 하는 것을 묻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생활하는 가운데에 속상하고 어려운 일이 있거든 다시 물으십시오. "나는 왜 사는가?" 결혼생활을 하는 데에 이러저러한 복잡한 문제가 있거든 나는 왜 결혼을 했는가, 물으십시오. 왜 사느냐 하고 묻는 데서부터 해답을 얻습니다. 그래서 ''의 문제는 '어떻게'의 문제에 해답을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깊이 생각할 문제는 이것입니다. '무엇을 믿느냐?'-이 문제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 하는 문제에 해답을 줍니다.

다시말해서 믿음의 대상, 믿음의 내용이 우선적인 문제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믿고 삽니까 하는 문제를 숙고 해보면 자연히 어떻게 행할 것이냐 하는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저절로 얻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그의 서신에서 이 교리 부분을 길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는 바 그 내용을 먼저 설명하고 그 믿는 바대로 사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전반부는 교리, 후반부는 윤리-이렇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교리가 먼저요 그 다음에 교리에 기초한 윤리가 뒤따라갑니다. 언제든지 교리적 훈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교리적 훈련, 즉 신앙적 훈련이 없는 윤리는 마치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수없이 사랑을 외치지만 사랑할 능력이 없습니다. 수없이 사랑을 긍정하고 옳다고 수긍하면서도 사랑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 사랑은 무산되고 맙니다.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교리가 먼저 있어야 하고, 그것이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믿느냐 하는 문제의 해답을 찾아야 그 다음에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1장에서 11장까지가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장부터 16장까지에는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인 교훈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이런 구조의 형식이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1장부터 4장까지는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매우 논리적으로 변증적으로 신학적으로 성서적으로 설명해왔습니다. 이제 5장부터는 그 설명을 한 단계 뛰어넘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윤리 문제의 총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자유입니다. 아무 데도 매이면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데도 매일 수 없습니다. 우리 장로교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교리의 기초도 자유입니다. 신앙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기초로 하고 근본으로 하여 장로교 교리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유-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엄청난 자유를 우리가 향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총론이자 근본개념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절대로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에 매여서 벌벌 떨어서도 안됩니다. 어떠한 규례에 매일 것도 없습니다. 완전한 자유, 진정한 자유를 누려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를 믿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은혜 안에 살면 자유롭습니다. 아무 데도 매일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된 윤리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두려움에 매이고 근심에 매이고 어떤 규례에 매이는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여태 무엇을 믿었나, 내가 믿는 바가 무엇인가, 내가 바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을 수시로 진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인입니다. 그래서 그 별명이 자유인입니다. 온전한 자유인은 신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의 기초는 자유입니다. 참자유를 가리킵니다. 양심과 신앙과 종교의 자유, 이것이 모든 자유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논할 때에 무엇보다도 우선 경제적인 자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너무 가난하고 찌들면 결국은 남의 집에 가서 식량을 구걸해야 합니다. 내 양심의 자유를 바쳐야 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가난하면 자유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또한 무식한 자도 자유인이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답답합니까? 외국인과 만났을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영어 공부라고 좀 하기는 했지만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고 영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부자유인 것입니다. 술술 터져 나오지 않으니 부자유가 아닙니까? 무식함은 자유가 아닙니다. 뜻하는 바의 말을 못하고 뜻하는 바의 일도 못하기에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밖에도 정치적인 자유, 사회적인 자유, 인권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것들 역시 중요합니다. 또 문화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문화의 침해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침략자들은 언제나 그 나라의 문화부터 침략해 들어갑니다. 언어를 빼앗고 풍속을 없앱니다. 문화적인 자유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경제, 정치, 문화의 자유-이 모든 자유의 근본은 양심의 자유입니다. 양심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에 뿌리를 둡니다. 종교적 자유가 모든 자유의 근본이 됩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독재자들마다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공약을 합니다. '나만 잘 따른다면 당신들에게 자유를 주겠다.' 이렇게 장담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유가 주어졌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볼셰비키혁명을 일으켰던 러시아 공산당은 노동자, 농민의 나라를 만들고 자유를 준다는 기치를 내세웠었습니다. 이러한 공산혁명으로 만들어진 공산주의 국가들이 오늘날 어떻습니까? 하나같이 비참할 정도로 가난합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입니다. 이루 말할 수없이 가난합니다. 중공의 농촌 지역이나 소련을 돌아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625 전의 우리나라와 같습니다." 나누어 먹을 생각은 열심히 했는데 건설할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전부가 통째로 가난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경제형편은 그렇다치더라도 공산사회에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공산 치하가 얼마나 부자유한지 우리가 익히 압니다. 정치적인 속박이 심합니다. 지주나 인텔리겐차는 다 때려부수었지만 공산당이라는 또다른 계층이 생겨나서 다시 지배를 합니다. 더 무서운 속박에 들어갔습니다. 이렇듯 모든 독재자들이 '자유를 준다'하였지만 정작 아무도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자유를 준다고 기만하고는 더욱 무거운 짐만 지워놓았습니다. 더 강한 속박으로 얽어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보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오직 복음에 있고 신앙에 있고 신학적 자유에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독교 윤리의 기초를 자유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훌륭하다고 하겠습니다.

자유를 지키고 누리려면 먼저 이 자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비로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값을 알아야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자유가 그 무엇보다 가장 귀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자유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고귀한 자유를 내던지고 엉뚱하게 물질이나 지위 따위를 얻어 그만 노예가 되고 맙니다. 깨닫고 보면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소중한 자유의 의미를 가르쳐줍니다. 먼저, 주어진 자유(given freedom)입니다. 우리가 빼앗은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자유입니다. 자유를 쟁취하겠다고 기를 쓰지만 싸워서 자유를 얻은 자가 없고 그렇게 얻은 자유를 지키는 자도 없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아니하는 한 자유를 누릴 사람이 없습니다. 가질 사람도 지킬 사람도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여야만 자유로서 내가 지킬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다. 내가 의도적으로 빼앗아놓았습니다. 그것이 내것이 됩니까? 빼앗긴 사람이 저 앞에 있는데 내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 외에는 참 자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1)"-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입니다. 종의 신분으로부터 자녀가 되게 하여 자유의 신분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했다-여기서 우리는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거저 주어진 자유이기에 소중합니다. 내가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내가 얻은 것보다 귀중하고 값집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특별히 피의 값을 치르고 우리로 하여금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를 속량하여 자유케 하셨습니다. 엄청난 자유입니다.

속량의 근본 의미는 이렇습니다. 이를테면 한 노예가 잘못을 저질러 주인으로부터 매를 맞고 있다 합시다. 마침 지나가던 행인이 이 노예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람을 왜 그토록 때립니까?" "이놈이 잘못했으니까 때리지요. 당신은 상관할 것 없어요. 내 종이니 죽이든 살리든 내 맘이오." 성난 주인은 매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 노예 때리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고 제게 파십시오." "그럽시다. 보기 싫은 까짓 노예 얼른 사가시오." 마음좋은 행인이 노예를 딱히 보아 돈을 치르고 삽니다. 그리고 노예의 표지인 쇠사슬을 풀어줍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자유요.” 이것이 완전한 자유입니다.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속량이라고 합니다. 어톤먼트(atonement)-돈을 주고 정당한 값을 치러 얻은 자유입니다. 그런고로 이제 완전한 자유인입니다. 누구도 붙들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자유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 자유는 틀림없는 자유입니다. 내가 얻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이라는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내게 주어진 극히 고귀한 자유입니다. 생명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이 고귀한 가치를 먼저 알아야 되겠습니다.

둘째, 거저 주어진 자유이기에 내가 이 자유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아시는대로 공짜로 얻은 것은 귀하기는 하나 내가 지켜내지를 못합니다.

지키기가 힘듭니다. 내게 지키는 실력이 없습니다. 내게 지키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 자유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면 한참 걸립니다. 오랜 시간 수련을 하고 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서독의 관계를 우리 남북한의 관계에 자주 비교합니다. 저들은 서로 왕래하고 교류가 빈번했지만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할까, 똑같이 두 나라로 갈라져 있던 것은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왜 합치지 못할까-안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들은 본래 하나의 나라로 전쟁을 하다가 연합군의 승리에 따라 타의로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자유를 저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연합군의 힘으로 자유를 얻었습니다. 공짜로 얻은 자유이기에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때문에 이 자유를 지키기가 힘듭니다. 저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815 해방 후 한두 달 동안 사람들이 제멋대로 먹고 놀기만 하였습니다. 초등학교를 때려부수면서 '자유다, 자유다' 떠들어댔습니다. 닥치는대로 때려부수고 짓밟는 것이 자유인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자유가 무엇인지를 정말

 

그러니 어떻게 자유가 지켜지겠습니까? 그 혼란의 와중에 어물쩡거리다가 625가 터진 것입니다. 거저 얻은 자유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얼마나 힘있는 교훈인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불하신 십자가의 값을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그 소중한 가치를 거듭거듭 깨달아야 비로소 자유를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이제 자유인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익히고 훈련해야 됩니다. 자유로부터 얻어진 이 신분, 이 존재로서 행동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먼저 "굳세게 서서"라고 말씀합니다. "굳세게 서서"-'스테케테'입니다. 차렷자세로 굳세게 서라는 말입니다. 군대 용어입니다. 'Stand fast'입니다. 밝은 의식으로 서 있어라, 눈을 똑바로 뜨고 서 있어라, 마음의 자세를 분명히 하라-준비태세요 행동자세입니다. 이렇게 서서 자유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느슨하면 또 자유를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엉뚱한 것에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자유인이라 하면 세 가지 차원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그 내용이 전부 나타납니다.

첫째, 과거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종이었던 과거로 자꾸 생각이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신분은 자유이나 그의 의식은 아직 부자유합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런 슬픈 일을 가끔 보게 됩니다. 고아원에서 자라난 아이가 어쩌다가 귀한 가정에 양자가 되어 들어갑니다. 그 가정에서 양자로 삼았으므로 이제 그는 그 집의 당당한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머리 속에는 고아원 생각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곳 아이들과 놀던 버릇이 그냥 남아 있습니다.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요즘은 보기 드문 일입니다마는 625동란 때에는 고아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한 고아원에서 몇 달 지내면서 보았던 모습입니다. 실로 측은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식사기도를 하는데 모든 아이들이 밥그릇을 두 손으로 꼭 붙든 채 기도합니다. 밥그릇을 놓아두고 기도했다가는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고아원에 있던 한 아이가 어느 가정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해봅시다. 분명 식사기도를 할 때에 밥그릇을 붙들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 버릇을 버리려면 얼마나 세월이 걸리겠습니까? 한참 걸려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과거에 매인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목적이 하나님께로 왔고 뜻도 하나님께로 왔고 신분도 하나님의 자녀가 분명합니다마는 소위 문화적 의식은 여전히 믿기 전의 사람, 믿기 전의 그 풍습에 매여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결혼식을 할 때 날을 잡습니다. 저보고 아무 날 결혼 주례를 해달라고 하더니 다시 와서 그날은 안되겠다고 합니다. "가서 더 의논을 해보고 다시 날을 정하겠습니다." 의논하기는 무엇을 의논합니까? 그날이 안되면 다음날 하면 되지요. 도대체 이것을 고치지 못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지난날의 풍습에 아직도 매여 있어서입니다. 그럴 때 보면 신앙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턱하니 와서 "아무 날이든지 괜찮아요, 그냥 합시다"하는 사람은 진짜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안되고 요날은 됩니다"하면서 날짜를 문제삼는 사람은 수상한 사람입니다. 물어보나마나 입니다. 왜 이래야 됩니까? 그래서 제가 가끔 물어봅니다. "왜 그렇게 거기에 매여 있습니까?" 대답이 참 재미있습니다. "좋은 날이 좋은 날 아니겠습니까?" 기왕이면 예수님께도 좋고 귀신에게도 좋고 마귀에게도 좋고 하나님께도 좋은 날이 좋지 않겠느냐 -그런 말씀이겠지요. 도대체 이런 의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과거에, 옛 풍습과 낡은 고정관념에 매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신분은 새사람이지만 새사람으로서의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자유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고 또 할례를 받는다면 그건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니냐고 하는 말씀입니다. 할례, 어디까지나 옛 풍습입니다. 그런고로 다시 할례 받는 것은 옛 종교 문화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의식 자체가 굉장하고 어떻고의 문제가 아니라 옛 종교 문화의 유산이기에 불가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인답지 못하다, 자유를 지킬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둘째, 자유인은 온전한 자유를 누려야 하기 때문에 형식주의나 의식주의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내실적으로 사고하고 자유를 찾는 사람이기에 형식주의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규례를 만들기도 합니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나겠다' '하루에 성경을 몇 장 읽겠다' '먼저 무슨 일부터 하겠다'-이런 식으로 규례를 만들어 지키려 합니다.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매여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신령과 진리로, 영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형식적 물리적 의식적인 것에 매이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인은 의식(儀式)에 매이지 말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자유의 온전함 때문에 부분적인 타협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분적인 타협을 배제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완전하기 때문에 달리 보충할 것이 없습니다. 유대인에게서 문화적으로 형식적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다른 것과도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옛생활과 타협한다든가 어느 부분은 옛것대로 남긴다고 하는 여유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마치 결혼식을 치른 다음부터는 신랑 신부가 온전히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식을 해놓고 또다시 옛 애인을 만나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한 사람이 아내(남편) 아닌 옛 애인을 생각한다면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이 무엇입니까? 한 여자를 사랑해서 온전히 자유하고 한 남자를 사랑해서 온전히 자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전히 자유하지 못하고 조금 보충해야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결혼한 의의가 없어집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과거로부터 자유하고 외식주의로부터 자유하고 타협으로부터 자유 할 때에만 온전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됩니다.

본문을 좀더 읽어나가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적극적으로 자유를 지킬 수 있는지, 그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논술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질 때에 자유를 지킬 수 있는데, 이는 적극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자유를 잃을까봐 벌벌 떨 것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를 지킬 수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 : 17)"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의역해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마음이라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뜻이 내 안에 있게 됩니다. 이래야 자유인입니다.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엄청난 자유를 나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는 귀한 말씀입니다. 또 로마서 82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여 온전한 자유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어떤 역사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먼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약속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소망은 궁극적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에 나타나 있는 바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리는 종말론적인 소망과도 같습니다.

단적으로 주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께서 오실, 그 약속의 날을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 어떤 것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물질에 매이고 명예에 매이고 세상에 매이기 쉽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장면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까짓 것에 매일 것 없습니다. 그까짓 세상의 부귀영화 때문에 울고불고 안달할 것 없습니다. 남보다 좀더 잘살고 남보다 좀 못살면 어떻습니까? 거기서 거기입니다. 대수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우리가 소망을 품고 그 소망이 늘 새롭게 피어날 때에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이어 6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참사랑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를 다 초월하게 됩니다. 할례 받아도 그만이요 안 받아도 그만입니다. 유대사람들에게는 할례가 그들의 종교 문화이므로 받고자 하면 받고 안 받고자 하면 안 받는 대로 좋습니다.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하지 못할 때에 까다롭게 따지는 점이 많은 것입니다. 내 마음이 너그럽고 자유로워지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여유가 생깁니다마는 내 마음이 답답하면 만사에 짜증이 나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들이 종종 제게 와서 인사를 합니다. "목사님, 저희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용돈은 많이 받았나?" 웃으면서 한마디합니다. "조금 받았습니다." "글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다마는 적어도 신혼여행 기간만은 인심 좀 후하게 써라. 택시를 탔을 때 미터기에 요금이 2천 원 나오거든 3천 원은 주도록 해라. 다른 날은 깎더라도 이날만은 깎자는 소리 하지 말아라. 일생에 단 한번인 이 기간은 넉넉하게 베풀며 지내야 된다." 이렇게 당부합니다. 내 마음이 기쁜 날에 다른 사람의 마음도 기쁘게 해주는 것,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너그럽게 삽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잔치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넓은 사랑을 받고 살기 때문에, 너무나 큰사랑에 감격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사랑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을 느낄 때, 사랑할 때에 그는 언제든지 매이는 것이 없습니다. 허물을 덮어줄 수 있고 어려운 문제도 인내할 수 있습니다.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사랑이 식으면 잡음이 많아집니다. 비판도 많고 까다로운 것도 많고 복잡한 것도 많아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 사랑 안에 깊이 들어가면 할례 무할례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방사람이면 어떻고 유대사람이면 어떠냐, 백인이다 흑인이다가 무슨 문제냐,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떠냐-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또한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합니다. 믿음, 성령으로 역사하고 사랑으로 역사 하는 그 믿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 없고 성경 말씀이 믿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부부 사이나 친구 관계에서도 한번 완전히 믿고 나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믿지 못할 때에는 골치가 아픕니다. 가령 남편이 늦게 귀가한다고 해봅시다. 남편을 전적으로 믿는 아내는 늦으면 늦을수록 사랑의 수은주가 올라갑니다. 이 사람이 오다가 차 사고가 난 것이 아닐까? 누구라도 만난 것일까? 무슨 일이 생겼나? 심히 걱정을 합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초인종이 울리고 남편이 들어오면 낯빛이 환해집니다. 반면 믿지 못하는 아내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어디로 샜을까? 누구를 만나 무슨 수작을 하고 있을까?" 오만가지 추측을 다 합니다. 원래 몽상가는 사실보다 꿈을 더 확실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쪽을 더 신임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육감이라는 것까지 합세하게 되면 대문에서부터 덤벼들게 됩니다. 얼마나 부자유합니까? 믿음 안에 참자유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봅시다. 믿으면 되는데 믿을 수가 없습니다. 믿어서는 안 되는 사회가 되고 만 것만 같습니다. 서로가 부자유합니다. 서로가 마음이 상합니다. 이 신의를 회복하는 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오랜 시일이 걸려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불신하는 사회에 자유가 있겠습니까? 경제적인 자유가 있는 것 같아도 없습니다. 정치적인 자유 역시 없습니다. 문화적인 자유도 없습니다. 양심의 자유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피해자일 뿐입니다. 가해자는 한 명도 없고 모두들 자기가 피해자라고 떠듭니다. 시사적인 것을 한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노동자들은 마음에 안 드는 일만 있으면 파업을 합니다. 노동자들의 데모가 파업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고용주들도 데모를 합디다. 고용주들의 데모는 폐업입니다.

양쪽에서 동시에 데모를 합니다. 어느 쪽 데모가 더 셀지는 두고봐야 알 일입니다마는 아무튼 파업과 폐업이 정면으로 만났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문제들이 어디에 기인한 것입니까? 불신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자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를 영영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영원히 빼앗기는 것은 아닌지 자못 염려가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안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또 그 자유를 지키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 합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입니다. 이 소중한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꾸준히 나아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