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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1(마 6:9~15)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처럼 귀중한 복음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실은 여기에 복음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Let God be God)"고 외치면서, 루터 스스로가 해석하기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합니다만 혹 찾으려 해도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무서운 고통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또 돌아올 수도 없는 "전적인 타락"에 빠져 있으므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애써 본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예수 자신이 계시자가 되셔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피로써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어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그 길을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곧 주의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만남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방신에게 제사하며 구하던 종교적 옛 풍습을 벗어버리지 못한 탓에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자세와 태도는 이방종교의 그것을 계속하고 있어, 마침내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큰 죄를 다시 범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른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우며 귀중한 복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저희를 본 받지 말라"고 소극적으로 가르치셨고 본문에서는 적극적으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확실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내 욕망과 세속적인 소원을 그저 토로하는 것은 사실상 우상 앞에서나 할 일입니다. 구하기 전에 내 소원과 또 무엇이 내게 필요한지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그 하나님께 욕망을 보고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며, "정욕으로 쓰려고"(야 4:3) 정욕에 사로 잡혀서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치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죄송스러운 행위입니까? 우리는 기도의 자세, 기도의 방법, 기도의 마음, 그리고 기도의 말 등을 자세하게 배워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기도의 모범들을 깊이 상고하며 많은 믿음의 조상들과 사도들의 기도에서 그 바른 자세와 받은 바 응답을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때까지 오늘 나의 기도의 자세를 성경적 자세에 비추어서 성실히 배우며 교정하자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기도하라." 하심은 큰 축복이며 은총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하심이며, 기도하라 하심은 곧 응답에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벌써 허락이 약속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는 계명이며 주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약속도 있고 능력도 지혜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한 다음에야 비로소 응답되고 은혜와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뜻입니다. 기도하는 자세 기도하는 관계 안에서 주는 우리와 말씀하시며 복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관계가 사랑이며 주시는 응답이 곧 은총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자녀가 구하며 부모가 주는 그 오묘한 관계 속에 깊은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 속에서 구하는 자와 주는 자가 모두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한다는 구체적 의미가 곧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아쉬운 것이 있어서만 간구하며 답답한 사정이 있어서만 기도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기도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서 기도를 중단하는 죄를 범하지 말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먼저 기도의 대상을 가르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의 대상에 대한 고백은 기도의 자세와 내용과 또 기도하는 자의 존재까지도 함께 결정해 주고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며, 자녀 된 자의 신분과 존재가 분명해질 뿐 아니라 기도가 의무이기보다는 특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니 이것은 소중한 자녀 된 자의 특권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말이 그저 쉽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크신 권능으로써 "본래 진노의 자녀였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며, 그가 우리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심으로써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가 되어서 (요 20:17) 이제 감히 아버지라 부르며 또한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양자의 영"(롬 8:)을 받아,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주의 기도문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 뿐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은 유대인들이 쓰는 "엘로힘"이란 히브리어로써 흔한 이름이고, 저들이 아주 소중히 여기는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를 지칭하는 이름이었습니다.(출 3 : 15) 이 때문에 제 3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시하며 유대인들은 참으로 그 여호와를 부르기를 꺼려하여서 "아도아이"(주)란 말로 대칭해서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버지라 부르라고 친절하게 가르치십니다.
일반적 의미에서 아버지의 개념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녀의 생명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상징적 표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진리를 비유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가장 귀중한 진리들을 상징적이요, 비유적인 용어로써 간결하고 생생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독생자 곧 아들로, 또 성령을 영 곧 바람으로 설명하십니다. 아버지로서의 표현 자체가 철학적이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헬라적 방법에서 떠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상징적인 히브리적 방법을 취하신 신학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또 아버지는 다스리시는 주관자로서 자녀를 보호하는 분입니다. 자녀들은 그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또 필요한 것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녀가 확실한 자녀된 존재와 그 자세를 분명히 할 때에 가질 수 있는 권리입니다. 자녀답지 못한 자로서 그 신분을 완전히 떠난 자가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욕이며 큰 불명예를 끼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탕자의 비유(눅 15)에서 탕자가 돌아오면서 자기 스스로 뉘우칠 때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자기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은 곧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그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은 탕자를 내 보내주며, 기다려 주시고 또 돌아왔을 때 그처럼 큰 잔치를 베풀며 영접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였습니다. 또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며 "찾도록 찾으시는"(눅 15 : 4)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계시하고 계십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참으로 희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시된 사랑은 부성적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특징은 공의로운 사랑이며 구체적이며 적극적이고 효과적이라는 데 그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몹시도 진노적이었고, 신약에 계시된 사랑은 자애로운 것으로 비쳐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들과 또 십자가의 큰 사건에 비춰진 하나님의 사랑은 공의로우며 진노적인 부성적(父性的) 사랑임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 구체화되어 집니다. 사랑하기에 진노하시며, 구체적이기에 진노로 나타나고, 효과적이며 적극적이며 행동적이기에 그의 진노는 불같이 나타납니다.
그 속에 부모적 사랑의 신비로움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감상적이고 힘없는 나약한 사랑이라면 눈물 흘리면서 벌써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그대로 실망 하든가 포기하지 아니하며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실 뿐 아니라 반드시 그 사랑을 실천하시며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이것이 그의 진노입니다.
또한 그 사랑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찾아 헤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십니다. 사랑 받을 수 없는 사랑의 배반자를 사랑하며 사랑할 만한 대상으로 창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조, 이 새로운 인간 창조의 과정에 교육적인 진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실 때 그 만남에 있어서 의로움의 반응이 곧 진노입니다. 당연한 공의로움의 계시인 것입니다.
의로운 진노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뜻에서 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가 그 아버지와 같이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확실한 소원이 그의 진노 속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진노적인 공의로운 사랑이 마침내 아버지의 자기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사건과 그 뜻에 대한 여러 가지 논리적 해석이 역사적으로 있어 왔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보상적 해석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지불할 값을 예수께서 대신 지불하였다는 것이며, 또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십자가로 충족하였다는 충족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희생을 통하여 그의 참된 사랑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부성적인 공의로운 사랑이 이렇게 구체화되어서 십자가 안에 계시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호세아 6:1 이하에서 하나님은 때리시고 치료하시는 진노의 사랑을 보여주셨음을 설명합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아버지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아버지 자신이 지불하신 그 큰사랑을 마음깊이 뜨겁게 느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기도는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 "우리"라는 말속에 하나님의 자녀된 공동체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웃을 형제로, 자기를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믿고 그 안에서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공동적으로 고백할 때에, 같은 고백을 한 두 사람은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공동체적 유대와 그 화목한 관계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 속에 벌써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자기의 전매 특허된 개인 소유물처럼 독점하려는 어리석은 믿음을 보고 유감 되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 공동체 의식에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아버지인 동시에 네 아버지이며, 결국 우리 아버지입니다. 나에게 사랑을 베푸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십니다. 이 같은 바른 신앙고백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 늘 새롭게 확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크게는 하나님을 자기 민족의 하나님 또는 자기 인종의 하나님으로 독점하고 스스로 독선과 아집에 매이며 자기 우월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협소한 민족주의로 표방된 선민사상들은 언제나 이 "우리 아버지"의 뜻을 잘못 이해한 데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성, 즉 앗수르 나라의 수도에 가서 "외치라" 할 때에 불평하며 다시스로 도망가려 한 것도 사실은 그의 협소한 신앙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원수이지만, 저들도 하나님의 자녀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 "우리 아버지" 개념 안에서 우리들의 형제 관계가 분명해져야 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면서 한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을 느끼면서 "우리 아버지"를 부른다면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윤리적 관계가 될 것입니까? 교만한 바리새교인은 세리와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세리를 멸시하다가 응답 없는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부르는 바른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하늘에 계신"이란 말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늘의 개념을 헬라적인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적 개념의 하늘은 결코 천문학적으로나 물리학적인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쳐다보는 푸른 하늘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뜻은 먼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뜻합니다. 위냐 아래냐의 공간적 개념이거나 피조물의 세계가 아닌, 창조주의 계신 곳을 뜻하는 질적 차이와 차원적 차이가 있는 용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34회나 하늘나라라는 용어를 볼 수 있는데 그 하늘이란 결코 푸른 하늘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신적 공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역시 이 하늘은 하나님의 차원 즉 비세상적으로, 땅에 속한 세계를 떠난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그곳을 가리키고 있는 용어입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신관인 하나님의 존재의 초월성을 보여주는 용어입니다. 헬라나 로마신화에는 신은 언제나 땅에 속하였고 인간과 섞여서 함께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적 신관은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며 인간과는 전혀 별도로 높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동시에 그 하나님이 계시하시며 따라서 인간 역사 안에 친히 내재(內在)해 오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불가전달성 속성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르나 그는 아시며, 내게는 불가능한 것도 그에게는 가능하며, 우리는 시간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는 영원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십니다. 그리고 오셨고 또 우리로 그 하늘에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요 15:1 이하) 그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모든 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대상으로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세 마디 고백 중에서 우리의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또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분명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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