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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적은 누룩(5장 7~12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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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누룩(5712)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 '복음 중의 복음'은 갈라디아서를 관류(貫流)하는 대강령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갈라디아서 전체에 걸쳐 다이내믹하게 도도히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의 중요성을 거듭거듭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동기가 교회 내적인 문제에 있었고, 그가 이 편지를 씀에 그토록 필봉에 힘을 기울인 것은 교회 내적인 문제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시험-우리가 신앙생할을 잘해나가다가도 도중에 잘못되는 일이 있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이 진리에서 떠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백번천번 새기고 다질 진리입니다. 우리의 최고 관심사는 ''입니다. 우리가 받는 축복이 ''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병에 걸렸다가 나았다든가 사업이 좀 잘되었다든가 하는 세상적인 것을 말함이 아닙니다. 내 욕망을 채운다거나 소원을 성취한다는 따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를 향한 근본적인 동기, 그 관심사가 잘못되었기에 신앙에 낙심이 생기고 가다가는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분명히 해야 될 것은 신앙적 동기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존재의 문제에 최고의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결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하건 어떤 손해를 보건 어떤 생애가 전개되건 그것은 문제거리가 못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 확실하면 만사가 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는 의()의 문제입니다.

이 의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내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의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의롭다 함을 주심으로 내가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내 선으로 내 공로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선행이 어느 수준까지 올라가서 내가 고행을 해서 내가 공적을 쌓아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을 다시 풀이해봅시다. '오직 믿음으로''오직 긍휼로', '오직 긍휼로''오직 은혜로'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 이 확실한 믿음에서 약간만 떠나도 벌써 불신앙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인본주의자가 됩니다. 율법주의자가 되고 외식주의자가 되고 의식주의자가 됩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교만해집니다. 절망하게 되고 분열하게 되고 급기야 완전히 타락하고 맙니다. 실로 무섭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 이 과정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믿어보려고 하다가 낙심합니다. 오히려 더 깊은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차라리 처음 미숙할 때에는 은혜 안에서 살았습니다. 한참 믿다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정말 내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는가, 오직 은혜만을 사모하고 있는가-내가 은혜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재검토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믿음 밖의 이야기가 아니요 믿음 안의 이야기입니다. 교회 안의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잘 믿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생기는 시험임을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런 연유에서 사도 바울은 전혀 타협 없이 이 은혜의 교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알아야 된다-꽤나 어려운 이야기같지만 사실 쉬운 이야기올시다. 누구나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다시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11)"-이것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주장하다가 핍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왜 핍박을 받았겠느냐,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이 문제를 강하게 비타협적으로 절대적 진리로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생각에 합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올시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도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12)"라고 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 골똘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꼭 고집불통으로 보입니다. 저사람은 영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다. 독선적이다,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세 가지의 욕쯤은 들어도 괜찮습니다.

첫째는 미쳤다는 소리요, 둘째는 고집불통이라는 소리요, 셋째는 비타협적이라는 소리가 그것입니다. 아직 이런 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했다면 그 동안 제대로 안 믿은 사람입니다. 한번쯤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 믿기를 죽에 물 탄 것처럼 믿고 앉았습니까? 그렇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하기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은 약간 미친 것입니다. 하루종일 일터에서 시달린 피곤한 몸으로 식사도 못한 채 이 삼일저녁예배를 드리러 나왔으니 말입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사람은 좀더 미친 것이 됩니다. 게다가 전적으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재물을 바치고 시간과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면 안 믿는 사람이 볼 때에는 보통으로 미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집도 있습니다.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왜 핍박을 받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 진리는 양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에, 타협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에 내가 이렇게 핍박받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아무하고나 타협하고 양보하려 하느냐-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7절에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의미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본 말씀입니다마는 31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어떻게 되어서 이 달음질을 중단하게 됐느냐는 것입니다. 잘 나가다가 도중에 왜 이러한 문제가 생겼느냐, 누가 너희를 꾀더냐, 누가 너희를 가로막더냐, 누가 너희를 시험하더냐-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반드시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본래성과 그 아름다운 본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10절의 말씀을 봅시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들은 본래 착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뿐더러 잘될 줄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누가 너희를 꾀더냐-너희들은 본래 착하여 그럴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가 못되게 장난을 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꾀어서 잘못된 것이지 본래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래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고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은 실수로 보아줍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을 때에는 잘못한 것을 본래적인 것으로 보려고 듭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학술적인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병리(病理)와 생리(生理)의 차이입니다. 본디 그렇지 않은 사람인데 지금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을 때에는 배냇병신으로 취급합니다. 본래부터 나쁜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대화하면서 서로 주고받는 말 가운데, 특별히 부부싸움할 때에는 '항상'이라는 단어는 빼고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항상(always)'이라는 말을 빼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예를 들어봅시다. , 남편이 저녁늦게 들어온다고 합시다. "당신은 왜 허구헌날 한밤중에 들어와요?" 어쩌다 화를 내도 "툭하면 왜 화만 내고 그래요?"라고 쏩니다. 어쩌다 늦었고, 어쩌다 화를 낸 것이지 늘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매일처럼 늦게 들어오는 사람일지라도 "무슨 일로 늦었습니까?"하고 물어야 됩니다. 오늘 처음 있는 일인 것처럼, 본래 늦게 들어올 사람이 아닌데 부득이해서 늦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사람은 일이 있건없건 늦는다, 배냇병신이라서 할 수 없다, 본성이 못된 사람이다, 역마살이 끼어서 싸돌아다녀야만 한다, 아예 일찍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다-이런 마음으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제 아버지가 그렇더니 자식도 그렇다느니 부전자전이라느니 했다면 이미 끝장난 것이나 같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말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뭣 좀 잘못했을 때 못된소리 한마디합니다. "당신 친정어머니가 그렇더니 당신도 그렇구만." 못 고칠 병입니다. 고약한 버릇입니다. "당신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했구나" "누구 나쁜 사람한테 꾐을 받았는가보다"-이렇게 봐줘야 하는 것입니다. 혹 어린아이가 잘못한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내가 내 아이를 책망할 수도 있지만, 이웃사람이 와서 내 아이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이런 때에 뭐라고 하겠습니까? "본래 착한 아이인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렇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 본래성을 아름답게 보려고 합니다. 나쁘게 보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갈라디아사람들은 지금 신앙이 휘청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잠시 꾐을 받은 것이요 잠시 실수한 것이다, 본래 그렇지 않을 뿐더러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이것이 신앙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교육적으로나 목회적으로나 혹은 사회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떤 대화에서도 상대방의 본성을 나쁘게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착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몇 안됩니다. 무엇인가의 꾐에 빠진 것입니다. 어딘가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영어로 'Something wrong with it.' 무엇인가가 잘못됐습니다. 어디선가 잘못되기 시작하여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릇된 꾐에 빠져서 실수했다는 말입니다. 불쌍하지 않습니까? 본래적으로 나쁘다고 하면 구제불능이 되어버립니다.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싸잡아 심판해버리는 것이 됩니다. 누가복음 1310절로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꼬부라져 있는 여인을 치료하시면서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사단에게 매여 있을 뿐이지 본래 이사람은 아름다운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보고 계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귀신들려서 보기에도 흉한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누룩을 예로 들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아주 적절한 소재를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빵을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빵에는 으레 누룩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빵도 알고보면 전부 누룩이 들어 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누룩으로 발효시킨 것입니다. 발효를 많이 시킬수록 시큼시큼하고 소화가 잘됩니다. 때때로 양식(洋食)을 하러 가보면 하얀 빵, 시큼한 빵 등 여러 종류의 빵이 식탁에 놓여 있습니다마는 저는 일부러 누룩을 많이 넣어 발효시킨 시큼한 빵을 골라서 먹습니다. 확실히 그쪽이 소화가 잘됩니다. 맛이 조금 시큼하고 이상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사람들은 매일 누룩을 먹고 삽니다. 오늘날처럼 빵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빵이 아니라 주부들이 가정에서 매일 손수 만들어내는 빵입니다. 빵을 만들 때마다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발효시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사람에게는 누룩은 매일같이 경험하는 것이요 보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적이요 보편적이요 항시적입니다. 단 하루도 누룩을 접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이 소재는 가장 좋은 소재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있는 누룩 이야기의 깊은 뜻은 이렇습니다. 갈라디아사람들은 본래 착하고 앞으로도 착할 줄로 믿는 사람들인데 어디선가 못된 것이 들어와서 이 장난을 쳤구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밖에서부터 무엇인가 못된 것이 들어왔다고 이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누구인가 못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밖에서부터(from outside) 말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재고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 세대들 아주 착합니다. 어제도 기도원에 가서 수양을 하고 있는 우리 대학부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예쁘고 착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착한 아이들이 거리에 나서면 바락바락 데모를 하고 화염병을 던집니다. 본래 그런 아이들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아이들입니다. 어쩌다가 잘못된 사상이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밖에서부터 들어왔습니다. 내부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잘못 지도하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만 여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불쌍히 생각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누룩 이야기를 꺼낸 것도 다름이 아닙니다. 전혀 뿌리가 다른, 본질적으로 다른, 근본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 밖에서부터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더 아름다워보이지만 사실은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릅니다. 종자가 다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아주 마귀적인 것입니다. 밖에서부터 떡하니 들어와 있는 이것에 그만 홀렸습니다. 잠깐 유혹에 빠졌다고 상황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룩에 비유한 것입니다. 너희는 나쁘지 않은데 밖에서 들어온 나쁜 사상에 잠깐 미혹되었다-어떻습니까? 어떠한 사람을 대하든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이러한 시각으로 상황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누룩은 소량이라도 점점 넓게 퍼지는 성질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누룩은 적은 것에서부터 점점 부풀어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찮고 미미해보여도 밀가루 속에 조금만 넣어놓으면 하룻밤 사이에 좍 퍼집니다. 순식간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소리없이 조용히 퍼져 들어갑니다. 온 가루가 전부 누룩으로 화해버립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강력한 전염성을 가졌습니다. 율법주의라는 것을 피상적으로 보면 좀더 잘 믿자는 이야기로도 보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아유, 믿음만으로 되나요? 행함이 있어야지." "요새 예수 믿는 사람들 보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엉망이어서 걱정이에요."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그사람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이 남 비판을 잘합니다. 자기 생각은 안합니다. 자기는 예외입니다. 여러분, 행동으로 평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중생하였느냐'입니다. 행함을 고치려고 하면 고쳐집니까? 속이 변해야 고쳐집니다. 그러므로 행함만으로 논할 것이 아닙니다. 선행을 하라, 사랑하라, 봉사하라-입이 닳도록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마음속에서부터 말씀을 받고 영을 받고 성령을 받고 중생하여야, 그때 비로소 사랑할 마음이 생기고 봉사할 마음도 생깁니다. 마음이 없는데 봉사하랜다고 봉사가 됩니까? 언젠가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들어가다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라고 써붙인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별소리를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디다. 누가 하라 마라 하게 생겼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근본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으로부터 저절로 사랑이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한번 더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행함을 생각하다가는 자칫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행함이 어쩌고저쩌고 합니다마는 행함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것도 그럴듯하고 저것도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그 속은 아무도 모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의로운 것 같으나 그 동기가 불순할 수 있습니다. 반면 겉으로 보기에는 실수하는 것 같으나 그 깊은 내면에는 남다른 고투와 의로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겉만 보고서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비평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에 기울어지면 더 잘 믿자, 봉사하자, 선행을 하자고 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은 선행만 남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은 온데간데없어집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소중한 교리마저 잃어버리고 맙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가 은혜의 시각에서 보면 모든 일이 은혜 안에서 주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선행도 은혜요 봉사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사랑의 기회가 있는 것도 은혜요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것도 은혜요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은혜로 보게 되면 선행을 했다고 하여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역시 은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베풀고, 감사하고, 봉사하고 다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은혜주의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자기가 한 것에 대해서 교만해지고 잘못한 사람을 비판하게 됩니다. 어느 사이에 외식주의,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겉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경건을 어떻게 외면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 내면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선행을 합시다, 좀더 의식을 갖추어서 신앙생활을 합시다. 모든 규례를 잘 지킵시다-우리가 쉽게 접하는 이야기입니다. 옳은 말 같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갑니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예수 믿는 것과 할례받는 것이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자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둘 다 하니 좋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드문 일이지만 결혼식 날짜를 미리 잡고서 제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날이 아니면 절대 안된다고 우깁니다. 또 어떤 이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날이어야 좋다고 하던데요" "정말 꼭 그날에 해야 되겠습니까?" "좋은 날이 좋은 날 아닙니까?" 여러분, 어떻습니까? 목사님에게도 좋고 무당에게도 좋은 날, 교회에도 좋고 세상적으로도 좋은 날-여기에는 핍박은 없겠습니다마는 얼마나 무서운 함정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한발 뒤로 물러서면 예수는 없어지고 형식주의만 남게 됩니다.

누룩에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자꾸 퍼져 나갑니다. 온 뭉치에 소리없이 전염됩니다. 아시다시피 좋은 종자는 가꾸기도 힘들고 가꾸어도 잘 자라지 않습니다. 나쁜 종자는 심지 않아도 잘 생겨나고 가꾸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잡초는 심지도 않고 가꾸지도 않고 거름을 안주어도 잘 번식합니다. 나쁜 습관도 같습니다. 고치려고 애를 써봐도 어쩌다가 불식간에 툭툭 튀어나옵니다.

운동을 한다고 해봅시다. 이러이러한 요령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마는 그것이 몸에 익혀지지 않습니다. 몸에 밴 나쁜 습관이 자꾸만 나옵니다. 잡초는 잘 자라게 마련입니다. 나쁜 성격은 그 뿌리가 깊습니다.

자꾸만 원점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요 세상의 자녀였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자꾸 옛사람이 들먹거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것으로 돌아가기가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갓태어난 호랑이 새끼를 어미에게서 떼어다가 우유를 먹여 키우면 마치 강아지처럼 키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순하고 착하답니다. 그런데 한번이라도 어미 호랑이를 만나 냄새를 맡게 하면 한 시간도 못되어 도로 호랑이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걷잡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담배를 안 피우던 사람은 담배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 끊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수십 년 동안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 기간이 십년이나 됐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한대라도 피우게 되면 다시 애연가로 돌아가버립니다. 그래서 끊기가 어렵습니다.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는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슬그머니 전체로 퍼집니다. 이상하게도 좋은 소문은 잘 안 퍼집니다. 사람들이 질투가 많아서 그런지 좋은 소문은 전달하기를 싫어하나봅니다. 나쁜 소문은 입에 잘 오릅니다.

듣기도 좋아하고 말하기도 좋아합니다. "걱정이 돼서 그래요. 우리끼리만 압시다." 걱정이 되면 입다물고 혼자 걱정할 일이지 왜 돌아다니며 전파하는 것입니까? 큰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나쁜 소문이라면 듣기도 좋아하고 전하기도 좋아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누룩과 같이 좍 퍼져나가는 현상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12)." 스스로 베어버리라고 합니다. 누가 베어버리느냐-문제를 일으킨 자 스스로 베어버리라, 어지럽게 한 장본인이 베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예 그로부터 관련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용서가 없습니다. 두고보자, 천천히 기다려보자 하다가 심령이 황폐해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손해는 자기가 봅니다. 마지막에는 기도마저 못하게 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함정에 깊이 빠져들어가 옴짝달싹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룩을 베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만큼 썩었으면 이만큼 베어내야 합니다. 아무리 아깝더라도 잘라버려야지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신체 가운데에 썩은 부분이 생기면 반드시 잘라내야 합니다. 손이 썩었으면 손이 아무리 귀해도 자릅니다. 다리도 자릅니다. 가차없이 잘라버려야 합니다. 몸 전체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더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괴롭더라도 잘라버려야 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어지럽게 한 본인들이 스스로 자르라-만약에 본인들이 스스로 잘라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손수 자르십니다.

그때에는 굉장한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잘라내야 합니다.

요한이서 110절에서는 이단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잘못된 사람인 줄 알면서, 누룩과 같은 사람인 줄 알면서 괜히 인사하다가 자신도 빠져듭니다. 이렇게 당하는 사람이 어지간히 많습니다. 인정이 너무 많고 박애주의자가 되어서 마귀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사랑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스스로 베어버려야 합니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하고 강하게 말씀합니다.

심판을 받으리라-만일에 저들과 가까이하다가는 저들이 심판받을 때에 너도 함께 심판받을 것이니 미리 관련을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래에 지녔던 그 순수성과 깨끗한 믿음을 지켜라, 처음에 가졌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끝까지 지켜라-이것이 사도 바울의 당부입니다. 오늘도 이 누룩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누룩에 감염된 부분은 단호히 베어버리고 순수하고 깨끗한 무교병(無酵餠)으로써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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