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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높이는 자(누가복음 14장 7절~11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上座절)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末席)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 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이 잠언은 기독교 윤리의 근본입니다. 아마도, 기독교인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이를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자기를 낮추며 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리요 실제적인 교훈입니다.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십시다.
하루는 바리새인의 한 두령이 예수님을 초빙하였습니다. 왜 초빙했는지 문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고 성경에는 다만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문면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그 바리새인이 청해서 예수님을 모셔들인 것이요, 그렇게 한 데는 속셈이 따로 있어서였습니다. 그가 이를테면 예수님을 사랑해서라거나, 존경해서라든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해서라든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거나 협조하기 위해서라든가 하는 좋은 뜻에서 모셔들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청한 목적은 한마디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데에 있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자기를 높이고자 취하는 수법은 가지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자랑을 하고 다닙니다. 그보다 좀더 영악한 사람은 어떤 선행을 통하여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내가 이런 일 했다'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선전을 한다든지, 사람들이 보는 데서 부러 공개적으로 선행을 해보이기도 합니다. 선행이 이렇듯 자기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질 때, 선행은 그 자체가 악(惡)이 됩니다.
마을에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뭇 사람에게서 우러름을 받으시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릅니다. 병자도 고쳐주십니다. 말씀도 해주십니다. 많은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런 분이 마을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을에서는 누군가가 그분을 대접해야 한다고 해서 바리새인 두령이 '그야 당연히 내가 해야지'하고 생각합니다. 이 마을에서야 나만한 유지(有志)가 어디 있나, 나만큼 선한 일 많이 한 사람이 어디 있나--자기가 이 마을에서 가장 높임을 받는 존재라고 자처하고 나서서 예수님을 모시게 됩니다. 그는 첫째, 당연하다는 듯이 예수님을 대접합니다. '이 마을에 오는 귀한 손님은 내가 대접한다. 나는 아는 손님만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손님도 대접한다'하고 어깨를 으쓱합니다. 그렇게 자기를 높입니다. 둘째, 그는 많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는 사람을 대접하는 셈입니다.
여느 사람으로서는 감히 일대일로 만나 인사조차 하지 못하는 그분을 나는 일대일로 만나 인사하고, 더욱이 내 집에 영접하지 않느냐, 나를 보아라, 나야말로 얼마나 대단한 존재냐 --- 이렇게 헛기침을 하면서 예수님을 모셔들였습니다. 바리새인 두령이 한 일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신분을 과시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선행을 많은 사람 앞에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회가 쉬운가, 호기(好機)로다'하고 득의(得意)의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자고로 이스라엘사람들이 중시하는 덕목으로 여섯 가지가 있는데, 그 세째 덕목이 '손님 대접'입니다. 그러니 그 바리새인 두령은 스스로 '나는 이렇게 손님을 대접하니 덕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나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사람이로다'하고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며, 동기가 그렇고, 그런 동기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니 그 자리에 초대받은 사람이 예수님 만이었겠습니까? 자기를 '존경할' 많은 사람을 함께 초청합니다. '나는 이렇듯 대단한 존재요 이렇듯 좋은 일을 하고 있소'하고 이보란 듯이 동네의 한다하는 사람들, 바리새인들, 자기를 닮은 사람들을 떠들썩하게 초대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잔치는 시작되고 사람들은 저마다 한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초대받은 무리들 역시 호스트인 그 주인을 닮은 것들이라 저마다 윗자리를 찾습니다. 요새는 그리 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마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가보면 우리네 동양사람들은 언제나 이 '자리다툼'이 문제였습니다. 둥그런 상에 둘러앉는 것인데도 '여기가 윗자리' '여기가 윗목' '여기가 아랫목'하고 유달리 자리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에게도 남달리 그런 성향이 있어서 윗자리 아랫자리를 몹시도 챙깁니다. 좀더 위에, 좀더 높은 데에 앉고자 합니다. '아, 여기가 윗자리구나'하고 턱 모양잡고 앉아 있다가 주인이 와서 "높은 손님이 오셨으니 좀 내려앉으세요"해서 망신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입니다. 윗자리에 앉았다가 내려앉기도 하고 내려앉았다가 윗자리로 올라앉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들의 그러한 추태를 보셨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의 이 집에서는 예수님이 주빈이시므로 소위 제일의 상좌에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앉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으로 보아서는 예수님을 그런 자리에 앉혀드린 것 같지 않아요. 아무튼 그렇게들 알게 모르게 '자리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는 누구, 그 다음 자리에는 누구, 또 그 아래의 자리에는 누구…… 하고 왔다갔다 하다보니 저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위계질서'에 꽤나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영 기분 나쁜 잔치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네가 누구에게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하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차라리 낮은 자리에 앉아라, 내 생각에는 이쯤 앉아도 되겠다 싶더라도 그보다 더 낮추어 앉아라, 그렇게 낮추어 앉고 보면 주인이 와서 "아이고, 왜 여기에 앉아 계십니까? 저리로 올라가 앉으십시오" 할 것이니 그 때에야 좌중(座中)의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영광스러워질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잘못 생각해서 스스로 윗자리를 찾아 떡 버티고 앉았다가 행여 주인이 와서 "미안하지만 좀 내려앉으십시오" 하게 되면 그런 망신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므로 윗자리에 앉지 말 것이다 --- 이렇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겸손'을 가르치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닐 덕목의 으뜸이 겸손입니다. 칼뱅의 「기독교강요」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가 스승을 보고 질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으로 으뜸가는 덕목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자의 이 질문에 간단히 대답합니다. "겸손이니라."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가는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다." "세째 가는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 또한 겸손이니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윤리기준은 겸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오신 것부터가 '겸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된 자, 마땅히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처세(處世)의 수단이나 방편으로 '겸손'의 티를 보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본성'인 것입니다. 반대급부나 보상을 기대하는 겸손은 연극일 뿐입니다. 참 겸손은 본성이어야 합니다. 겸손은 신앙인의 자기인식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존재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은 겸손입니다. 신앙인의 눈으로 이웃을 대할 때, 모든 사람이 나보다 낫습니다. 낫게만 보입니다. 낫게 느껴집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나 자신을 볼 때에는 도덕적 기준으로 보나 의지로 보나 신앙행위로 보나, 아무리 보아도 어디 이렇다하게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존 뉴턴의 찬송대로, 나는 아무런 할말이 없습니다.
일부러 또는 짐짓 겸손하려고 하느라면 기회주의자가 됩니다. 무엇 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할만한 일을 맡기려들면 "나는 모릅니다.
내가 뭘 압니까?"하고 반응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사람, 기회주의자입니다. 속으로는 은근히 자만하면서 겉으로는 짐짓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보고 "아, 그래요?" 그러신 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뭘 아는 사람'을 달리 찾아 이 일을 맡겨야겠군요"하고 돌아선다고 하면 이 사람의 내심이 어떻게 돌아갈 것 같습니까? 짐짓 겸손한 것, 악덕입니다. 인위적 겸손은 겸손이 아닌 것입니다.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 스스로 겸손하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겸손한 자는 말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심으로도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이다."그렇습니다. '나는 교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교만함을 꾸짖습니다. 내 속에서 때마다 불식간에 꿈틀거리는 교만 기를 탓하고 매질합니다.
겸손하면 높아진다고 하니, 그렇다면 높아지기 위하여 겸손해야 되겠다 하여 겸손한 자라면 보상심리의 노예요 위선자입니다. 높아지고 싶어서 겸손한 체하는 것이지 본성에서 자연히 우러난 겸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음, 내가 짐짓 낮아지면 주인이 와서 높여주겠구나' 싶어서 일부러 낮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고 하면, 이는 삼겹의 교만입니다. 모름지기 품성(稟性)으로서 겸손해야 합니다. 체질화한 겸손이 겸손입니다. 이는 신앙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회개하는 심령이어야만 가능한 겸손입니다. 중생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입니다. 중생과 회개에서, 자기 진실과 성실에서, 성품으로 자연히 우러나는 겸손 --- 이것이 겸손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예수님께서 주시는 잠언말씀입니다. 스스로 높인다-내가 나를 높이는 것입니다. 진실한 자기평가가 아니라 내가 나를 제값보다도 높게 평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눈꼽만큼만 높게 평가해도 탈이 됩니다. 내가 나를 제값 이하로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주변에서 어떤 비난을 받아도 불평이 없습니다. 남이 평가해주는 '나'보다도 내가 평가하는 '나'가 더 낮고 보니 문제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보고 무식하다고 면박합니다. 이런 때에 "뭐라고!" 하면서 시비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무식한 사람이라오"하고 나오는 사람이라면 무슨 불평이 있겠습니까? 나는 스스로 유식하다고 생각하는데 남은 나를 보고 무식하다 한다면 화가 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로되, 요컨대는 자기평가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레이나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볼일이 있어서 이 제자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레이나." 스승이 부르는데도 레이나는 대답이 없습니다. 옆방에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해서 거듭해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슬며시 부아가 났습니다. "이 녀석이……" 그는 옆방 문을 화닥닥 신경질적으로 열어 젖혔습니다. 순간 아우구스티누스는 아차 하고 뉘우쳤습니다. 레이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히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보니 스승의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제자에게 간청했습니다. "너의 발로 내 목을 밟고 서서 '교만한 아우구스티누스야, 교만한 아우구스티누스야, 교만한 아우구스티누스야'-이렇게 세 번 소리쳐다오." 그는 이렇게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였지만 그의 내부에서 이렇게 무심결에 고개를 쳐드는 교만이 있었음을 깨닫고 그는 가슴을 쳤습니다. '아, 나는 교만한 자다! 내가 이렇듯 교만하구나. 제자가 대답을 곧바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욱하고 문을 열어 젖히다니……' 그래서 '내 목을 밟고 교만한 아우구스티누스'를 꾸짖어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사람이란 '나는 교만하다'라고 자기평가를 내릴 때에 겸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가 문제입니다. 상대적 평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자기 혼자서는 곧잘 '나는 죄인이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가도 다른 사람이 교만하게 나오면 그에 대해서는 겸손하기가 어려워지고 맙니다. '잘난 척하네' --- 이렇게 마음이 돌아갑니다. 상대적 평가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즉 교만한 자 앞에서 겸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들 잘 났는데 나는 정말 못났구나' --- 이렇게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스스로 유능하다고 하고 의인이라고 할 때에 '나는 부족하오, 나는 무능하오, 나는 죄인이오'하고 인정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이를테면 어쩌다 저 사람과 다투는 일이 생겨 서로 마음이 상했다고 합시다. 이런 때에 아차 하고 홀연히 깨닫고서 '아이고 내가 사과를 해야지. 내가 잘못했어'하고 마음을 잡았다가도 막상 그 사람을 딱 대하고 보면 불식간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심사가 뒤틀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필경에는 내 성격마저 비뚤어지게 됩니다. 병리적 체질이 됩니다.
다시 한번 신앙적으로 자문해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로 회개를 하였습니까? 회개하고 나가다가는 누가 나에게 침을 뱉는다 하더라도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할 수 있어야 참 회개를 한 것이 됩니다. 회개했다 하고 나가다가 누가 나를 보고 비난을 퍼붓기라도 하면 그 당장에 혈기가 치솟아버립니다. 무슨 회개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일껏 자성(自省)하고 일껏 눈물로 내 잘못을, 내 죄를 회개했다가도 교만한 사람만 보면 '도루묵'이 되어 자기 페이스를 잃고 만단 말입니다.
본문의 잔치자리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일껏 마음을 겸손하게 가져 자기를 낮추고 낮은 자리에 앉았는데, 저만치 보아하니 나보다는 훨씬 낮은 신분의 '별 볼일 없는' 인간 하나가 윗자리에 턱 앉는 것이 보입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배알이 뒤틀려서 욱하고 일어나 그쪽으로 가서는 "저리 가. 여기는 내 자리야!" - 이렇게 처신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페이스를 잃는 것, 이것이 이른바 '망신살'인 것입니다. 겸손하다고 여겼던 자기가 타인 앞에서 간데 온데 없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남이야 스스로의 분수를 모르건, 알건 주제를 모르고 시건방을 떨건 말건, 나에게는 내 페이스가 그대로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신앙, 나의 진실, 나의 겸손은 어떠한 상대 앞에서도 나 스스로 지키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오래 전에 제가 직접 목도한 일입니다. 군에 있을 때입니다. 한번은 공중목욕탕에를 갔습니다. 아시다시피 목욕탕 안에서는 누구 할 것 없이 알몸이 아닙니까? 알몸들끼리 어쩌다 물통 하나 때문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처음에는 말로만 주거니받거니 시비를 하더니 필경은 이놈저놈 하고 고함에 삿대질에 공기가 아주 험해졌습니다. 욕탕의 절반 이상이 군인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싸우던 한쪽이 "너 나왓!"하고 상대방을 끌고 나갑니다. 다른 군인들도 발가벗은 몸 그대로 휴게실로 따라나갑니다. "너 나왓!"하고 앞서나가던 그 사람이 알몸에 먼저 군모부터 찾아 쓰는 것이었습니다. 모자에는 '상사' 계급장이 달려 있습니다. 한편. 그 상사에게 끌려나간 사람도 천천히 옷을 챙겨 입는데, 보니 이 사람은 '대위'가 아닙니까?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두고두고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라는 진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낮춘다는 것입니다. 남이 낮추어서 내가 낮아지는 것은 '심판'입니다. 내가 낮추어서 내가 낮아지는 것이 '겸손'입니다. 남이 나를 낮추면 '망신'이라고 합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나를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참 겸손인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그저 섬기는 위치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섬김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보다도 더 행복한 사람은 섬기면서도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으뜸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섬기는 위치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칭찬이건 물질이건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말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주님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결혼생활도 그렇습니다. '나는 이 집안을 섬기러 왔다.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시누이를 섬기러 왔다. 자식을 낳으면 자식을 섬기고, 손자가 생기면 손자를 섬기고…… 나는 이 집에 섬기러 온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한 사람은 그 생환에 no problem입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는 사랑 받으러 왔다, 여왕대접 받으러 시집왔다고 생각하기에 그 생활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섬기려 하는 자-스스로 낮추는 자입니다. 스스로 높일 때에 남을 낮추게 되지 않습니까? 상대적이니까요. 균형의 원리가 이루어지거든요. 내가 나를 높이는 순간에 남을 낮추게 됩니다. 이렇듯 남을 낮추어야 자기가 높아진다고 믿기에, 우리는 농담이건 진담이건 시간만 있으면 남을 헐뜯으려고 합니다. 남을 헐뜯고 흉보는 그 순간에 내가 올라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병자의 생각입니다. 건강한 사람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을 높여야 내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남을 낮추면서 내가 올라가겠다고 생각하는 것, 남을 두고 내가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지렛대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좀더 거창하게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변증법적 모순입니다. 여러분, 이제 그같이 잘못된 철학은 버리십시오. 그같이 모순된 변증법은 버리십시오. 그리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어떤 경우에든지 남을 높여야 나도 높아지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도 서로 헐뜯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앞에서 아내자랑 남편자랑 하는 것이 볼품없어 보일 것 같아서 그랬는지는 모르나 교인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보아도 그저 기회만 있으면 서로를 헐뜯습니다. 남편 헐뜯고 아내 허물 들추고 하는데,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기야 이 정도는 양반입디다. 자기 남편더러 '병신'이라고 욕하는 별사람도 있습디다. 도대체 이래서야 어떻게 함께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입버릇처럼 되어버린 나머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실수요 잘못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예 체질화해버렸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남을 낮추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낮추는 자는 남을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스로 낮추는 자만이 남을 높이는 것입니다. 남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낮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이요, 본문말씀이 주는 진리입니다.
다음으로, 오늘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스스로 자기를 낮출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신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높이는 자는 따로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높인다고 높아지나요? 오히려 떨어집니다.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일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높이는 자요, 주인만이 높여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있는 잔치자리 이야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상좌(上座)에 앉음으로 자기를 높일 때에 주인이 그에게 와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그렇습니다. 높고 낮음은 주인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나름의 평가기준으로, 그 집에 모인 손님들을 평해서 '당신은 여기 앉으시오. 당신은 저기 앉으시오'하며 :높고 낮음을 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상좌에 앉아 높아지게 한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망신만 당할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래서 주신 말씀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신앙적 겸손으로 낮춘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어떤 때에 스스로 좀 낮아지는 것 같이 생각되고 피해의식이 생기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만회하려고, 스스로 높이려고 변론을 하고 변명을 하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는 점점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그 인격이 말이 안되게 비참해집니다. 여러분, 머리가 땅에 닿도록 스스로를 아주 낮추어버립시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스스로 낮추고 기다립시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틀림없이 높여주십니다. 여러분의 생애를 가만히 돌이켜보십시오. 스스로 높이려고, 낮아지지 않으려고 애를 쓸 때에 오히려 비참해지고, 신앙 가운데서 잘 참고, 스스로 낮아질 때에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높여주시는 것을 신앙생활과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낮추라" 예수님께서 친히 주신 이 진리의 말씀을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는 이렇게 받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시지 아니하시고, 스스로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시어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힘주어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스스로 낮아지는 마음, 겸손한 마음, 섬기는 마음, 종이 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우리가 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높음에 대해서는 잊어버립시다. 높아지려는 생각을 하지 맙시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 낮은 데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낮은 데에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높일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남이 나를 낮춘다고 섭섭해하지도 마십시오. 스스로를 낮추어버리세요. 남이 나를 낮추는 것보다 더 낮추십시오. 이렇게 될 때에 모든 근심 걱정과 문제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봉사하고, 스스로를 낮출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절)" 명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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