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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제 이의 탕자(누가복음 15:25-3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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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의 탕자(누가복음 15:25-32)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 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어떤 학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서 자그만치 세 사람의 탕자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집을 나가 탕자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은 이미 밝혀진 탕자입니다. 그런가하면 집을 나가겠다는 부랑아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는 그것으로 끝내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게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어 즐기는 이 아버지! 어떻게 생각하면 정신나간 짓을 하는 것 같은 아버지도 하나의 탕자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아들 잘못 둔 바람에 아버지까지 탕자가 되고만 처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탕자는 오늘 본문에서 보게되는 형님 탕자입니다. 그는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재산을 축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집안에 있으면서도 집을 나간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지만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며, 아들된 특권에 대한 감격이나 고마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에 대한 사랑도 없이 억지로 집안에 남아 있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그 목적이 다른 데 있다고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유산에 대한 탐욕으로 아버지의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아들이라면 이 또한 엄청난 탕자입니다. 이 사람 또한 몇 번이나 회개해야 할 사람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정신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형 역시 탕자라는 말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동생이 돌아오는 동기를 생각해보면 그가 진정으로 철저히 뉘우치고 변화된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종들도 풍족하게 사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러니 이제는 돌아가서 아들이 아닌 품군이나 종으로서라도 배불리 먹다가 죽어야겠다"는 본능적인 생각, 다시 말하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부분이 배가 고파서 돌아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 동기는 그렇게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만 그가 집을 향하여 어정어정 돌아오고 있는데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완전한 아들로 영접을 합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며 신발을 신겨 다시금 권세와 신분을 보장하여 세웁니다. 이것은 결코 그가 아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이 그를 온전히 감싸 덮어서 그를 아들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는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아들은 아들인 자기의 의로 아들된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의를 아들이 힘입어서, 즉 아버지의 의가 아들에게 옮겨져서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하고 꼭 깨달아야할 교리입니다.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이 아들을 감싸 덮어서 아버지의 의로 인하여 부랑아요 탕자인 이 아들이 비로소 아들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냥 아버지의 의를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아무런 수고나 행동, 체면도 없이 받아들인 아버지의 의가 있을 뿐입니다. 생각할수록 몸둘 바를 모를 처지이지만 이제는 그저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서 뻔뻔스러운 것 같지만 좋은 옷을 입고 앉아서 잔치를 받아 먹고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염치없는 아들! 이 뻔뻔스러운 아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염치없고 뻔뻔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서 나아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그렇게 할 때에 동시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 탕자는 그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과 그 의를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말하기를 "구원이란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오직 긍휼이요, 오직 은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의 은총이 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오직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동생의 입장에 비해 이제 형의 태도를 생각해봅니다. 두 형제를 비교하기 위해서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동생은 오직 믿음으로 은혜의 관계에서 아버지 앞에 나아갔고 이 형은 율법적 관계에서 아버지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생은 은혜파요, 형은 율법파인 셈입니다. 언뜻 보기에 동생은 집을 나가 방탕하며 돌아다니다가 거지가 되어 돌아왔으니 형편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는 은혜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형은 집을 나가지도 않았고 재산을 축내지도 않았으며 특별히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당당한 아들이요, 깨끗한 아들로 보입니다. 하지만 내적인 그는 아버지를 율법적 관계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또 하나의 무서운 죄를 짓고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적인 죄요, 이스라엘의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율법적 관계에서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구원받을 만 하며, 나는 아들의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니 당연히 복을 받아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보다 더 악하고 잘못된 생각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동생을 이방인에 비교한다면, 형은 유대 사람으로 비교합니다. 동생을 은혜라고 한다면 형은 율법입니다.

그리고 좀더 깊이, 좀더 가까이 말씀드린다면, 동생은 방금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감격하여 은혜에 충만한 그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형은 예수 믿은지 오래되어 믿는 것이 습관화되었고, 어느 사이에 믿음으로 시작한 것이 율법으로 치닫고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선한 일을 조금 하면서 신실하게 살겠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중에 어느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는 누구나 다 탕자가 돌아올 때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다가 이 탕자가 집에서 1, 2, 계속 지내는 중에 형이 실수하는 이 실수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바로 거기에 걸려있습니다. 예수 믿은 지 오래된 교인일수록 전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10, 20년이 되면 이제는 다 굳어져서 누구에게도 예수 믿으라는 소리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교회에도 나가봤자 시원찮고 안나가자니 꺼림칙하여 그저 들락날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참으로 두려운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동생으로 출발하여 형으로 끝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형 중심의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봐야겠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이 형의 등장이 대단히 극적(dramatic)입니다. 밭에 나가있던 맏아들이 돌아오는 길인데 집 가까이 와보니 웬 풍류 소리와 춤추는 소리가 떠들썩합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고 묻습니다. 그럴 때에 그 종이 대답하는 말이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종은 분명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다고 하였는데, 성경을 보면 이 형은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형이 왜 노한 것이겠습니까? 여러분! 이는 간단하게 알아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동생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노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보면 여러 가지 불만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동안은 그래도 잘 참으며 살아왔습니다만 이제 와서 이 불만이 터지는 것은 동생이 돌아와 환영을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와 같이 못된 심사가 많습니다. 내가 못살아서 문제가 아니라 남이 잘 살아서 문제입니다. 이 때문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우리 사회의 수치스러운 한 심성을 대변해주는 말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여러 곳에 기록하기를 "시기하지 말라, 질투하지 말라, 특별히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쨌든 이 형이 지금 화나고 불쾌한 것은 동생이 너무 환영받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너무 사랑을 많이 받으니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제일 치사한 것과 더러운 죄가 질투하는 죄입니다. 내가 고생하는 것은 억울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잘사니까 억울하고 분해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조심할 것은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 내가 교만하지도 말아야하고 이렇게 분노하는 자리에 들어가서도 안될 것입니다. 지금 형인 이 사람은 크게 잘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가 노하게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그는 돌아온 동생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생각하듯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은 이 내 동생으로 생각하고 반가워했으면 좋았겠는데, 그 순간에도 그는 동생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작 생각한다는 것이 못난 동생을 위해서는 돌아오자마자 잔치를 베풀어주고 아버지를 모시고 수고하며 살아가는 나를 위해서는 잔치 한 번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동생이 돌아온 그 큰 기쁨도 전혀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동생이 돌아왔으면 동생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 순간까지 나를 생각하고 나의 처지를 앞세울 것이 아닙니다. 동생만 생각했다면 그 큰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러지를 못하니 그 큰 기쁨을 놓치게되고 오히려 노를 발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지 못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늘 기다리며 한숨짓던 아버지! 괜히 서성거리며 길목을 지키던 아버지의 모습을 몇 번이고 보면서 슬퍼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어왔을터인데 어쩌면 이렇게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단 말입니까? 아버지의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이 아들이 이렇게 망령된 태도로 나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형은 동생의 마음도, 아버지의 마음도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형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동생인들 얼마나 고통스럽고 거북하겠습니까? 그러잖아도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인데 이렇게되면 바늘방석에 올라앉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정녕 형이 환영해주지 않는다면 탕자인 이 동생은 죄스럽고 부끄러워 이 집안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면 이 큰아들이야말로 형의 입장에서 형노릇도 못하고, 아들 노릇도 못하는 답답한 형이요, 답답한 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그가 그렇게 된 내용이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아버지께 하는 형의 말 가운데 특별히 "이 아들이 돌아오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없이 한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조금 바꾸어 표현하면, 당신의 이 못난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면 내 동생이건만 형의 못된 마음은 이렇게 내뱉고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르기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합니DTXT. 아버지는 말하기를 "네 동생이" 라고 하는데, 이 형은 "당신의 아들이"하고 나옵니다.

앞서 한 종도 "당신의 동생이 돌아오매" 하고 갖추어 말을 하는데, 형은 왜 동생이라 하지 못하고 굳이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말하느냐 말입니다.

문제의 발단이 이렇게 되고 보면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제가 어느 때에 친구의 결혼 중매를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만, 한 번은 그 장모 되시는 분이 저에게 일부러 부탁을 하시면서, 자기 사위의 말버릇 한 마디만 좀 고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한 마디가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분이 사위와 함께 살고있는데 "어머니"라 불러주었으면 정말 좋겠는데 꼭 "장모님, 장모님" 하고 부르는 것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꼭 장모님이라고 해야하는 것이겠습니까? 어머님이라고 불러서 안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저 아내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요, 아내의 동생이면 내 동생이라는 생각을 하여야지, 그렇게 반드시 당신의 어머니, 당신의 아들 해서야 되겠습니까?

좀 거북한 이야기입니다만 무려 20년을 같이 살다가 70살에 이혼하는 것을 보았는데 물론 이 가정은 계속 문제가 있어온 가정입니다. 전처의 자식이 여덟이나 되는 가정에 들어온 계모인 후처는 자기가 낳은 아이는 없는 가운데 전처의 자식들 때문에 항상 불편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헤어지게 된 그 결정적인 마지막 장면이 이런 것입니다. 나가 살고있는 막내아들이 잠깐 다니러 왔는데 점심때가 되어서 그 어머니가 짜장면을 시켜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내아들은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인 아버지가 돌아오자 이 어머니가 하는 말이 "당신의 막내아들이 왔었는데 내가 점심 사주었오. 그러니 그 짜장면 값을 내놓으시오"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70된 노인이 "남은 생이라도 좀 편하게 삽시다" 하고는 헤어진 것입니다.

이 관계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나와의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요즈음에 와서 남편을 보고도 "아빠"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좋은 말도, 바른 말도 아닙니다. 만약 아이가 없다면 무슨 관계가 될 것입니까? 나하고 직선적인 관계에서 여보, 당신이어야 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아무개 엄마, 아빠가 상관이 됩니까? 모르고 부르는 것이기에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말로 따지고 보면 "당신의 아들이" 하는 것과 같은 말인 것입니다. 이는 11의 만남이 아닌 한 다리 건너서 오는 굴절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형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 동생이 왔습니다"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 왔습니다"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네 동생이 돌아오지 않았느냐, 네 동생인데 어찌 내 아들이냐, 내 아들은 곧 네 동생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관계는 이렇게 빗나가는 것입니다. 그가 진정 내 동생이라면 귀한 것입니다만,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대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동안의 불평이 노출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다는 것으로 말머리를 끄집어냅니다. 여기서 여러 해가 몇 해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생이 나간 동안은 분명하나 "여러 해"란 말은 과장된 표현입니다. 그 다음에 "섬겨"라고 하였는데, 헬라 원문 성경에 보면 좀더 강한 뜻으로 "두류오" 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살이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들은 여러 해 동안 내가 아버지 집에서 종살이를 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아버지 집에서 살았건만 얼마나 억지로 살았던지 종살이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들은 오히려 집나간 아들만도 못합니다. 종살이하는 마음 가지고 억지로 살 바에야 차라리 뛰쳐나가고 말 것이지, 무엇 때문에 집안에 남아서 계속 불평, 불만을 삼키며 아버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살았겠어요? 이보다 몹쓸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무슨 아들입니까? 이 아들이야말로 더 무서운 탕자란 말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그 은혜로운 관계를 이 율법적인 관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는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자기가 스스로 지금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스스로 불평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종살이하는 마음으로, 어렵게 어렵게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과 동시에 율법적 관계이기 때문에 여기에 교만이 덧붙습니다. 그 교만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명령으로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설령 아버지가 명령조로 말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충고요, 사랑의 교훈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주인이 종에게 명하는 폭군적인 말로 받아들이고 생각했다면 이 아들은 정말 나쁜 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아들이 하는 말인 즉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 나는 다 지켰습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릴 때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었던 젊은 율법사 말입니다. 그가 지켰다는 율법은 바로 소극적 의미에서의 율법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도적질하지 말라" 했으면 도적질 안할 정도까지는 지켰을지 몰라요. 그러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소극적으로 생각하니까 살인한 것도 없고, 간음한 것도 없고, 도적질한 것도 없다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빈둥거리고 놀았으면 이미 도둑질한 결과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노력하여 벌어먹지 않고 남의 것을 먹었으니까 말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다" 하였는데 그 앞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지켰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자기의 의에 빠지고, 자기의 의에 집착할 때 터무니없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됩니다.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 그러므로 나는 깨끗하다는 이러한 마음! 나는 아버지의 명을 다 지켰나이다 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이 정도 율법주의에 빠져 교만해지면 대체로 보아 불만스러워 합니다. 내가 이렇게 의로운데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는 더 큰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러한 사람은 악해도 부자로 잘 사는데 신앙적으로 깨끗이 사는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느냐는 등의 엉뚱한 생각과 불만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것을 뒤집으면 죄의식에 매이고 맙니다. 그래서는 항상 저주 의식에 매여 두려워하며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율법주의에 매인 이 사람은 자기의 의를 내세운 결과로 이러한 불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하는 말이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합니다. 이것 또한 대단한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나를 즐겁게 한 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산다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어야하고 일하는 자체가 기쁨이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아들의 자격으로 내 일을 내가 한다는 의미에서의 특권적인 즐거움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시고 노는 것만 즐거움으로 생각한단 말입니까? 이와 같이 즐거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불만이 많습니다.

여러분! 엔조이(enjoy) 라는 그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흔히들 행복이나 즐거움은 돈이 많아 이곳 저 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잘 먹고 잘 입는, 그리고 향락적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만 그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즐거움은 돈으로, 물질로 보이는 것으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살면서 아버지의 아들로서 일하는 즐거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하는 그 즐거움! 이 즐거움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즐거움인 것입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을 보면 쉬라고 있는 공휴일을 하루 종일 교회에서 수고하며 보내면서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누가 돈주면서 하라고 하면 안 할 것입니다.

휴식이 따로 없습니다. 하고싶은 일을 하면 그것이 곧 휴식입니다. 듣고싶은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음악입니다. 음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아노를 가르치며 사는 분의 말이 자기는 전축이 있어도 듣지 않고 피아노 소리가 ""하고 나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합니다. 그 분은 이미 음악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사실은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아마추어(amateur) 가 진짜 음악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진작 음악을 전공하여 음악을 직업으로만 하는 사람은 음악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사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즐거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듣고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들으면 그것은 음악이 아닙니다. 거기엔 즐거움 대신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아버지는 나를 즐겁게 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찌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살며 자기 의를 내세우다보니 진정한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보면 아버지의 대단한 인내가 있습니다. 역시 아버지가 아버지입니다. "아무 것도 안 주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면 이제 다 내 것이 아닙니까? 사랑은 내 것이 다 네 것이고, 네 것이다 내 것인 것입니다. 전체를 흥정하고 하나로 묶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 것이 다 네 것인데도 받은 것이 없다니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의 신앙세계를 본다고 하여도 온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라면, 온 세계 또한 나의 세계인 것입니다. 이는 곧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파트에 살면서 정원을 아쉬워하는 분들에게 궁색한 변명이지만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럴 것 뭐 있습니까? 문만 열면 다 정원인데요." 그래서 저는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정원 잘 가꾸어놓고는 담장을 높이 쌓은 집입니다. 정원을 아름답게 잘 가꾸었으면 담장을 좀 낮게해서 나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같이 보며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을 나만 보겠다고 담장을 높이 해놓으니 감옥이 어디 따로 있던가요? 그 곳이 감옥이지. 스스로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동물원의 그 무엇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임자가 따로 있나요? 보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어차피 먹을 것이 아니라면, 남의 저고리를 보고도 좋다 하면 고 순간은 내 것입니다. 한강을 내려다보고도 즐거워하면 그 긴 강줄기가 다 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집착하지도 말고 협소하게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세계가 다 내 것이고, 내 것이라고 쥐어보았자 나 하나 숨지면 끝입니다. 내 것이 안될 뿐더러 사실은 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기에 다 내 것인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이 아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로 아버지가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동생을 비난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아들이라며 그런 아들을 왜 환영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를 보면 아버지의 재산을 아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랍니다. 바로 여기에 이 아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재산에만 신경을 쏟고있는 것입니다. 은 이미 동생이 먹어버렸으니 는 자기 것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이 전체가 내 것이 될터인데, 이 동생 녀석이 다시 들어왔으니 또 빼앗기겠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이 사람이 아버지의 살림을 걱정하는 것은 딴청을 부리는 것이지 절대로 아버지의 살림을 아껴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내 것을 빼앗길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 사랑 없는 비판이 있습니다.

비판에는 언제든지 사랑이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비판은 함정이요 가시와 같은 것입니다.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 형제간의 우애가 아무리 없기로서니 이렇게 마구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정말 좋은 형이라면 그와는 정반대의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아버지, 용서해주세요! 동생도 잘해보겠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써보았겠지만 마음먹는 대로 일이 잘되지를 않아서 이렇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하는 정도가 되어야 형의 자격이 있다고 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형, 이 사람은 일언반구의 그런 말이 없습니다. 몇 년만에 보는 동생이건만 인사말 한 마디도 없이 일언지하에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며 가시 돋친 비판을 합니다. 추호도 용서할 마음이 없으며 전혀 사랑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 없는 비판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전부를 다 한꺼번에 매도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두 다 창기에게 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아들이라고 한 마디로 짤라버립니다. 이것은 실로 무서운 비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이 좀 나쁘게 보인다고 해서 전체를 나쁘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전서 4:8에 보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형은 동생의 미래를 보지 않습니다. 과거를 보고 현재를 보면서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앞으로 회개하여 좋은 동생이 되고, 좋은 아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의 가혹한 판단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고 그 미래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이야 어떻든 앞으로 회개하고 좋은 아들이 되어줄 것을 기대합니다. 재산을 다 잃어버려도 살았으니 반갑고, 기대할 미래가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고 즐겁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형은 물질만 생각하고 자기 몫이 다시 빼앗기게될 것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보지 못하고 동생이라는 귀한 존재를 볼 수 있는 눈도 없었습니다. 끝까지 냉혹한 율법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속에서 결코 동생만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정죄하게 되었으며, 그 심판 앞에서 자기가 또 하나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미처 몰랐습니다.

율법과의 관계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은혜로운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그는 회개하지도 못합니다. 사실 동생은 탕자가 되었으므로 회개하였지만 형은 자기가 탕자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회개도 없습니다. 어쩌면 이 불만 가지고 이대로 살아가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마지막을 보면 참으로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너와 내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옳지 않느냐? 나는 기쁜데 너는 왜 기쁘지 않느냐? 며 이 아버지의 마음에 큰아들도 동의해 주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형이라면 동생이 돌아왔으니 당연히 기뻐해야지요. 죽었던 동생이 살아왔는데 재산이 문제란 말입니까? 당연히 기뻐해야 할 시간에 기뻐하지 못하는 이 사람! 이것처럼 불쌍한 탕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기쁨에 동참하며 더불어 이 기쁨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마음으로는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내 즐거움으로 여기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나도 기쁜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도 기뻐하시는데 낸들 왜 기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있을 때에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아버지의 기쁨을 헤아려 짐작하고 그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을 줄 알 때에 형제의 기쁨을 더하게 하고, 나 자신의 계속되는 기쁨으로 크나큰 행복을 누리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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