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접붙임 받은 감람나무(로마서 11:13-24)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 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 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로마서의 맥락을 보면 1장부터 11장까지는 어떻게, 혹은 무엇을 믿느냐하는 교리에 대한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12장에서 마지막 16장까지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하는 윤리적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9, 10, 11장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개인적인 큰 고민으로 안겨진 바를 설명하고 있는 그러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장에서 사도 바울의 놀라운 지혜와 굉장한 신앙고백, 그리고 매우 놀라운 경륜에 대한 이해 등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엇을 고민하며 어떤 환상을 가졌는가 할 때 그 내용은 이러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을 졌다고 생각하는 사도 바울로서는 왜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매우 큰 고민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부분이며 저 자신도 항상 그런 생각을 해 온 터였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9장, 10장, 11장을 읽으면서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유대 사람과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라도 안 믿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이유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를 믿을 수가 없을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민족이라 하여 2천 년 내내 무조건 핍박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의 흑인들은 특별히 유대 사람을 매우 미워한다고 합니다. 상당히 오래 전에 발표된 것이긴 합니다만 유대 사람에 대한 하나의 스페셜 이슈(special issue)로서 나온 "왓 이즈 쥬(What is Jew?)"라는 논문에 의하면 흑인들이 유달리 유대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인데 그 첫째 이유는 저들과 같이 마이너(minor)의 중요지 않은 위치임에도 자기들은 못살고 유대 사람들은 잘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문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후손이라 하여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의 일을 두고 오늘날 그 후손들을 미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마는, 어쨌든 이러한 종교적 감정으로 인해 유대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독일의 히틀러가 600만의 유대인을 죽인 참극도 유대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기독교인이 유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어떻게 예수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당시부터 유대 사람들이 왜 예수를 믿지 않는가를 고민하며 깊이 생각한 나머지 몇 가지의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론의 첫째는 유대인도 마지막에 가서는 반드시 믿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버리실 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한 결론은 이방 사람들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하여 유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만약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먼저 예수를 믿고 기독교를 자기네들의 민족적 종교로 받아들였더라면 먼 이방의 우리는 예수를 못 믿을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박해함으로 이 나라 저 나라로 흩어져 피신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됨으로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을 통하여 당신의 전도자들을 이방으로 파송하십니다. 그리고 핍박을 통하여 복음 선교를 가능케 하며, 핍박을 통하여 복음의 순도를 높이십니다. 그러므로 핍박 중에 전하는 복음은 순수하며 여기에는 전혀 잡스러운 것이 첨가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핍박을 받으면서 쫓겨다니는 사람이 전도를 하면서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런 말을 하고 다닌다면 "당신이나 복받으시오."라는 말을 듣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핍박 중에 전해지는 복음은 언제나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신비로운 뜻까지도 헤아리면서 유대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이방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세 번째의 결론은 이방 사람들이 다 믿게 되면 유대 사람들이 시기하는 마음이 생겨 믿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수천년 앞의 일을 내다보았으며, 이것이 바로 로마서 9, 10, 11장의 주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이요, 환상이며 그리고 굉장한 신학과 신앙 고백입니다. 모든 일을 이만큼 깊고 멀리 내다 볼 수가 있다면 문제가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이런 주제를 놓고 오늘 본문에서는 나무에 접을 붙이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식물학자가 아닌 저로서는 접목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득불 이에 대한 기본적인 두 법주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먼저 일반적으로 접붙임을 할 때에는 서로 비슷한 종류의 나무끼리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랄 때에 보면, 가정에서는 보통 감나무 같은 것을 접붙일 때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무튼 접붙임을 보통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에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뭇가지를 접붙이어서 진액이 통하게 하므로 그 나무 전체로 하여금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접붙임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아닌 특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이 저들의 풍속에 의하여 감람나무를 접붙이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여기에 좋은 참감람나무가 있고, 저기에는 열매를 제대로 맺지도 못하는 야생의 돌감람나무가 있을 때에 좋지 않은 돌감람나무의 가지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히게 하기 위하여, 그 가지를 잘라 좋은 감람나무의 가지를 잘라낸 자리에 붙여 놓고 진액을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은 참감람나무의 진액이 좋지 않은 돌감람나무의 가지로 올라가면서 그 가지도 좋은 감람나무로 변하게 되어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돌감람나무가 여기에 있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은 감람나무의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느냐 할 때, 일단 그 좋지 않은 돌감람나무에 붙어 있는 동안은 아무리 거름을 주고 농약을 치며 별 짓을 다 해도 그 종자, 그 뿌리에 붙어있는 한 별 재주가 없다고 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좋지 않은 감람나무가지에서 좋은 감람나무 열매를 얻으려면, 일단 좋지 않은 감람나무에서 잘라내어 좋은 감람나무 줄기에로 옮겨 붙여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좋은 감람나무의 진액을 받아 과거와는 달리 좋은 감람나무로 바뀌어지면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비유의 맥락입니다.
그러면, 그 뜻하는 바의 의미가 무엇인가 할 때 먼저 참감람나무란 이스라엘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잘 가꾸어진 민족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나 도덕, 인간성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오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시적으로 훈련된 훌륭한 민족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지칭하여 참감람나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방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비교해 보면, 역시 이스라엘 사람은 아주 훈련이 잘된 민족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수성을 극구 주장하는 이들의 학설에 의하면, 인류의 모든 좋은 문화는 전부 다 이스라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철학, 종교, 특별히 유일신 사상에 의한 신앙과도덕적인 모든 종교가 다 이스라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신학을 연구하면서 보아도 신학의 주제가 되고 내용을 이루고 있는 사상들의 전부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에서 기인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요즈음에 와서 관심을 끌고 있는 해방 신학이라는 것도 실은 그 뿌리를 이스라엘에 두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연구하는 바 과학의 바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물론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 것도 없지는 않지만, 발전적인 세계 문화의 기원이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 뿌리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한 가지 사실은 이 참감람나무란 잘 가꾸어진 감람나무라고 하신 사실입니다. 이 감람나무는 그냥 아무렇게나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많은 환란과 역경을 겪으면서 좋은 감람열매가 맺힐 수 있도록 오랫동안 잘 다듬어진 나무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돌감람나무는 감람나무는 감람나무이지만 내버려진 채로 자라온 야생적 감람나무입니다. 그래서 잘 자라지도 못했고 모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 감람나무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자니 열매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태의 병리적인 나무가 되어버린 그러한 감람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이 돌감람나무란 완전히 이질화된 그런 의미에서의 감람나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성서는 이방 사람을 가리켜 이 돌감람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접목의 문제입니다. 접목이란 양적인 변화가 아닌 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맺지 않는 것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제 주인은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잘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며 돌아본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종자가 변하거나 뿌리가 바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있는 포도나무 그 자체를 두고 더 잘 맺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양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감람나무의 접붙이는 이야기는 질적인 변화, 곧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가 된다는 것은 본질적이요 생명적이며 근원적인 변화를 가져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야생적인 돌감람나무가 잘 가꾸어진 참감람나무로 변화되는 이 과정이 물리적 변화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양적인 변화를 위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성경이 말하는 바의 요점은 완전히 생명적인 질적인 변화가 있고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접붙이는 과정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돌감람나무 가지가참감람나무 가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돌감람나무의 줄기에서 일단 끊어져야 합니다. 이 끊어진다는 것은 잠깐 죽는다는 것이며, 이는 매우 중요한 우선적 과정입니다. 그런 이후에 비로소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참감람나무에게 붙어서 그로부터 진액을 받음으로 접붙임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접붙임의 두 조건을 말한다면 첫 번째는 전에 붙어있던 나무로부터 끊기 움을 당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조건으로는 새로운 생명체인 좋은 나무에 가서 완전히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접붙이를 할때 보면 아주 튼튼하게 묶어서 한 순간도 어긋나거나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 두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렇게 하여 얼마간을 지냄으로 완전히 붙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붙어 있지를 못하고 조그만 틈이라도 생기게 되면, 그 가지는 시들고 병이 들어 접붙임을 이룰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접붙임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하나 생각해야 될 문제는 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가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돌감람나무의 가지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해야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주인은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잘 둘러본 다음 가장 신통치 않은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사정없이 끊어 버리고는 그 자리에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접붙임이란 그대로 가져다 비끄러매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접붙임이란 일단 한 가지를 잘라낸 후에야 다른 가지를 붙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로 이 과정에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이 과정을 생각함은 이방 사람을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사람이 믿지 않게 되는 희생을 치루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비록 신통치는 않다 하더라도 엄연히 참감람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인데 돌감람나무를 위해서는 그 가지가 잘리어야 하고 그 잘리운 자리에 돌감람나무 가지가가서 붙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부득불 예수를 거절해야 했으며, 그렇게 하므로 복음은 이방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이 문제에 역점을 두고 계속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계속 노력을 하였으나 그때마다 쫓겨나서 왜 이방 사람에게로 갈 수밖에 없느냐 할 때 그것은 이스라엘이 거절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러면, 이제 조금 높은 자원의 의미에서 기독교인이란 무엇이냐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의 인간이지만 야생적인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내어 굴리게 되면 아무짝에도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질적인 변화의 요구요, 본질적 근원적인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이 육적으로 사는 인간은 죽고 영적으로 사는 인간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이 세상적으로 기울어지는 인간이 완전히 죽어버리고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인간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옛 사람이 완전히 깨어지고 죽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참감람나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신령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를 수십 년 다녔다해도 이 변화가 없으면 중생 못한 문제의 교인이며, 이런 신자는 어디를 가도 말썽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의로운것 같고 열심도 있어 의젓하게 보이지만, 그 속 중심은 아직도 돌감람나무에 야생적인 것이 있어서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이러고 있는 동안은 계속 문제만 있을 뿐 신앙의 열매는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러한 변화는 환경이나 신분의 변화, 혹은 소유나 지식의 변화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변화는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변화이어야 하는 것으로 스스로 혼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행이나 극기 생활을 하며 명상이나 선을 한다하여 이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이 중생의 역사 역시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하여 접붙임을 받고 좋은 열매를 맺은 가지에게는 몇 가지의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는 야생적인 쓸모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아무 것에도 쓸 수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이었더란 말입니다. 어느 때인가 한번 어떤 분을 향하여 다른 한 분이 "당신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렇소?"라고 하였더니, 상대편에서 하는 말이 "내가 예수를 믿었으니 이만하지 안 믿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소?"하고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 인격이라는 것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변화된 중생된 영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자기의 본래를 돌아보며 자긍하지 말고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음으로 앞으로 중생이 되어 오늘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는 그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을 뿐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의 사항은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본래 이 자리에는 참감람나무의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지가 시원치 않음으로 잘라 버리고 그 자리에 돌감람나무의 가지를 붙인 것이고 보면, 열매 맺지 않는 돌감람나무로부터 온 가지를 끊어버리는 일쯤이야 더욱 쉬운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접붙임을 받은 자들에게는 경건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이 두려움을 갖지않음으로 함부로 말하고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무책임한 행동과 말들이 결국은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에게 모두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심판은 무서운 것이며 마음대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접붙임을 받은 네가 건방지게 교만할 것이 어디에 있느냐며 감사와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분명한 지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주의 사항은 떠나온 나무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돌감람나무로부터는 떠나 왔으니 다시 돌감람나무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한 사람으로 죽은 자와 같은 무감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이 세상에 미련을 두며 또다시 그 쪽으로 돌아가 돌감람나무의 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가끔 장사를 하는 분들이 예수를 믿은 다음 "나는 예수 믿어서 손해를 많이 봅니다."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마는 그런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 자체가 매우 잘못된 것임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었으므로 떠나온 돌감람나무의 원 줄기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 네 번째 주의 사항은 이제는 참감람나무에 접붙인 바 되었으니 참감람나무의 원 줄기에 꼭 붙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도 떨어짐이 없이 원 줄기로부터의 진액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진액, 성령의 진액을 계속 받아야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이 들리지 않고 마음의 성령의 감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우리 마음 가까이에서 영적으로 들려지고, 성령이 나를 감화시키심으로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접붙임 받은 나를 위하여 대신 꺾여져 나간 참감람나무의 그 가지에게 결코 멸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하여 예수를 믿지 않는 우대 사람들에게 멸시를 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었다면 믿은 그 자체를 놓고 감사할 뿐이지 다른 사람이 안 믿는다 하여 그를 불평하거나 멸시할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참 생명, 참 존재란 나 스스로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때만이 비로소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참된 인간이 되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살아가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이의 탕자(누가복음 15:25-32) (0) | 2024.03.19 |
---|---|
제 일의 탕자(누가복음 15:11-24) (0) | 2024.03.19 |
지혜로운 건축자(고린도전서 3:10-15) (0) | 2024.03.19 |
질그릇 인생(고린도후서 4:7-11) (0) | 2024.03.19 |
좀과 도둑(마태복음 6 : 19 - 21)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