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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2(마 6:9~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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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2(6:915)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앞장에서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공부했습니다.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 기도하는 대상에 대해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야 바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만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하고, 그 다음은 방향을 돌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나열하여 구한다면, 이것은 자기 욕망의 푸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기도란 시작해서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내가 누구 앞에 서 있으며 누구에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기도의 성장과 함께 점점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고, 성경적인 지식도 늘어나서 기도의 대상에 대한 이해가 보다 넓어지고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대해 부분적으로 알던 것을 좀더 넓고 깊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므로 기도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계속 깊어지고 온전해져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자기 모습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체면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워놓고 볼 때, 너무나 잘못한 것이 많아 감히 무엇이라고 기도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기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인생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기도했고, 성 안토니오는 "하나님은 누구시오며 나는 무엇입니까?"라는 한 가지 제목으로 무려 3년 동안이나 산 속에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기도할 때에, 먼저 기도의 대상을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바로 보면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의 간구 가운데 첫번째 간구로써,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의역해 보면 "당신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기게 되기를 소원합니다"라고 보다 쉽게 옮길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5에 보면,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항상 우리 마음에 주인이 되시어 우리 생활 전체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인이 거룩하니 그 전체가 거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당신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간구되어져야 합니다.

주기도문 가운데는 7가지 간구가 있는데 그 중 첫째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나님을 위한 기도임에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를 먼저 생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나를 닮은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나를 보아야, 하나님도 바로 보고 나도 바로 보는 것입니다.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기도할 때, 나의 형편과 처지에 대한 답답하고 다급한 이야기들을 먼저 쏟아놓기 시작하면 분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와서 나중에는 내가 누구한테 기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울다가 원망하다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나의 사정만 보여지니 이것이 기도입니까?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다급하고 답답한 사정이 있더라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는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첫째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제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는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에서 이름에 대한 문제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서는 이름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이름은 반드시 존재가 공존하는, 즉 임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도 심사숙고해서 짓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인물 중에 야곱이란 이름은 간사하다는 의미를 가진 좋지 못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평생 간사한 생을 살았습니다. 여기서 성명철학을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름은 신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을 자꾸 부름으로 그것이 기도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저주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풍습은 이상하게도 나쁜 이름을 지어야 수명이 길다고 해서 귀한 자식일수록 이상한 이름을 지어서 애칭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어딘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름은 정말 잘 지어서, 부를 때마다 기도요 축복으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나 많은 왕들의 이름들을 보면 모두가 그 사람의 운명을 대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 일생을 살고 난 뒤, 그 생의 결론으로 이름을 지은 것같이 그의 이름이 곧 그의 생애를 대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름이란 살아보기 이전에 먼저 지은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름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을 의미하고 그 존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거룩이라는 문제입니다. 거룩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관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거룩(hol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하기오스', 구분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특별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섞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옷을 만들 때도 경건한 사람들의 옷은 여러가지 색을 섞어서 짓는 것을 피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므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거룩이 특별히 잘 이해되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는 거의가 아버지의 수저와 밥그릇은 특별히 구별하여 좋은 것으로 장만해 놓고 그것은 아이들이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똑같은 한 솥에서 나온 밥일지라도 어른의 밥은 먼저 떠서 따로 구별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만 경건한 마음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올 때는 될 수 있는 한 옷도 구별해서 입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엌에서 입던 옷, 시장에도 가고 교회에도 간다면 구별된 마음이 아닙니다. 옷도 생각도 행위도 구별하여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도 구별하라는 뜻입니다. 무엇인가 구별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날이 그 날이면 주의 날이 섞여져서 좋지 않습니다. 구별한다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거룩입니다.

다음, 높이는 거룩입니다. 거룩이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보면 무겁다는 뜻이 있습니다. 무겁다는 것을 히브리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중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구별할 뿐 아니라 무겁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부르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기를 애국가가 울려나오면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던 길을 멈추게 하지 않습니까? 어른들은 애국가가 울려도 교육이 잘 안되어 왔다 갔다 하지만 학생들은 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애국가를 구별하여 무겁게 여기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무거운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높이는 거룩이 있습니다.

다음은 성결하고 깨끗한 거룩입니다. , 성결 되고 깨끗한 자세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필자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마이크나 오르간 등을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것으로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도구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치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으로 구별되고, 하나님 편으로 높이고, 하나님 편으로 무겁게 여기고, 하나님 편으로 성결하게 하는 이것이 일차적으로 생각해야 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거룩한 자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거룩한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십니다. 문제는 사람 편에서 그 이름을 거룩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할 때에 누구에 의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온 인류에 의해, 특별히 믿는 사람들에 의해, 아니 나로 말미암아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거룩하지만 우리들의 사용에 의해서, 행위에 의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사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세례 받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줄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습니까? ,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마에는 그 이름을 도장찍었으므로 이제는 그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마치 결혼식과 같아서 예식을 하고 나면, 신부는 이제부터 그 집의 식구로서 호적에 올리는 것과 같이,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면 나의 이름 석자 앞에 "성도 아무개" 라고 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이름을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을 이어 받았으니 우리는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높여야 할 큰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입니다. 육신적으로도 우리가 아무개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도리가 아닙니까? 그의 자녀이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생각지 않는다면 자녀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생각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높이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이름이 높임을 받지 못합니까? 먼저 헛되이 부를 때 높임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나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도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헛되이 맹세함으로 높임을 받지 못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 놓고서는 실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함으로 욕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단사상이나 거짓 교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중에서도 자신 있는 이야기를 할 때에, "내 말이 참 말이 아니면 성()을 간다"는 말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이란 내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정도로 확실하다는 의지가 들어있는 말입니다. 성이란 불변하여 항상 누구의 자녀라는 것이 따라 다니므로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몇 가지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한 사람들의 소원을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다."(잠언 30:7-9) 솔로몬의 귀한 간구입니다. 너무 배불러서 교만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도 있고, 또 너무 가난하면 가난한 것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살아서 너무 가난하지 않도록, 즉 남으로부터 구제 받지 않고 살도록 노력하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열심히 믿으면서 지지리도 못살면, 너같이 될까바 예수 믿지 않겠다라고 하나님께 욕이 돌아갑니다. 또한 구제할 능력이 있으면 "내가 무엇이관데 남을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있게 하시나이까" 하고 감사하며 도와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를 통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서로서로 도와서 특별히 못사는 사람이 없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업에 실패하면 자기네들끼리 모두 와서 도와줍니다. 유태인으로서 이렇게 가난하게 살면 선민으로서의 망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똘똘 뭉치어 서로 도와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들도 이것을 해야 합니다. 가난한 그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한 것도 있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몸이 너무 약해 매일같이 휘청거리면, 하나님께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잠잘 때 잘 자고, 먹을 때 잘 먹어서 건강도 열심히 돌보아야 합니다. 내가 게으르고 관리 소홀로 병약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모세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32 : 9-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하나님, 이 백성을 버리고 혼자서 잘 되는 것 원치 않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 생명을 취하소서"라고 놀라운 기도를 합니다. 모세의 이 중보기도 중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32 : 12)라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의 뜻이 무엇입니까? 쉽게 풀이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나올 때 떠들썩하게 열 가지 재앙까지 내리면서 구출해 놓으시고, 이제 와서 광야에서 다 죽으면 애굽사람들이 무어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이름에 욕이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 백성이 망하는 것은 죄의 결과라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되니, 이 백성을 살려달라는 대단한 기도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자녀이오니 내가 잘못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고생하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나를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찌하시겠습니까? 모세가 이렇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시어 진노를 풀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위대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바로 주기도문의 첫째 간구인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귀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루터가 말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는 일에 나를 바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먼저 보지 말고 하나님을 먼저 보아, 그 이름을 위해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웃입니다. 이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성도들에게 이야기합니다만 물건을 살 때 너무 깎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라 하면서 악착스럽게 물건을 깎으면 덕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서 땅을 살 때도 수고하시는 분들께 너무 깎지 말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교회 지으려고 땅을 사는데 서로 좋은 마음으로 거래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더 주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 못쓰겠다"라는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참고, 예수 이름 때문에 손해 보면 하나님께서 다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되도록 애써야겠습니다. 가능하면 사도 바울처럼 "내 소문을 듣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 : 24)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셋째는 자기 자신입니다. 내 자신의 의식 속에 항상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 힘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이름과 나는 함께 있습니다. 이런 자아의식으로 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입장이 되어야겠습니다.

폴랜드의 유명한 천재 음악가 쇼팽은 피아노를 위시하여 작곡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인 사람입니다. 그가 20살에 예술의 나라 불란서로 유학을 떠날 때 그의 아버지가 부탁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폴랜드의 자랑이 되어다오." 아들의 마음속에 국가를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쇼팽의 선생님 역시 훌륭한 분이어서 떠나는 그에게 조그마한 은컵에다 폴랜드의 흙을 넣어 정성스럽게 싸서 주며 "어디를 가든지 조국을 잊지 말게, 이 한 줌의 흙을 군의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기 바라네" 하며 선물로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공부하는 동안 힘들 때마다 "나는 폴랜드 사람이다. 폴랜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해야지" 하며 노력을 했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누구보다 폴랜드의 이름을 높이며 산 생애였습니다. 그의 유언은 "나의 폴랜드 흙이 담긴 이 컵을 나의 무덤 속에 넣어주시오"라고 조국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나의 마지막 생명을 부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오직 당신의 이름이 나의 생명을 통해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항상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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