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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요한복음 12장 24, 2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절)---오늘 공부할 잠언말씀입니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살고 싶어하는 본능이요, 또 하나는 죽고 싶어하는 본능입니다. 우리는 살겠다고 아둥 바둥 애를 쓰면서도 '죽고 싶다'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합니다. 특별히 괴로운 일이라도 있어서 죽고 싶다 한다면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좋아서 죽겠다, 우스워서 죽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튼 되게도 죽고 싶은가봅니다. 바로 이것이 본능입니다.
본능이란 의식이전의 일입니다. 의식과 관계없이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어느 결엔지 불쑥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것입니다. 강렬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살고 싶어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강렬한 생존본능이 있습니다. 살아남으려고, 죽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여러분, 갓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젖 빠는 것을 보신 적 있지요? 힘차게 빱니다. 참으로 신비합니다. 아기에게 젖 빠는 힘이 없으면 죽고 맙니다. 도리가 없습니다. 먹고자 하는 본능이 있기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식욕'이라고 하는 강한 생존본능입니다. 식욕이 떨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건강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욕이 왕성하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식욕이 왕성할 때에 건강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식본능도 있습니다. 자기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종족유지의 강렬한 욕망입니다. 식욕과 생식욕 --- 생존본능입니다.
우리들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살아남겠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그런가하면 사람에게는 죽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이 '죽고 싶어하는 마음'은 '살고 싶어하는 마음'의 이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고 싶기 때문에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동네에 나이 많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죽고 싶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습니다. 동네아이들에게 "얘들아, 죽고 싶은데 나 좀 죽을 수 있게 약 좀 사다주려무나"라는 말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어느 날엔가, 이 말을 들은 동네의 한 짓궂은 녀석이 밥풀에다 밀가루를 입혀서 할머니한테 가지고 갔습니다. 할머니한테 그것을 건네주면서 녀석은 말했습니다. "이 약을 잡수시면 돌아가실 수 있어요." 그랬더니 그 할머니, 몽둥이를 들고 쫓아 나오더니 "야 이놈아, 네가 나랑 무슨 웬수가 졌냐? 뭣 때문에 내가 죽기를 바라느냐?"하고 호통을 치더랍니다. 보십시오. 말로는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하지만, 그실 진정으로 죽고 싶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죽고 싶다'라는 말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할 바에는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동물처럼 산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만 연명하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대접 못 받으면서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나름대로 사람됨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대로 살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고 싶다는 것은 사람답게 살고 싶은 본능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아주 복잡합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최소한의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죽고 싶다 하는 것 - 이것은 인간존재의 본능의 발로입니다. 숨쉬고 산다는 것만 가지고는 사람됨의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정신적 욕망이 있고, 나름의 상당한 이상이 있고, 자기정체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육신의 건강만으로는 사는 데에 만족감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에 죽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가정에 연로한 분이 계시거든 무엇이건 적당한 일을 부탁할 것입니다. 이것 좀 해주세요, 저것 좀 해주세요 하고 부탁을 할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할일이 있다는 것은 노인들을 기분 좋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칭찬 받는 것을 특별히 좋아합니다. 그러니 잘하셨다고 칭찬을 해드리십시오. 이 일은 어머니께서 해주셔야만 합니다, 저 일은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고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노모가 부엌에서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그릇이라도 깨뜨릴까봐 손도 못 대게 합니다. 청소를 하려고 해도 어머니가 하면 하나마나라고, 자기가 다시 해야 한다며 못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만 합니다. 그러니 노인들의 입에서 '죽고 싶다'라는 소리가 나올 수 밖에요. 자기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함으로 만족감도, 살고 싶은 의욕도 없게 됩니다. 심지어는 손자손녀가 귀여워서 안아주려고 하면, 그것도 버릇 나빠진다고 못하게 합니다. 이렇듯 우리의 노인들은 존재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다'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존재라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어지지 않으니까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죽고 싶다'라는 말은 자기존재에 대하여 인정을 받고 싶다는 말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런 욕망이 죽고 싶다는 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2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도대체 자기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살고 싶어합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합니다. 오래도록 살고 싶어합니다. 나아가 자기존재를 인정받으면서 보람되이 살고 싶어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냐 하는 데에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오래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의 잠언말씀은 우리에게 인간답게 산다는 것,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작정 살아남는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이 붙어 있다고 살아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동물적 생명의 연장이 아니라 생의 존재가 어떻게 인간다우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여객선이 거센 풍랑을 만나서 파선의 위기에D쵹TXT@처했습니다. 그 배가 점점 물 속에 가라앉으려 합니다. 선장은 조그마한 구명선을 모조리 바다 위에 띄워놓고 승객들에게 호소합니다. "아무 짐도 가지지 말고 타십시오. 모든 보화, 모든 소중한 것은 다 내버리고 목숨 구할 생각만 하십시오. 이 구명선은 작으니까 되도록 무게를 줄여야 합니다. 그러니 사람만 옮겨 타십시오." 구명선으로 드리워진 줄을 붙잡고 승객들이 하나둘 구명선으로 옮겨 탑니다. 귀한 소지품들은 다 내버리고 맨몸으로 구명선에 옮겨 탑니다. 그런데 끝까지 구명선으로 옮겨 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왜 안 내려갑니까?" 선장이 재촉하자 그 사람이 줄을 붙잡고 내려가는데 줄이 툭하고 끊어지는 바람에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맙니다. 줄이 끊어진 것은 그가 몰래 몸에 지닌 금덩이 때문이었습니다. 금덩이 없이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나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결국 이 사람은 자기생명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보화를 사랑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생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일반적으로 '자기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먹은 것만이 온전히 자기 것 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미련하게 먹어댑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마땅히 음식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한계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절제하며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이라고 해서 평소보다 엄청나게 걸신 들린듯이 먹어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중국에 갔을 때에 깜짝 놀랄만한 일을 목격했습니다. 제가 묵고 있는 호텔에 소련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보면 소련사람 들이 키가 크고 잘생겼습니다. 어느 날엔가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갔는데 음식을 뷔페 스타일로 차려놓았더군요. 줄줄이 차려놓은 음식을 보아하니 변변치 않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련사람들은 그 음식을 접시가 터져 나갈 정도로 담아다가 맛있게 먹습니다. 그렇게 다섯 번이나 가져다가 먹습니다. 어느 소련사람은 한 자리에서 삶은 달걀을 다섯 개나 먹고도 모자라는지 주머니에다 다시 달걀을 다섯 개나 집어넣더군요.
이것을 가지고 나가려다가 문간에서 제지당했습니다. 여기서 먹는 것은 좋지만 가져가지는 못한다고 주의를 주자 할 수 없이 달걀을 꺼내놓는데 부끄러운 기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라면 창피할 것 같은데요. 그 모습을 보니 얼마나 걸신이 들었으면 저럴까 싶었습니다.
음식이라는 것은 섭취에 한계가 있습니다.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만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기사랑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 잘먹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무지막지하게 먹어댑니다. 그런데 이렇게 먹어대다가 탈이 나서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한계를 넘어서는 욕망충족은 자기사랑이 아닙니다. 이성의 판단으로 먹을 것 안 먹을 것을 구분해야 하며, 먹는다면 어느 정도나 먹어야 하는지, 그 한계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이성적 판단이 앞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성과 사회성과 이성의 지배하에서 자기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을 넘어섰을 때에, 그것은 자기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경제적 생활을 위하여 남을 죽이고 돈을 빼앗았습니다. 이것이 과연 자기사랑입니까? 자기생명을 사랑한 것입니까? 가끔 강간살인 사건과 같은 끔쩍한 사건이 일어나서 사람을 경악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식으로 자기욕망을 채웠다고 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살입니다. 자기생명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욕망을 무작정 채운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이 가진다고, 많이 배운다고 해서, 그것을 자기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안일함이 자기사랑인 줄로도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편안 하려고만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내 몸을 편안하게 하려 합니다. 언젠가 미국에 갔을 때에 텔레비전에서 침대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본디 땅덩이가 좁아서인지 그런 광고는 없습니다만 그곳의 텔레비전 광고를 보니 굉장하더군요. 운동장같이 넓은 방 한가운데에 연못을 만들어놓고는 물침대를 띄워놓았습니다. 침대가 고무보트처럼 물에 떠서는 그 위에 사람이 누우면 굼실굼실합니다. 저 같으면 그 위에서는 오던 잠도 싹 달아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런 것을 돈주고 살까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런데 사람들은 좀더 좋은 침대, 좀더 좋은 옷, 좀더 좋은 환경만을 추구합니다. 안일하기만을 바랍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어느 고급별장 같은 데에 혹 있을는지, 그런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서양사람들의 사는 것을 보니 침실 문 하나만 열고 나가면 풀(pool)이 있습디다. 겨울에도 물을 데워서 수영을 즐깁니다. 참으로 낭비가 심합니다. 잠자다가 일어나서는 그대로 풍덩 물에 뛰어들어갔다가 나와서 또 자고…… 하고 싶은 것 다 찾고 살아갑니다. 이렇듯 안일한 것, 편안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자기사랑이거니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정말 자기사랑입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이 안일함으로 사람도 못쓰게 되고, 몸도 허약해집니다. 심신이 병들고 맙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가하면 게으름과 방종과 향락…… 이런 것을 자기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평생 소원이 내 마음대로, 나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것이다, 돈을 마음대로 써보는 것이다' 합니다마는, 글쎄요.
그것은 자기사랑이 아닙니다. 자살입니다. 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귀중한 뜻이 있습니다. 정말로 자기생명을 사랑하느냐,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냐, 정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길이 어디에 있느냐-이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세속적인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것과 참 생명을 사랑하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생명, 세상적인 생명을 사랑하느라면 참 생명을 파멸로 이끄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세속적인 자기생명에 연연하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젊은 율법사가 그들입니다. 먼저, 어리석은 부자를 보십시오. 그는 많은 곡식과 물건을 곡간에 가득 채워 넣고는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될 말입니까? 쓸데없는 소리입니다. 세속적인 자기생명에 연연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하거늘 어떻게 그 재물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지위를 높이는 것이, 자기를 부자로 만드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합니다. 이것은 자기사랑이 아닙니다.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단축하는 것입니다. 자기존재를 더없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영생의 길을 묻고는 힘없이 되돌아간 젊은 율법사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노라 자부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눅 18 : 22)"라고 영생의 길을 일러주십시다. 세속적 생명에서 아직 헤어나지를 못한 그는 심히 근심하는 낯빛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생명은 구하면서도, 그 생명을 위하여 지불해야 할 댓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를 못했습니다. 값을 치를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육체적인 생명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육체적인 생명은 육체적인 건강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건강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희 교인들이 제가 오래 살기를 바라시는지 건강에 관한 책을 자꾸 가져다주십니다.「백 세에의 초대」 「건강의 비결」…… 이런 책들을 선물해주십니다. 시간이 있을 때면 조금씩 읽어봅니다. 거기서 제가 얻은 결론이 있습니다. 건강의 비결은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어느 책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가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잘 믿음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풍성한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는 것 --- 이것이 건강 비결의 7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둘째는 음식을 잘 조절해서 먹는 것입니다. 별것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많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운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먹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운동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흔히들 "귀찮은 것이지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 재미없잖아요. 늦잠 자는 게 좋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운동이라는 것을 가만히 보면 전부가 몸을 아프게 하는 것뿐입니다. 이쪽으로 아프게 하고, 저쪽으로 아프게 합니다. 별것 없습니다. 아프게 하면 운동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편안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누워자는 것이 편하지요. 그리고 자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편하지요.
결국 운동이라는 것은 다리도 아프게 하고, 팔도 아프게 하고, 목도 아프게 하고…… 온몸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괴로운 것입니다. 게다가 운동은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3일 이상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그 운동은 하나마나라고 합니다. 모름지기 운동이란 열심으로,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육체적인 건강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지불해야 할 값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러니 영적인 것을 위하여 치러야 할 대가는 더욱 클 수 밖에요. 자기생명을, 자기건강을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쓸데없는 생각을 품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나아가 설령 하고 싶지 않더라도 자기의지로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사랑입니다. 이것이 자기사랑의 방법입니다. 자기사랑이란 좋은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자기사랑의 뜻이 오묘합니다. 좀더 높은 차원에서 생각해봅시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영생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는 그 수고, 그 노력이야말로 진정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보십시오. 부자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죽어서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비록 세상에서는 지지리도 고생을 하며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당으로 갔습니다. 과연 누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까? 누가 진정으로 행복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부자는 불쌍한 사람이고, 거지 나사로는 행복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자기를 사랑한 사람이고, 부자는 자기를 사랑할 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이란 영생, 곧 구원받은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도 믿지 말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너, 믿지 말라는 예수는 왜 믿느냐? 우리 죽은 뒤에 제사도 안올리려고 그러느냐?"라고 엄포까지 놓습니다. 부모님에게 뭐라고 말씀드리면 좋겠느냐고, 어느 날 제게 와서 묻더군요. 저는 그런 질문에는 대답을 늘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것도 없고 이해되기를 바라지도 마십시오. 오로지 수없이 같은 말을 해서 설득을 시키는 길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늘 하는 그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같은 말이 어떤 말입니까?"라고 다시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예수 믿은 것은 효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아시거나 모르시거나 믿으시거나말거나 저는 효도하기 위해서 예수 믿은 것입니다. 부모님이 이 세상에서 오래오래 편안하게 살도록 해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렇게만 살고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영원히 살도록, 영생을 얻도록 해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참 효도를 하기 위해서 예수 믿은 것입니다. 효자치고 가장 큰 효자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부모님 앞에서 병들어 있는 자식은 불효자식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도 제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까? 저는 천당까지 가서 살랍니다. 제가 예수 믿은 것은 진실된 효자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라는 말을 부모님이 알아들을 때까지 하라고, 그것밖에는 비결이 없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여러분, 효자라면 마땅히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나아가 부모님이 예수를 믿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함으로 영생을 얻도록, 천당에 갈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합니다. 이보다 더한 효자는 없습니다. 그까짓 효도관광이나 시켜준다고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천당에 가도록 해드리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구원 얻은 생명, 이것만이 참 생명입니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말은 구원을 뜻하는 것이요, 죄와 사망과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요, 감사와 기쁨과 찬양의 생활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세상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분리해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생명과 참 생명 가운데서 하나를 택해야 할 때가 옵니다. 양자택일의 때가 옵니다. 이 때에 우리는 마땅히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이 세상의 생명쯤은 쉽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불행도 불평 없이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행복을 위하여 미래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 현재의 고통을 감수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생이라고 하는, 그 중요한 본질적인 생명을 위하여 세상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진정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현재적 생명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보십시오."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생명을 미워하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죽으라는 말씀입니까, 죽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헬라 원문대로 보면, 이 미워한다는 말은 덜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원한 생명보다 세상생명을 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기 위해서 세상생명을 덜 사랑합니다. 영원한 가치의 것을 소중하게 여기기에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덤덤합니다. 대충 살아갑니다.
세상 것에 너무 알뜰할 필요도 없고,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학술적 용어를 빌려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 집착성 생명'이 문제가 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합니다.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합니다. 이 세상에 매여서 하늘나라 일을 소홀히 여깁니다.
이런 사람은 천당에 가기가 힘이 듭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렵게 사는 분들에게 "인생이 무엇입니까?"라고 한번 물어보십시오. "나이가 어떻게 먹는지도 모르게 살아갑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어려워서 아침부터 밤까지 그저 뛰면서 살아갑니다"할 것입니다.
어느 수필을 보니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물을 겨를 없이 바쁜 것이 좋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에도 보면 비교적 여유가 있는 분들이 오히려 문제가 많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다 걱정 없는, 비교적 아무 문제도 없다 싶은 분들이 오히려 고민에 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얼굴에 생기는 주름살로 고민합니다. 여러분, 얼굴이 빤질빤질해서 무엇합니까? 얼굴이 젊다고 몸도 덩달아 젊어지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굴에 느는 주름살을 두고 안타까워합니다. 벌써부터 종말론적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재산을 다 두고 죽을 생각을 하니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한 것입니다. 옷만 해도 그렇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이런 옷 저런 옷 해서 본때 있게 입고 다녔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서 보십시오. 새 옷을 입고 거울을 보아도 입으나 안 입으나 입니다. '옷걸이'가 시원치 않다 보니 모양이 나지 않습니다. 세상에 마음붙일 데가 없습니다. 그 동안에 생각을 잘못했던 것입니다. 자기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어왔던 것입니다. 내 몸에 비싼 옷을 걸치고 남들이 예쁘다고 인정해주는, 그 하찮은 것으로 자기존재가 세워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이제 이것이 다 떠나고 나니까 '아이쿠, 죽었구나' 싶은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 집착하는 생명이란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세상 중심적인 생각에 너무 집착하느라고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나하고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예수 믿어서 이 세상에서 복 받는다는 것에는 매력이 있지만, 예수 믿어서 천당 가는 것에는 별 흥미가 없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신앙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앞에 있을 천국에 중점을 두고, 천국에 기준해서 생명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세속적인 생명에 집착해서 자꾸 그곳으로만 기울어져 모든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이 자기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보면 슬픈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데마는 사도 바울을 좇았던 제자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핍박이, 어려운 일이 생기자, 본디 세상을 사랑하는 자 데마는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사실 데마는 그 핍박을 견디고 사도 바울과 같이 순교하여 영생을 얻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을 며칠 더 연장은 했겠습니다마는, 평안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세상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의 결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왜 세상생명을 미워합니까? 이 욕망이 있는 한에는 내가 신령한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매이는 동안은 쌔가 영원한 생활을, 영원한 생명을 지향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생명을 미워한다 -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욕망으로 기울어지는 자기 자신을 정말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은 복이 있겠다, 영생을 얻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생명을 부정하는 사람은 참 생명에 대해서 긍정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대해서 부정할 때에 하늘나라에 대해서 긍정할 수 있고,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자기 자신을 미워할 때에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생명을 보전하는 길, 사랑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자기생명을 미워할 줄 아는 사람만이 자기생명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자기생명을 얻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주시는 예수님의 잠언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절)."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로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기생명을 구원하는 사람이요,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죽어야 할 시간에 죽을 줄 모르는 사람, 희생해야 할 시간에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 자기생명과 자기자존심과 자기명예가 아까워서, 세상적인 욕망이 너무 아까워서 도저히 희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을 좇아 그대로 사는 사람이 진정 자기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생명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자기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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