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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에 사는 사람들(사무엘하 9:1-8)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사울의 종 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발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죄의 원인 되는 죄를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라고 합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원죄의 성격을 불신앙적 교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불신앙적인 교만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되는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짓는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모름지기 교만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더 큰 죄가 있다면 절망의 죄입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하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교만도 절망도 다 같은 불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죄가 교만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죄가 바로 절망의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배반한다 하는 것은 가장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은총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은총이라는 말은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내리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특별한 사랑을 우리는 은총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흔히 사랑이 있다 없다, 사랑을 받았다 못 받았다 하는 문제들은 전부가 상대적이요 횡적이요 수평 관계에 의한 사랑의 개념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종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란 누가 평가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고, 받았다 못 받았다 하는 얘기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깨닫느냐 못 깨달았느냐 하는 문제만이 있을 뿐입니다.
무한한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는 마치 사랑이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결국 사랑은 깨달아 나갈수록 그 사랑이 점점더 커지는 것을 우리가 매일같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또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관계성 속에 태어납니다. 부모에게 대해서는 지식의 관계로 태어납니다. 형제에 대해서 또 하나의 형제요, 이웃에 대해서 또 하나의 이웃으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홀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천상 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하는 말은 안 통합니다. 혼자만의 사람도 없고 혼자서의 존재도 없습니다.
혼자 태어나지도 못했고 혼자 죽어 가지도 못합니다. 결국 사랑은 복잡한 관계 속에 인연을 맺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그런 관계성 속에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어떤 때는 사랑의 관계가 되는가 하면 어떤 때는 미움의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어떤 어머니는 자식 하나를 얻기 위하여 십 년씩 기도를 하고 간절히 소원하는 가운데에 자식을 얻어서, 감지덕지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키워 나가는가 하면, 애당초 태어날 때부터 바라지 않던 자식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버려지는 기아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태어난다는 자체가 내 마음대로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에서 태어나는 사람, 혹은 원수의 관계로 평생을 사는 사람, 또 하나는 그저 덤덤하게 무관심의 관계로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구석에 있는지 없는지 아는 듯 모르는 듯 사랑도 미움도 없는 무관심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인간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되는 것은 이 사실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미움입니까? 누가 애인이고 누가 원수입니까? 이 관계는 구분하기가 어렵고 또 한 단계 더 나아가 생각하면 이 관계는 변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애인이 내일의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요새 결혼 시즌이라서 결혼식을 많이 합니다. 두 사람이 뜨겁게 사랑하고 새 가정을 이루고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평생 원수가 됩니다. 마음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관계는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아주 좋은 모델이 있습니다. 다윗과 사울, 이 두 사람은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좋은 유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입니다. 다윗은 그 신하입니다. 왕과 신하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사울은 장인이요 다윗은 사위입니다. 장인과 사위의 관계입니다. 그런가 하면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목동을 불러다가 군대의 장관을 삼았고 그 이름을 높여 준 은인이 사울입니다. 은총을 베푼 자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울은 다윗에 대해서 원수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하요 사위인 다윗을 죽이겠다고 왕이요 장인 되는 사람이 직접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피해서 살아 남기는 했습니다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자, 이제 사랑하는 자가 변해서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만이 아닙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 했으나 그 아들 중의 하나인 요나단은 목숨을 걸고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사무엘상 18:3에 보면 생명처럼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 이것은 보통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왕자로서 왕의 지위를 물려주면서 친구를 사랑한 것입니다.
이 세기에 다시없는 모델입니다. 친구로서 최고의 사랑을 나눈 좋은 친구로서 우리는 다윗과 요나단을 들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생각하면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사울 왕은 분명히 원수입니다. 그 아들은 생명처럼 아끼는 친구입니다. 사울 왕은 그 친구의 아버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울 왕은 기름 부음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높은 분입니다.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입니다. 그런데 신하와 사위를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패륜된 사람입니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인간 이하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존경해야 합니까 멸시해야 합니까? 충성을 다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아주 죽여 버려야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입니까, 원수입니까? 이 동시적 관계,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됩니다.
다시 오늘 본문에서 보면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므비보셋은 사울 왕의 손자입니다. 사울 왕을 생각하면 원수의 하나 남은 씨앗입니다. 이제 므비보셋까지 제거하면 사울 왕의 족속이 아주 멸종됩니다. 자, 그러나 목숨처럼 사랑하던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하나뿐인 친구의 하나뿐인 혈족입니다. 이제 이 사랑하는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원수 사울 왕의 손자로 대해야 합니까,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아들로 대해야 합니까?
이러한 복잡한 관계는 사실 생각하면 다윗의 고민만의 아닙니다.
우리 인생사가 다 그러합니다. 어느 관계를 택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느 관계로 생각해야 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동기에 의해서 보는 관계가 있고, 현실만 보고 생각하는 실리적 관계가 있고, 먼 장래를 생각하는 종말론적 관계가 있습니다. 먼 훗날에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느냐, 아니면 현실로 보느냐? 보는 것으로 보느냐, 보이지 않는 그 깊은 면을 보느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섭리를 알고 벌써 이루신 하나님의 큰 은총 속에서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 문제의 해답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왜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수없이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 왕을 여러 번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는 미움을 받으면서도 미워하지 않았으며, 왜 원수를 원수로 대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했습니까? 왜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을 끝까지 기름부은 종으로 높이고 살았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알기 때문에 은총 속에서 모든 사람의 관계를 소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은총으로 대하시기에 은총을 알고 그 은총으로 이 모든 일들을 소화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편으로 생각하십시다. 어느 편으로 생각하느냐, 또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문제는 달라집니다. 사울 왕을 보고 므비보셋을 보면 칼을 들어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보고 므비보셋을 보니까 그를 왕자로 대하게 됩니다. "너는 나와 함께 왕자들과 같이 왕의 식탁에서 평생 먹고 살리라." 이런 은총을 베풀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그리고 이웃을 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큰사랑을 보고 그리고 이웃을 보십시다. 전혀 다른 세계로 다른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다윗은 모든 관계를 다 정리하고 오직 하나님을 보고 요나단을 보고 므비보셋을 본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아주 귀중한 요절이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므비보셋, 이 사람은 절름발이입니다. 그것도 두 발 다 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생각하자면 쓸모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원수의 손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친구의 아들로 그를 영접하게 됩니다. 현실로 본다면 쓸모 없는 폐인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생각할 때에 이 마지막 남은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수가 없었더라는 말입니다. 친구를 대하듯이 그를 대하게 됩니다. "내가 네 아비가 되어 주마." 이것이 다윗의 말입니다.
어느 철없는 어린아이가 밖에 나가 친구들과 싸우는데 싸우다 보면 아이들은 남의 단점을 잡고 얘기합니다. 아이들이 마지막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너의 엄마는 곰보다"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꼼짝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이놈이 울면서 엄마에게 이렇게 행패를 합니다.
엄마는 남의 엄마처럼 왜 미인이 못되느냐 합니다. 누구는 곰보가 되고 싶어 됐나요? 이것 참 답답한 사정이지요. 언젠가 할 수 없이 그 어머니가 사연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어린것을 앞에 놓고 얘기를 합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 유복자로 있을 때 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혼자 살 길이 없어서 나는 어느 공장을 다니면서 일을 했고 너를 숙직실에다 뉘어 놓고 들어가서 일하고 나와서 젖을 먹이며 키웠는데, 어느 날 숙직실에 불이 났다.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불 속에 들어가서 너를 싸 들고 나왔기 때문에 너는 무사했으나 나는 불에 타서 얼굴이 곰보가 되었다. 이래도 보기 싫으냐?" 이 어린아이는 어머니 앞에서 울었습니다. 이제 동네 아이들이 또 얘기를 합니다. "너의 엄마는 곰보다." 이 아이는 자랑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세상에 최고의 미인이다."
나를 향해 지불한 그 희생을 생각하고 그 엄청난 은총을 생각하고 나서 쳐다보니 곰보 얼굴도 천사의 얼굴로 보이더란 말입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은총으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은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뚤어지게 보는 사람은 만사를 다 비뚤어지게 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그 거룩하신 희생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제 십자가 안에서 용서하신 그 크신 은총을 우리가 아는 순간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은총 속에서 보게 됩니다.
탕자가 돌아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와서 아들로 영접을 받는 순간 이제 무슨 불평이 있겠습니까? 오직 그 은총만이 감사할 뿐입니다.
여기에 은총의 윤리성이 있습니다.
은총을 아는 자는 은총으로 사랑합니다. 은총적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이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먼저 있어야겠습니다.
제 사랑하는 친구가 아프리카에 가서 어느 오지에 있는 추장과 일주일을 머물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좋은 인상들을 가지고 예수 믿을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마지막 헤어질 때 추장이 하는 말이 "당신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소. 언젠가 나도 예수 믿게 될는지 모르겠소. 대단히 고맙소." 그래 놓고 하는 말이 "그런고로 내가 오늘 좋은 선물을 하나 드리겠소." 하고는 자기 아내 중에 제일 예쁜 사람으로 하나 골라서 가져가라고 주더랍니다. 안 된다고 하니까 죽이겠다고 그러더랍니다. "내 호의를 거절하는 것을 보니까 당신은 원수요" 하며 대들어서 그것을 설득하느라 일주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호의를 거절한다는 것이 바로 얼마나 큰 죄가 되는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우리에게 향한 그 큰사랑과 그 은총을 얼마나 우리가 진실하게 깨닫느냐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릅니다. 은총을 배반하는 최악의 죄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 속에서 나 자신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므비보셋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어찌 이같이 대하십니까?"
그는 사울의 손자입니다. 돌이켜 '내가 저 보좌에 앉을 수 있는 왕이 될 수 있었는데' 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개 같은 나를 어찌하여 왕자로 대하십니까?" 이것이 자기 공로입니까? 자기 의입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모든 것이 그저 고맙고 그저 큰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감사와 기쁨과 그리고 겸손 그것뿐이었습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사랑하시나이까?"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 같은 나를, 혹은 죄인의 괴수를 어찌하여 사랑하셨느냐." 이것이 은총을 아는 자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그의 윤리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를 식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그 은총 속에서 나를 보고 이웃을 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윤리관입니다.
자격이 있다 없다 할 것 없습니다. 은총에는 조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이것 외에 아무 조건도 없습니다. 이미 사랑받은 것이 사살입니다. 앞으로도 사랑해 주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격을 묻지 맙시다. 은총 속에 살아가는 그 엄청난 사실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자인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그도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가 은총을 알기 때문이요, 은총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은총 속에 살아가는 그 크신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은혜를 알지도 깨닫지도 감사치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없는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원컨대 그 은총의 크심을 알게 하시고, 그 깊이를 깨닫게 하사 은총 속에 살아 가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은총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그러한 넘치는 은총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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