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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과 도둑(마태복음 6 : 19 - 2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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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과 도둑(마태복음 6 : 19 - 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마태복음 5,6, 7장을 내용으로 하는 산상 보훈 중의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산상 보훈의 말씀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 나머지 어떤 경우에 온 성경이 다 없어진다 하더라도 산상 보훈만 있으면 예수님의 마음과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조금은 지나칠 정도의 표현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튼 이 산상 보훈에 나타난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도 아주 핵심되는 소중한 말씀들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믿어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계명이며 그리스도적 계명입니다. 혹은 표현을 조금 달리하면 크리스천 도그마(Christian dogma)로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교리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생활을 어떻게 하고, 기도는 어떻게 하며, 네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조목조목 상세하게 일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물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물질 생활을 하고 삽니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며 거처할 집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의식주에 매여 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하며 수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생활 문제를 놓고 그리스도인의 물질 생활은 어떠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적인 물질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만 이원론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나와서는 신령한 생활을, 집에 돌아가서는 속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매우 잘못된 생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이란 일원론적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생활도 신앙적으로 해야 할뿐더러 물질 생활도 신령하게 신앙적으로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육체적인 생활을 비롯한 종합적인 삶 자체가 신앙적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적인 생을 살아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윤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윌리암 팀플(William Temple)같은 이는 "기독교는 모든 종교 중에 가장 물리적인 종교이다"라는 말까지 한 것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종교들이 정신 세계에만 집착하여 물질 세계는 속된 것으로 별개시하는 것에 반하여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물질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물질 세계는 곧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세계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세계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물질에 대한 문제가 완전히 신앙적으로 소화되어야 하고 해석되어야 하며 또한 그렇게 쓰여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신앙 생활을 여러 면에서 잘하려고 애쓰는 분들 중에서도 이 물질 생활을 잘못함으로 종내는 신앙 생활 전부가 잘못되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됩니다. 이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것은 다 신앙적이고 좋은데 물질 생활에는 정직하지를 못하고 신앙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인은 물질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이 문제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매우 깊은 원리를 들어 귀중한 말씀을 담아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먼저 총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본문에 나타난 좀과 동록과 도둑이라는 말입니다. 이들 모두가 하나의 비유 같지만 사실 예수님의 의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언제나 그러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예외 없이 명석하게 구분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목적은 하나요, 그 깊은 뜻은 같은 것이지만 분석적으로 보면 좀과 동록과 도둑, 이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셋이 합쳐진 뜻은 한 마디로 말해 물질이란 순간적인 것일 뿐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 보았댔자 결코 그중 하나도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끝까지 붙들 수도 없거니와 좀이 먹고, 녹슬며, 도둑이 가져가고 한다면야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물질은 잠깐 나에게 맡겨준 것일 뿐입니다. 이를 두고 청지기라고 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물질이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나와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 가치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의 여유가 있게 되면 이 돈으로 어떻게 하면 좀 오래, 그것도 유익하게 관리할 수 있을까 하여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해봅니다마는 그렇게 확신 있는 길이 생각되지를 않는답니다. 땅을 사 두자니 재산세다 공한지세다 하여 세금만 많지요, 한창 프리미엄(premium)을 붙여 소동을 피우던 집 문제만 해도 값이 그렇게 자꾸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집이란 별수 없이 아무리 좋은 집이라 하더라도 세월이 가면 싸지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값을 좀 많이 받았다 하면 그 또 양도소득세라는 것이 있어서 제대로 돌아오는 몫인들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안되겠고, 그렇다고 은행에 넣어 두자 하니 인플레(inflation)만 자꾸 되고 또한 비밀구좌를 만들어 멀리 스위스 은행에라도 넣어 둘까 해보지만 그랬다가는 어느 순간 내가 죽으면 그 돈 다 누가 가질는지 모르겠구나 생각되어 여기에도 저기에도 마음을 정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청빈 낙도라는 것입니다. 아예 아무 것도 없는 것이 편한 일이지 그것을 붙들고는 "이것 어디에 둘까?"에 신경을 쓰다가 속병까지 들어서는 종내에는 병원 출입을 하다가 그 돈 다 써버리고 말게 되니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이처럼 재산이란 보관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돈이란 벌기가 힘들다지만 지키기도 힘이 들고 쓰기는 더욱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일,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일에 쓰기가 그리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물질의 문제는 참으로 어렵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깊은 의미를 담아 이 비유의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이 물질이 결코 나의 것이 아니며, 내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순간일 뿐 어느 사이에 남의 것이 되고, 없어지며, 그 값어치도 점점 하락되고 마는 것이니 이제는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쓰며 살라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은근하고 듣기 좋게 그러면서도 두고 두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옷을 만지다가 좀먹은 것이 있으면 "그렇지 예수님께서 좀이 먹는다고 하셨지!" 또한 그릇들을 챙기다가도 시꺼멓게 녹슨 것이 있으면 "이래서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녹이 쓴다고 말씀하셨다니까" 혹은 남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그대로 떼이었거든 "이것 봐. 예수님께서 도둑맞는다고 그러셨는데 도둑이 따로 있나 이것이 도둑이지 뭐"하면서 순간 순간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늘 새롭게 예수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뇌성이 들여오듯이 내 귀에, 내 마음속에 분명하게 들려올 수 있어야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떤 때에 보면 돈을 떼이고서는 빼앗겼다며 울고만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쓸 데 쓰지 않으면 빼앗길 것이라며 예언하신 바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진작 몰랐더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배당 안에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옷을 챙기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시장에 가서나 사무실에 앉아서나 어떤 사건을 만날 때마다 "바로 여기에 그 말씀이 응했구나!"하면서 내가 이 말씀을 왜 진작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살지 못했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셨고 또한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좀이 먹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야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봅니다. 좀이란 잘 아시다시피 옷을 갉아먹는 벌레입니다. 요즈음의 옷감에는 광물성으로 된 것이 많아서 좀이 먹을 수 없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마는 옛날 자연섬유로 만든 옷감은 의례히 좀이 먹기 마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옷이라는 것이 당시에 있어서는 특별히 부의 상징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긴 옷이 날개라는 말과 더불어 오늘날에도 옷의 종류에 따라서는 부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경쓸 것까지는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옷을 바꿔 입을 줄 잘 모르다보니 한번 입었다하면 한겨울 내내 입고 다닐 정도로 옷에다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한번은 국민복을 입고 조선호텔에 들어가는데 수위가 "여보시오"라며 불러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왜 그러시오"하며 언짢게 한 마디 했더니 "가십시오"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이 옷을 헐하게 입은 저의 모습을 보고는 뭐라고 할 모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옷을 보고 사람을 말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고 옛날에는 아예 확실한 신분제로 옷을 입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는 색깔까지 왕족, 귀족, 천민, 노예 등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자기 신분의 색깔 외에는 입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옷이야말로 자기 신분을 더욱 더 높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서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이 은 이백세겔과 금덩이 하나, 그리고 옷 한 벌을 훔친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처럼 당시에 있어서는 한 벌의 옷이 그렇게도 귀했고 요즈음 우리들처럼 철철이 옷을 바꿔 입거나 매일처럼 빨래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귀하기가 얼마나 심했든지 옷 한 가지로 삼대를 입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의 형편에도 어려운 때가 있었음은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때문에 혼수라는 문제가 생겨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부인들은 시집갈 때 명주다, 광목이다 해서 바리 바리 싣고 가서는 시집에서 옷 한 벌 얻어 입지 않고 그것으로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같은 세상에도 혼수에 욕심을 부린다면 그것처럼 바보스러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어쩌다 1년에 한번 입을까 말까 한 것, 게다가 옛날처럼 한복이라면 그렇게 유행을 타지 않아도 되겠는데 이건 짧았다가, 길었다가, 넓었다가, 좁아졌다 하며 변화가 무쌍하지 않습니까? 그저 그때 그때 필요한 대로 바꿔 입으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옷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옷을 많이 해 가는 풍속이 생긴 것은 그만큼 옷이 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돈이면 당장에 해결이 되지마는 옛날에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옷을 준비하고 그것도 되도록이면 명주 같은 값비싼 비단으로 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는 그 값비싼 비단에 더욱 값을 올리기 위해 때로는 금과 은을 섞어 짜거나 수를 놓아 번쩍번쩍하는 옷을 입고 다녔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 옷에 대한 자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겠습니까? 아무튼 이런 값비싼 옷들을 해 놓고는 그것을 두고 두고, 오래 오래 입겠다고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웬걸 어느 날 꺼내 보니 그만 좀이 먹었더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도 보면 "들어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1-3)라고 하셨습니다. 옷은 입어야 하는 것이요, 내가 안 입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입어야 하는 것이 옷인데 이것을 오래 오래 혼자 두고 입겠다며 장 안 깊숙이 쌓아 놓았더니 뒤에 보니 좀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르게 표현하면 좀이 먹은 옷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할 시간에 주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냐? 마땅히 나 아닌 타인을 향해 써야 할 물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그것이 증거가 되어 말세에 심판을 받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바자회 때에도 자주 드리는 말씀입니다마는 집에 두고 쓰지 않는 물건이나 옷을 어쩌다 보면 그냥 두고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것을 빨리 내어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자는 것이지요. 만일 그대로 두고 죽으면 말씀대로 심판의 요소가 될 것이란 말입니다. 사실 돈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세상 떠날 때는 깨끗이 없어져서 플라스(plus), 마이너스(minus)하여 제로(zero)가 되어야지 그때 가서도 많이 남아 돌아가면 하나님 앞에서의 책망을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돈을 주었을 때는 좋은 일에 쓰라고 준 것이지 꾸역꾸역 모아 두었다가 그렇게 죽으라고 하더냐?"며 크게 책망하실 것이란 말입니다. 재산은 써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보면 바이올라라는 호텔(Biella Hotel)이 있는데 그 호텔의 맨 꼭대기에는 양로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양로원은 나이 많은 노인들이 들어올 때 얼마 이상의 재산을 다 넣고 들어오면 그 다음부터는 매달 100불씩의 용돈을 주고, 그 외 병원비 식비 등 필요한 모든 보살핌과 장례식까지 다 맡아서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맡겨진 돈은 바이올라호텔 오픈 도어 처치에서 맡아 가지고 그 전부를 선한 일에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죽을 때까지 필요한 기본적인 것만 남겨 놓고는 다 써 버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나이 많으면 뭐 그렇게 쓸 것이 많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깨끗하게 오늘 이 순간에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가서 "다 주고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은 것, 좀먹은 옷이 내 장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책망하시는 말씀이 성서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3:28, 27:16, 5:9, 51:8).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동록, 곧 녹이 슬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인 보화란 그 어느 것이든 영원한 것이 못 됩니다. 이 보화란 시대를 따라 한갓 곡식일 수도 있고 찬란한 보석일 수도 있습니다마는 어느 한 가지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왜냐 하면 이를 어디에 두어야 안전하고 또한 어떻게 보관해야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밖으로부터 녹이 슬고 안으로부터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히 점진적으로 서서히 가치가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옷이 귀하다지만 그것도 젊었을 때의 말이지 다 늙은 다음에야 번쩍거리는 옷을 입었다고 하여 제대로 어울리기나 하겠습니까? 우리가 집이다, 뭐다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체 몸이 낡고 보면 그것도 나를 위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붙들고 있어봤댔자 그 가치는 계속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무가치하게 되고 필요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녹이 쓴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도둑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둑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도둑질이란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인데 이것은 소유권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의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강제성을 띠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지도 않고 원치도 않는 때에 어떤 이유나, 어떤 과정에 의해서 빼앗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다른 것인데 그만 빼앗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일에 있어서도 내가 즐거워하는 마음에서 먼저 주면 그것은 주는 것이고 애들이 자꾸만 조름으로 그것에 못 이겨 억지로 주었다면 그것은 빼앗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빼앗긴 것과 준 것! 어느 쪽이 더 많은가를 말입니다. 대체로 보면 빼앗긴 것이 많지 좋은 마음으로 선뜻 내어준 것이 얼마 되지를 않을 겁니다. 체면 때문에 빼앗기고, 싸우기 싫어서 빼앗기고, 친척에게 빼앗기고, 자식에게 빼앗기고, 그러고 보니 다 빼앗겼습니다. 진정으로 내 스스로 일부러 찾아가서 이것 좀 쓰세요 한 적이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3년 전인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성탄 헌금 들어온 것을 가지고 가난한 결핵 환자촌을 찾아 얼마를 도와주었더니 거기 책임자가 하는 말이 청구서를 사방에 내면서 애원을 하며 달라고 해도 잘 주지를 않는데 자기 발로 찾아와서 이렇게 큰돈을 주는 것은 제 생전에는 처음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딘가에 이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을까 하여 스스로 찾아가서 도와주는 그것이 진정 준 것이지 주세요, 주세요 해서 준 것은 빼앗긴 것이지 준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진정으로 내어 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빼앗긴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누가 복음 1233절에서도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도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며 비슷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결국은 이 모두가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종교 신앙의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사람이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무엇인가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그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자식을 너무 사랑하면 자식이 신()이요, 돈을 사랑하면 돈이, 명예를 사랑하면 명예가 나의 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서 조금 더 이어나가다 보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돈이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돈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주인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돈을 섬기는 자처럼 불쌍한 사람은 다시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하나님이냐? 맘몬(Mammom)이냐? 그 둘 중 하나일 뿐이란 말씀입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이 신의 위치에까지 올라갑니다. 가만히 보면 요즈음 세상은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위에 있고 지식보다도 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좌우간 하나님 다음만 되어도 좋겠는데 하나님 위에까지 올라가니 그것이 걱정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돈의 위치가 이렇게까지 높이 올라간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돈이 없어서도 안될 세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더 돈에 대하여 초연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비참할 정도로 돈의 노예가 되어 버렸고 돈이 신으로 화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러한 돈과 물질에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물질대로 있었으면 좋으련만 물질과 마음이 이렇게 교차가 되고 나아가서는 하나가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 후서 1214절에 보면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고 사도 바울은 호소하고 있습니다. 물질이 아니라 마음이란 말입니다. 내가 구하는 것은 너 자신이지 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물질과 인격을 두고 볼 때에 언제 어디서나 인격과 그 마음을 보다 위에 두어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이 물질에 끌려서 행동하는 물질 노예의 생활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욱 명심할 것은 물질이 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그 보물을 누구를 위하여 쌓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땅 위의 축적! 이것은 이기적인 축적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돈을 저축한다는 자체가 잘못되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 누구를 위하여?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이것이 무모한 것입니다. 생명의 한계성 대문에 무모한 것이요, 좀이 먹고 녹이 슬며 도둑이 가져갑니다. 사실 나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로 이점을 빨리 깨닫고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언젠가는 그 모두가 남의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재물이란 아예 처음부터 모두가 함께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일용할 양식이요 다 같이 먹어야 할 양식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쌓아 두는 곳이 문제입니다. 어디에다 쌓아 두느냐? 다시 말하면 어디에다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 쓸 기회가 있을 때에 써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 많은 분들이 흔히들 말하기를 "내가 한때는 돈 좀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에 내가 지금처럼 예수를 잘 믿었더라면 좋은 일 좀 할 것인데 이제 다 없어진 다음이니 마음뿐이지 뭐가 있어야지요 뭐"라며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글쎄요, 그 분에게 지금 그 돈이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문제는 쓸 수 있을 때에 써야 하고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지를 못하면 좀먹고, 녹슬며, 그리고 빼앗기기 마련인데 이것이 곧 심판인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618-19절을 보면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 된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는 말씀입니다.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귀한 일에 쓰여질 때 귀한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정말 어떤 때에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내지 않습니까? 좋은 일에 쓰여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나쁜 일에 쓰여지면 그것처럼 추하고 나쁜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그곳은 안전한 곳이요 영원한 곳이며, 길이 길이 생명을 구하는 일에 쓰여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보화라는 말을 우리 인간의 실체를 두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의 몸도 건강도 모두가 다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보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에 비교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별수 없이 좀이 먹는 것이지요. 그래서는 자기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그만 주름살이 생기고 흰머리가 나며 허리가 굽어지고 이빨은 흔들거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좀이 먹었는가 하면 이제는 이런 저런 병으로 시달리며 때로는 째고 깁고 자르고 하다가는 더 낡아지면 내다 버리게 되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녹이 슬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보링도 하고 수리도 하다가 정 나쁘면 폐차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죽음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도둑입니다. 갑자기 오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서서히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않는 사이에 그야말로 도둑처럼 들이닥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에 그 호흡이, 그 생명이, 딱 끊어지고 맙니다. 이처럼 죽음이 옵니다. 도둑이 옵니다.

그렇다면 좀이 먹기 전에, 녹이 슬기 전에, 물론 도둑을 맞기 전에, 이제는 무엇인가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하늘에 있어야 하고 신령한 것에 있어야 하며 영원한 가치의 것을 위하여 우리의 몸도 마음도 바쳐지고, 그리고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능력, 우리의 물질도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가장 귀한 인격이 될 수 있고 가장 귀한 물질이 될 수 있으며 가장 귀한 생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치 창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높은 가치를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진 바 보물이 무엇입니까? 지식입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그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름이 아닌 바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거기는 그 누구도 손댈 수가 없는 하나님의 보고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영원을 준비하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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