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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됨의 의미(요 8:31~4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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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됨의 의미(8:314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자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지는 자유, 그가 생각하는 자유의 질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행복의 영역은 그가 누리는 자유의 영역 만큼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부자이면 부자인 만큼 경제적인 자유를 많이 누리게 됩니다. 가난하면 실제 생활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사고 싶어도 억제해야 하고, 선한 일을 하려 해도 돈이 없으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구제하기 위해 열심히 벌라는 좋은 말씀입니다.

어쨌든 부자이면 그만큼 자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성인이라면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졌으므로 지적인 자유의 한계가 그만큼 넓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잘 모른다는 것은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며 때로는 감옥과 같이 느낄 때도 있습니다. 가령, 외국 여행을 갔는데, 영어를 전혀 모른다면 모든 것이 불편하여 내가 누리는 자유가 자유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지식을 배우면 배운 만큼 지적인 자유의 영역이 크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자유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자유의 질이 문제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다라고 방종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육체적인 자유는 없어도 양심의 자유, 도덕의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경제적인 자유보다는 양심의 자유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가끔 버스를 타면 젊은이들이 노인들께 자리를 양보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일어서면 다리가 불편하고,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불편하고,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는 자유입니다. 다리가 좀 불편하더라도 마음이 편한 것을 택하는 사람은 양심의 자유가 더 귀한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조금은 가난하고 불편하게 살더라도 양심대로 사는 자가 차원높은 인간입니다. 결국, 사람은 내가 가지는 자유의 질에 따라 사람의 값이 결정되고 맙니다.

높은 의미에서의 자유, 고상한 자유, 신령한 자유란, 양심의 자유요 신앙의 자유입니다. 만약, 예수의 이름으로 감옥에 갇혔다면 육체는 괴롭고 부자유하지만 마음은 한없이 자유로운 것임을 기독교 역사에서 많이 보았습니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를 하면 자유로운 몸이 되고, 거부하면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정조를 굽히고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면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들어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의 몸은 자유롭게 활보하는 것 같지만, 그의 마음은 얼마나 부자유한지 모릅니다. 어느 노목사님은 지나간 목회 생활 중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 신사참배에 응했다는 사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당시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부자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찾아야 할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병으로 비유하면, 아픈 곳을 모르는 병으로 이것은 죽을병입니다. 배고프면 배고픈 것을 알아야 하는데 배고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죽을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속박 중에 있으면서도 부자유하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면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자유란, 빼앗는 것이 아니고 얻어지는 것으로써 자유의 의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은 내가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므로 자유해진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과 "아들이 자유케 하면 참 자유를 얻으리라"는 말씀은 다같은 말입니다. 가령, 내가 물에 빠졌을 때, 허우적거린다고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므로 밖에서 누군가가 줄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노예가 스스로 자유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돈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풀어 주어야만 자유할 수 있는 것이 노예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빚진 사람은 빚을 갚기 전에는 어떤 것으로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도 속죄함을 받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자유란 진리가 나를 풀어 주는,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풀어 주셔야만 자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8:31) 제자되는 길은 본문에서 본대로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매이면 자유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씀을 존경하고 믿어야 합니다. 제자되는 길의 시작은 믿음입니다. 그가 스승 됨을 믿고, 그가 참 됨을 믿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만약에 배우는 학생이 교과서를 믿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학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자는 믿어야 하고, 그래야 자유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믿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 말은 생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믿는 것을 말하며, 마음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걸고 그 안에 산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즉 스승의 말씀을 믿고, 그리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거하면 자유하게 되고, 여기서 떠나면 율법적 관계가 되고 그러면 자유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한다는 말은 말씀 안에서 산다는 뜻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듣는다는 것에 대해 이미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만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들음은 말씀과 나를 연결하는 것으로 계속적인 소통을 의미하며 이 소통은 곧 사랑입니다. 한창 서로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자의 이야기는 한없이 듣고 싶고 들어도 계속 좋습니다. 그러나, 권태기에 들면 벌써 한두 마디도 듣기 싫고 들려지지 않으며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사랑의 관계인 것입니다. 또한 거한다는 것은 듣는 것만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주일날 교회에 나오고 삼일 저녁, 새벽기도 등 일년에 450번 정도 나오는데, 들을 때마다 배울 때마다 새로운 말씀으로 받게 됩니다. 아무 때 읽어도 새로운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필자가 잘 아는 나이 많은 의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그 분의 병원에 가 보면 원장 테이블 위에 다 낡아빠진 커다란 성경책이 놓여 있습니다. 환자가 없는 시간이면 빨간 줄 투성이인 성경책을 계속 들여다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 분은 말씀하시기를 자기는 이제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신문도 볼 필요가 없고 그저 이제는 성경책 하나만 보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이 책도 보고 저 책도 보지만, 요단강이 가까워지면 이제 무엇인가 집중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 안에 거하는 자세입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성경 맛이 달라집니다. 젊었을 때는 인생이 헛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지만, 이 경험 저 경험 겪고 나면 깊게 실감나게 이해되는 것입니다. 필자는 27살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성경을 잘 아는 줄 알고 열심히 가르치고 전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무래도 40살은 넘어서야 보다 깊은 말을 할 수 있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길은 경험이 없이는 같은 성경을 보아도 이해가 다릅니다.

본문에서 말씀 안에 거한다는 말은 말씀에 깊이 들어가서 푹 빠져서 깨닫고 이해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말씀 안에서 순종하게 됩니다. 다시 종합해 보면,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깊이 들어가서 깨달으며 순종하는 것으로 이것은 곧 제자됨을 말하며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되면 진리를 알게 되는데, 이 말은 말씀이 참인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진리를이라는 하나의 말로 쓰고 있는데, 헬라어로는 '알레데이아''알레디노스' 두 가지 의미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거짓에 반대되는 참(true)이란 뜻이며, 후자는 허구에 반대되는 사실(real)로써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진리입니다. 보다 간략하게 말하면, 사실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 말씀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보면 볼수록 참이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진리이며, 이 진리를 알게 되면 진리는 나를 사로잡고 나는 포로가 됩니다. 진리가 완전히 나를 붙들면, 이제 내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끌어가고, 이렇게 되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하고 이 자유는 참 자유입니다. 술을 마시면 가슴이 커진다고 들었습니다. 가슴이 커지면 용기가 생기도 둥둥 떠다니는 착각이 들어 무서운 사람이 없답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유가 생긴다고 하는데, 그 자유는 휘청거리는 자유요 거짓 자유로써 참 자유가 아닙니다. 참 자유란 진리가 주는 자유입니다. 돈이 주는 자유는 허무이며, 건강이 주는 자유는 무상입니다. 결국은 병이 들고 죽는 것이므로 세상이 주는 자유는 한계성이 있지만, 진리가 주는 자유는 참 자유로써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주는 자유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첫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떠나서 살면 두렵고 고독하여서 내가 혼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므로 외롭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고독한 사람은 죄인입니다. 진리와 함께 사는 자는 모든 두려움과 심리적인 갈등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나 중심이 되고, 때로는 나약함에 빠지고 게으르게 되므로 나를 이긴다는 것은 가장 큰 과제입니다.가 최고의 적이요, 가장 무서운 존재로서 누가 자기를 이길 수 있습니까? 내 의지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도박하는 사람이 돌아서기 위해 자신의 손을 자르고 맹세까지 했는데도 소용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사랑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히어 인간의 의지로 안 되던 모든 것이 술술 해결되어집니다.

어느 술고래가, 직장에서 술 마시기 대회에 나가 연 4회를 우승했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더니 간증하기를, 설교를 잘 알아듣지는 못하는데 듣다가 보니 술맛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담으로 술이 끊어질까 걱정된다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말씀을 믿고 깊이 들어가면 술맛도 담배 맛도 싫어집니다. 다이아몬드도 별것이 아닙니다. 출세나 명예에서도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리가 주는 자유입니다. 말씀이 내게 자유를 주면 나를 이기게 되고 이기면 나는 없어집니다. 대신에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나는 자유하게 됩니다.

셋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남이 나에게 무엇이라고 하나에 신경 쓰며 눈치를 봅니다. 소위 체면이라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하고 허세도 부리는데 정말 힘듭니다. 심하게 신경을 쓰다보면 눈치만 보는 기회주의자가 되고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말씀 안에 거하면 여기서 자유로와져 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면 그것으로 족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체면 때문에 사람이 죽기도 하지만, 여기서 자유하게 되면 실패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이므로 주의 말씀대로 진리대로 살면 그것은 대단한 자유입니다.

넷째, 죄로부터 자유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가책에 빠지고 매여서 또 죄를 짓는 불가피성에 빠져 죄를 반복하는 죄를 짓습니다. 그 다음에는 죄를 변명하는 죄를 짓고 또 이번에는 죄 때문에 절망하는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말씀이 비춰 주는 자기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이 모든 가책으로부터 벗어납니다. , 모든 죄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자유입니다.

다섯째는, 사망으로부터 자유입니다. 믿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걱정은 없습니다. 일찍 죽으면 직행길이고 늦게 죽으면 돌아가는 것으로 아무 때고 죽는 것이므로 죽음에 대한 염려는 떼어놓았습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세상에 죽을까 하고 벌벌 떠는 사람은 가장 비겁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고등학생인 아들을 잃은 부모가 필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잃은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찌하면, 이 불행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느냐고 물어온 것입니다. 저는 대답대신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했습니다. 손 목사님은 대학생인 아들 둘이 있었는데, 625 당시 공산당 폭도들에게 붙잡혀 가서 순교를 했습니다. 이 때 손 목사님은 오히려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같은 죄인의 가정에 순교자 두 사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이 세상에 물들기 전에 청년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갔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훌륭한 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그 분은 자기 나름대로 깨달았다고 감사해 했습니다. 여기서,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하늘나라를 기준해서 이 세상을 보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기준해서 하늘나라를 보면 안 됩니다. 하늘나라를 기준해서 생각하면, 빨리 가면 갈수록 좋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33살 넘은 사람은 다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십시오. 어차피 가야 하는 인생인데, 죽음에 대해 걱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어쨌든 믿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는 자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거하고 참 제자가 될 때, 진리가 자유케 함으로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 짓는 자유, 방종 하는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속박이요 노예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뜻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면 본문의 말씀대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행복이란 자유에 있습니다. 능력도 지혜도 창의력도 자유에 있습니다. 이 은혜가 항상 여러분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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